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서의 영생신앙

김신일

머리글

구약성서의 영생신앙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면서 먼저 구약에서의 영생신앙을 쁹기는 쉽지않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구약에서는 "영생" 이라는 뚜렷한 주제로 장문의 귀절을 대할수 없고 단지 역사서, 지혜서, 예언서 등에 산발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즉 사후존재에 힌트를 제공하는 몇가지 언급들만이 이 연구의 1차적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또하나의 이유는 구약성서에서의 죽음에 대한 이해가 매우 다양하고 때로는 모순되기도 하여 일관되지 않기 때문이다. 필자는 제한된 식견으로 이 연구에 임하면서 우선 구약성서속에 나타난 영생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히브리 사상의 삶과 죽음, 그리고 사후세계에 대한 개념을 살피고, 성서속에 이 주제와 관련된 부분들을 주석하며, 결국 구약성서의 영생신앙이 귀결되어지는 "쉐올"에 대해 고찰하려고 한다.

몸 글

1. 구약성서의 삶과 죽음 이해

(1) 구약성서의 삶

구약성서에서는 사람존재를 몸(basar)과 영(ruah)의 합성물로 본다. 살아있는 유기체는 basar라고 불리운다. 생명의 자발성은 ruah인데 이는 죽으면 '돌아간다'고 말해진다(창 25:8; 욥 3:11). 다시 말해서 '생명'은 한 존재의 구체적인 실존이다.

구약성서의 인간창조의 기록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는 말씀이 기록되어있다. 인간 생명은 하나님께서 직접적인 방법으로 부여하신 '생기'로부터 유래되었다. '생기'(????, 네솨마)는 영혼(잠 20:27), 호흡(사 2:22), 기운(욥 33:4) 등으로도 번역되며 일반적으로는 인간의 '혼'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사람은 '생령'(??? ???, 네페쉬 하야)이 되었다. 이는 '살아있는 존재'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이원론적인 오해가 생길수 있다. 생령이라는 단어는 오역된 것이며 공동번역과 같이 "살아있는 생명체"의 번역이 좋다. 한가지 주지할 사실은 구약성서에서의 인간이해는 통전적인 이해이다. 즉, 헬라식의 이분법적인 사고가 아닌 인간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구약성서에서 생명(삶)은 은사, 실로 최상의 은사이다. 장수, 충만한 삶, 후손에 이어지는 생명은 하나님이 주실수 있는 최상의 은사이다. 삶은 축복과 동의어이다. 삶은 생명을 누리는 기쁨이며, 이 기쁨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구하는 자들에게 생명이 약속되었다(암 5:4). 그래서 빵과 다른 음식물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도 삶의 양식으로 이해되기까지 했다. 이런 생각 배후에는 하나님 자신이 오로지 살아있는 자라는 표상이 깔려있다(하나님은 생명의 원천이다). 이런 생각에서 비교적 후기의 문서 "당신의 은혜는 생명보다 더 낫다"(시 63:4)에서 보듯이 은총이 생명을 압도하기 시작탖다. 지금까지는 은총과 생명은 함께 속한 것이었다. 은총은 곧 생명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제는 은총과 생명이 분리되었다. 하나님이 생명의 원천이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을 지나쳐서는 생명을 소유할수 없었다. 하나님만이 죽음을 주장하실수 있다. 성서의 여러 부분에서 보듯(창 2:7;창6:3;시104:29ff;욥34:14f) 인간의 생명은 산자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헤였다. 인간이 자신의 주인이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맺고 살때 의로운 자였다. 올바른 관계를 맺지 않고 살고 그렇기에 의롭다고 인정받지 못한 자들은 죽을것이라고 했다(그렇기 때문에 생명은 신학적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로 이해되었다).

(2) 구약에 나타난 죽음

구약성경에는 죽음에 대한 다양한 용어들이 나타난다. 창세기 3장 19절에서 이미 "흙으로 돌아간다"는 표현이 나타났다. 인간이 원래 만들어진 소재로 돌아가는 것이다. 인간(adam)은 원래 "땅"(adama)의 "흙"(apar)로 만들어졌다.(창2:7) 이제 그는 "흙으로 돌아간다". 사람은 한평생 생존을 위해 싸우지만, 결국 한줌의 흙이 되고 말 것이다. "땅" 혹은 "흙은 인간의 요람이요, 집이요, 무덤이다"(Jacob).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표현은 성경의 여러곳에서 다시 반향되고 있다(욥 10:9; 43:15; 시 103:14; 전 12:7 등). 시편 90편이 이 점을 가장 감동적으로 표현하였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나이다"(3절) 즉 죽음이란 생기가 끝나고 목숨이 끝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인 혼(nephesh)은 하나님께 돌아간다고 한다(전 12:7). 죽음은 혼이 떠나는 것이다(창 35:18; 왕상 12:21; 마 10:28). 그러나 여기서도 표현의 문제가 대두된다. "영혼이 떠났다"는 식의 헬라적 사고의 가능성이 열리기에 이것은 오히려 "생명이 끝났다"고 이해하는 것이 옳다.

