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의 부활신앙

김신일

들어가는 글

신약성서의 부활은 크게 예수의 부활과 일반인들의 부활로 구분지을수 있다. 필자는 이 두가지 구분을 늘 염두에 두고 사복음서에서 시작하여 초대교회의 바울에 이르기까지 이 부활들에 대한 논의를 살피고자 한다. 먼저 사복음서에서는 예수의 부활과 일반인들의 부활의 차이점, 특히 예수부활의 특징들, 그리고 지금고 여전히 논점이 되는 부활에 대한 전승들을 개관한다. 두번째로 초대교회 시대에서는 고린도전서 15장을 중심으로한 바울의 부활이해를 살피고자 한다. 여기에서도 예수의 부활과 일반인의 부활을 구분하여 언급하지만 특별히 죽은자들의 부활에 큰 관심을 가진다. 나아가 논외로 죽은자들의 부활과 부활의 시기에 대하여도 간단히 언급하려 한다.

몸 글

1. 사복음서에서의 부활이해

예수의 죽음은 그의 생애의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죽음에서 좌초하지 않고 죽음을 통과하면서 죽음을 극복하고 다시 부활했기 때문이다. 예수의 부활은 역사적 사건이지만, 역사에서 유비(비슷함)를 쁹을 수 없는 새로운 하나님의 행위였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입증하거나 반증할수 있는 사건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제자들의 환상(D.F.Strauss)이나 십자가의 의미의 연장(R.Bultmann)이 아니라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nova creatio)였다.

여기에서 한가지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것이 있다. 그것은 신약의 관점에서 볼때 예수의 부활은 일반적인 부활의 전형적인 예로 이해되지도 않았으며, 또 그렇게 이해될수도 없다. 즉 예수의 부활은 다른 일반인들의 부활과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다루어 져야 한다. 신약에서 예수의 부활에 사용된 용어는 '아나스타시스'(?????????, resurrection) 인데 이 명사는 다른 죽은자들의 일어남에 대하여는 사용되지 않았다. 이는 영원한 부활을 의미하며 다른 일반인들의 부활에는 다시 '살아남'(rising) 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A. 일반적인 부활

(1) 야이로 딸의 부활 (마 9:18-26: 막 5:21-43: 눅 8:40-56)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때 예수는 '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는 명령과 함께 그녀를 살려내신다. 특별히 누가는 소녀의 '영'이 돌아왔다는 말을 첨가함으로써 이 기적을 몸의 소생이 아닌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다. "영"(??????)은 몸으로부터 떨어졌다가 다시 돌아와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 말은 헬라사상에서 나타나는 "혼"(????)에 해당한다. 그러나 여기 사용된 표현은 구약에서 유래한 것으로서(왕상 17:21) 무슨일이 일어났는지를 가리킬 뿐 아니라 예수의 활동과 엘리야의 활동(사르밧 과부의 아들 살림)이 가지는 유사성을 암시해준다. 그 결과 소녀는 즉시 살아난다.

(2) 나인성 과부 아들의 부활 (눅 7:11-17)

예수가 나인성문 가까이에 이르렀을때 장례행렬을 만난다. 그리고는 가까이 다가가셔서 관에 손을 대시고 "일어나라"고 명하신다. 이? 죽은 사람이 예수의 명령에 "일어나 앉아" 말을 하기시작함으로 살아난것을 증명한다. 불트만(Bultmann)은 이 이야기가 헬라적 유다계 그리스도교회에서 생성되었다고 주장하는데 헬라적 기적 이야기들 속에서 몇가지 이 이야기들의 병행을 쁹는다. 그러나 이런 병행적 이야기들이 있다고 해서 그것들이 이 이야기의 역사성을 입증하거나 반증하거나 하지 않는다. 죽은이를 살려내는 사상은 이미 널리 알려졌던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구약성서에서 그 가까운 병행을 쁹을수 있다. 다만 장례행렬에 대한 서술만이 다를 뿐이다. 그리하여 이 이야기가 팔레스틴의 유다적 교회에 속한것이라고 보는 쉬어만(Schurmann)의 주장이 앞의 불트만의 주장보다는 더 타당하다고 본다.

