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의 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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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 : 허성업(Th.M. 1차)남성천(M.A. 1차)

 


그리스도 공동체는 우연히 세상에 파송된 것이 아니라 매우 중대한 임무를 띠고 파송되었다. 교회는 자신의 임무에 앞서 존재하는 것도, 임무를 얻은(acquire) 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임무와 동떨어져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p.795) 교회는 자신들의 임무를 표현함으로써, ((즉)) 실천하거나 회피함으로 서거나 쓰러졌다. 교회는 임무라는 빛을 통해 스스로를 이해하기도 하거나 전혀 그러지 못하기도 하다. 세상조차도 교회를 교회의 임무와 관련지어, 비록 그것이 물량주의와 성취주의라는 잘못된 인상을 남겼을지라도, 존경을 표하기도 하고 전혀 그러지 않기도 한다. 그리스도 공동체는 자신의 임무에 의해 임무와 더불어 생존한다.

1. 교회 임무의 내용은 무엇인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리스도는 이들을 당신의 백성이자 몸으로, 교회의 일원으로 만드신다. 그리스도는 교회가 공통적으로 부여받은 임무의 기원이자 내용이시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그들을 교회로 만드실 때 당신을 고백하는 공동체로 일깨우시며, 교회가 그리스도를 고백하도록 자신을 드러내신다.(p.796) 그리스도의 자기선언과 이에 대한 지식이 드러나지 않으면 교회의 임무는 해야할 방향을 상실한다. 우리는 이 점을 분명히 상기해야만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 공동체 임무의 순수성, 즉 임무의 내용에 관한 가장 우선적이고 결정적인 표준을 갖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교회가 세상에 붙박혀 그 지위를 증명하고 명백히 할 책임을 형성하고 있다는 데에 우선 관심해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것을 확증한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긍정(Yes)이시고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단순히 교회의 제안자나 표상, 혹은 암호가 아니시다. 우리가 이 긍정을 그리스도 공동체의 임무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 분과 떨어지거나 넘어선 어떤 것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 분으로부터 떨어진 긍정이라면 이것은 진리에 관한 성격이나 힘을 가질 수 없다. 만일 교회가 자신을 긍정의 증언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를 따르고 선언하고 찬양하는 것은 헛되다. 긍정으로부터 떨어진 긍정이라면, 이것이 비록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능력은 없다.

교회의 임무에 있어서 사실 우리는 부정(a No)을 포함하는 긍정(a Yes)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정체성을 가지기 때문에 공동체는 근본적으로 부정이 아니라 긍정이다.(p.797) 그래서 교회의 임무는 '부정'이거나 '긍정과 부정'이 될 수 없다. 교회가 '부정'을 표현해야만 한다면, 이것은 序言은 혹은 結言은 아닐 것이다. '부정'은 단지 '긍정'을 말하기 위한 삽입구의 역할만을 할 수 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해야만 하기 때문에 교회의 임무는 무엇보다도 먼저 긍정을 증명하는, 그러므로 홀로 선하신 그리스도를 증명하는 것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교회가 이를 얼마나 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임무를 얼마나 잘 수행하느냐가 따져진다. 교회가 이를 전혀 하지 않는다면, 교회의 행위는 그리스도 공동체이기를 그친 것이고 자신의 임무를 포기한 것이며 무엇을 하든지 본질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 없이 혹은 인간에 反하여 하나님을 예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하시는, 인간을 위하시는 하나님을 예시하신다. 그리스도는 죄 있는 인간의 義認化와 聖化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예배 역시도 효력있게 만드시는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가장 깊은 知覺에서 개혁하시는 분, 즉 단순한 복구가 아닌 모든 피조물의 영광과 목적을 폭로·명시하시는 분이시다.(p.799) 한마디로 그리스도는 선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런 이유로 선하심은 일시적인 표명이 아닐 뿐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으로 구체화되고 이미 하나님의 말씀으로 드러났고 받아들이기 쉬운 선하심이다. 따라서 이에 관한 지식과 삶은 피조물들에게 난해한 것이 아니라 쉬운 것이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여 이를 증명하고 드러내야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만일 선하신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면, 이것은 위임받은 교회 임무의 내용이 인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p.799) 교회의 임무에 의하면, 인간은 항상 가치있는 존재이다. 이것은 인간의 방법이나 존재에 어떤 내재적인 가치가 있다는 것이 아니다. 선하신 하나님의 대상이고 이에 의해 인간은 고양되며 하나님은 인간의 친구이자 보호자이고 형제이기 때문에, 인간이 대체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러셨던 것처럼 인간과 더불어 행동하시는 하나님은 교회 임무의 내용이 되실 수 있다. 교회가 타락한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뿐 아니라 그도 또한 강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신의 임무를 포기하는 것이고 그리스도 공동체가 되기를 그만두는 것이다. 교회는 인간이 존재하는 어떤 환경에든지 무조건 이렇게 하도록 요구받는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우리는 복음-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쁘고 선한 소식-을 위해 위임된 교회가 있음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긍정은 교회가 있어야 하는 이유를 제공한다(This great Yes is its cause). 이것을 제외한 다른 어떤 것도 교회의 임무가 될 수 없다. 이 임무는 상당히 중요하고 절박하기 때문에, 교회는 이를 전적으로 선언해야지 다른 것에 책임지울 수 없다. 확실히 연합된 교회를 이루는 인간 모두는 나름의 다양한 질문, 관심, 보호, 영감들을 갖고 있다.(p.800) 그러나 연합된 교회와 그 구성원들은 복음에만 봉사하고 이것만을 따라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主들을 부르거나 선포할 자유가 없다. 교회는 멋대로 긍·부정을 말함으로 참다운 긍정을 가릴(obscure) 자유가 없다. 교회의 자유는 주어졌기 때문에, 복음에 벗어나는 경우엔 보호 될 수 없다. 교회는 복음을 위한 자유이다. 복음에 대한 불순종이 교회의 활동을 독선적이고 외곬으로 만드는 것이지 순종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2. 교회의 임무는 누구에게 적용되는가? 그리고 누구는 어떤 자인가?

