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신약성서의 교회상

 

 

 

1. 마태복음

 

주후 70년(예루살렘 멸망) 후에 쓰여진 마태복음의 저자는 아마도 시리아 주변, 유대교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디아스포라 지역에서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마태 공동체는 좀 더 큰 유대인의 그룹에서 떨어져 나온 보수적 성향의 유대인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로 추정된다.

마태복음은 종종 "교회론적인 복음"이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오직 마태복음만이 "에클레시아"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태 공동체는 율법 준수나 민족적 기원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베드로처럼(베드로의 지도를 받아)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신앙(하나님의 행위) 위에 세워진 것으로 자신을 이해한다.

마태복음이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부르는 칭호로서는 양떼(10:6, 16, 15:24, 25:31, 26:31), 선택된 자(24:22, 24, 31), 하나님의 자녀(3:9, 15:26, 23:37), 형제(5:22-24, 47, 7:3-5, 18:15, 21) 등이 있지만, 가장 자주 나오는 칭호는 "제자"이다(73회).

마태 공동체는 자신을 무엇보다도 예수의 제자로 이해한다. 제자의 요건은 무엇인가? 제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새롭게 해석된 율법에 대한 순종(율법의 요약으로서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조건은 물론 믿음이다. 하지만 믿음은 순종으로 나타난다(21:32). 순종은 믿음의 시금석이고, 심판의 표준이다(25:31-46). 높이 들린 그리스도의 임재는 "그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28:20) 제자들에게 약속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는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의를 실천해야 한다(5:2). 그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처럼 온전해야 한다(5:48).

      

길레스, 신약성경의 교회론, 89ff.

E. Schweizer, Gemeinde und Gemeindeordnung im NT, 44ff.

 

 

2. 마가복음

 

하워드 키(H. Key)에 의하면, 마가복음의 공동체는 묵시적 종파로서 자신을 하나님의 가족, 참 이스라엘로 생각하고, 가까운 미래에 종말을 기대하며 복음 전도에 전념한 공동체라고 한다. 그에 의하면, 마가가 사용하는 이미지는 공동체적이다. 예수는 개개인을 불렀지만, 그의 추종자가 된 사람들은 공동체가 된다. 그들은 종말론적인 가족의 구성원(3:20, 31-35, 10:28-31), 하나님의 양떼(6:34, 14:27), 새 포도원의 농부(21:1-11), 새 계약의 공동체(14:24)가 된다. 결국 마가 공동체의 정체성은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해하는 것에 있었다는 것이다(H. Key, Community of the New Age(Philadelphia: Westerminster, 1977).

이 공동체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며(1:1, 8:31), 예수의 재림의 때를 모르지만(13:32) 인자로서 재림할 그를 기다린다(13:28-30, 35-37). 마가복음에서도 "제자도"는 기독론과 관련하여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여기서 제자는 12제자를 말하는데, 이 제자들은 예수에 대해 적대적인 유대인과 구분되며, 종종 그들(특히 유대인 지도자들)과 적대적인 관계를 이루는 공동체이다. 제자들의 임무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일"(1:17)이며, 그들은 예수에 의해 파송된다(6:12-13).

하지만 제자들은 갈등, 실패, 오해, 두려움, 물질과 권세에 대한 욕망, 미래에 대한 염려에 빠지는 연약한 피조물이다. 이처럼 마가는 제자들의 연약함을 일관되게 강조함으로써 그 시대의 교회를 향하여 뭔가를 말하려고 한다. 즉 예수의 제자들조차 실패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는 점을 말해 주면서, 마가는 자기 자신을 죽기까지 겸손하였던 예수를 모델로 제시한다(10: 43-45).  

 

길레스, 신약성경의 교회론, 80ff.     

 

 

3. 누가복음

 

누가는 교회를 무엇보다도 "구속사적인 실체"로 이해하고 있다. 누가는 교회가 구약의 이스라엘의 연속이라는 전제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완고함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가 달라졌음을 강조한다. 부활 후에도 아직 결단의 가능성이 열려 있었지만, 스데반의 순교 이후로 이 가능성을 끝났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역사는 이방인으로 넘어감으로써 근본적으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즉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옛 구분은 사라지고, 새로운 주님의 교회가 생겨났다. 제르벨(Jervell)은 이러한 "회복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교회 개념이야말로 누가의 독특한 교회론"이라고 주장한다.

