공동체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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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구(9826091)


교회 공동체의 시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번째 '파루시아'(Parousia) 번째 사이에 존재한다. 파루시아는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 계시와 행동하심이다. 바르트는 파루시아를 가지 의미에서 이해하고 있다. 번째 파루시아는 불의를 심판하러 오신 심판자로서 부활 이후 40일간 제자들을 만나신 것이고, 번째 파루시아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계시로서 오시는 그의 마지막 오심이다. 교회 공동체는 바로 번째 파루시아로부터 앞으로 마지막 파루시아로 움직이는 마지막 계시 사이에 있다. 따라서 교회 공동체의 시간은 번째와 마지막 계시 '사이의 시간'이다. 이러한 '사이의 시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에 의해서 그의 몸인 교회 공동체 가운데서 교회의 머리로서 보이지 않게 현존한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교회가 이러한 시간 안에서 움직인다고 하는 것은 교회의 강함이면서 동시에 약함이기도 하다.

교회 공동체의 강함은 그의 시간이 부활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사람들의 메세지를 듣는 것이다. 공동체는 성령의 깨우치는 힘에 의해서 메세지를 믿는 신앙의 연합체로 모인 것이다. 성령이 살아 계신 주님이라고 믿는 것이다. 메세지의 믿음에서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성취하시고 부활로써 죄인을 의롭게 하신 하나님의 심판을 들을 있을 것이다. 교회 공동체의 삶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되며, 또한 메세지를 공동체 자체로서 증언할 있다.(725) 이것은 공동체 자체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살아 계신 교회 공동체의 주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고, 유지되는 약속된 능력에 의하여 가능하다.(726)

교회 공동체의 시간에서의 하나의 강함은 교회의 삶이 일반 다른 사회와는 다른 목적론적 방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727) 공동체는 시작으로서의 파루시아에서 출발해서 마지막 파루시아를 향해서 움직이며 그것을 희망하며 기다린다.(726) 공동체는 세상의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모든 인간의 상황을 변화시키는 메세지에 대한 믿음의 가운데서 사는 것이다. 믿음의 - 골고다 십자가에서 의롭게 하심을 성취하였다는 것을 - 통하여 공동체는 하나의 신앙이 되고 세상 가운데서 세상에 대한 증오와 경멸이 아니라, 신뢰와 희망 가운데서 세상을 이기고 세상과 함께 목표를 향해 움직이는 것이다.(726-727) 교회 공동체의 강점은 신앙의 통일성에서 교회가 모든 시대에 모든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는 인간성의 잠정적 표현으로 모여진다는 사실에 기인하고 있다. 이점에서 세상에서 비교될 없는 목적과 의미와 힘이 교회 존재에 주어지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는 시작과 종말의 '사이의 시간' 안에서 다가오는 마지막 파루시아를 알기 때문에 강한 것이다.(727-728)

바르트는 교회 공동체의 존재의 '사이의 시간'의 강점과 함께 동시에 그의 약점도 보고 있다. 왜냐하면 시간과 움직인 속에 있는 교회의 삶은 보이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믿음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성령에 의해서 믿음 가운데 있지 않고 강해지지 않는다면 이러한 시간 안의 교회의 약함은 치명적인 것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교회의 믿음에 의한 강함조차도 교회의 신앙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약점인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번째 파루시아에서 마지막 파루시아에 이르기까지 보이지 않는 것에 신앙을 추구해야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데에 약점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이의 시간'의 본질에 존재론적으로 기초하고 있다.(728) 왜냐하면 직접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번째 계시와 번째 현재하심과 행위 사이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사이의 시간'인 교회 공동체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처음의 40일간처럼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부활은 단지 그것의 사실성일 아니라 화해의 선포와 같은 사실성이 믿어져야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믿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과 세상과의 화해에 의해서 선포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건이 성령에 의해서 의로움을 받은 인간의 생명은 그들이 믿음으로써만 보여질 있다.(729) 파루시아는 부활의 사건에서 시작될 때에만 알려질 있으며, 교회는 그것 밖에서는 아무것도 없다. 교회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들 가운데서 살고 계시다는 것을 말씀하기 때문에 믿을 있다.(730-731)

세상 가운데의 존재로서의 교회는 자신을 소수의 연약한 무리로 본다. 그러나 여기에서 하나의 역설적인 관계성을 있다. 수많은 불신앙, , 미신 그리고 교회와 자신에 대한 부정과 불신 속에서 이러한 물음이 나올 있다. 세상에서 기독교 신앙은 무엇인가? 여기에서 '믿음'이라고 하는 약점이 드러난다. 그것은 교회 공동체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믿음에 기초하지 않고서는 대답할 없다. 역사철학이나 인간학으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화해의 케리그마(Kerygma) 사실에서만 대답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외면적으로 믿는 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을 통하여 신앙을 일깨우고 신앙 안에서 교회의 존재를 있고 유지시켜 주신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서만 신앙을 가질 있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여기에 124:1-4, 124:8 인용하시면 이러한 점이 교회가 강점을 지닐 있는 것이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교회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닌 약자가 됨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경고한다.(732)

마지막 파루시아는 아직 오지 않았다. 교회의 '사이의 시간'이 교회 공동체의 독특한 강점과 약점의 기초가 되는데, 궁극적으로 제한된 시간 안에 있는 시간은 교회 공동체를 모으기 위하여 그리고 공동체 존재와 그의 사명을 위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다. 이것이 교회의 의미이며, 목적이다.(733)