(3) 나사로의 부활 (요 11:1-44)

죽은지 나흘이나 지난 나사로는 예수의 "이리로 나오라"는 명령을 듣고 붕대에 감긴채 무덤속에서 살아나왔다. 요한복음서에서 이 기록의 의미는 단순하다. 예수는 그의 아버지에 대한 복종과 의존성 안에서 그가 원하는 자에게 생명을 주는 권한을 갖는다. 그의 부활은 마술의 일화도 아니고 혹은 어떤 성인의 탁월한 업적이라고 할수 없었다. 그것은 마지막 날에 일어날 일에 대한 하나의 선취이다. 또한 그것은 신자가 영생을 누리게 됨을 의미한다. 즉, 죽음을 지나서 생명에 이르게 됨을 말한다.

(4) 예수 임종시에 부활한 사람들 (마 27:52)

예수의 임종시에 '지진들이 일어났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났다'는 기록은 유독 마태복음만의 기록이다. 이 본문은 수많은 의혹을 가지고 있지만 죽은자의 부활이 있을것이라는 믿음(마 9:25: 22:23)이 현실화 한것이고 예수 재림때에 있을 모든 성도의 부활을 예증한다. 그러나 쉬바이쪄(Schweizer)를 비롯한 학자들은 이 52절의 원문이 다른 사본들처럼 53절 "예수의 부활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는 이후에 일어났다고 본다. 즉 예수 임종시에 일어난 부활이 아닌, 예수 부활이후에 일어났다고 본다. 이런 수정은 예수께서 부활한 자들중에 첫열매가 되며 그 이전에 다른이들이 부활할 수 없음을 부각시키는 것으로(고전 15:20) 이후 교회의 영향으로 보여진다.

한편 본문의 '부활한 성도들'(?????, 하기오이)는 교회의 한 전설에 따라 구약시대의 위인들(심지어 욥도 여기에 포함되었다고 봄)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사실 우리는 그에 대한 확실한 자료가 없기때문에 단정지을수는 없지만 분명 구약에서 메시야의 부활의 도래를 믿고 기다렸던 자중에 잘 알려진 인물이거나 또는 중간기 시대에 영적인 영웅들로써 활약한 자들이거나 이스라엘 역사상의 순교자들이 아닌가 추측해 보기도 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일반인들의 부활은 생명을 회복하기는 하되 그것은 다시 죽게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단순히 그들의 죽음이 지연된 것뿐이다. 그 외에도 베드로를 통한 유두고의 부활(행 20:10)이나 바울이 행한 도르가(행 9:37)의 부활에서도 마찬가지의 이해가 필요하다. 한편 히브리인들의 관점에서 죽음은 삶의 한 약한 형태였다고 볼수도 있다. 미쉬나에 따르면 시신은 그 죽음에 대하여 삼일 이내에 다시한번 확인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당시 많은 유대인들은 죽은사람의 영혼이 사흘 동안 시신을 떠나지 않고 소생의 기회를 쁹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에서 우리는 유대인의 죽음에 있어서 사람이 죽었을때 그 혼이나 영은 몸을 떠났으나 너무 멀리 가지만 않았다면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측면을 발견한다. 이것이 바울이 유두고에 대하여 "생명이(문자적으로는 혼이) 저에게 있다"(행20:10)고 말한, 혹은 누가가 야이로의 딸에 대한 부활기사에 대하여 "그 영이 돌아왔다"(눅 8:55) 고 말한 이유이다. 예수께서도 그 아이가 "죽은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셨고 나사로에 대하여까지도 "내가 그를 깨우러 가노라"(요 11:11)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은 정말 죽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경우들에 있어서 그 죽은 자들은 생명에로 다시 불리움을 받게 되는데, 이 사실은 시체가 눈을 뜨고 앉는(행 9:40), 혹은 앉아서 말하기 시작하는(눅 7:15) 것에 의해 설명되고 있다. 죽은자를 일으키는 것은 이미 어떤 한계를 넘어선 치유의 연장이다. 회복시킬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의 것이나, 엘리사와 수넴여인의 아들의 경우와 같이(왕하 4:32-37) 그 능력의 대리자가 인간일수도 있다. 실제로 죽은 자를 일으키는 것이 열두 제자들에게 주어진 정규 선교사업의 일부로써 포함되고 있다.(마 10:8) 그러나 결국 그들의 부활은 제한적이고 일시적이다.

