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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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1. 하정호

 

 

 

크리스챤 공동체를 세우는 일과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화해주의라는 결론을 지으면서 지금까지 다루고 있는 두 주제이다. 이 주제 속에서도 역시 세상이 하나님과 화목하는 특별한 형태로서의 성화에 관한 거룩한 하나님의 역사를 다루려고 하는데, 이것은 이전에도 있었고 현재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건이다.

부활하여 살아계신 주 그리스도의 능력있고 생동감 넘치는 지도하심과 우리가 성화의 원리로 이해해야 할 성령께서는, 크리스챤 공동체(교회)를 세우는 일과 교회 안에서 교회와 함께 그리스도인의 결과에도 영향을 끼친다. p 614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의 화해자이면서 각 개인의 화해자도 되시며 그의 교회의 머리로서 많은 사람들의 주님이 되심처럼(많은 특별한 사람들과 특별한 교제를 하심) 교회 구성원 개개인의 머리도 되신다.

성령의 역사 속에서 생긴 일이 곧 교회의 설립이라는 사실을 고려해야만 한다. 우리가 지금 성화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것을 고려하고 있다는 사실이 - 우리가 교회(그리스도인 공동체)에 관해서나 혹은 그리스도인의 사랑에 관해 이야기할 때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에 의한 하나님의 역사하심 속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거나 성령의 결과로 주어진 사람들의 사역 속으로 우리 자신을 몰입시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p 615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논의하고자 하는 성화의 형태는 성령의 소생시키는 힘의 역사와 관련이 되어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과 함께 세상 속에 Christianity를 세우신다. 즉, 거룩하게 시작하면서 크리스챤 가운데 일어나는 인간의 행동을 통제하며 지지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룩하신 교회를 알고 이해해야 하는 것은 분명한데 교회의 참된 실제속에서 성령의 역사의 나타내심을 잠시라도 잊어서는 안되며,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진 교회의 성령의 역사를 잊어서도 안된다. 물론 교회는 한 인간이 이 땅에 세운 건축물로써 교회의 역사는 처음 시작때 부터 인간의 행동을 포함했고 앞으로도 항상 포함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곧 이러한 인간이 만든 건축물인 그리스도 교회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성령에 의해 교회안에서 일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인간 행동의 결정체로써 참된 교회는 진실로 존재하고 일어나며 계속해서 살아남게 된다.

즉, 두 가지면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그 분 자신이 일으키시고 만들어 가는 인간의 일이 있기에 이러한 역사 속에서 주제가 하나님임을 제외하고는 특정한 인간에게 인간을 위해, 인간과 함께 행동하신다. , 교회는 역사와 관련될 때만 볼 수 있다. 이러므로 참된 교회를 보기 위해서는 인간 역사 그 자체만을 추상적으로 바라볼 수가 없다. 이것은 진정한 현상이 아니라 거짓 현상이 될 것이다. 성령은 행하심의 실체 결과인 인간 행동 - 하나님에 의해 일으켜지고 만들어진 참된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 은 그 자체로 무슨 특별한 것이 되려고 결코 노력하지 않을 것이고 오직 성령의 운행과 성화의 거룩한 역사와 주 예수의 성령에 의한 교회의 설립에 의해서만 시작되고 조절되고 지탱된다. 어느 정도까지는 그 것 자체로 그 무엇인가가 되지만 그것은 단지 교회와 비슷한 현상일 뿐이지 참된 교회는 아님을, 이런 현상을 생각해 보면 알게 될 것이다. p 616

크리스챤 공동체인 참된 교회가 일어나는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 하심 - 살아 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소생시키는 힘 - 이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인간의 일을 성화 시키면서 사람들을 세워가며 인간의 일을 참된 교회 속으로 끌어들이실 때에만 교회는 계속되고 존재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부활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사이에서만 이런 일들을 하시므로 공동체 시기(교회시대)의 세상에서는 즉, 이런 상황에서는 인간 세상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특별하고 일시적인 계시에만 참여할 수 있으며 그때까지는 인간은 여전히 육체와 죄와 죽음에 매여 있게 된다.

