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의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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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신대원5차 장인호(9726105)


우리는 교회라고 불리며, 주장하고, 교회처럼 보이는 것에 관해 참된 교회임을 살펴보았다. 즉 그것의 이름과 얼마나 일치하는가? 이 본질의 실제적 표현에 있어서 이것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사실 무엇이라고 여겨지는가?그것이 일깨우는 기대와 그것이 만드는 주장을 어떻게 이행하는가?

우리는 공동체로서의 세움의 사건이나 발생 혹은 행동 안에서 참된 교회라는 일반적인 답을 얻었다. 우리의 다음과제는 가장 중요한 특징들을 전개하면서 세움의 사건의 개념을 설명하는 것이다.

우리가 먼저 성령의 사귐의 신앙고백적 개념의 용어들에서 그것을 먼저 해석한다면-그것은 우리에게 보답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세움의 개념의 해석으로 그것을 사용한다면 '세움'이라는 용어는 라틴어의 커뮤니오와 그리스어 코이노니아의 엄밀한 의미로 설명되어야 한다.

사귐은 많은 사람들이 같은 연합을 위해 공동의 움직임에 끌어들일 화합에 기초하는 하나의 행동이다. 이것은 성령의 힘과 움직임 안에 하나님에 의해 닮아지고 살아난 사람들의 조화된 행동에 의해 일어난다. 사귐은 신성과 인성이 준비함으로 일어난다.

사귐은 완성과 완성사이의 불완전한 공간에서 일어난다.(641page) 즉, 연합과 연합사이이다. 각 수행단계에서 그것들 자체는 불완전하다. 그것은 완성과 오고가는 연합에서 일어난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 이 성취안에 있는 그들의 참여중심에서 일어나고 거기는 또한 이러한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고 공동의 행동을 한다는 사실 가운데 일어난다. 그들 가운데 연합하기 위해서 그들의 연합이 세워야만 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일어난 일이고, 그들이 함께 그들로부터 오고, 그것이 감추인 실재의 폭로로 함께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들 가운데 연합하기 위하여 그들의 연합이 세워야함 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일어난 일이고 그것은 감추인 실재를 폭로로 함께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 연합에서 같은 연합으로 이리저리 보기 때문에 그들이 연합되고, 함께하고, 공동으로 행동한다. 이 사귐에서 공동체의 세움이 일어난다.

공동체의 '세움'이 논의된다. 교회는 하나님의 '성화'의 역사와 '생동시키는' 성령의 역사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 교회는 다름아니라 '성도의 교제'(Communio Sanctorum)이다.

성도의 사귐는 성령의 능력안에서, 그리고 성령의 역사에 의해 회집되고 생동된 인간들의 활동 안에서 일어난다. 바로 이처럼 성령의 역사에 의해 모여든 인간들, 그와 상응하는 일을 행하도록 사명을 받은 인간들이 곧 성도들이다. 이러한 교제가 또한 '죄인들의 교제'(Communio Sanctorum)이며, 이들은 아담에게 속한 자들임을 간과하지 않는다. 이들은 모든 인간들의 범죄와 타락에 가담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하면서 이들은 '성도들의 공동체'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과 사랑이 이들을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다.

'Communio Sanctorum'을 전통에 따라 두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는 '성도들'이다. 이것은 성령에 의해 거룩하게 된 인간들의 사귐이다. 또 다른 하나는 '거룩한 것들', 거룩한 관계에서 볼 때, 'Communio Sanctorum'은 '성도들'이 이러한 '거룩한 것들'에 참여하는 사건이다. 이것은 신앙의 인식과 고백, 감사와 찬양, 회개, 기쁨, 기도 안에서, 그리고 세상과의 관계에서 겪는 고난과 투쟁 안에서, 봉사, 희망, 예언, 예배 안에서 일어난다. 이러한 친교는 공동체의 건립의 사건으로서 죄인들이 그들의 행동과 본성 안에서 이러한 '거룩한 것들'을 받아들이고 확증하는 사건이다.