B. 예수의 부활

(1) 예수 부활의 특징

반면에 예수의 부활은 아주 다르다. 거기에는 단순한 의식회복이라는 암시는 없다. 그는 그 한계를 넘어 떠나간 영들의 영역(스올)으로 들어갔다. 그는 또다시 죽게 되어있는 그 삶으로 단순히 되돌아온 것(rising)이 아니라 영원히 일어나셨다. 그래서 성서는 이 예수의 부활에만 "Resurrection" 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예수의 부활에 대한 언급은 이미 그가 선포하는 메시지의 핵심부분이었다. 즉, 그가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시고 제 3일만에 살아나야 할것을 비로서 가르치시니"(마 16:21)라는 말씀을 위시해서 예수는 자신이 부활할 것임을 이미 예언하셨다(막 8:31: 눅 9:22). 그 외에도 사복음서에는 14번이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특별히 요 11:25의 말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는 말씀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또한 예수는 부활후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할것이 아니냐"(눅 24:25,26)라고 말함으로 자신의 부활을 친히 증거하고 있다. 이후 예루살렘에 모인 무리에게도 나타나서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38,39) 말씀함으로 자신의 부활이 육체적으로 분명한것임을 증거하고 있다.

(2) 예수의 부활체

예수 부활의 또다른 특징은 그의 부활체에서 쁹는다. 먼저 성서는 예수의 부활체에 대한 물리적 실재성을 확인하고 있다.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영은 나와 같은 살고 뼈가 없느니라"(눅 24:39) 주님은 친히 증거하고 있고 손과 발, 옆구리를 내보이심으로 원래 그의 몸과 같은 몸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것이 예수께서 부활의 순간에 겪은 놀라운 변화를 배제하지는 않는다. 예수는 부활이후 마음대로 나타나셨다가 사라질수도 있었다는 신비한 요소가 그의 출현설화에 등장한다.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서도 사라졌다.(눅 24:31) 또한 "그들중에서 계셨다"(눅 24:36) 는 기록에서 보듯 제자들중에 갑자기 나타난다. 이래서 아마 제자들은 귀신을 보았다고 생각했을것이다.(37절). 같은 사건을 기록한 요한은 예수께서 문이 닫혀 있었는데도 그들 가운데 와서 서계셨다고 한다.(요 20:19)

예수 부활체에 대한 신비한 요소들은 또 있다. 사람들이 종종 예수를 첫눈에 알아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마 28:17 에서 예수를 보고 "어떤 이는 의심하더라"고 기록한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를 동산지기로 오해했다. 그의 음성도 몰라 보았다.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처럼 예수께서 친히 이런 혼란을 조성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활체의 변화가 이렇게 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그러나 제자들중 아무도 "당신은 누구입니까 ?"라고 묻지 않았다. 결국 이후 승천하신 기적과 더불어 이런 신비적이고 기적적인 요인들을 통틀어 보면, 예수이 몸은 살과 뼈를 지니고 있었으나, 이제는 영화롭게 된 조건속에 있었고, 시공의 법칙에 무관하게 활동할수 있었음을 알수 있다. 그렇다고 예수의 인성이 소멸된 것으로 보아서는 않된다. 그의 몸을 바울은 "영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신도들의 부활체의 형태이기도 하다고 하였다.(고전 15:44; 빌 3:20) 여기서 영적이라고 하는 말은 비물질적인 것을 뜻하지 않는다. 바울의 용법에 의하면, 영적이라는 말은 언제나 성령의 통제를 받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영체란 하나님의 영이 원하시는 것을 행할수 있는 몸체를 뜻한다. 영체는 무한히 성령의 조정을 받는 몸이다. 이것이 주님의 불멸하는, 영화로운, 권능에 찬, 몸이며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영체이다.(고전 15:42-50)