기독교도도 역시 이 세상 속에 속해 있으면서 그 안에서 일하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 - 비록 그 행동이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생겨나고 형성된다 할지라도 기껏해야 그 행동이 이런 식으로 생겨나고 형성된다는 사실은 모호한 증거가 된다. 때론 행동이 계시해야 할 증언이 생략되거나 모호하고 왜곡될 때에는 나쁘게 되거나 최악의 경우가 될 수도 있다. 즉, 교만하거나 나태한 사람이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간단히 말하면 인간의 자만심과 나태에 의해 생겨난 행동에 그 본질을 숨기고서 마치 그 행동이 하나님에 의해 조성되고 만들어진 것처럼 보일 때 그것은 참 교회가 아니라 교회를 흉내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하게 하시고 만들어 가지 않는 모든 행동들은 참된 의미의 하나님의 교회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인데, 이러한 일들은 지금 여기까지 교회가 생겨나고 지속되고 있는 동안 항상 범하게 되는 특정한 죄이다. p 617. 아래

참된 교회는(하나님께서 세우시는데 인간들이 원해서 세워지고 이룩된 것이다. 성령의 능력 안에서 보여지게 되는데 교회가 설립되고 전통적으로 되어 가는 속에서와 또 개혁과 변화를 이루어 가는 가운데서도 성령께서 숨어서 역사하고 계심이 나타나고 빛을 발하게 된다. 이러한 나타남(출현)과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은 은총의 자유를 표현한 것이다. 즉, 크리스챤의 행동이 죄를 지을 경향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특별한 자비의 행위를 보여주시는 것은 교회를 세우시고 거룩하게 만들어 가는 것을 표현하고 있음이다.

우리는 시민권이나 문서, 법률과 제도 내에서 한 나라의 국정을 보는 것같이 참된 교회를 찾아볼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교회의 구성원들(교인)과 문서, 제도와 질서, 교회의 교리와 지식, 조직과 사회, 정책을 입안하는 지도자와 평신도와 그림과 인쇄물 등 교회의 역사와 관련된 모든 것들은 볼 수 있다. 만일 위에서 말한 이 모든 것 안에서 교회를 찾아볼 수 없다면 참된 교회는 어디에서 볼 수 있단 말인가? 아니면 이 모든 것 안에서 정말 볼 수 있단 말인가?

참된 교회가 되려고 이 모든 것들을 내세우며 주장하는 것들은 단지 교회를 흉내내는 것뿐이며 비록 그들이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만들어 가고 있다고 주장할 찌라도 그것은 단지 자신들을 나타내려고 애쓰고 있을 뿐이다.

이 모든 것 속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단지 종교적 사회집단일 뿐이다. 만일 우리가 이것을 그 경우가 아닐 뿐 아니라 지금 여기에 가지고 있는 것이 참된 교회라고 생각한다면 그것 자체로는 증거가 되지 않으며 교회의 현존이 뚜렷한 증거가 될 것이다. 교회가 교회의 실제를 창조해 내거나 줄 수 없는 것처럼 보임도 같은 진리이다. 그것은 단지 교회와 함께 위로부터 주어질 뿐이다. 만일 그것이 하나의 참된 교회로 보여진다면 그것은 곧, 거룩한 작전의 승리임을 의미하는 것이며 성령의 능력 있는 역사가 죄 투성이인 인간의 의지에 의해서 감추어져 있던 데서부터 참된 교회를 보다 더욱 빛나게 하시며 자유롭게 하시는 표현을 의미하는 것이다.

참된 교회가 보인다는 것은 항상 하나님의 계시 안에서만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계시에 의해 깨어있는 믿음 안에서만 항상 가능한 일이기에 실제로 사람들에 의해 보여지게 되는 것이다. 계시와 믿음이 없는 곳에서는(아마 매우 혼동 되고 믿을 수 없는 방법으로) 애매 모호함 속에서 단지 이런 여러 가지 면의 교회에 관한 분량만 보여지게 된다.

