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에 나타난 부활신앙 연구

배 덕 만





. 서론

기독교 신학의 중심은 부활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기에 부활신앙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바로 기독교 본질의 이해의 정도(正道)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또한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와 그 주변 문화에 대한 총체적 이해 속에서 그 이해의 실마리를 찾아 나가야 하는 길고도 지루한 탐구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기에 더욱 중요하고 가치있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본 소고는 이러한 구약의 부활신앙의 신학적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그 역사적 배경과 그 전개과정을 살펴보면서, 그것이 지닌 이스라엘 내의 의미를 추적해 보고자 한다. 그래서 Ⅱ장에선 우선 부활교리의 여러 유형들과 그 의미를 점검해보고, Ⅲ장에선 구약의 부활신앙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여겨지는 주변 종교의 신앙과 그것이 미친 영향의 정도를 추적해 보며, Ⅲ에선 부활신앙과 관련되 구약성서와 외경의 문헌들을 간략히 분석해 보고자 한다.

. 부활의 교리적 제유형

1. 구약의 삶과 죽음

A. 삶에 대한 집착

구약에 나타난 이스라엘 사람들의 특징 중의 하나는 삶에 대한, 특히 이 곳에서의 삶에 대한 집착이다. 그들은 저승에서의 황홀한 삶에 대해 어떠한 꿈도 꾸지 않는다. 그들은 이 세상을 하나님이 손수 지으신 세계로 그리고 사람은 신의 선물로 이해했다. 가장 귀한 선물인 생명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보호 하에서 경건, 성공, 풍요, 행복 그리고 평화를 의미했다.

B. 죽음에 대한 거부

죽음은 삶의 조화를 파괴하는 모든 것과 연관된다. 즉 좌절, 불의, 불임, 전쟁, 질병, 불행 등. 이것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개입을 요구하는 인간의 운명 속으로 파고들 수 있다. 따라서 시편기자들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 간의 교제 속에 있는 삶의 중요성과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할 뿐 아니라, 죽음의 위협적이고 혐오스런 특징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구약적 사고는 보다 덜 극적이며, 군형잡힌 현실주의의 특징을 지닌다. 즉 피조물이 죽는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왜냐하면 피조물은 연약하고 죽을 수 밖에 없으며, 그 안에 어떠한 신적 요소나 불멸의 성질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음이 정당한 것으로 수용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한다. 첫째로 죽음은 길고 풍요로운 삶의 끝에 와야만 한다. 삶이 한창일 때 와서는 안된다. 둘째로 죽은 자는 그 뒤에 자손들을, 적어도 아들 하나는 남겨야만 한다. 세째로 장례식은 특히 시체의 매장은 엄격하게 지켜져야 한다. 따라서 범죄한 자에 대한 신의 처벌은 단축된 생명, 자손의 결핍, 짐승에게 던져진 시체 등을 통해 정교하게 드러났다.

C. 죽은 자들의 세계에 대한 표상

이스라엘도 죽은 자들의 세계에 대한 표상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스올(Sheol)이라 불리운다. 스올의 특징은 이전의 삶과는 아무런 관련도 갖지 않은 존재들이 어떤 목적이나 의사소통도 없이 모여있다는 것이다. 죽은 자들은 "잊혀진 자"로서 살아 있는 자들과는 어떠한 접촉도 불가능하다. 그들의 세계는 돌아올 수 없는 나라이며, 철문과 간수들이 지키는 감옥이다. 또한 그곳에 대한 하나님의 통제권이 인정되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 침울하고 유감스런 지역에 개입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곳은 아직 심판과 처벌의 장소가 되진 않았다.

2. 부활의 개념

A. 부활의 개념

부활의 개념은 세 개의 다른 그러나 서로 연관된 신앙들을 포함하고 있다. 첫 째는 한 개인의 핵심적 자아(혹은 영혼)가 죽음 직후, 혹은 육체가 해체된 후, 죽음의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며, 둘째는 죽은 자의 육체들이 현세의 종말에 가서 마침내 다시 소생되는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는 최후의 심판 후에 어떤 다른 상태에서 심원하고 영원한 존재로, 혹은 이 세계를 이어가는 어떤 세계에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의로운 자들이 집단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B. 개념의 다양성의 원인

이러한 견해의 다양성은 이 교리가 다른 문제들을 풀기 위해 다른 철학들 내에서 전개되어 왔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래서 죽음이 잠으로 간주되는 곳에서는 부활이란 하나의 불가피한 賁어남, 혹은 하나의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결과가 된다. 반면 시간이 직선적이라기 보다는 순환적 과정으로 여겨지는 곳에서는 부활이 현재의 순환이 끝나고 새로운 세계가 존재하게 될 때, 죽은 자들의 자아(영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된다. 또한 이런 교의를 표현하는 부활의 상징도 다양하여, 가장 보편적 이미지인 "잠에서의 賁어남"과 식물 세계의 유비인 "꽃이 다시 핌" 등이 있다.