언뜻 떠오르는 것과는 달리 대답은 그리 간단치 않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교회는 선하신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인간, 세상의 대표자이자 축소판인 인간에게 파송되었다. 그러나 인간이 무엇인지, 누구인지, 어떤지 하는 것은 명료하지 않기 때문에 이에 대한 설명을 필요로 한다.(p.801) 필연적으로 인간의 특징이 고려되어야만 한다. 복음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내·외적으로, 본질적으로,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개별적으로 결정된 존재이다.(p.803) 인간은 자신의 상황에 따른 결정을 설명하거나 해결하지 못한다. 인간은 자신의 상황으로부터 유출된 것들에 종속된 존재이다. 따라서 하나님과 그 분의 복음에 의해 표명된 인간은 性·地域·時代·敎養·身分·政治·經濟적 상황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과 적접적인 관계를 맺는 존재이다. 교회에게 주어진 임무는 이러한 인간에게로 향한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논의를 발전시켜야만 한다. 하나님과 이웃과 직접 관계하는 인간이란 누구이며 무엇인가? 교회는 인간이 복음에 대한 무지와 복음으로부터 분리된 공허함에 거하고 있음을 말해야 할 것이다. 확실히 복음의 관점에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이론적으로나 실재적으로, 하나님이 수여하신 복음을 인간이 받지 않고 있다는 것과 복음의 메시지에 무지하다는 것을 넌지시 드러낸다.(p.804) 하나님은 인간을 이렇게 보고 알고 이해하신다.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이 만나시는 인간을 ((정말)) 이처럼 보고 이해하실까? 복음의 새로운 측면은 인간이 복음에 대해 낯선자(a stranger)로 있음을 매우 확실하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하나님은 이런 점을 심각하게 여기시거나 이로 인해 인간을 거절하시는 것이 아니라 너그럽게 보아주신(overlook)다. 하나님은 불신앙의 존재를 믿지 않으시기 때문에 인간의 이론적이고 현실적인 無神性, 異敎性을 믿지 않으신다.(p.805)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논쟁의 대상으로 삼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자신이 인간과 함께 인간을 위해 있었고 있고 있으실 분이라고 말하신다. 하나님이 인간과 만나실 때 하나님은 이것을 전제하신다. 교회가 자신의 내용과 관련해 임무를 이행할 때 인간을 위와 다르게 이해하거나 바라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자면 교회는 인간이 공동체의 메시지에 대한 지식이 없고 따라서 궁극적으로 이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다루어야 할 것이다. 교회가 자신의 인간에 대한 이러한 인식의 우월성을 간직할 때, 교회는 정말 인간을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라는 자격으로 만날 수 있다.

