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서의 영생 사상

이상훈

Ⅰ. 서론

신약성서에서는 歷史의 종말에 있을 구원과 멸망에 대해서는 자주 언급되어져 있는 반면 개개인의 사후 운명에 대해는 거의 말하지 않고 있다. 예수 역시 하나님 나라의 도래 및 역사의 종말에 대해서는 많은 언급을 했으나 개인의 사후 문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더욱이 복음서에 남아 있는 예수의 말씀은 많은 부분 초기 교회 공동체의 신앙고백 과정을 거쳐 완성된 까닭으로 예수가 생각한 본래의 死後觀이나 永生觀을 찾는 데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

이에 본 소고에서는 신구약 중간기의 상황적 배경을 간략히 소개하고 공관 복음을 중심으로 한 예수의 死生觀과 로마서와 고린도전후서를 중심으로 한 바울의 사생관, 요한복음을 중심으로 한 요한복음 기자의 사생관을 다루었으며, 당시 영지주의과 관련하여 도마복음도 취급해 보았다. 여러가지 제약상 본 소고에서는 신약의 많은 부분을 다루지 못했으며, 예수나 바울, 요한의 사상적 흐름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밝히는데 역점을 두었다.

Ⅱ. 본론

1. 당시의 배경

포로기 이후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믿었던 야훼에 대한 실망은 결국 이 세계가 인과응보적 관계로서만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케 했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이제 더 이상 이 세계에서 펼쳐질 자신들의 희망적 상황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제 이 희망의 기대는 하나님의 주권과 이스라엘의 구속의 도래와 계시를 땅 위의 제한 속에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우주적인 넓이에서 제시해 주는 것이다. 바벨론과 페르시아의 신화는 이것을 표현하기 위한 색채와 표상을 제공하였고 그 후 이원론적 특징은 유대교의 희망 안으로 들어왔다. 그래서 다니엘서 이래 유대인의 종말 기대는 묵시 문학으로 변하고, 새로운 표현 양식과 묘사들이 창안되었다. 이에 속하는 것은 우선 두 시대에 대한 개념, 즉 죄와 저주 아래 날고 퇴폐 하여 무서운 파국으로 향해 돌진하는 이 시대와 의인들이 보게 될 영광과 기쁨 가운데 다가오는 새로운 하나님의 시대라 할 수 있다.

물론 포로기 이전에도 묵시 문학적 표상이 유대 사회에 있었으나 포로기 이후의 것과는 매우 다른 양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포로기 이전에는 많은 예언자들과 선지자들이 이스라엘과 유대를 향해서 종말론적인 표상을 이야기하며 민족의 회개를 촉구하였다. 이 때 나타나는 새 시대

는 현 시대와의 전적인 단절이 아닌 어느 정도 연속선상에 있는 시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포로기 이후 주변 세계의 영향을 받으며 발전한 묵시 사상에서는 이 땅과는 전적으로 단절되고 완전히 새롭게 시작되는 새 시대를 이야기한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가르침이 유대교의 신학 가운데 자리잡게 된다.

구약 시대에는 사실상 인간을 통전적으로 하나로 봤으며, 영혼불멸에 대한 사상은 가지고 있지 않았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의지(Will)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죽음 역시 하나님의 의지 가운데 놓여져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마카비 전쟁을 등을 통해 의로운 자의 죽음이 새로운 문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전쟁을 통해 쓰러져 간 많은 의로운 자들의 문제는 미래에 이들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졌으며, 이에 대한 첫 번째 해결책으로 부활의 개념이 더욱 발전케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이러한 부활에 대한 개념은 묵시문학에서 의로운 자나 일반 사람들 모두가 겪게 될 세계 심판과 관계를 맺는다. 마지막 심판 때 의로운 자와 일반 사람들은 그들이 존재했던 당시의 인격과 동일한 인격을 가지고 다시 무덤에서 나오게 되며, 하나님은 영원한 심판 선언을 하시므로 의로운 자는 영광과 축복이 있는 곳으로, 악인은 지하세계(underworld)로 보내신다. 그러나 살인한 죄인들은 예외적으로 심판의 날에 나타나지 않는다.

한편 이러한 사상은 구약의 히브리인들의 생각과는 많은 차이가 있으며, 바벨론 포로기 때 접한 이란 종교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예수 시대 때 많은 사람들은(특히 당시 경건함에 대해 자존심이 강했던 바리새파 사람들에 의해) 이러한 심판과 부활 사관을 가졌던 것으로 짐작된다.