교회 공동체의 '사이의 시간'의 의미는 무엇인가? '사이의 시간'은 번째 파루시아와 마지막 파루시아 사이의 전혀 없는 시간이다.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잠정적인 하나님과의 화해의 특수한 계시와 마지막으로 오시는 무한하고 완전하고 보편적인 교회의 계시 사이에서 성령 안에서 교회 공동체의 삶이 세상과 함께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734)

번째 파루시아는 끝났다. 그리고 불확실한 '사이의 시간'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완전히 분리된 파루시아는 아니다. 가지는 하나이며 그것을 행하시는 분의 인격에 함께 존재한다. 그러나 바르트는 사건의 성격을 명확히 구분한다. 번째 사건은 잠정적이고 일시적이며 특수한 형태이나, 번째는 완전하고 궁극적이며 보편적 형태이다. 사이에 새로운, 그리고 앞으로 세상의 종말을 향한 모든 시간이 열리는 것이다. 이러한 종말의 시간이 교회의 시간이다.(735)

교회는 종말의 시간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 교회가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위대함인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유지하시는 세상과 인간 가운데서 교회는 종말의 희망이 되고 있다.(736) 하나님께서는 그의 마지막 말씀을 하셨다. 그럼에도 인간에게 주어진 교회의 목적은 무엇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여지고 선포된 앞으로 새로운 인간의 현실적 존재의 목적은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여전히 일어난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목적과 해답은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인 인간의 찬양을 듣기 전에는 마지막 형태로서 일어나는 하나님에 의한 결정적 완성, 성취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737)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의 위대함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에 의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의 응답을 듣도록 교회의 일하는 시간으로서 '사이의 시간'을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 없이 인간의 머리로서 구속자나 화해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교회의 머리로서 지상의 역사적 형태인 몸이 되기를 원한다. 또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하실 아니라, 신앙으로 고백되고 이것이 일어나게 하기 위하여 시간과 공간을 주시며, 종말의 시간을 시작하시고 계속하신다.(738)

교회 공동체는 세상을 향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는 잠정적 표현으로서 공동체에 있게 하기 위하여 이러한 시간 가운데 있는 것이다. 교회의 사명(Mission) 교회 현실의 핵이다. 하나님은 교회 공동체를 부르시고 봉사를 위하여 교회에게 시간을 주셨다.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현재하신다. 교회는 교회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주님과 세상을 위하여 오시는 '사이의 시간' 가운데 있는 것이다.(739)

 

요약

바르트는 공동체의 시간이 번째 예수 그리스도의 파루시아(Parousia) 번째 파루시아 사이의 시간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파루시아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행위를 나타낸다. 주의 번째 파루시아의 직접적 가시적 현존과 임재는 그가 불경건한 이들의 심판주로서 부활절 이후 40일간 제자들에게 보였던 것을 말한다. 그리고 번째 파루시아는 자와 죽은 자의 심판주인 그가 그의 계시 속에서 보여주는 궁극적이고 종말적인 임재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공동체는 그의 번째 파루시아와 번째 파루시아 사이에 존재한다. 공동체의 시간은 '사이의 시간'이다. 이러한 '사이의 시간'안에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성령에 의해 불가시적으로 그의 몸인 공동체의 머리로 현존한다. 공동체가 이러한 시간과 움직임 속에 존재한다는 것은 공동체의 약점이자 동시에 강점일 있다.

공동체가 이러한 '사이의 시간'에 존재한다는 사실의 강점은 시간의 출발이 부활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그를 직접 보았던 자들의 증언이 있다. 성령의 일깨우는 능력에 의해 공동체는 이러한 메세지에 대한 믿음의 통일성안에서 그리스도에게로 모아진다. 부활의 메세지를 믿음으로써 일깨워진 공동체는 믿음의 속에 존재하며, 속에서 공동체는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인 교회가 된다. 바르트는 이러한 공동체 존재의 목적론적 방향성에서 하나의 강점을 발견한다. 공동체는 출발 안에 이미 그것이 기다리는 끝을 뒤에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의 연합 안에서 공동체는 시대와 종족과 언어를 뛰어 넘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인류의 선행적 묘사로 모아진다는 강점이 있다.

바르트는 '사이의 시간' 안에 있는 공동체의 약점은 오직 믿음에 의한 직관력이 요구된다는 것임을 지적한다. '사이의 시간'에 그리스도는 가시적인 현존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바르트는 우리가 시간 안에서 증언들의 메세지를 통하여 들을 수밖에 없으며, 오직 믿음으로 일깨움을 받는다는 약점을 지적한다.

바르트는 교회 공동체의 '사이의 시간'이 공동체에게 주는 의미를 질문한다. 그는 이에 대하여 시간은 공동체의 회집와 존재와 선교의 시간이라고 대답한다. 또한 그는 시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번째 파루시아와 번째 파루시아 사이에서 세상과 더불어 성령 안에서 함께 유지되어야 하는 시간임을 말한다.

바르트는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의 파루시아 안에서 갖게 형태와 외적인 힘과 소망을 이미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파루시아가 그것을 행하시는 분의 인격 안에 의존한다고 강조한다. 결론적으로 바르트는 파루시아를 동일한 하나의 사건으로 단언하면서, 이러한 종말의 사건은 공동체의 시간으로 해석한다.

바르트는 '사이의 시간'을 성령의 사역을 위한 시간으로, 믿음과 회개, 세상을 통한 복음선포의 시간으로, 그리스도 공동체를 위한 시간으로 강조한다. 이런 의미에서 시간은 '은혜의 시간'이다. 종말의 시간은 세상을 위한 공동체의 시간이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바르트는 교회 공동체의 봉사를 강조한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공동체의 '봉사의 시간'임을 단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