우리는 교회에 주어진 임무를 제시받은 인간이 복음에 관한 지식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필요하다는 공식(formula)을 받아들이면서 더 진척시키겠다. 이렇게 인간은 운명적인 자기오류와 자기모순에 뒤얽혀있다. 모순찬 태도와 경향들에 대해 인간은 화를 낼지 모르지만, 이것들은 인간이 결여되어 있고 필요를 느끼고 가련한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들이 밝고 생기있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모순찬 태도와 경향들은 인간이 자신과 동료들과 세상과 관련해, 자신을 위협하는 세상의 힘에 직면한 자신의 무력함과 관련해 자기가 명석하지 않은 것에 대해 절박한 도움을 요청한다.(p.807)

복음이 결여된 이러한 인간은 따라서 무엇보다 복음에 관한 지식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당신의 능동적인 선하심-죄인인 인간을 자유케 하시며, 병든 자인 인간을 고치시며, 죽은 자인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는-을 선포하심으로, 인간의 근거(cause)를 들어올리시고(take up) 말씀하시며 자신을 나타내신다.(p.808)

우리는 이제 요약할 수 있겠다. 교회에 부여된 임무는 복음에 관한 지식이 없어서 고생하는 인간을 향해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고생하는 인간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세뿐 아니라 현세에서도 당신의 창조물로 늘 그래왔듯이 사랑하시며 사랑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을 생각할 때, 우리는 정적이고 현재적인 저급한 존재 원리(element of existence)와 동적이고 미래적인 우월한 존재 원리를 구분해야만 한다. 다른 말로 해서, 복음이 인간의 무지에 기인한 인간됨을 보는 것과 인간의 무지를 지적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에 기인한 인간됨을 보는 것을 구분하자는 것이다. 인간 존재에 관한 이런 우월한 법의 계시와 선언이 복음이다.(p.809)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그려진(갈3:1) 인간 존재에 관한 이러한 우월한 법을 증명하는 것이 교회의 임무이다. 이 임무의 이행으로 교회는 무지로 침식되고, 돈쥬앙(Don Juan)과 같이, 모든 가능한 도덕적 상실이란 격변에 연루되어 있는 인간을 다룸과 동시에 또한 정반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인간을 다룬다. 더 진전시켜, 이제 우리는 교회에게 주어진 임무를 통해 지시받은(addressed) 인간들을 기다리는 미래란 즐거운 미래,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도래했다는 부활절 메시지의 미래, 그러나 아직 그 나라는 오지 않았다는 강림절 메시지의 미래란 것을 덧붙일 수 있다.(p.810)

인간은 참 인간이 될 것이다. 인간은 더 이상 뒤틀려지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과 이웃 앞에서 자신의 인간성을 진정으로 실현할 것이다. 이러한 인간 존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미하며 흥겨운 예배를 드릴 것이다. 이것이 복음에 따라 인간을 기다리는 미래이다. 만일 교회가 비록 인간이 무지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미래를 향해 열려 있는 자로, 하나님을 즐거이 예배하며 이를 통해 예언자적 존재로 옮기워지는 자로, 비록 현재엔 난관이 있을지라도 구원을 받아 자유함을 누릴 자로, 이것들에 속해있는 자로 희망을 지시받는 존재로 파악하고 연설하고 취급한다면 교회는 정당히 행하는 것이다. 반면에 교회 자체를 인간의 과거와 현재에 의해 영향받은 것이라고 인정한다면, 인간의 무지와 가련함을 운명으로 간주한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방법으로 인간의 지식, 자유, 즐거움과 함께하시는 것이지 포기하신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포기해서 인간이 덧없다고 한다면 교회는 정당히 행하지 않는 것이다.(p.811)

3. 임무의 순수성에 관하여 ; 어떤 유혹들이 임무를 왜곡시키는가?

주님과 그분의 섭리로 수여받은 교회로서, 인간을 지적하는 내용과 근거가 순수하고 진정하며 믿을만하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교회의 임무는 주님의 순수한 섭리로부터 교회를 이루는 사람들의 섭리로 옮기워진다. 하나님의 빛은 ((이것을)) 통해 깨어져 버린다. 여기서 우리는 세 번째 질문을 하게 된다.(p.812) 우리는 비판적으로 교회 내용, 즉 복음상의 두 가지 유혹들을 숙지해야만 할 것이다.

3.1. 시대와 상황과 관련한 유혹

복음에 관해 각별히 ((언급할)) 점은, 모든 시대와 개개의 특수한 역사적 정황을 관통하는 교회의 정체성과 그로 인한 보편성(universality)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선포함으로써 부드러워지고 무뎌지고 은밀히 중단되어 눈에 드러나지 않게 된다는 데에 있다.