2. 예수의 死生觀

신약성서 학자인 캐드브리(Henry Cadbury)는 말하기를 "예수와 그의 청중들은 사후문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으며, 그것을 새롭게 정립하거나 어떤 문제제기도 하지 않았다. 예수나 그의 청중들에게 있어 사후 문제는 논쟁거리나 물음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런 까닭으로 사후 미래에 대한 확실한 定義나 범위등을 알려주는 어떤 암시가 예수에게는 없다" 고 했다. 이런 관점에서 캐드브리는 예수와 그 무리들은 당시에 널리 통용된(사두개인들을 제외한) 미래의 부활과 죽은 자의 심판 등 유대적 사상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고 보았다.

존 힉(J. Hick) 역시 이미 죽었던, 그리고 지금은 잠들어 있는(asleep) 의로운 자들이 다시 일어날 것이며 하나님의 왕국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은 B.C.E. 2세기경 묵시 문학에 잘 나타나 있으며, 이러한 부활에 대한 대중적 개념(popular conception)은 기독교에 자연스럽게 유입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 예로 마태 복음 27장 51-53절을 들고 있다. 마태는 예수의 죽음과 함께 '땅이 흔들리며 바위들이 갈라지고 무덤들이 열려 죽은 성인들의 많은 몸이 부활하였고 예수가 부활한 후에 그들은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도시에 들어갔다'고 설명한다. 물론 이것은 마태가 예수 부활을 설명키 위해 쓴 가필로 여겨지나 무덤에서 성인들이 부활한다는 대목은 당시의 부활 사관이 기독교에 유입된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존 힉은 주장한다.

또 다른 한편 존 힉은 B.C.E. 1세기가 되면서 유대 묵시 문학에서 사후 개념들이 매우 현학적으로 바뀌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에녹 1서 62:15,16 에서는 몸의 부활과 함께 부활한 몸은 영광과 빛의 의상(garments)을 지니고 있다고 기록되었으며, 51장 4절에서는 부활한 의로운 자는 천사와 같은 상태가 된다고 하고 있다. 이처럼 영적인 것이 강조되는 부활관 역시 기독교에 자연스럽게 유입되었다는 것이 존 힉의 설명이다. 이러한 예는 사두개인과 대화하는 예수의 말씀 속에 잘 드러나 있다. 예수 역시 죽음에서 부활할 때 "그들은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며 하늘의 천사와 같이 된다"고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쿨만(O. Cullman)은 죽음에 직면하여 예수와 소크라테스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밝히고 있다. 전형적인 헬레니즘 思考라 할 수 있는 영혼의 불멸을 믿었던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제한된 몸과 필연적으로 악한 이 세계로부터의 자유로 定義내린다. 이러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그는 완전한 평화와 안정 가운데 독배를 마신다. 그러나 반면 예수는 소크라테스와는 전혀 다른 문화적 상황에 있다. 그의 죽음은 완전한 것이며(영과 몸이 모두 죽는), 따라서 죽음은 하나님과 반대되는 끔직한 파괴자로 받아들여진다. 성서적으로 볼 때, 예수는 죽음에 직면하여 "심히 고통과 비탄"에 잠겼으며(마가복음 14:33), 가능하면 이러한 고통의 "잔을 옮겨달라"(36절)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예수는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분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히브리서 5:7), 죽는 순간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가복음 15:34)라고 소리치기도 했다. 以上의 성서 구절을 볼 때, 예수는 소크라테스의 영혼불멸과는 다른 히브리적인 죽음관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 쿨만의 주장이다.

