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백성은 일차적으로 신학적 실체이다. 즉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부름을 통하여 형성된 거룩한 백성이다(신 7:6, 14:2, 21, 26:19, 28:9 등). 교회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과 부름을 전제로 하며, 이 부름은 개인의 모든 행위에 선행하여 온 백성을 상대로 한 것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개인으로 구성된 백성의 공동체 전체이다.(H. Küng, 이홍근 역, 교회란 무엇인가, 분도출판사, 1978, 117쪽 이하).

구약성서의 이스라엘 백성의 자의식은 자신이 하나님에게 속한다는 확신에 뿌리박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야훼의 소유이다(출 19:5; 민 11:29, 17:6; 신 9:26, 27:9 등). 야훼와 이스라엘 간의 관계는 다양한 비유들을 통해서 가시화되었고(야 훼의 아들-딸, 혼인관계, 포도나무, 포도원, 주의 무리 등), 다양한 용어를 통해서 표현되었다(이스라엘의 하나님, 우리-너희 하나님, 아브라함-이삭-야곱의 하나님, 조상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이스라엘의 주, 아버지, 심판자, 왕, 창조자, 돕는 자, 구원자, 방패와 보호, 산성과 바위 등). 하나님과 백성은 서로 속해 있다. 백성의 일은 곧 하나님의 일이고 하나님의 일은 곧 백성의 일이다. 이스라엘의 승 리, 행운은 야훼의 이름과 명예를 드높인다(삼하 7:26, 시 106:8, 렘 33:9 등). 이스 라엘이 정복당하면 야훼의 이름도 다른 백성의 조롱거리가 된다(수 7:7-9, 신 32:27, 시 79:9 등). 야훼는 그의 위대한 백성 때문에 칭송받고, 이스라엘은 그의 위대한 하나님 때문에 칭송을 받는다(시 33:12, 144:15; 신 4:7, 32:43, 33:4 등).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친교를 나타내는 전형적인 히브리적 표현은 '계약'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생활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 계약을 체결했다는 사실을 통해 규정한다. 계약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 간의 친밀한 교제를 규정하고 백성의 삶 전체를 규정한다. 계약은 야훼의 공동체 창조 의지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계약 안에서 사는 자야말로 의로운 자, 선택된 자, 거룩한 자, 경건한 자이다.(N.A. Dahl, Das Volk Gottes, Darmstadt, 1963, 6쪽 이하.) 계약은 이스라엘 종교의 공통 분모이다(K. Barth, KD Ⅳ/1, 22쪽. K. Barth에 의하면 하나님의 모 든 의지는 바로 계약의지이다. 그러므로 그는 창조조차도 하나님의 영원한 계약의 표명, 계시 및 실행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창조는 계약의 외적 근거로, 계약은 창조의 내적 근거로 이해되었다(K. Barth, KD Ⅲ/1, 38, 106쪽 이하, 258쪽).

하나님의 공동체는 예배(제의), 전쟁, 율법과 풍습의 공동체였다. 예배는 이스라엘 백성의 삶에 결정적인 의미를 주었다. 예배는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중심이었다. 그리고 성소는 또한 전쟁기지가 되었다. 제의에서처럼 전쟁에서도 야훼의 현존을 통한 백성의 영적 능력의 집중과 갱신이 이루어졌다(야훼의 거룩한 전쟁). 그리고 카할은 법 공동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백성의 일치는 동일한 율법과 풍습에 기초한 것이었다. 율법은 이스라엘 전체를 보존하기 위한 것이었고, 야훼는 율법의 보호자였다. 하나님의 뜻에 따른 생활은 계약관계에서 기인한 것이다(N.A. Dahl, 같은 책, 6쪽 이하).

그렇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폐쇄적이고 자기 완결적 실체가 아니고 종말론적 실체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선택은 미래를 지향하는 하나님의 행동의 종말론적 개방성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의 선택은 하나님의 포괄적인 세계 구원의 행동의 틀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스라엘과 맺어진 하나님의 계약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이스라엘의 종말적 선교를 지시한다. 이스라엘의 소명은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의지의 선포에 있다. 새로운 출애굽, 새 계약, 새 백성의 회집, 메시야 기대, 새 성전 등에 관한 예언적 발언들은 바로 이를 지 시한다(앞의 책, 38쪽 이하, M. Keller, Volk Gottes als Kirchenbegriff. Zürich: Einsiedeln: Köln, 1970, 252쪽 이하).

이처럼 하나님의 선택과 계약, 종말론적-세계지향적 선교의 성격을 갖는 "하나님의 백성" 개념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통치" 개념으로 집약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계약(토라) 순종을 통해 오직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주권(통치권)에 복종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신학적인 실체인 하나님의 백성 개념은 또한 정치신학적 개념, 신정통치적(Theocracy) 개념이다. 구약의 시대사를 통해 볼 때, 신정통치는 (1) 왕정 이전의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의 통치, (2) 왕정의 통치, (3) 왕정 몰락과 포로기 이후의 사제의 통치를 거쳐가면서 변형되었지만, 그 바탕에 흐르는 기본 신앙은 "오직 야웨" 사상, 즉 오직 하나님만이 통치 하신다는 신앙, 즉 "야웨 왕권" 신앙이다(김이곤,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 신학사상, 110호 2000년 가을, 34ff 참조).