이런 저런 특별한 문제에 있어서 교회에게 주어진 명확한 말씀은 없기 때문에, 교회는 답변하려하는 대신에 겸허히 기다려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교회에게도 다양한 애정어린 견해들이 있겠지만 ((겸허히 기다려야만 한다는 것이다)). 교회의 정확한 선언이란 모든 종류의 태도들과 혼합된 오염이 아니다. 이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 요구되는 것은 지혜롭고 안전하게 절제하는 것이다.(p.814) 의도하였든 그렇지 않았든, 특정한 시대와 상황에 대해 교회가 부합한 것이 교회를 약화시킬 때, 성령과 전능하신 아버지의 오른편에서 통치하시는 올리워지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선언은 더 이상 선포되어질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교회의 임무는 이런 경향을 허락하는 것이 아니라 금지하는 것이다.(p.816)

교회가 자신을 특정한 시간과 특정한 인간 상황에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고 수용하도록 요구되고 초대되었다고 본다고 가정해보자. 교회는 이제 자신을 예언자적 활동으로 대표하고 싶어지고, 자신의 힘으로 그리고 자신과 세상을 위한 표상으로 자기를 나타내고 싶을 것이다.(p.817) 그러나 이 점에서 두 번째 과오가 존재하게 된다. 즉, 교회가 복음을 "다른 복음-살아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주의 성령 아래에 있지 않은, 교회에 의해서 자의적으로 해석되는, 상황과 시대의 정신에 의해 채택되는, 그래서 본래의 힘과 표상을 상실하는 가짜 복음"(갈1:6f)-으로 바꾸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p.818) 교회는 복음보다 우월해진다. 이런 환경에서 복음이 공동체에게 믿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가 복음에게 자신들의 믿음체계가 되라고 강요한다.(p.819) 이런 환경에서 교회는 자신을 설명하고 해석하고 專有하며 지배하려는 시도를 감행할 것이다.(p.820) ((그러면)) 복음은 전혀 놀라운 것이 아니다. 복음이 더 이상 살아있는 말씀으로서 증언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의해 지배당하게 된다면, 그 때 그 결과는 잡탕이 되는 것이다. 그 때 교회가 복음이란 이름으로 제공하는 것들은 더도 덜도 아니라 세속화된 복음, 즉 근원적 의미와 힘을 상실한 "다른" 복음이 되는 것이다.(p.821) 이런 형태에서 공동체는 더 이상 우월한 하나님 말씀으로 존재할 수 없을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선언일 수 없을 것이다.(p.822)

우리는 교회의 역사에 나타날 수 있는 두 가지 위험한 순간들을 말했다. 첫 번째 위험은, 공동체가 그럴 능력이나 자발성이 없는데도, 태만한 듯 보이는 자신의 중립성을 벗어버리고 發起하려 하는 데에 있다. 두 번째 위험은 교회가 자신의 필요와 열망에 따라 만들어내어서 복음을 시대와 상황에 적합하게 고백하고 이해하려는 시도, 이런 운동을 감행하는 것이다. 그 결과 교회의 독특성과 영속성은 포기된다.(p.823) 첫 번째 실수는 곧장 두 번째 실수를 부르고 두 번째 실수는 곧장 첫 번째 실수를 반복하게 한다. 만일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렸다면"(예2:13) 이것은 필연적이다.

3.2. 인간과 인간성과 관련한 유혹

또한, 교회에 위임된 임무의 순수성에 관한 질문은 공동체가 보고 이해하고 연설하고 상대하는 인간과 관련하여 놓여진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의 근원으로부터 연유한 두 개의 유혹에 관심을 가진다. 첫 번째는 인간을 만난다는 것을 간과(neglect)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인간을 수호(patronizing)해준다는 것이다. 만일 교회가 이런 유혹의 길을 따른다면, 주님과 그 분의 섭리에 의해 주어진 임무의 순수성을 반드시 잃는다. 그 분에게 복종할 때, 교회는 요구된 거리보다 더 접근하지 않고 적절히 거리를 유지하면서, 인간에 가까이 다가갈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교회가 이러한 순수성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당연한 것은 아니다.(p.824)

교회는 인간이 더 이상 세계의 대표자가 아니라고 무시(neglect)해 버린다. 이런 경우 교회는 하나님의 피조물 사이에서 자신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잊어버린다. 교회는 인간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 교회 임무란 빛에서 볼 때, 교회는 인간을 이런 식으로 볼 수가 없다. 교회의 임무수행에서 나타나는 인간으로부터 동떨어지고 수신인(addressee)에 관한 무시는 교회가 매우 위험한 탈선을 하고 있다는 징표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탈선은 두 번째의 기초가 된다.(p.825)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와 여타의 인간성(the rest of humanity)은 구별되어진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교회는 여타의 인간성과 공존한다는 것을 말해야 한다. 이것은 교회가 세상을 전적으로 언급해야만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당신이 자신의 예언자적 사역으로 위와 같은 지각을 전달하셨다. 교회는 그 분의 행동에 참예함으로써 이런 현상의 한 역할을 감당할 뿐이다.(p.826)