한편 벨레이(Lloyd R. Bailey, Sr.)는 쿨만의 주장에 많은 문제점이 있음을 지적한다. 우선 소크라테스의 행동을 다양한 그룹들이 있었던 그리이스 철학의 표준으로 묘사할 수 있는냐고 의문을 던진다. 또한 신약 시대의 유대 사상에서 영혼불멸과 부활이 명백하게 반대되는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의문이 간다고 주장한다. 과연 복음서들은 죽음을 영혼의 파괴로만 보았느냐의 문제와 함께 죽음에 대한 예수의 통찰과 그에 대응하는 예수의 모습들은 구약의 사생관과의 연결선상에(쿨만의 주장대로) 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중간사 때의 사생관과 더 관련이 있다는 측면에서 벨레이는 쿨만의 주장을 반박한다. 죽음에 대한 예수의 태도는 임박한 체포와 처형에 대한 두려움뿐만 아니라 그의 사역중 실현되지 못한 왕국 선언과 연관된다. 더욱이 "몸(body)은 죽여도 영(soul)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말고 오히려 몸과 영을 지옥에서 멸하는 자를 두려워 말라"는 예수의 말은 히브리적인 인생관이라기 보다는 그리스적인 인생관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신약성서, 특히 예수에게 있어서 개인의 사후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을 찾아 보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나 누가복음은 마태나 마가복음서 보다 사후문제에 관한 언급이 많이 들어 있다. 부자와 나자로의 비유는 개인의 사후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부분인 바, 이를 중심으로 사후문제에 대한 예수의 생각(혹은 누가의 생각)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 대한 해석을 시도한 학자들은 우선 비유 본문을 두 가지로 나누는 일부터 시작한다. 먼저 전반부인 19-26절은 부자와 빈자의 처지가 저승에서는 완전히 뒤바뀐다는 이야기이고, 후반부인 27-31절은 살아 생전에 모세와 예언자들의 가르침대로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전반부의 내용은 에집트 문헌에도 있고 예루살렘 탈뭇(하기가 2:77d, 38; 산헤드린 6, 23c, 27)에도 있는데, 본래 이집트에서 발생되어 유대교로 건너가고 예수님과(?) 초대교회를 거쳐 루가에게 이른 것으로 본다.

한편 불트만은 후반부(27-31절)에 있는 내용과 유사한 유대 전설을 소개하며 후반부 역시 원래적 자리는 유대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으나 이러한 내용을 누가 썼느냐에 대한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불트만은 누가 以前에 전반부와 후반부를 통합시켜 누가에게 전수되어졌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도나휴와 크로산은 누가가 편집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단어 분석을 통해서 볼 때도 '부자와 나사로' 비유는 다분히 유대적이라 할 수 있다. 16:22절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품"은 신구약 중간시대에 가난하고 경건한 사람들이 죽어서 가는 곳으로 상징화 되었다. 특히 이스라엘의 세 족장인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이 있는 곳은 경건한 사람들이 가는 곳으로 묘사되고 있다(마카비4서 13:17, 마태복음 8:11). 히브리적 표현인 be-heiko shel abraham("in Abraham's bosom)은 일곱 아들과 그녀의 어머니인 미리암의 순교를 다룬 하가딕에서도(PR 43: 180b) 언급되고 있다. 미리암은 聖戰에서 전사한 자신의 가장 어린 아들에게 그가 아브라함의 품에 잘 있는지 궁금해 한다. 창세기에 대한 미드라쉬 하가돌(ha-gadol)과 아브라함의 언약에 대한 부분이 있는 탈무드에서도(Kid. 72b) "아브라함의 품"이 나타난다.

또한 23절에 있는 '음부'(혹은 지옥)나 누가복음 23:43절에 있는 '낙원'은 사후에 사악한 자와 의로운 자로 가는 곳으로 후기 유대 사상에 나타나고 있는 개념이다. 물론 구약에 있어서 사람이 죽어서 靈이 가는 곳으로 음부와 낙원이 직접적으로 묘사된 곳은 없다(물론 이사야 66:24에서 사악한 자들에 대한 심판이 나와 있으나 이 구절은 이미 묵시 문학적 영향이 들어간 시기에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지옥에 대한 개념은 무엇보다도 묵시 문학적 영향 속에서 발전되어 갔으며, 에녹1서 27:1ff에서 사악한 자들이 심판받어 처벌되는 '저주받은 골짜기'로 묘사되고 있다.

랍비문학에서는 천지가 창조되기 이전에도 천국과 지옥이 존재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으며(Pes. 54a), 랍비 아키바(R. Akiba)는 이사야66:23절에 있는 '매월 첫 날에 여호와를 경배한다'는 대목을 해석하면서 사악한 사람들도 그들의 죄에 대해 처벌을 받은 후에는 천국에 있는 의로운 자들과 같이 할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상의 것을 볼 때, 복음서에 기록된 죽음과 사후에 관한 기록들은(예수가 말했건 혹은 후대 공동체가 말했건 간에) 대체적으로 유대 종교에 편만해 있던 죽음에 관한 개념들과 매우 유사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유대인들은 죽음과 사후 문제를 체계화시키지 못했으며, 랍비문헌에서도 이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있을 뿐이다(때에 따라서는 전혀 다르기도 하며). 이러한 경향은 예수와 그의 공동체에게도 있었으며, 따라서 복음서에 나타난 죽음과 사후에 관한 문제도 어떤 하나로 통일시키기 어려운 난점이 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예수나 그의 공동체는 고대 히브리적인 죽음관 보다는 후기 유대적 死生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바울의 死生觀