3. 부활의 유형

A. 질병의 치유로서의 부활

열왕기의 세 본문은 엘리야와 엘리사에 의해 수행된 구제적 개입을 이야기해 준다. 이것들은 기적적 치유만큼 부활의 예증이 된다. 즉 그것들은 예언자적 사역에 권위를 부여하고,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권력을 명백히 한다. 예언자에 의해 이루어진 부활은 병자의 건강회복이다. 그리고 이것은 어린 아이의 몸에 생기를 불어넣어 다시 온전케 한 것으로 특징지어 진다.

B.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으로서의 부활

1)이스라엘의 회복: 호세아6:1-3은 "시로-에브라임 전쟁(735 B.C)"과 동시대에 기록된 문헌이다. 이스라엘은 다메섹에 의해 강제적으로 그 전쟁에 연루되었다. 선지자들의 선언은 그의 동포들이 어떤 좌절들을 맛보았다는 것을 전제하였다. 그리고 이 절들의 주제가 야웨께 돌아가고 싶은 자신들의 바램을 표현했던 일종의 회개의 찬미를 형성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분의 도움을 확신했기 때문이다(1절). 그리고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하나님의 도움을 통해 그 좌절의 제거와 정상으로의 회복을 예견하였다(2절). 또한 3절도 동일한 구조를 띤다. 즉 그것은 야웨께서 그들을 위해 행동하길 지연치 않으리라는 확신에 기초한 찬미였다.

한편 부활의 관념이 이미 8세기에 이스라엘 내에서 입증되었다는 것, 그러나 그후 그것은 질병치유와 정치적 구원과 거의 구별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그 역사에서 이스라엘의 운명과 관계를 맺고 있었으나, 인간의 최종적 상황과는 결코 아무런 관련을 맺지 않았다.

2)유다의 회복: 에스겔37:1-14도 예루살렘의 함락(587 B.C)을 전후로 일어난 비극적 사건 직후, 야웨백성의 회복을 다루고 있다. 상처입고, 거의 죽게된 민족에게 예언자는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의 집"의 재건이라는 하나의 부활을 예언하였다. 에스겔의 메세지는 하나의 환상(1-10절)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일종의 상징적 예언으로 활약하였다.

여기서 에스겔은 그의 형제들에게 유다의 불행에 의한 "희망없음"이 예상할 수 없었던 만큼 놀라운 갱신으로 변화될 것을 약속한다. 이것은 후기 유대교(바리세파)와 기독교 전통이 예견하는 그런 부활의 한 예가 아니다. 오히려 에스겔의 경우는 동시대의 호세아와는 달리, 자신이 목격했던 환상을 묘사하면서 자연주의적 신비주의가 아닌 창세기2:7에서 기원한 전통적인 야웨가르침에 기초하고 있다.

아무튼 587년의 끔직한 사건에 대해 대답하면서, 에스겔은 부활의 관념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야웨 제의에 충분히 일치하는 관점 내에서 그렇게 하였다.

. 구약의 부활과 주변 종교와의 관계

1. 기존 이론들에 대한 비판

비록 이스라엘의 초기 성서에는 분명하게 표현되지 않았지만, 부활에 대한 신앙이 그들 속으로 파고드는데는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고 자주 주장되어 왔다. 왜냐하면 부활신앙이 이스라엘 주변 지역에서 잘 입증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그런 주장들은 다음과 같은 논리에 근거하고 있다. 첫째, 메소포타미아 신들을 흔히 "죽은 자들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는 신"으로 혹은 심지어 지하 세계로부터 그들을 구해내는 것. 둘째, 바빌론의 타무즈와 우가릿의 바알처럼 소위 "죽고 다시 사는 신들"과 관련된 신화와 제의의 광범한 분포이다.

그러나 사실, 그 신들의 칭호는 죽음 직전에 있는 사람의 실질적 소생이 아닌, 생명의 보존을 가르킨다. 또한 타무즈 유형의 신들은 자연의 리듬의 인격화일 뿐이다. 따라서 "죽고 다시 사는 신"이라는 그에 대한 묘사가 일반적인 인간의 부활 교리를 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그런 신들은 마치 죽은 것처럼 슬피 울긴 하지만, 사실 죽었다가 다시 산 것으로 이야기 되는 것이 아니라, 페르세포네처럼 지하세계에 산채 붙잡혔다가 결국은 구출된다..

