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교회의 조직과 질서

 
     

우리는 수많은 교파와 교회들의 병존, 그 직무조직, 체계의 다양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사실은 교회일치와 교회연합의 장애물일 뿐만 아니라 일치된 복음증거의 장애물이 되고 있다. 또 우리는 하나의 교회 안에서조차 존재하는 직무 이해의 다양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사실은 교인들 간의 일치, 화해, 협력의 장애물일 뿐만 아니라 불화, 갈등, 헤게모니 쟁탈의 원인이 되고 급기야는 교회분열의 씨앗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교회의 본질이해와 함께 교회직무의 올바른 이해는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교회의 본질과 직무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성서적 교회의 본질이해에 근거하여 성서적 교회직무를 이해해 보고자 한다.

 

1. 교회의 본질과 직무의 상관관계

(1) 교회의 본질: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였고 처음부터 이스라엘과 독립된 종교집단을 창안하지는 않았다. 예수는 온 이스라엘에 대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고 그들을 이 나라 앞에서 결단하고 회개하게 함으로써, 참 이스라 엘의 회복을 목표하였다. 물론 그는 제자들을 불러모았고, 이런 의미에서 예수는 도래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맞이하고 이를 증거하는 무리(눅12:32, 막 14:27)를 소집했다. 이런 뜻에서 교회의 싹이 이미 발아하고 있다고 보겠다(함축적 교회론). 교회는 예수의 부활, 성령 강림 이후에 모인 제자들의 모임에서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우연에 앉은 온 세상의 주로 고백하며 예배하고 성찬 식을 행하면서 비로소 교회는 이스라엘 백성 속에서 참 이스라엘, 새 이스라엘로 모습을 띠게 되었고, 이방선교를 통해 교회가 드디어 하나의 에클레시아(그리스도의 제자, 그리스도를 믿는 자-그리스도인)로 완성되었다.

(2) 교회의 직무: 교회는 그리스도의 통치 속에서 새롭게 실현되기 시작한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도록 부름을 받는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의 표징, 전조라고 이해된다. 이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미래적 종말론적 사건인 반면에, 교회는 아직도 오지 않는 완성될 나라, 즉 예수의 재림 전에 위치하여 있으므로(그 당시 는 중간 시기가 짧은 것으로 알았던 흔적이 많다). 역사 속에 존재하고 있는 의미에서, 교회의 조직, 활동을 위한 직무가 필요할 수 밖에 없었다.

(3) 상관관계: 본래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표징으로서 어떤 조직, 굳혀진 형태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었으나(예수의 활동 당시를 보아 알 수 있듯이), 한편으로는 지상 위에 존재하여 완성될 나라를 기다리는 무리로 있는 한, 자연히 일정한 임무할당, 조직을 갖출 수 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신약성서에서는 어떤 확고한 조 직 체계를 보여 주지 않고 다양한 모습을 보여 준다. 초대교인들이 서 있는 자리, 신학이해에 따라 이미 신약성서 내에서부터 오늘과 같이 매우 다양한 모습의 교 회 직무형태를 갖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의 "신약성서적인 교회 조직"이란 것은 없다. 신약성서의 모든 책들마다 교회의 직무 이해가 서로 다르게 증언되어 있다(오늘날의 교회 직제의 다양성의 근원?) 그러나 슈바이쳐(E. Schweizer)는 신 약성서의 교회 직무의 세 가지 모델 형태를 본다.

 

2. 신약성서의 교회직무의 세 가지 모델

(1) 팔레스틴의 교회직무: 팔레스틴 교회는 아직도 유대교의 옛 형태와 조직 안에서 강하게 머물러 있었다. 베드로(기둥, 반석)와 야고보가 특별한 역할을 수행했다. 유대교적 직무인 서기관직, 랍비, 장로들이 들어 왔고, 사제들도 교회 안으로 들어 왔다(물론 평신도와 구별되지 않음). 물론 이 조직들에서는 모든 잘못된 권위, 위치는 배제되었다. 비록 베드로가 교회의 반석으로서 특별히 맺고 푸는 권한을 부여받았지만(마 16:19), 이 권한은 모든 제자들에게 주어졌다(마 18:18 이하. 사도행전에는 사도 후의 교인인 아나니아와 삽비라, 빌립도 세례의 권한이 있었고, 사도들이 없이도 성만찬이 거행되기도 했다.