누가에게서 교회는 새로운 존재요, 아브라함의 참 후손으로서 하나님의 뜻과 율법을 실제로 성취한다. 누가는 이 새로운 실체를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기를 매우 꺼리고, 그 대신에 새로운 이름인 제자, 형제, 신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 그리스도인(타종교인들이 붙여 준 호칭)을 사용한다. 그리고 누가는 예수의 삶과 죽음의 증인으로서의 제자들의 본질을 강조한다. 그들은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고 그와 함께 고난을 받도록 부름을 받은 구별된 공동체이다. 그들은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도록 부름을 받았다(9:23).

 

길레스, 신약성경의 교회론, 85ff.     

E. Schweizer, Gemeinde und Gemeindeordnung im NT, 54ff.

 

 

4. 요한복음

  

요한 복음에 공동체적 사상이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이 자주 제기된다. 이 질문이 나오게 된 것은 요한복음에 교회(εκκλησια)라는 단어가 한번도 사용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혹은 새 이스라엘 같은 초대 교회의 전통적인 교회론적 용어도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요한은 자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용어와 사상으로 그의 교회론을 전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요한은 구약 성서의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는 "목자와 양"(10:1-18), "포도나무와 가지"(15:1-17) 등의 이미지를 신약의 교회의 표상으로 그리고 있으며, 제자들의 공동체(8:31; 13:35; 14:12; 15:5; 20:19-23), 제자들의 하나됨(17:20-23),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임(1:12; 11:52), 성령 공동체의 모임(14:6-7, 25-26; 15:26-27; 16:7-11, 12-15) 등으로 교회를 표현하고 있다.  또한 신부로서의 교회(3:29), 교회의 씨로서의 밀알(12:14) 등의 신약 동시대의 전통적인 교회 용어도 요한에게 전혀 낯설지 않다.    

요한 교회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교회론이 철저하고, 예외 없이 그리스도 중심적이라는 데 있다. 모든 교회론적 이미지가 일관성 있고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목자와 양"과 "포도나무와 가지"의 이미지는 구약성서에서 이스라엘을 상징하던 것이었지만, 요한복음에서는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이런 의미로 보면 예수가 곧 교회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교회를 형성하는 구성원이 신자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이고, 신자는 포도나무의 가지로서 목자의 양으로서 교회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요한복음의 교회론의 다른 특징은 그리스도와 신자 간의 개인적 관계를 교회 형성의 또 하나의 축으로 중시되고 있다는 데 있다. "목자와 양"에서는 상호 앎의 관계로, 목소리를 인식하는 관계로 그리스도와 신자 각자의 밀접한 관계를 묘사한다.

요한복음에도 "열두"(제자)라는 말은 언급되어 있지만(6:67, 70, 71, 20:24), 이들을 지칭 할 때도 "열두 제자"라는 말보다 "제자"라는 말이 선호된다. 요한복음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동등하게 제자로 묘사한다. 사마리아 여인(4:7-42), 막달라 마리아(19:25; 20:1-2, 11-18), 마르다(11:1-44), 베다니의 마리아(12:1-8), 예수의 어머니(2:1-11; 19:25-27) 등의 여인들은 남자들과 대등한 신앙 고백을 하고 선교활동을 한다.  

요한의 교회론은 교회 갱신의 신학이다. 요한 공동체는 요한 복음서를 통해서 사도적 공동체에게 갱신의 목소리를 내려 한 것 같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의 무리라는 개념에서 멀어지는 것을, 또 그와의 개인적 친교에서 멀어져 가는 것을 요한 공동체는 경계한 것처럼 보인다. 비록 요한 공동체는 베드로로 대표되는 사도적, 주류 기독교 공동체와 동반자임을 주장하지만, 예수와의 친밀한 관계, 그의 뜻을 깨닫는 것에는 항상 우위성을 주장하는 데서 이러한 입장을 암시받을 수 있다. 이것은 1세기 내의 기독교가 그리스도와의 개인적 교제를 통해서 그 생명성을 회복하자는 교회 갱신의 운동이었다.