이러한 면에서 교회는 하나의 참된 교회이며 그런 것으로 볼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믿게 된다. p 619

그러므로 이런 확신 속에서 참된 교회는 자신의 살아 있는 기초를 가지고 있기에 교회의 존재와 가시성 안에서 그 역사의 관심을 가지게 된다. 우리는 이것을 거룩한 계시와 통제, 공통체 내에서 발생하는 인간 행위의 후원이라고 부르는데 그 안에서 기독교가 세상 속에 존재하게 된다. 우리는 크리스챤 공동체를 세운다는 개념 하에 이 모든 사건을 한데 모을 것이다. 이 첫 번째 부제 안에서 이런 타이틀을 설명하면서 전체를 이해하려고 한다.

이런 역사는 하나의 방향과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 만일 그것을 우리가 이해하려면 교회의 역사는 방향과 목표가 있다는 점이 첫 번째로 살펴보아야 할 요점이다. 문제는 머리말 주제의 결론 부분에서 언급을 하였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인간과 인간 생활의 성화 과정을 일시적으로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 자신의 교회를 맞추어 가는 능력이다.

참된 교회의 존재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교회의 생명을 주며 건립하시는 거룩한 작용은 교회의 존재 자체만을 아주 불가능하게 하신다. 왜냐하면 참된 교회는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목표의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교회는 교회의 주인되신 주님을 섬겨야만 하며 섬길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교회가 교회를 세우신 거룩한 작용보다 자신만을 나타낸다면 그것은 참된 교회가 결코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것으로 해서 교회는 이런 목표점에서 교회 자체를 나타내거나 나타내 보여지거나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교회 자체를 나타내거나 자신에게 영광을 더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교회는 자신의 교회를 위하고 교회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통제 아래 두면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섬기는데 둘 것이다.

참된 교회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계시하신 구원과 은혜의 단순한 형태도 아니고 하나님과 세상의 화해의 형태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단지 우연하게 혹은 상대적으로나 혹은 선택적으로 참작할 수 있는 단순한 형태를 가진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다른 더 나은 수단이 알려졌을 때 무관심하게 취급될 수 있는 목적을 이루는 단순한 수단도 아니다. 우리는 교회의 유일한 목적이 단지 자신을 찾고 나타내며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려는 겉모양만 교회인 것으로부터 떨어져 있을 수 있고 또 떨어져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참된 교회는 참된 교회임을 숨길 수 없고(닮은 점)유사성이 있는 곳으로부터 밝히 드러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우리가 이런 일시적인 성화 안에서의 움직임과 과정의 의미로 이해하게 될 때 이것이 이해가 되며 본래 모습을 찾게 된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표명한 것이므로 특히 모든 인간의 고상함과 자리잡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났을 때 우리 멀리 뒤에서 혹은 우리의 높은 곳에서부터 스스로 이루어낸 구원의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구속적인 사건이다. p 620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미 결론지어진 것이 아니라 부활절에 그 분의 계시 속에서 시작된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이다. 그것은 전체적으로 그의 재림을 향하여 가는 과정속에서 갈보리에서 예수님에 의해 한 번에 모두 성취 되어 버린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어저께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으신 그 분(히13:8) - 그 중간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성화는 핵심적이며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시적인 나타남과 참된 교회의 형태 속에서 성화는 바로 오늘이다. 만일 오늘이라는 시간 속에서 일시적인 나타남을 창조해 내고 유지시키며 계속적으로 다시 새롭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것도 되지 않고 결국 우리의 구원도 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우리 자신을 이런 것에서 멀리한다면 우리는 구원과 구주 예수님으로 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가 ①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났던 성화보다도 자신을 더 드러 내려고 하고 p 623 ②교회의 존재가 일시적이라는 사실을 잊어 버리려고 하며 ③교회 자체를 하나님 앞에서 현재의 지위로서만 정의하려고 하면서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데서 존재의 가치를 찾으려고 하는 낙하점에서 항상 놓일 수 있으며, 그런 우려가 있음으로 해서 특정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런 사람들은 절대로 교회의 존재의 의미와 목적을 드러 내는데 자신들을 맞추어 가지 않는다. 우리가 말하려는 역사 안에서는 이런 어떤 의문점은 결코 있을 수 없다. p 622