바울은 신약의 어떤 사도들보다도 죽음의 문제를 절실히 實感했던 인물이었으며, 이에 따라 그의 서신 전반에 걸쳐 죽음의 문제가 새롭게 부각되고 해석되고 있다. 우선 그는 '죄'라고 부르는 어떤 결정적 요인 때문에 인간 생명 안에 들어온 비정상태로서 죽음을 보고 있다(롬 5:12, 6:23,고전15:22) 바울에게 있어서 죽음은 인간의 죄성에 대한 신적 심판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죽음은 죄의 값이며, 죽음이 쏘는 아픈 가시의 힘은 죄가 지닌 힘 때문인 것으로 해석한다(고전 15:55).

따라서 '죄'가 극복되어야 할 것이듯이 죽음 또한 멸망 받아야 할 원수로서 이해되고 있다(고전15:26). 이제 죽음은 하나님의 창조의 일부분이 아니며, 인간이 행한 범죄에 의하여 이 세계에 들어온 惡의 세력이 된다. 바울에게 있어서 창세기 2-3장은 구약의 해석처럼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관점에서가 아닌 '인간의 죄'라고 하는 관점에서 해석되어지며, 죽음의 문제도 이와 관련시켜 풀이한다.

더욱이 바울은 에덴에서 인간의 불복종으로 인한 하나님의 罰이 단지 인간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며, 모든 피조물 전체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견해를 명백히 하고 있다. 따라서 전 우주는 척박하고 직접적으로 죽음의 세력에 직면해 있으며, 모든 희망과 가능성 너머에는 죽음이 가로놓여져 있어 어떤 형태로든지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바울의 생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러한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는 중요한 사건이 된다. 그는 하나님께서 예수를 일으켜 세웠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을 예수와 함께 생명의 나라로 데려가실 것"(살전4:14)이라는 믿음 속에서 죽음을 극복한다. 여기에서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믿는 자는 그의 부활에도 참여하고 있음을 역설하는데, 이 때 바울은 밀의 종교들과 영지주의에서 생긴 언어로서 이것을 표현하고 있다. 로마서 5:12-21절에서 바울은 의롭다함을 받은 자의 생명(???)의 소유를 증명하기 위해서 영지주의 사상을 이용하고 있으며, 고린도후서 5장 1-10절에서는 다분히 헬라적 용어와 사상을 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不死生的인 생명(???)을 힘입어 영혼이 육체의 죽음 후에 신의 행복한 영역에 이르러 하늘의 빛의 세계에 오른다고 보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전통적 유대교 및 초대 그리스도교적 가르침과 동시에, 마지막 심판 및 옛 세계에 종막을 내리고 구원의 새 세계가 온다는 묵시 문학적 사상을 고수한다. 따라서 영생(생명)의 현재성을 이야기 할 때는 영지주의적(혹은 헬라적) 용어와 사상을 사용하고, 종말론적인 미래적 관점에서 볼 때는 유대 묵시적 사상을 이용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바울의 인간론은 대체적으로 히브리적인 일원론을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상 히브리어에는 '몸'(????)과 꼭 일치되는 말이 없다. 그러나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몸'의 의미가 ????라는 헬라어의 역사에 의해 결정된다고는 할 수 없으며, 히브리어인 basal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바울에게 있어서 '몸'(????)은 全人을 가리키는 말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적대자들에게 부활을 이야기 할 때, 항상 '몸'(????)로서의 부활을 강조하고 있다. '부활章'이라 할 수 있는 고전 15장에서 바울은 단순히 몸은 죽어서 부패하고 영혼만이 불멸한다는 이치가 아닌 신체적인 부활도 있어야 됨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4. 요한의 死生觀

복음서들 가운데 가장 늦게 쓰여진(A.D. 1C 후반 ?) 요한복음은 신체적 죽음 넘어에 언제 일어날지 모를 부활에 대해 論하기 보다는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있는 한 개인의 실존에 대한 문제를 더욱 심도 깊게 다룬다. 신체적인 죽음은 이제 더 이상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며 좀처럼 언급되지 않고 있다. 심지어 신체적으로는 파멸된다해도 이제 더 이상 죽음에 근거를 둔 존재들이 아니다. 예수를 믿든 자는 말 그대로 죽어도 사는 존재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죽음에 직면한 예수의 태도에서도 나타난다. 임박한 죽음에 대한 예수의 태도는 공관복음에서 묘사되었던 것과는 매우 다르다. 소극적으로 두려움에 떠는 예수의 모습이 아니며, 자신의 죽음을 매우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예수는 자신이 다시 목숨을 얻을 것을 알고 자발적으로 목숨을 버리며, 관원들이 자신을 체포하러 왔을 때도 자신의 신분을 스스로 밝히며 적극적으로 행동하였다. 더욱이 예수의 架上七言중 요한복음에 있는 것은 모두 긍정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19장 30절에 있는 "다 이루었다"는 표현은 예수가 죽음을 구원의 표징으로 받아 들이고 적극적으로 이를 수용했음을 시사해 준다.