야웨 왕권 신앙의 발생과 배경에 관해서 서로 엇갈린 견해들이 주창되곤 하였지만,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주 후에 가나안 전통(특히 우가리트)으로부터 들어온 것이라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여하튼 구약의 시대를 통하여 면면히 전개되어온 야웨 왕권 신앙은 반(反)왕권주의, 창조신앙(창조와 창조질서의 보존)으로부터 삶의 전 영역을 포괄하는 보편적이고도 우주적 완성에 대한 기대로 확대되어 갔다. 특히 예언자들과 묵시문학가들을 통하여 이 신앙은 종말론적인 의미를 크게 지니게 되었다(J. Pixley, 정호진 역, 하느님 나라, 한국신학연구소, 1986).

신약성서에도 "하나님의 백성"의 개념은 구약성서에서처럼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 인간의 윤리적 실천과 선교적 위임을 포함하는 것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나라" 신앙 안에서 심원하게 변형, 발전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바로 그 안에서 가까이 온 "하나님의 나라"로 전향(회개)하고, 삶의 전 영역을 이에 따라 변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각도에서 말하면,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소집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포함한다. 예수의 기도, 즉 "이름이 거룩하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는 "포로가 되고 상처를 입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하여 그분의 이름이 이방인으로부터 조롱을 받는 현실 로부터 벗어나서, 갱신되고 치유된 하나님의 백성이 다시 이루어지게 하소서"라는 기도와 다르지 않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옵소서"("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뜻이 이루어지옵소서"는 앞의 기도의 마태의 추가적인 부연이다)는 "우리로 하여금 그분 안에서 다가오고 실현되기 시작한 하나님 나라에 속하는 백성이 되게 하소서"라는 기도와 다르지 않다(G. Lohfink, 정한교 역,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 했가? 8ff).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하고 가까이 가져온 "하나님의 나라"란 무엇인가? 1)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현실이지만, 이 세상을 위하여,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는, 이 세상 안에서 실현되기 시작하는 그분의 통치이다. 2)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인간의 과제(준비와 협동)를 통하여 다가오는 그분의 통치이다. 3)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가난한 자들"에게만 약속된 것이지만, 회개하는 부자도 배제되지 않는다. 4) 하나님의 나라는 구원과 기쁨의 사건(혼인잔치)이지만, 초대를 끝까지 거부하는 자에게는 현실의 역전과 심판이 예고된다(이신건, 조직신학입문, 한국신학연구소, 110쪽ff). 5) 하나님의 나라는 (1) 정치적 독재(인간 우상)의 거부(정치적 민주화), (2) 경제적 독점(맘몬 우 상)의 거부(경제적 사회화), (3) 문화적, 사회적, 인종적 차별의 거부(평등한 형제- 자배적 공동체), (4) 자연 파괴의 거부(자연과의 친화적, 공생적 삶 추구), (5) 하나님이 없는 삶의 부정(구원과 기쁨, 영생과 영광에 참여함)이라는 5가지 차원을 갖는다(J. Moltmann, 김균진 역,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참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까이 온 "하나님 나라"의 빛 아래서 교회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며, 더욱이 그 전단계(前段階)도 아니다. 바르트에 의하면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복사(輻射), 반영(反影)이고(하나님의 나라는 교회이지만, 교회는 아직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큉에 의하면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전조(前兆), 여명(黎明)이며, 판넨베르크와 몰트만에 의하면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표징(表徵), 선취(先取)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오고 있기에 그 전조로서 교회도 온 것이지, 교회가 왔기에 그 결과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오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령의 권능 안에 있는 교회는 아직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지만, 그 활동 안에서 그것을 선취하는 새로운 인류의 전위대(前衛隊) 혹은 돌격대(突擊隊)이다. 기독교의 메시야적 잠정성(暫定性), 즉 역사적인 실존(순례자, 나그네로서의 삶)은 스스로 사회적, 역사적 한계를 초월하도록 만든다. 그렇지만 기독교의 역사적 궁극성(窮極性), 즉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로 하여금 그 어떠한 불확실한 역사 속에서도 확신과 기쁨을 갖도록 만든다. 잠정적이나마 궁극적인 확신 속에서, 그리고 궁극적인 것을 지향하는 잠정적 불안 속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지시하고 반사하여 투영하고 선취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는 장차 올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인 표징을 수립하는 '메시야적 공동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이신건, 하나님 나라의 지평 안 에 있는 신학과 교회, 211f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