그러나 팔레스틴 교회는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가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 율법과 조직이 교회의 존속과 생존을 위해 필요하다는 생각하였다. 그래서 직무 담당자는 특별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많은 은사(특히 질병 치유)는 주로 그들에 의해 이루 어졌고, 안수를 통해 성령을 받게 한 일은 사도직에만 주어진 것 같다(행 8장).

이런 강한 유대전통, 직무전통을 이어받은 교회관은 마태복음, 누가복음, 목회서신들에서 반영되어 있다. 이런 전통은 가톨릭 교회 속에 강하게 살아 있다. 로마의 법, 전통의식과 결합되어 가톨릭 교회는 특히 강하게 직무, 조직, 계급을 내세 우게 되었다. 특히 이단(몬타니즘, 영지주의)들을 방어하면서 감독의 권위가 강하게 주장되어 오면서 굳어진 계급형태를 오늘날 갖추게 되었다.

 

(2) 요한적인 교회직무: 요한이 이해한 교회는 완전히 다르다. 요한에게서는 교회가 성령을 소유하기 때문에 모든 직무, 조직적인 것은 매우 후퇴하고 있다. 그에겐 거룩한 곳이 따로 없고, 성령은 자유롭게 한다(요 4장). 영으로부터 태어난 자는 율법이나 규정에 종속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영은 원하는 대로 불기 때 문이다"(요 3:8). 요한복음 14장에 의하면, 성령은 예수 대신에 교회를 다스린다. 이러한 요한적 교회는 완전히 자유로운 무리, 성령의 기름부음에 의해 사는 무리이며, 그곳에는 어떤 특별한 직무가 필요하지 않다. 교회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 서 모든 것을 알고 있다(요일 2:20). 요한 교회는 태동하는 감독적인 교회 직무와 때로 투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요한삼서 9장 참조).

이런 요한적 교회는 성령, 성도의 자율성을 더 강조하므로 오늘날 무교회주의자, 자유 교회, 바닥 공동체, 형제 교회, 회중 교회 등에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3) 바울적인 교회직무: 바울 교회는 중간적 위치를 차지한다. 팔레스틴 교회가 경직된 직무교회, 율법주의의 위험에 처하는 반면, 요한 교회는 "교회(조직체)가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영지주의, 무교회주의, 무율법, 방종주의에 가까울 수 있다. 바울은 그 중간에 서 있다.

슈바이쳐는 이 바울적 교회를 중세 유럽 도시의 시장(市場)에 비유했다. 이 시장은 평화시에는 시의 중심이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면 적이 어디로 공격하느냐에 따라 갑자기 동쪽 벽이, 혹은 서쪽 문이 중심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바울은 성 직자와 평신도를 구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이 교회 내에서 봉사 하도록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모든 신도들이 영을 소유하고 있다. 모든 교회 지체들이 은사를 받아 교회 내의 특별위임을 받고 있다. 그렇지만 이 사명이 특별 한 봉사직에 위임될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자들에게 주어진 카리스마적 은사도 인정하면서 또한 부름을 받은 카리스마적 직무도 인정하였다(고전 12:28, 엡 4:11).

이런 바울적 교회관은 직무와 영적 은사, 이 둘을 다 인정하고 서로 조화, 화해시키는 교회상을 보여주고 있다. 직무(직책)와 영의 은사는 서로 적대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이면서도 긴장 관계 속에 있다. 이런 교회관은 중간 노선을 선택 하는 많은 개신교회에 속해 있다.

이처럼 신약성서의 교회는 이런 세 가지 교회형태가 역동적 긴장관계를 이루면서 하나의 교회를 이루고 있다. 신약성서의 교회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운동 속에 있다. 적들이 어디에서 공격해 오느냐에 따라서 직무적 교회가 되기도 하고, 요한적 교회가 되기도 한다. 양쪽 방향의 공격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는 바울적 교회가 중심으로 거듭 돌아오기도 한다. 그러므로 신약성서의 교회 직무는 정적인 것이 아니라 항상 양 극단을 조정하면서 바울적인 중심을 거듭 생각하는 도중에 있다. 그 직무는 경직된 규칙이 아니라 항상 거듭 새로이 창조해야 할 다양 한 견해를 가진 자들 간의 "평화"(고전 14:33)이다. 평화는 신약성서의 역동적 교회 직무의 본질이다

(E. Schweizer, Gemeinde und Gemeindeordnung im NT, 148ff.).