그의 성령의 소생시키는 능력 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일시적인 나타남이 일어나는 것과 참된 교회가 사건인 곳에서 행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이 없이는 직접적으로 행하시지 않는다. 그 분은 이런 사람들에게 필요한 자질을 주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신다. 이런 사람들이 주님을 섬길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사람들의 역사 -인류의 생각과 노력과 성취에 관해 차례로 -를 말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일시적인 나타남을 이루어 가기 위해서 처음에는 맞지 않았지만 인간의 생각과 말, 의지와 일 속에서 차츰 맞추어 가는 역사에 관해 이야기 할 것이다. 좀더 정확히 말해서 하나님께서 이런 백성(사람)을 길위에 내 놓고서 provisional representatian(일시적인 나타남)을 향하여 계속해서 목표와 방향을 제시하시면서 움직이게 하시는 역사에 관해 이야기할 것이다. p 623

다시 좀더 정확히 이야기해서 이미 오셨고 다시 오실 것이고 오늘 여기에 살아 계신 주 예수의 활동의 역사에 관해 이야기할 것이다. 주께서 당신의 백성과 함께 그리고 백성에게 행하시기에 이 사람들은 자기들에게와 세상에게 주어진 시간을 그 분의 활동으로 채우게 된다. 모든 인간을 위해 그 분 안에서 일어났던 증거로 해서 역사는 이 사건의 직접적이고 우주적이며 결정적인 계시를 향하여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런 일시적인 나타남과 교회의 설립을 위해서 교회가 맞추어 나가는 것이다. 물론 다른 용어들을 예를 들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성장과 유지, 질서 등을 묘사하기 위해서 쓰여질 수 있다. 그러나 교회의 설립이 나머지 것들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심적이며 우리로 하여금 전체의 윤곽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신약 성경 안에서 교회의 설립이 가지는 중요한 역할을 우리는 이 시점에서 시작하도록 부르고 있다. p 626 下

신약 성경의 모델에서 사용하고 있는 upbuilding(설립)의 명확한 의미는 크리스챤 공동체이다. 그것은 크리스챤 개개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자체를 말하는 것으로써 개개인이 자신들의 상호 사역(mutual ministry)을 통해서 교화가 된다. 즉, 교화가 되기도 하며 스스로 교화하기도 한다. p 627 그것은 실제로 일어나는 사건의 성취와 교화 작업으로 결국 건물의 건축 문제이다. 이미 건물이 지어 졌다는 것과 이미 기초 형태를 시작했다는 개념에는 은유가 포함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은유는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크리스챤 공동체는 자연스럽게 특정한 상태에 도달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어떤 교회는 어떤 도달된 상태에 의한 공동체는 아니다. 교회는 이전 단계의 발달과 역사와 설립의 결과와 이어서 따르게 될 시작점에 사실에 의한 공동체이다. 교회는 이러한 하위 혹은 상위 원리를 통과하는 과정 속에 있다. 그러나 교회는 실제로 그들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앞으로 만들어 가야만 하는 차이점이다.

건축의 개념에는 인간이 이룬 건축 작업인 완성된 건축물이라는 개념은 자연스럽게 포함하게 된다. 그것은 전체 은유의 가장 핵심적인 것을 말할 수 있겠다. 만일 크리스챤 교화가 미래를 전체로 내다볼 수 없다면 크리스챤 교화는 어떻게 될 것인가? 만일 교회가 미래를 내다보고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지 않는다면 교회 건물은 무익한 것이 될 것이며 - 건물을 짓는 도중이라 하더라도 - 그것은 크리스챤 공동체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건물을 짓는 것은 통합을 의미한다. 공동체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사도들과 신의 은총을 입은 자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마지막으로 만일 그 공동체가 참된 교회라면 그곳은 모든 공동체의 멤버들의 완전한 공동체에 의한 것이다. p 627