욥기 13장 19절에 따르면, 죽음은 "기운이 끊어지는 것(gawa)"이다. 동일한 표현이 아브라함의 죽음에 나타난다. 아브라함은 "향년이 일백 칠십 오세라. 그가 수가 높고 나이 많아 기운이 진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창 25:8). 아브라함은 175세로서 좋은 노년을 보내고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한다. 여기에서 새로운 표현은 "자기 열조에게 돌아갔다"는 것이다. 이것은 "조상에게로 돌아가다"(창 15:15)와 같은 표현이다. 사사기 2:10절에서도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다"고 말한다. 이 표현은 이 세상을 떠나고 장사된 후 앞서간 친구, 조상들과 다시 만난다는 것을 뜻한다. "장수하다가 죽는것"은 아브라함(창 25:8), 기드온(삿 8:32), 다윗(대상 29:28)에게 적용되었다.

여호수아는 임종을 앞두고 "나는 오늘날 온 세상이 가는 길로 간다"(수 23:14)고 말하며, 다윗은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다"(왕상 2:2)고 말한다. 앞에 있는 "온세상이 가는 길"과 "온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이 같은 의미인 것을 알수 있다.

죽음에 대한 가장 멋있는 표현은 아무래도 전도서 12장에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서는 죽음을 "사람이 자기 영원한 집으로 돌아 가고 조문자들이 거리로 왕래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그는 아름다운 언어로 죽음을 노래한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이것들 외에도 구약에서 언급하는 죽음의 표현은 "잠을 자는것"(시13:3) 이라는 표현도 있다. 결국 구약에서의 죽음은 다양한 용어로 표현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어찌되었든 구약에 따르면, 인간 존재는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후에도 인간은 쉐올이라고 불리우는 죽음의 영역속에서 계속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죠지 엘돈 래드(George Eldon Ladd)는 쉐올에 대하여 죽음이 인간존재의 종국이 아님을 보여주는 구약적 표현방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2. 구약 성서에 나타나는 영생에 대한(사후에 대한) 언급

이제 우리는 구약 성서에 산재해 있고, 죽음이후에 대해 힌트를 주고 있는 언급들을 몇가지 살펴보자.

(1) 에녹 (창 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는 본문의 말씀중에 "데려가시므로"의 원어 '라카흐'(???)는 '취하다','받아들이다','택하다'는 뜻이다. 이는 엘리야의 승천을 가리킬 때도 사용된 말이다.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는 말은 직역하면 '그리고서 그가 없어졌다'는 뜻인데 이'없어졌다'의 기본 어근은 '아웬'(???)으로 '헛됨', '무'라는 뜻이기는 하나(사 58:9; 슥 10:2) 여기서는 '에녹이 죽었다'는 뜻이 아니라 다만 에녹이 이 세상에서 '사라져'(공동번역) 그 흔적을 쁹아볼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일뿐이다.

(2) 욥 (욥 19:25-26)

"내가 알기에 나의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는 본문은 욥이 앞서서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욥 14:14)라고 물은 물음에 대한 강력한 긍정이다. '육체밖에서(안에서, 없이) 하나님을 보리라'는 말씀은 욥이 죽은 후 하나님께서 부활시키실때, 부활하여 새로운 몸의 상태에서 하나님을 뵈올 것이라고 해석할수 있다. 이 해석이 클레멘트, 오리겐과 같은 초기 기독교 교부들에서 시작하여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3) 사울 (삼상 28:13)