교회 임무의 오류에 대한 유혹은 인간을 수호한다는 것이다. 교회가 스스로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에 충족하다고 생각하거나 교회가 인간을 복음의 관점으로부터 이해하는 것을 거부할 때, 교회에 의해 수호되는 수신인(addressee)은 교회 자체의 힘을 보이기 위한 대상이 된다. 교회는 아무튼지간에 인간과 관계하여 자신을 표현하고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나 ((이 때는)) 매우 위험한 순간이다. 이제 교회는 인간보다 뛰어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지배자로서 인간 자신보다 인간을 더 잘 이해하는 처리자(disposer)로서 인간에게 접근한다. 교회는 인간을 피할 필요가 없다. 교회는 인간의 부족한 경향들을 끌어당겨(draw) 인자하게 수호해주는 위치에 있게 된다.(p.827) 이러한 像을 갖음으로써 고도로 세속화된 교회는 자신이 해야만 하는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너무 가까이 접근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교회의 임무는 왜곡된다. 이러한 像에 갇혀져 있고 접근되어진 수신인의 특질은 따라서 교회의 임무 안에서 直視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용하지만 결정적인 대리(substitution)가 있어왔다. 교회가 인간에게 전해야 했던 것은 우월한 지식이 아니라 교회가 정말 알고 있는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교회가 증거해야 했던 것은 인간과 세상 자체보다 절대적으로 우월한 복음이다. 만약 이것이 교회가 수행하는 것이라면, 수호의 태도에 관한 문제는 없다.(p.828) 교회 자신의 고유한 매력들에 따라서 인간을 지도해 가려는 꿈도 꿀 수 없다. 왜냐하면 교회는 지금 자신이 증언해야 하는 복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교회가 사람들을 조정하거나 수호한다면(patronize) 사람들을 간과하는 것 이상으로 그 자신의 임무를 왜곡하는 것이다.

교회가 그 분의 음성을 들으며 나아갈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세상에서 그 분과 함께 그리고 사람들 중에서 통치할 수 있게 될 것이며 위대해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역을 수행하면서 교회는 인간에 군림할 수 있는 힘을 얻으려는 시도를 할 수 없으며 인간을 수호할 수도 없다. 만일 교회가 통치하고 지배하려 한다면, 이러한 일을 훨씬 잘할 수 있는 세상에 의해서 뒤쳐져 버릴 것이다.(p.829) 만약 교회가 그 분의 이 말씀에 봉사하려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봉사하려고 노력하는 것이지 세상을 통제하려는 것이 아니다. 만일 교회가 主의 가르침에서 인내하고 기뻐한다면 교회는 부적절하고 위험한 선택에 노출되지 않게 될 것이다.


요약

교회의 임무는 간단히 말해 세상을 향해 복음이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다. 여기서 논의는 진전된다. '세상을 향해'라고 할 때 이것은 바로 '인간을 향해'와 다른 의미가 아니다. 이 인간이란 누구인가? 그는 복음의 수혜자이고 하나님에 의해 긍정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상황과 사회적 구조에 의해 제한받는 인간이다. 이 인간은 선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악하기도 한 인간이다. 결국 인간은 모순을 지닌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해방시키는 복음,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그럴 때에라야 인간은 참다운 인간이 될 수 있다. 교회가 인간에 대해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하지 않으면 공동체는 많은 헛점에 빠지게 된다. 그 헛점 중 우리가 분명히 지적해야만 할 것은 인간에 대해-이 인간은 시대와 상황이라는 자리에 처해있는데-철저히 무관심하거나 또는 그 반대로 인간에 대해 철저히 부합하려는 태도이다. 공동체가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귀기울이지 않는 한 교회는 자체의 자기 성장을 꾀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주님에 대한 고백을 견지하지 않는 한 공동체는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게 될 것이다. 이를 우리는 교회사로부터 확인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복음 은 더 이상 복음이 아니라 '다른 복음'이 되어버린다. 따라서 교회는 그 거리를 잘 유지하면서 인간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것은 세상이 볼 때 낯선 것이고 이에 대해 불만을 가질지도 모르지만 교회의 존재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교회가 그 분의 가르침에 인내하고 기뻐한다면 자신의 독특성(Identity)과 전체성(Universality)을 상실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