공동체의 세움은 사귐 안에 있고 행동하는 성도에게 있다. 그 성도는 세계안에 존재하는 사람들이며 그러나 세계의 유행후에 그들은 그들의 사귐의 오래된 것 가운데 새로운 인간성의 묘사를 대표하기 위하여 설립하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구별되었다. 이러한 사람들-성도들-은 성령의 사귐안에서 살며 행동하는 다른 사람들과 친교하는 사람들이고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러나 무엇이 그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가? 그들의 특별한 존재와 행동의 기초의 마지막 기술에서,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이라는 것을 대답할 수 있고 대답해야만 한다. 그의 사랑은 특별한 방법 안에 포함하고 활동하는 그들과 그들을 향해 지적했다.

그들의 고독안에서의 개인들로가 아니라 그들의 공동의 삶 하나의 민족으로서 함께하는 그리스도인으로 만든다. 그러나 잠시동안 우리는 땅위에 있고 알맞은 때의 사람들로써 그들의 존재와 행동을 구별하는 것을 아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무엇이 그들의 교제가운데 역사적인 사건이 될만한 특별한 것인가?

이것을 보기 위해 우리는 사도신경 안에서 성령의 사귐이라 불리우는 교회의 이중적인 의미를 기억해야만 한다. 소유격은 분명히 거룩한(santi) 사귐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모든 세대와 장소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에 의해 성화된 사람들이다.(642page)

그러나 이것은 또한 그들의 인간존재와 활동안에서 그들은 거룩(santi)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으로부터 분리된 거룩(santa)안에서 사귐이다. --거룩(santi)처럼 그들이 위치하는 거룩한 관계들 관여자들의 거룩한 선물들, 이행하기로 요구되어지는 거룩한 일들, 그들이 적응하는 거룩한 지위, 그들이 수행하는 거룩한 기능으로 거룩(santa)안에서의 사귐이다. 이 관점으로부터 성령의 사귐은 거룩(santi)으로 거룩(santa)에 참여하는 사건이다.

우리는 성도의 사귐에 뒤따르는 실제적 정의를 줄 수 있다. 이것은 그들 믿음의 지식과 고백안에서 그리스도인의 교제로서 일어난다. 이것은 또 확실히 또한 기본적으로 -만약 우리가 그들의 이해하는 의미 안에서 그 용어를 이해한다면- 신학적 고백적 교제로서 일어난다.

그들의 감사와 은혜의 교제안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그들의 참회(회심으로이끄는)관계에서 일어난다. 성도의 회심안에서 참회라는 기쁨과 함께 일어난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기도로서 기도의 교제로 일어난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 안에서 무엇보다도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찬양과 무언으로나 혹은 소리를 내어 경배하는 예배의 관계로서 일어난다. 세계를 향한 교제 안에서 세상의 일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들의 필요의 교제에 의해 일어난다. 그러나 또한 이 관계에서 세계로 순응하기 위한 어떤 의미로가 아니라 세계로 진실되고 의미있게 그것들은 설명하기 위해서 단호한 사람들의 힘으로써의 관계이다. 이것은 예배의 교제로서 일어난다.

이것은 현재 순간적인 미래를 넘어선 그들의 소망과 예언적관찰과 도달의 교제로서 일어난다. 무엇보다 물론 그것은 그들의 모여지고 강조(추진)되어지고 유지되어지는 세계의 복음의 선포의 교제로서 일어난다. 이런 이유로서 그것이 기도의 교제로서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은 거룩한 예배의 교제로서 일어난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 안에서 무엇보다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찬양과 묵상으로나 소리내어 경배하는 예배의 교제가운데 발생한다. (643page)

성장은 유기체적 세상으로부터 발생하는 형상이다. 우리는 무엇이 성장인지 물어야 한다. (645page)  