"내가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본문은 사무엘의 영혼과 만나 보려고 했던 사울에게 접신한 무녀(巫女)가 고백했던 말씀이다. 여기의 '신'(??????,엘로힘)은 형태상 복수이나 단수로 이해해야 할것이다. 즉 그 무녀는 자기가 본 어떤 형상에 대한 자신의 두려움을 반영하기 위하여 한 혼의 형상만을 보았으면서도, 그것을 복수 곧 '장엄의 복수'로 표현한 것이다. 이 '신'은 항상 어떤 '신'(god) 자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즉 이 말은 '신적인 존재' 곧 '영'(靈)을 의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어떤 '영적인 존재' 곧 '유령'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접신녀가 불러냈다는 사무엘의 영혼이 과연 어떤존재인가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어떤학자(Keil, Lange, Klein, Payne)들은 실제로 사무엘의 영혼이 접신녀에 의해서 불러내졌다고 말한다. 또 다른 학자(Hertzberg, Pulpit)들은 이를 완전히 거짓이라고 말한다.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는 사울의 요청으로 접신녀가 불러 올린 사무엘에 대한 해석은 매우 어려운 난제 중 하나님에 틀림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접신녀와 초혼술(招魂術)의 정체를 이해해야 한다. 먼저 초혼술을 행사하는 접신자는 우선 강신(降神)이라고 하는 특수한 심령적 경험을 통과한 사람으로서, 죽은자의 혼을 불러 일으켜 현실의 인간과 의사 소통을 할수 있도록 하는 매개체의 역활을 하게 된다. 이것이 소위 초혼술이라고 불리우는 일종의 이교적 사술(邪術) 형태이다. 그러나 성경적 근거는 이러한 사술이 악령의 역사이며, 사단의 속임수임을 말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사람이 죽게되면 그 혼은 즉시 지상의 세계와 차원이 다른 처소로 옮겨지고 지상의 세계와 교통하지 못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눅 16:19-31; 23:43; 고후 5:1). 따라서 초혼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결코 죽은 자의 혼이라 불리울수 없고, 다만 죽은자의 혼을 가장한 사단의 역사에 불과하다. 결국 '땅에서 올라온 그 신'은 루터나 칼빈이 지적한대로 사무엘의 형체를 입고 나타난 사단적 유령으로 보아야 한다.

(3) 시편 (시 16:10)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라" 그는 불사를 믿고 있었다. '영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페쉬'(???)는 '생명', '자신'의 의미도 지니고 있다. 본 시는 죽음의 위기로부터 자신의 생명을 구출해 달라는 간구의 시이므로 우리는 이 용어를 '생명'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쉐올'에 대해서 살피면 구약시대의 사후개념은 신약시대와 같이 분명하지 않았다. 구약시대의 성도들은 사후에 의인과 악인이 구분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그것을 확실하게 신학적으로 정립하지는 못했다. 다만 인생이 쉐올에 음부에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하였으며, 이 쉐올은 일종의 '지하세계'(underworld)로 인식되었다. 이곳에 들어간 사자(死者)들은 무의식 상태에 있게 되며, 따라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도 없게 된다고 생각했다.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는 말씀은 다윗이 다만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난 그의 경험을 기록했을 뿐이라는 주장과, 정말로 다윗이 자신의 부활을 소망하였기에 노래하였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여기에서 어떤 견해를 취할것인가 하는 문제는 과연 구약에도 부활에 대한 사상이 존재했는가 하는 사실에 달려있다. 어렴풋이나마 욥 14:14 (위의 (2) 참조) 에서 부활사상이 발견되지만 이 부활사상이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뚜렷하게 정립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영감있던 다윗은 부활에 대한 사상이 있었기에 이런 표현을 하였을 것이다.

(4) 다윗 (삼하 12:23)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수 있느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본문은 다윗과 밧세바의 간음으로 생긴 아기가 하나님의 징벌로써 죽게 되었을때 한 다윗의 고백이다. '시방은 죽었으니'라는 표현은 다윗의 죽음에 대한 이해를 말해준다. 즉 한번 떠난 인간의 생명은 돌이킬 수 없으며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다윗은 죽은 아이에 대해 계속적으로 미련을 가지는 대신 하나님의 최종적 결정에 스스로를 복종시켰다. 결국 다윗은 생명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시 36:9; 42:8)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라는 표현도 자신의 아이가 죽은 자들의 거처인 쉐올에 들어갔으므로 이제 다윗 자신은 생전에 아이를 만날수 없고 자신의 사후에나 만날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을 피력한 말이다(Lange, Rust, Keil, Clericus). 즉, 구약시대 당시 히브리인들은 자신들이 죽어서 곧장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세계인 스올로 내려가 거주하게 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4) 솔로몬 (전 12:7)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솔로몬은 인간의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지만 사람의 영혼은 위로 올라간다는 것이다. 에녹은 죽음을 맛보지 않고 직접 영원한 상태로 들어갔다. 족장 욥은 나무가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관찰하면서 사람이 죽는다 하여도 다시 새생명으로 움트리라는 소망을 가졌다(욥 14:7,14). 이러한 사상을 잘 알고 있던 솔로몬은 인간이 동물과 동일하게 죽을지라도 영혼이 하나님앞에 나아간다는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5) 이사야 (사 26:19)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자를 내어 놓으리로다"