 

3. 교회 직무의 복음적 이해

그렇다고 해서 교회 직무란 아무래도 괜찮다거나, 혹은 현실적, 정치적 혹은 경제적 여건에 따라 세워나갈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교회 직무의 형태가 어떻게 결정되는 것인가? 하는 것은 '복음'으로부터, 또 '복음의 일부로서 표현되는 직무' 이해로부터 주어져야 한다. 복음으로부터 교회 직무를 이해하고, 세우고, 갱신해야 한다.

(1)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의 나라(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주권)이다. 즉 오직 하나님만이 만물의 통치자이다. 그러므로 어떤 인간도 인간 위에서 호령하고, 부리고, 억눌러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형제와 자매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말씀대로 "만약 높은 자가 되려거든 낮은 자가 되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마 20:25-28). 섬김의 정신, 섬김으로부터 나오는 권위가 교회 직무의 본질이어야 한다.

(2) 초대교회의 복음: 초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과 교회의 주님이 되었 다는 고백 속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 선포를 새롭게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예수가 만인을 통치한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권력, 힘으로써가 아니라 희생, 용서, 부활의 능력, 성령의 임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 나타난 최초의 직무인 집사(Diakonia)는 아주 세상적인 용어(식탁에서 주인을 섬기는 자)로부터 가져왔다. '디아코니아'에는 그 어떤 권한, 특권, 계급의식, 명예도 없다. 초대 교회의 최초의 직무는 이처럼 '낮아지는 봉사'의 특징을 갖고 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과 일치한다.

(3) 바울의 복음: 바울신학에서 모든 교회의 봉사와 기능을 포괄적으로 표현하는 개념은 '카리스마'(은사)이다(롬 6:23 - "하나님의 은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영생은 다른 여러 은사들 중의 한 은사가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일한 종말론적인 은사이다. 그리스도는 생명, 은혜, 영 그 자체이고, 우리의 주님이다. 그러므로 '은사'를 가진다는 것은 곧 생명, 은혜, 성령에 참여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 참여는 봉사와 소명 속에서 나타난다. 봉사는 이 은사가 현실로 드러나는 것이다. 영생은 이 땅에서 새로운 순종으로 나타난다.

바울에 의하면, 교회의 모든 지체들이 다 자신의 은사를 갖고 있다. 그런데 은사는 크게 세 가지 종류이다. 첫째는 '선포'의 은사인데, 이 은사를 가진 자에 속하는 자들은 사도, 예언자, 전도자, 교사, 권고자이며, 그 밖에도 영감, 환상도 선포의 은사로 간주될 수 있다. 둘째는 '봉사'의 은사인데, 이것에 속하는 것으로는 신유, 악귀 추방 등이 있다. 셋째는 '치리'의 은사로서 감독 등이 이를 가지고 있다. 심지어 고난도 은사로 간주되며, 남이 모르는 사랑의 행위, 기술적 봉사, 결혼, 순결 등도 은사로 열거된다. 주님에 의해 부름을 받은 자들은 모두가 은혜의 분 량대로 은사를 가지고 있다(롬 12:3; 고전 7:7).

이처럼 다양한 은사의 척도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주님 안에서 주님을 위하는 행동, 즉 그리스도인의 순종에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있지 않은 은사는 광신주의에 빠진다. 모든 은사들은 교회의 머리인 예수 그리스도에 순종 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다.

결론적으로 요약하자면, 교회 직무는 항상 역동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양한 은사의 즐거움이 있는가 하면, 그런 가운데서도 긴장과 대립이 항상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치는 항상 종말론적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항상 주의 음성을 새롭게 들어야 하며, 신앙 속에서 직무를 올바르게 세우고 갱신하려고 노력 해야 한다. 교회는 '순례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고착된 습관이나 해묵은 전통으로부터 항상 새롭게 탈출하는 용기를 가져야 하며, 언제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바라보고 전진하여야 한다

(E. Kaesemann, Amt und Gemeinde im NT, Einheit und Vielfalt in der neutestamentlichen Lehre von der Kirche, in: Exegetische Versuche und Besinnungen, Goettingen, 19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