예수 그리스도 성령의 광범위하고 집중적인 자기증거는 성령의 사귐과 자라남을 성취한다. 우리는 공동체의 활동이 성령에 의해 이루어짐에 있어서 의미의 가득함을 이해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증거를 통해 더 명확히 해야 한다. 그의 독특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존재의 성격을 하늘의 형태를 가지며 언급한다. 그는 하나님 우편에 존재한다. 성령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거주하는 누구에게 어떤 관계로부터 일으켜 세우는 힘을 가지고 있다. (652page)

신약성경은 공동체의 머리로서 그를 말하고 있다. 하늘과 현세사역에서 머리이며 몸인 것이다. 세우시는 성결의 능력은 그가 전적으로 이상하고도 신비롭게 오심을 넘어서서(오순절의 이야기 안에서 서술되어지는 것에 관해) 가장 기초적인 출발점이 구성된다.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에 있어서 처음형태와 둘째 형태에 달려있다. 우리는 현재 두 번째 형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자기 증거를 통해 공동체를 살리는 힘과 성령을 같게 보는 것으로 돌아가야 한다.

세계 안에서 공동체의 활동과 성장은 위대한 일이 발생하는 요소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를 일으키며 모든 인간을 성결케 하는 표시이다. (654page)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공동체라는 진술을 피할 수 없다. 하나님과 함께 그의 숨겨진 것 안에 머리되심으로 예수그리스도이다. 머리되신 예수그리스도에 관해 단지 믿는 것이다. 그의 사랑에 관해 우리가 보지 못하나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벧전1:8). 그의 계시에 관해 기다리는 것이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22:20). 공동체의 존재는 그의 존재에서 서술되어진다. 내가 살겠고 너희도 살겠음이라(요14:19). 연속된 순서에 의해서 예수그리스도는 공동체라는 것이 확언되어졌다. (655page)

하나님의 통치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발생한다. 그 자신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우리는 개신교가 하나님의 나라가 공동체라는 것에 관해 너무 멀고 경솔하게 경쟁하며 언급했다는 진술에 대하여 회피 할 수 없었다. 그 하나님의 나라는 공동체이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로 나타난 처음 계시와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마지막 계시로서 향해가고 있는 것은 공짜로 되어 지는 것이 아니다. 공동체는 나라의 옴으로 이루어질 것을 기도한다. 우주적이고도 완전한 계시를 통해 완전해질 것이다.

공동체의 진정한 정체성은 현재가 아니라 성령의 강한 역사 안에서 행해지며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지는 오는 세계 사이의 그리스도안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하게 세워진다.(656page)

예수 그리스도는 반드시 성장한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요3:30). 하나님의 나라는 씨처럼 자란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마음과 귀와 눈을 열고 인간의 사귐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그에게까지 자라야 할 것이다(657page).

요약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교회를 창조하고 계속적으로 갱신시키는 능력은 성령이라고 한다. 교회가 설립되고 항상 거듭 설립되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이다. 성령이 활동함으로써 교회가 생겨났고 지금도 존속하고 있다. 성령은 인간을 위해 인간에게서 행동하시는 하나님이고, 인간에게로 와서 화해하시는 하나님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이고, 인간의 편을 들어서 행동함으로써 인간이 자기 자신을 긍정하고 그와 동시에 하나님을 긍정하도록 가능케하는 하나님이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인간에게로 파송되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의 형태와 그의 삶의 표현의 확증이다. 성령은 교회를 각성시키고 조명하는 능력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름 이름이고 그의 선행적 계시가 아닌 다른 사역이며 그를 인간에게 인식시키지 않는 다른 활동을 결코 갖지 않는다. 성령은 그리스도인들을 모으며 조명하고 성화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한 몸으로 신앙하도록 보존한다. 그러므로 성령은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와 관계 맺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다. 교회가 존재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을 통하여 가능케 하시기 때문이다.