본문을 구약성서중에서 부활에 대한 교리를 가르쳐주는 몇 안되는 구절중의 하나이다(25:8; 단12:2; 겔 37:1-14; 호 6:2). 자세한 언급은 본 연구범위에서는 벗어나기에 간단히 살펴본다. 성도의 부활은 하나님 구속 역사의 최종적인 완성이다. 성서기자는 하나님의 구속역사에 있어서 괄목할 만한 분기점을 이루는 심판의 모습을 언급하면서 종국에 있을 성도의 부활을 예언하고 있다. 부활은 세상 질서가운데 가장 극단적이며 최종적인 질서 중의 하나인 사망을 깨뜨리고 완전한 생명으로 탄생하는 것이다. 긍극적인 승리이다. 결국 저자는 이런 사실을 언급함으로 백성들의 궁극적인 안전함을 설명하고 있다.

3. 구약의 영생신앙인 사후세계 : 쉐올(She'ol)

이상과 같은 우리들의 연구는 필연적으로 구약성서에서 사후 세계에 대한 표현으로 사용하고 있는 "쉐올"에게로 이른다. 흠정역(KJV)은 히브리 단어인 쉐올을 grave(무덤:31회), hell(지옥:31회), pit(구덩이:3회)로 다양하게 번역했다. ASV나 RSV에서는 번역하지 않은채 쉐올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쓰고 있다.

고대로부터 인류는 죽음이 실존의 끝, 즉 완전한 무(無)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믿어왔다. 이는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히브리인들은 죽은 후 사자가 가서 거하는 곳이 반드시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곳을 가르켜 '음부'(陰府)라고 일컬었다. 그러면 음부는 어떤곳인가 ?

(1) 언어학적 고찰

음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쉐올'(????)이다. 헬라어로는 이를 '하데스'(????)로 번역하고 있다. '쉐올'의 의미는 대략 다음과 같다. a.묻는곳 : 이는 죽은자가 음부에서 여러가지 질문 및 조사를 받는다는 사상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b.요구하는 곳 : 이는 죽은자의 시신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곳이 곳 음부라는 사상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c.음푹파인곳 : 이는 음부가 지하의 커다란 공동(空洞)이나 움푹파인 장소일 것이라는 추측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2) 음부의 개념

구약시대 히브리인의 음부 개념은 다분히 고대 근동인들의 개념과 엇비슷하였다. 즉 그들은 의인과 악인 간에 약간의 구별이 있긴 하지만 두 종류의 사람이 함께 기거하는 어두침침한 지하 세계가 곧 음부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곳에 거하는 자들은 일명 '르바임'(Rephaim)이라고 하는 망령(亡靈)들로서 살아 있을때의 인간 형체가 희미하게 남아있는 '그림자적 존재'라고 이해하였다. 아무튼 이러한 기본 개념하에 구약 성경에서 묘사하는 쉐올의 다양한 개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a.의인과 악인, 신자와 불신자가 함께 거하는 장소이다(창37:35;시9:17).

b.어둡고 그늘진 장소이다(욥10:21,22;시143:3).

c.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장소이다(욥10:21).

d.침묵의 장소이다(시94:17;115:17).

e.하나님을 찬양할수도 없는 장소이다(시6:5;88:10-12)

f. 아무것도 알수 없는 세계이며 일도, 계획도 없는 장소이다(욥14:21;전9:5-10).

한편 이상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인들은 다른 고대 이방 민족과는 달리 나름대로의 독특한 음부개념을 지니고 있었다. 즉 그들은 음부가 결코 멸절(滅絶)의 상태가 아니라 계속되는 실존의 장소로서 하나님의 힘과 용기가 여전히 미치는 곳으로 이해하였던 것이다(시139:8;욥26:6).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당신 백성을 음부에서 구해 내실날이 있을 것으로 믿었다. 시편기자와 욥의 간구는 바로 이런 소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3) 스올의 위치

성경에서 '문이 달린 도시'(욥38:17;사38:10) 또는 '모든 생물들이 필연적으로 들어갈 집'(욥30:23)으로 묘사되고 있는 음부는 대개 땅 아래, 즉 지하세계의 어느 지점에 위치한 것으로 이해되었다(민16:30). 그러나 대양(大洋)아래, 즉 지하의 굴 속에 위치하고 있다는 견해도 있다.

이상과 같이 구약시대 히브리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모두들 쉐올에 간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사후 개념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꼐서 가르쳐 주고 계시는 내세관과는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의인은 죽은뒤 낙원, 즉 천국으로(눅 23:43). 악인은 지옥으로 간다고 증거하고 계시기 때문이다(마 5:22,29; 막 9:43).