사랑(이웃을 향한)은 공동체를 짓는다. 만일 공동체가 사랑을 실현하지 않는다면, 그 공동체는 지어질 리가 없다. 그래서 그 공동체의 재건축은 구체적으로 구성한다. 사실 거기에는 그곳의 주인이신 예수님과 하나님에 의해 사랑을 받은 공동체의 멤버들 사이의 상호적인 사랑이 있다. 이 사랑은 우리를 우리의 마지막 부분으로 인도한다. 잠시 동안 그러나 우리의 집중은 크리스챤의 형제애적인 사랑으로서의 사랑과는 반대로 전환한다. (어떤 감상적인 저음없이) 형제애적인 사랑은 사실 하나님, 예수님에 의해 통합되어졌다. 그들은 상호간에 그들 자신을 주님의 희생의 세계에 사용되어질 수 있는 하나의 유기체로 적응하며, 구성한다. 이러한 통합과 상호적인 적응이 없다면, 거기에는 상호적인 독립과 지원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체가 없다면 불가피하게 분리되어지고 혼란스럽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때 예수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된 인류의 임시적인 대표는 없을 것이다. 그 임시적이고 역사적인 판단은 궤도를 벗어난 형태와 혼란, 무기력, 해산, 체포와 패배로 교회를 따라 잡을 것이다. 이것은 상호적인 통합이 없는 모든 증상들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에 의해 재건축된 공동체는 이러한 실패를 거스른다. 그리고 공동체의 작업은 실패를 거스르며 공동체 자신이 짓는다. 공동체가 삶 속에서 행해지고 가르치고 특히 공동체의 예배가 하나의 전제로서 이러한 통합을 가진 상호적인 독립과 후원 속에서 예배가 행해져야만 할 것이다. 공동체는 이러한 방법으로 공통체 자신을 통합한다. 또는 오히려 자기 스스로 움직이시는 성령을 허락한다. 그것이 바로 참된 교회이다. p636

우리는 한가지 핵심으로 결론을 내린다. 건축물의 모형이 완전한 모양으로 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공동체의 건축의 일은 공동체 중심에 있는 참된 교회이다. 거기에는 계속적으로 시작하고 직접적으로 명백하게 인지할 수 있다. 그러한 작업 속에서 그곳의 에클레시아라는 이름이 진실이다. 그 공동체는 함께 주님이 작업하시는 집회가 있고 하나님과 천사들과 세계와 최소한 공동체는 아니더라도 공동체의 개인적인 멤버들 앞에서 알게 하기 위해 공동체 자신을 참회하고 희생한다. 이러한 일은 공동체 공유의 예배이다. p638

공동체를 교화시키고 스스로 교화하는 것은 예배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화가 끊임없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예배가 그 첫 번째 이다. 예배가 교회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디에서든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바로 주님, 예수님 그리고 교회 건축의 임무를 가진 기독교인들의 건축이 한 가지 단순한 생각의 지배와 구별되는 점이다.

크리스챤 예배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공동체를 위한 공동체 자신의 행위이다. 그런 까닭에 공동체의 재건축이 있다. 이 핵심으로부터 공동체는 매일 매일 크리스챤과 그들의 개인적인 관계의 삶에 고리를 넓혀서 확장할 수 있고 확장해야만 한다. 그들의 매일의 언어와 행동과 태도는 예배를 더 광대하게 하고 변환시키기 위해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 핵심에서 크리스챤 예배의 본질로써 친교는 처음 형식으로 일어나야 하고 모든 개인적인 기독교인들은 평상시에 영향을 끼쳐야 하고 매력적이어야 하고 외쳐야 할 뿐만 아니라 후원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이 핵심에서 공동체는 집단적이 아니라 살아있는 기독교인들의 교회이어야 한다. 공동체는 결합적으로 작업 중에 있다. 그리고 필수적으로 개인적인 기독교인들과 이방 세상의 두 가지로 보여질 수 있다.

공동체는 자신을 성화 해야 하고, 어디서나 바깥 세상이나 매일의 삶에 더 넓은 지구에까지 성화하려고 결심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널리 퍼질 때까지 그것은 일시적인 공동체의 화해와 공의와 희생의 대표로 입증할 것이다. 만일 공동체가 자신을 성화하지 않는다면 공동체는 틀림없이 매일의 삶 속에서 교화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우주의 운행 원리 속에서도 공동체의 교화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p 6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