 

김동수, 요한복음의 교회론

 

 

5. 바울서신

 

바울에게서 교회는 이스라엘, 즉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이스라엘에 속할 수 있는 자격은 공로나 혈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서 주어진 것이다. 교회야말로 비로소 참된 의미에서 이스라엘이다. 교회는 구속사의 후기 단계에 출현한 존재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모습 속에서 이미 주어졌다. 하지만 참 교회의 표지는 역사적 위치, 역사적 발전이 아니라 신앙이다. 교회가 이스라엘과 연결되어 있는 것은 그 역사적 연관성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신실 때문이다. 교회가 이스라엘이라고 불린다면, 그것은 곧 교회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선택)로부터만 존재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롬 9-11장).

바울에게서 가장 두드러지는 교회 개념은 "그리스도의 몸"이다. 슈바이처(E. Schweizer)는 바울의 "그리스도의 몸" 이해에서 히브리적 시간관 안으로 그리스적 사고가 들어왔다고 말한다. 즉 교회가 십자가에 달렸다가 부활한 그리스도의 임재에 둘러싸여 있고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고 있다고 바울이 말한 것은, 유대교적 시간 언어가 그리스적 공간 언어로 표현된 결과라는 것이다.

여하튼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 개념을 통하여 교회가 지금 살아 계신 주님과 결합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교회가 아브라함의 후손인 것도 역사적 발전 때문이 아니라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리스도 자신만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모든 역사의 성취와 목표이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써 교회는 아브라함에 속한다. 그리고 교회는 "종말론적 실체"로서 모든 세상을 믿음으로 불러 모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이 된 모든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E. Schweizer, Gemeinde und Gemeindeordnung im NT, 80ff.

 

 

6. 후기서신

 

골로새서는 하늘의 성좌들이 지상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믿던 그 당시의 천사 숭배에 맞서서 높이 들린 그리스도를 모든 권세와 정사의 머리로 선포한다. 교회의 주님이신 그리스도는 천사들보다 우월할 뿐만 아니라 그의 통치는 온 우주까지 미친다. 즉 그리스도의 화해는 우주적인 범위를 갖는다. 교회는 주님의 통치 아래서 벌써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부활했다.  

에베소서에서도 교회는 그리스도가 모든 권세와 정사의 주님으로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골로새서처럼 중심에 놓여 있지 않고, 교회 자체가 신앙의 중요한 대상이 되고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하늘 세계로 옮겨졌다. 교회와 그리스도의 친밀한 일치가 강조되고, 교회와 세상은 강하게 구별되었다 이 세상은 불순종의 아들로서 빛의 아들과 대적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이 세상 안에서 성장하고 있다. 성장의 원천과 목표는 그리스도이다(4:12-16)

베드로전서에서는 "신령한 집"의 개념이 바울의 "그리스도의 몸" 개념과 병행하고 있다. 교회는 이스라엘(이스라엘의 진정한 발전)로서 하나님의 은혜의 선택과 성령의 활동 속에서 성장한다. 교회는 이방인 가운데 통과하면서 하늘의 영원한 기업을 향하여 순례하는 백성이다.    

히브리서는 교회가 "순례하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강조하고 있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의 낮추심(비하)과 높이 들리심(고양)의 구조 속에서 사고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들리심으로부터 출발하여 재림을 향해 나아가는 순례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요한서신들에서도 요한의 교회관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여기서도 예수를 참 하나님으로 인식하는 자는 모든 것을 가진 자로 설명되고 있다. 이들의 파송은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재림 사이에 있다. 하지만 교회 안에 거짓 교사가 출현함으로써, 요한서신들은 요한복음보다 더 강하게 세상과의 엄격한 분리를 강조한다.

요한계시록에서 교회는 시련 속에서 방황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분명하게 그려진다. 교회는 "이스라엘"로서 종말론적인 실체이다. 교회의 희망은 열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진 하늘의 예루살렘에 있다. 여기서 교회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와 동일시된다(7:11이하). 교회는 하나님의 예정으로 선택된 무리, 시련을 극복하고 승리한 무리이다.    

 

E. Schweizer, Gemeinde und Gemeindeordnung im NT, 94f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