결국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학에서는 어떤 부활에 대한 실질적 교리에 대한 증거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이집트인들도 단지 육체의 죽음 이후, 죽은 자들이 자유롭게 그 본질적 자아를 획득하고 지복의 상태에 들어간다고 주장한다. 보편적인 태도는 죽은 자들을 "약하고, 무기력한" 것으로 표현하는 명칭들과 그들을 그늘진 존재로 표현하는 것에서 분명해진다.

폭넓게 말한다면, 헬레니즘 시대 이전 이스라엘에서 획득한 개념은 바로 이런 것들이다. 구약에서 묘사된 것처럼 죽은 자들은 침묵 속(시94:17, 115:17)에 거하면서 "연약한"(욥3:17), "기력이 없는"(시88:4) 자들며, 동시에 그들은 결코 돌아올 수 없는 자들이다(시88:11, 잠21:16, 사26:14).

2. 구약의 부활과 주변 종교와의 관계

A. 사지의 절단과 재결합의 표상

육체의 부활에 대한 관념은 사지가 절단되어 죽은 특정한 영웅들이 그 사지가 기적적으로 다시 모여짐으로써 결국 생명을 회복하게 된다는 믿음에서 예시되었다. 이것은 세계 민요 속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관련된 것들은 모든 죽은 자들의 정상적이고 불가피한 운명이라기 보다는 비일상적이고 예외적인 것들이다. 게다가 우가릿의 Mot의 경우나, 이집트 Osiris 신화의 경우에, 그 이야기의 특징은 죽은 자의 진정한 부활보다는 씨뿌림과 추수의 과정을 단지 극화하고 상징화할 뿐이다.

B. 최후의 심판의 표상

비록 이란적 가르침의 유형에서 주로 분명하게 나타나긴 하지만, 최후의 심판적 요소는 사실 부분적으로나마 죽은 자들의 운명인 것으로 오랫동안 믿어져 왔던 공통되고 종말론적인 사건에 대한 투사로 인식되어 왔다. 저승에서의 그러한 심판은 이집트에서 풍부하게 입증되었을 뿐만 아니라, 메소포타미아 신앙 속에서 그에 대한 간헐적인 흔적들을 찾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인들 사이에서도 유사한 관념들이 항상 존재했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순수하게 동방적 원천에서라기 보다는 다른 곳에서 헬레니즘 시대의 유대인들에게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3. 조로아스터교의 부활신앙

조로아스터교의 초기 문헌들에는 육체의 부활이 아닌, 낙원으로 영혼의 승천만이 언급되고 있다. 아베스터의 후대 기록에는 최소한 부활에 대한 하나의 언급이 발견된다. "죽은 자들이 일어날 때, 살아 있고 부패하지 않는 자가 나오고, 생명은 변형될 것이다." 그 살아 있는 자가 구원자인 "샤오쉬얀트(Saoshyant)"이다. 그는 현세의 끝에 나타난다.

우주론을 다룬 논문인 "분다히쉰(Bundahishn)"에는 종말론이 상세히 진술되고 있다. 30장은 사람의 사망시에 발생하는 것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그의 영혼은 머리맡에서 3일 밤을 있은 후 떠나간다. 만약 그가 의인이었다면 향기로운 바람과 살찐 암소 그리고 젊고 아름다운 소녀를 만나서, 낙원으로 가는 친바트(Chinvat)의 다리를 건너게 된다. 반면 그가 악인이라면 그는 더러운 바람과 몹시 마른 암소 그리고 소름끼치는 소녀를 만나 다리에서 지옥으로 던져진다.

아베스타의 단편인 하드호크트 나스크(Hadhokht Nask)에 보면, 3일 밤 후 그 영혼은 다에나(daena)를 만난다. 그의 업적에 따라 그것은 예쁜 소녀나 혹은 못생긴 노파로 나타난다. 다에나가 그의 천상적 짝임에 틀림없다. 그것의 특성은 이 곳에서의 그의 행동에 의존한다. 그 둘이 함께 결합될 때, 사람의 영적 부분은 완성되고 영생에 들어갈 수 있다.