바르트의 교회론의 첫째 관점에서 공동체는 다름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역사적 실존형태', 즉 '그의 몸'이다. '그리스도의 몸'의 개념은 성서에서, 특히 바울서신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이 개념은 본회퍼의 교회론에서 영향을 받았다. 본회퍼는 그의 박사논문 '성도의 교제'(Communio Sanctorum, 1927)에서, 비록 그리스도와 교회간의 동일성은 일어날 수 없다 하더라도, 교회는 집단인격으로서 그리스도인이기도 함을 역설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현존이시듯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현존이다. 신약성서는 '그리스도가 교회로서 존재하신다'는 계시형태를 말하고 있다."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두 종류의 실존형태를 가지시는데, 그것은 천상적·역사적 실존형태와 지상적·역사적 실존형태이다: "그분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과 부활하신 분으로서 천상적·역사적 실존형태 안에서, 즉 아버지의 우편에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 그 자신의 지상적역사적 실존형태는 바로 그리스도 교회이시다. 그렇지만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인 것은 아니다.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실 뿐만 아니라 몸이시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이시다. 그렇지만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인 것은 아니다.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이시다'는 문장은 뒤집혀선 안된다고 말한다. 교회가 존재하기 때문에, 또 존재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에, 바로 그리함으로써 교회도 존재한다.

바르트의 교회론의 둘째 관점에서는 공동체의 '건립'이 논의된다. 여기서 교회는 하나님의 '성화'의 역사와 '생동시키는' 성령의 역사인 것으로 '성도의 교제'(Communio Sanctorum)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성도의 교제는 성령의 능력안에서, 그리고 성령의 역사에 의해 회집되고 생동된 인간들의 활동 안에서 일어난다. 바로 이처럼 성령의 역사에 의해 모여든 인간들, 그와 상응하는 일을 행하도록 사명을 받은 인간들이 곧 성도들이다. 물론 바르트는 이러한 교제가 또한 '죄인들의 교제'(Communio Sanctorum)이며, 이들은 아담에게 속한 자들임을 간과하지 않는다. 이들은 모든 인간들의 범죄와 타락에 가담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하면서 이들은 '성도들의 공동체'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과 사랑이 이들을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Communio Sanctorum'을 전통에 따라 두가지 의미로 이해했다. 하나는 '성도들'이다. 이것은 성령에 의해 거룩하게 된 인간들의 친교이다. 또 다른 하나는 '거룩한 것들', 거룩한 관계에서 볼 때, 'Communio Sanctorum'은 '성도들'이 이러한 '거룩한 것들'에 참여하는 사건이다. 이것은 신앙의 인식과 고백, 감사와 찬양, 회개, 기쁨, 기도 안에서, 그리고 세상과의 관계에서 겪는 고난과 투쟁 안에서, 봉사, 희망, 예언, 예배 안에서 일어난다. 이러한 친교는 공동체의 건립의 사건으로서 죄인들이 그들의 행동과 본성 안에서 이러한 '거룩한 것들'을 받아들이고 확증하는 사건이다.

바르트의 교회론의 셋째 관점에서는 공동체의 '파송'이 논의된다. 여기서 교회는 하나님의 '소명'의 역사와 '조명하는' 성령의 역사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 교회는 다름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다.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부름받았다. 개개인들을 서로 결합시켜 특별한 백성의 일원들로 만든 자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공동체의 성장은 사귐 안에 있고 행동하는 성도에게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증거를 통해 공동체를 살리는 힘과 성령을 같게 보는 것으로 돌아가야 한다. 예수그리스도 성령의 광범위하고 집중적인 자기증거는 성령의 사귐과 자라남을 성취한다. 우리는 공동체의 활동이 성령에 의해 이루어짐에 있어서 의미의 가득함을 이해하는 데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증거를 통해 더 명확히 해야 한다. 하나님의 통치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공동체는 예수그리스도의 부활로 나타난 처음 계시와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마지막 계시로서 향해가고 있는 것으로 공동체는 나라의 옴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우주적이고도 완전한 계시를 통해 완전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