그러면 성경에서 언급하는 쉐올을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것인가 ? 앞서 언급했듯이 '쉐올'이라는 단어는 성경상에서 여러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주목하자. 즉, 성경에서는 이 쉐올이 a.사후세계(지옥, 삼하 22:6; 욥 11:8; 시 9:17). b.인간의 무덤(시 16:10; 사 5:14; 겔 31:15; 암 9:2). c.구덩이(민 16:30,33) 등을 각각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쉐올을 무조건하고 죽은자가 가는 사후세계만의 의미로 한정시켜 이해할수는 없다. 대신 쉐올이란 인간의 죽음과 그 상태를 표현하는 단어로 이해되어져야만 알것이다. 즉 죽음은 침묵의 세계요 어두움의 세계이다. 따라서 성경은 이런 죽음의 상태를 가르켜 쉐올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하였다.

(4) 쉐올신앙의 형성

가장 오래된 증언에 의하면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과 맺는 교제 안에서 죽음이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죽음은 하나님과의 교제안에서 오래 산 삶의 자연스럽고도 취소할 수 없는 종말로 간주되었다. 젊을때의 죽음과 타지에서의 죽음은 형벌로 간주되었으나, 노년기의 '자연적인 죽음'은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았다. 그리고 죽은 이후의 운명에 대해서는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은듯 하다. 그래서 죽음은 '모든 세상길의 덧없음', '자기 선조들 옆에 누워 휴식함', '곡식이 영글어 타작 마당에 이름'(욥 5:26)과 같이 성숙한 상태로 들어가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다가 점차 죽음을 불행한 것으로 여기는 단계가 나타났다. 죽음은 비통한것, 허무한 것으로 음울하게 묘사되었다(시 90:3-12; 전 9:1-6). 후기에 이르러 이스라엘 주변세계로부터 '쉐올'(지하세계)의 표상이 이스라엘안으로 스며들었다. 인간은 죽은후 지하세계인 쉐올로 내려가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이 무상한 실존을 영위한다. 여기는 망각의 땅이며(시 88:6), 지상의 비통한 삶보다도 더 가련한 것이고(전 9:3-6), 사람의 운명은 짐승의 운명과 다를바 없다. 모두 다 티끌에서 왔다가 티끌로 돌아간다(전 3:18-21).

이런 생각은 헬라적 '영혼불멸'의 관념과는 대립된다. 전 인간이 완전한 단절을 겪기 때문이다. 구약성서의 쉐올표상은 메소포타미아의 지하세계의 신화의 영향을 입었다.

지혜문학에서는 쉐올표상이 헬라적 영혼표상과 결합되었다. 그래서 죽고 난 뒤에도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의 영광속에서 계속 살고 있다는 확신이 표현되고 있다(지혜 3:1-9). 그러나 전적으로 헬라적 영향만은 아니다. 시간이 흐를수록(특히 포수기 후의 문서들, 즉 시편과 제 2 이사야에서) 죽음에 맞선 희망이 질문되기 시작한다. 죽음이 자연스럽다는 것은 점차 문제시 되었고 그리하여 하나님은 목숨을 지하에 버려두지 않으며 하나님을 사모하는 몸을 썩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확신(시 16:9-11)과 하나님은 인간을 영광안으로 받아들여 그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확신(시 73:23-26)이 생겨났다. 결국 구약성서의 영생에 대한 희망은 영혼불멸의 표상이 아니라 야훼의 생명력에 대한 신앙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이제 이스라엘에게는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을 죽은자들의 부활로써 설명하기 시작한다.

마침글

구약성서의 죽음이해는 매우 다양하고 때로는 모순되기도 하며, 일관된 죽음이해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성서 안에서의 영생신앙은 한마디로 "쉐올"신앙으로 귀결된다. 물론 구약성서 자체가 가지고 있는 엄청난 시간과 공간, 그리고 역사와 문화는 우리의 이 연구를 쉽지 않게 한다. 그러나 구약성서가 오랜 시간동안 기록되어져 왔고, 그 시간동안 신학의 사유화 되어지는 과정이 기록되었으며, 나아가 역사 문화적으로 여러 이방문화들과 교류하고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전제할때, 구약의 사후개념(영생신앙)의 문제도 이런 형성과정을 겪어서 이스라엘의 독특한 "쉐올" 신앙을 형성했다고 볼수 있다. 이 신앙이 묵시문학에서의 부활신앙으로 이어지고, 신약성서를 통해 더 체계화된 영생신앙의 형태로 발전되어져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