34장은 부활을 다루고 있다. 세번째이자 최후의 구원자인 사오시얀트가 도착할 때, 죽은 자들이 일어난다. 먼저는 원초적 사람인 가레 마레탄(Gaya-matetan), 그 다음엔 최초의 인간의 짝, 마쉬예(Mashye)와 마쉬야네(Mashne), 그리고 끝으로 모든 인류. 그리고 대회합이 개최된다. 죄인들은 처벌되고, 의인들은 낙원의 축복 속으로 들어간다. 녹아 내린 철의 시내가 온 당을 뒤덮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그것을 통과해야만 할 것이다. 악한 자들은 불에 타고(그래서 정화된다.), 의인들은 우유처럼 그것을 겪어 낼 것이다. 결국 모든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고, 창조의 갱신도 이루어질 것이다.

유사한 관념이 34장에서도 나타난다. 여기서는 떠나간 자들이 어떻게 다시 그들의 육체를 받고, 다시 일어나게 되는 가에 대해 질문을 받는다. 첫 번째의 답은 무로 부터 창조하는 것보다 이미 존재하는 것을 다시 모으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이다. 만약 "아후라 마즈다"가 그것들을 창조할 수 있었다면, 그는 또한 흩어진 조각들을 다시 모을 수도 있다. 죽은 자의 육체적 실체를 보관하는 다섯 개의 창고가 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다시 소생할 때, 아후라 마즈다는 이 모든 요소들을 다시 모은 후, 새로운 인간을 창조한다.

이러한 설명은 인도의 리그베다(Rigveda)에 표현된 신앙들과 매우 유사하다. 그리고 분명하게 이런 후대의 설명들은 적어도 두개의 기원과 특성의 결합, 즉 영혼이 다른 세상에서 자신의 짝과 결합하는 관념과 육체적 부활의 관념의 결합을 보여준다.

. 주요 본문에 대한 분석

1. 다니엘 12:1-3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1).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2),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3).

이 본문은 구약성서에서 부활교리를 가장 적극적으로 표현한 곳이다. 또한 본문은 예루살렘과 지금까지 전통들의 헬레니즘화에 대해 반대한 유대인들을 향하여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보여준 태도로 인해 야기된 종말적 환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즉 이 시대의 박해는 심각한 신정론의 문제를 야기시켰다. 이 시기 동안 경건한 자들은 죽고, 배교자들은 번성했다. 따라서 국가적 재앙을 죄의 결과로 설명하는 전통적 신정론이 안티오쿠스의 수족들에 의해 희생된 경건한 자들을 위로할 수 없었다. 따라서 사악한 성원들은 처벌을 피하고, 충성된 자들은 그들의 헌신에 대한 어떠한 보답도 누려보지 못한채 죽었던 박해의 세대는 정당한 댓가를 받기 위해 다시 불려지도록 요구되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악을 행했던 부정의한 자들은 다가오는 구원의 때에 심판을 통해 처지가 뒤바뀔 것이고, 그런 목적을 위해 다시 지상으로 불려질 것이다.

한편 이 본문은 죽은 자를 잠자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고, 그들은 그 잠에서 깨어날 것이며, 결과적으로 다시 살아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부활을 더이상 단지 국가의 회복이 아닌, 개인적 공덕에 대한 개별적 보상으로 인식함으로써, 토라와 예언서에 잠재해 있던 심오한 의미들을 도출해 내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많은(rabbim)"이 그런 뜻을 내포하긴 하지만, 모든 죽은 사람들이 일어나는지의 문제가 분명치 않다. 비록 의로운 자들이 부활하고 또 다른 자들은 영벌에 처해지기 위해 일어나긴 하지만, 이것이 모두를 의미하는지 어떤지의 문제가 여전히 논쟁거리로 남는다.

그리고 끝으로 이 본문에서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느낄 수 있다. "가브리엘"은 이 시대의 끝에 나타나서 의로운 자들을 변호하고, 사악한 자들을 좌절시키며, 죽은 자들을 부활시키는 이란의 "샤오쉬얀트"를 연상케 한다. 또한 믿음 없는 자들을 영벌에 처하는 정죄도 조로아스터교의 가르침에 나타나는 동일한 자들에게 내려진 운명을 반영하고 있는듯 하다.

2. 이사야 26: 19

죽은 자들이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

본문은 "위대한 묵시"로 특징지워지고 매우 복잡하며, 바빌론 유수 이후에 출현한 커다란 단락(24-27장)의 한 부분이다. 따라서 해석도 매우 난해하다. 어떤 이들은 본문이 직접상황과는 관계가 없는 후대의 주석이라고 주장하고(Kaiser와 Lohse. 1977), 다른 학자들은 이것을 5세기에 나타난 묵시로 간주하면서, 그 안에서 7-18절에 분명히 언급된 백성들의 절규에 뒤따른 구원의 신탁을 본다(H. Wildberger).