제3세대 그리스도인들의 증언이 가장 잘 담겨진 요한복음에서는 생물학적인 죽음이 닥치기 前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는 법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신앙의 결단 없이는 영원한 생명에 도달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제 죽음은 신앙인 안에서 극복되어지며, 신앙의 결단을 통한 새 생명에 촛점이 맞추어 진다. 이처럼 구원을 현재화하는 것은 요한복음이 영지주의와 많이 접근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그의 구원은 영지주의와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는 구원의 미래적 요소를 배제시키지 않았으며, 재림과 부활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그것을 현재적으로 이해하는 思考에 포괄시켰다.

5. 도마복음의 영생

도마복음이 영지주의적 책들이 있던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도마복음은 거의 대부분 영지주의적 색채를 지니고 있다. 많은 연구를 통하여 시기적으로 다른 복음서들에 비해 후대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공관복음에는 없는 말씀들이 나올 때마다 도마가 독자적인 전승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배제할 수 없으며, 평행본문이 있을 경우에는 본문 비평을 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는 까닭으로 소홀히 쎁급할 수 없는 책이기도 하다.

한편 도마복음에 나타난 영생관은 다분히 현세적이라 할 수 있다. 51편 말씀에 보면, 제자들이 죽은 자들의 영면과 새 세계 도래의 시기에 관해 대화하는 것이 나와 있다. 이 때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너희가 기다리는 이 휴식은 이미 왔다. 그런데 너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앞 문구는 누가복음에 나오는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뒷문구인 깨달음의 문제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깨달음은 일종의 신비적 체험이 아닌 오직 지식을 통한 이해의 문제라 할 수 있다.

61편 말씀의 첫 부분의 내용은 누가복음 17:34절과 비슷하다:"두 사람이 한 침상에서 쉴 터인데, 하나는 죽을 것이요 하나는 살 것이라"(도마),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으며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다"(누가) 그러나 도마와 누가의 전체적 의미는 판이하게 다르다. 누가는 종말의 때,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당할 운명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반면에 도마는 현재 예수를 받아 들이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현재 어떤 입장에 놓이게 되는가를 밝히고 있다. 예수를 수용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지금 당장 빛과 어두움으로 구분된다.

21편 하반절의 말씀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21편 하반절의 '도적의 급작스러운 침입'은 여러 복음서에도 나와 있는 평행본문이다. 그러나 도마에게 있어서 그 의도는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각 복음서에는 종말이 언제 올지 모르므로 항상 깨어서 준비하라는 것이 要旨인 반면, 도마복음에서는 지금 깨어서 하나님이 임재했음을 깨달으라는 것이 전체 주제라 할 수 있다. 즉 도마복음에 나타난 도적의 침입은 미래적 사건이 아닌 현재적 사건을 이야기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여러가지를 볼 때, 도마 복음에 나타난 영생관은 다분히 현재적이며, 현재적 결단과 지식이 천국과 지옥을 현재적으로 판가름하는 직접적 기준이 된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는 각 개인이 예수께서 하신 은밀한 말씀들의 의미를 깨달을 때 달성되는 현재적 실현인 것이다.

Ⅲ. 결론.

以上의 것을 살펴 볼 때, 대체적으로 예수는 유대 묵시적 사생관을 가졌으며, 바울은 예수의 부활과 관련하여 헬라적 사상과 용법을 이용하며 예수 사건을 전인류적, 우주적 사건으로 이해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요한 복음과 도마 복음은 영지주의적 입장을 더욱 많이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것은 오늘의 현재적 삶이 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떻게 결단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결정되고, 이것은 죽음의 문제에 있어서도 같은 이치로 작용한다. 사실 이들의 사생관은 체계적이지도 조직적이지 못하며, 때로는 상반된 주장을 하기도 한다. 만약 이것에 대한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교리가 필요했다면(사도 바울은 어느 정도 그것이 필요했지만) 이들은 온통 그것에 관심을 쏟고 이를 설명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지금 현세적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심이 있었으며, 사후 문제 역시 현재적 삶 위에서 定礎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