어떤 이들은 이 짧은 절에서 "이슬"의 암시에 주목하기도 한다. 이것은 가나안적 모티브를 지닌 것으로 호세아 6:1-3에도 나온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페르시아 쇠퇴기에 고난을 당한 이스라엘의 회복문제에 주목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본문이 죽은 자들의 실제적 부활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것은 보편적 부활이 아닌, 야웨의 죽은 자들과만 관계된 것이다. 즉 여기서 언급된 부활은 "위대한 묵시"의 상황에서 일반적인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 약속이 아닌, 고난과 박해의 시대에 야웨를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바친 신실한 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유대 묵시문학에서 발견된 시점에 매우 근접해 있다.

3. 마카비2서 7:1-29

안티오쿠스의 박해 때로 설정된, 일곱 명의 젊은이들과 그들의 어머니의 순교에 대한 이 전설은 기원전 2세기 말에 현재의 형태로 정리되었다. 이 기록은 부활의 관념이 정당한 보답에 대한 신앙과, 특히 순교의 경우에 있어서, 관련되 있음을 보여준다. 일곱 명의 룬은이들은 안티오쿠스 왕에 의해 고문을 당하고 죽는다. 젊은이들은 차례로 자신들의 부활의 신앙을 고백한다. "우주의 왕께서 우리들을 영원히 새로운 생명으로 일으키실 것입니다."(9절).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다시 일으키시리라는 희망으로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당신에게 부활이 없을 것입니다."(14절). 끝으로 그들의 어머니가 그들에게 이야기 한다.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사 너희들에게 생명과 호흡을 다시 주실 것이다."(23절). 이러한 희망의 이유는 바로 그들이 "하나님의 법"을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바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왕이 자신의 오만함에 대한 정당한 댓가를 받을 것이라는 것이 반복해서, 특히 36절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부활이 어떻게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다만 그 어머니가 마지막 아들에게 한 말 속에서 즉 "그를 그의 형제들과 함께 돌려 주시리라"(29절)는 희망을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다른 세상에서 어떤 가족의 생활을 의미하는 듯 하다.

한편 저자는 자신의 부활의 관점을 설명하기 위해, 원래는 망명지로부터 이스라엘의 귀한을 의미했던 제2 이사야로부터 세가지의 이미지를 빌려왔다. 첫볁는 그 젊은 이들이 고통받고 변호된 "야웨의 종"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말을 통해 그들은 왕 앞에선 하나님의 대변자들이고, 이런 직무로 인해 고난을 당한 것이고, 다시 이것으로 인해 하나님에 의해 변호되는 것이다. 둘째로 먼저 그들에게 생명을 주셨던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권능"이 그분께서 자신들을 부활의 때에 새로운 생명을 주시리라는 희망의 근거가 된다. 세째로 그 청년들의 어머니는 자식들의 귀환을 기다리는 "어머니 시온"의 인격화이다.

. 결론

이상에서 구약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부활신앙에 대해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신약과 중간기 문학에 비해 양적으로나 명료성에 있어 그 교리적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보여지지만, 이후의 발전을 위한 중요한 단초들과 그 점진적 발전의 흔적들이 발견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본래 부활신앙이 이스라엘 고유의 자생적 신앙형태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주변 지역의 종교 속에 편재해 있던 개념들과 사상의 파편들을 자연스런 문화의 접촉 속에서 수용하고, 그것을 자신들의 독특한 역사경험과 신앙고백 속에 융합하여 자신들만의 독특한 신앙형태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즉 민족적 수난의 경험으로 측발된 신정론 문제 속에서, 전통적 해석의 한계를 깊이 인식하게 되었고, 그로인해 새로운 신학이 요청되었다. 이것이 부활신앙의 태동을 자극하였다. 그러나 점차 이것은 민족적 회복에 대한 상징적 표현의 차원에서 벗어나 점차 개인의 헌신과 돈독한 신앙의 수호에 대한 정당한 보상의 개념으로 발전하여 오늘의 형태로 정착하게 되었다.

이러한 구약의 부활신앙을 통해 이스라엘은 민족적 위기를 극복해 갔고, 동시에 자신들의 고유한 신앙적 유산을 수호할 수 있었다. 이것은 곧 이스라엘의 정체성 보존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할 수도 있겠다. 물론 이로 인한 이스라엘의 민족적 이기주의와 자폐증적 고립이라는 심각한 부작용도 발생하기 했지만, 그럼에도 이스라엘의 삶과 신앙을 지지해준 중요한 받침대가 되었으며, 그러기에 이스라엘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종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의 부활신앙의 이해가 중요함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