(3) 부활전승 개관

복음서들은 예수의 생애에 관한 '순 역사적 보도'가 아니라 '신앙의 견지에서'의 서술이다. 더 엄밀히 말해서 '부활신앙을 가지고 회고하는 관점에서' 서술한 것이다. 복음서들은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를 죽은자들로부터 부활케하셨다는 증거를 증언하면서 끝맺고 있다. 죽은자들로부터의 부활에 대한 메세지, 즉 부활신앙은 명백히 처음부터 복음에 속하는 것이었다. 신약성서 저자들은 부활복음을 각각 자기 고유의 신학으로 소화시키고 있으면서, 예수부활에 관하여 매우 다양하게 증언하고 있다. '예수의 수난전승'을 전함에 있어서 사복음서 기자들은 전체적으로 비교적 일치된 보도를 하는데 반하여, 예수의 '부활보도와 부활증언'에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이야기들을 조화시킬수 없으며, 하나의 통일된 이야기로 만들려면 무리가 따른다.

성서의 부활증언은 두개의 서로 다른 전통의 갈래로 나누어서 볼수 있다. 즉 '부활의 케리그마'(부활선포)가 따로있고 '부활이야기'(부활사화:復活史話)가 따로 있는 것이다. 케리그마에 사용된 전승과 부활 이야기 사이에는 결코 조화시킬수 없는 차이들이 있고 그리하여 이들은 단일전승이 아니라고 본다. 그래서 우리는 비판적 분석 연구에 의해서만 그 기본 성분을 쁹아낼수 있다. 우선 부활이야기는 병행된 두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 '빈무덤 이야기'와 '발현이야기'가 그것이다.

마가는 변질되지 않은 빈무덤 기사(記事)를 그대로 전한다. 그런데 누가는 빈무덤의 발견과 부활하신 주님의 발현을 따로따로 전한다. 마태는 빈무덤의 발견을 발현보도와 연결시킨다. 요한은 발현이 무덤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전한다. 나아가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의 발현만을 보도한다.(고전 15장)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전승을 각기 따로 따로 연구해 보아야 한다.

먼저 빈무덤 설화는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것으로 부활을 소극적으로 증명한다. 이 설화는 주로 예수의 추종자 중 여인들에 의해서 전해진 것이지 제자들에 의해 전해진 것이 아니다. 부활하신 예수가 여인들에게 나타났다는 기사는 없다. 그들에게는 천사만 나타났다. 이에 반해 발현설화는 오직 제자들의 체험이고 여인들의 것은 아니었다. 또 제자들에게는 천사가 나타난 것이 아니라 주(主)가 나타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런가 하면 부활선포의 케리그마에서는 베드로를 맨먼저 손꼽고 있는 반면에 부활이야기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이름들, 부인들의 이름들도 커다란 구실을 하고 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무덤을 비어 있는채로 발견했다는 보도가 부활이야기에는 전해지는데 다른 전승들에는 이 보도가 완전히 누락되어 있다는 점이다. 빈무덤 설화 이외의 전승에는 빈무덤에 관한 말이 없다. 바울도 이는 말하지 않는다. 다른 전승들도 빈무덤 설화로 부활을 증명하려 하지 않았다. 또한 발현전승들은 본래의 발현 장소로서 갈릴리를 가리키고 있는 반면에 무덤이야기들은 예루살렘에서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이렇듯 서로 조화시킬 길이 없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전승들이 한가지 사실에서는 완전히 일치한다. 예수는 당신의 죽음후에 특정의 몇몇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는 사실이다. 즉, 그분은 당신을 살아있는 분으로 몸소 보여 주셨고 그러기에 그분은 죽은자들로부터 부활하신 분으로 선포되고 있다는 것이다.

(4) 부활불신론

18세기 이후 성서에 대한 비판적 연구가 발달됨에 따라 성서 기록을 근거로 형성된 전통적 교리가 도전을 받게 되었는데 부활에 대한 불신이 그중의 하나였다. 성서에 대한 문서설적인 태도와 해석은 성서의 권위를 격하시켰고 따라서, 예수의 부활을 그대로 믿거나 인정치 않고 그속에 담겨져 있는 오해와 잘못된 부분들을 쁹아내려고 노력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시도가 예수의 "빈무덤"에 대한 합리적 해명의 시도였다. 복음서 기록에 따르면 예수의 묘는 빈무덤이 되었다(눅 24:3; 막 16:6). 그러나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반론들이 있다.

첫째로 허위설이다. 이는 예수의 제자들이 로마병정들을 돈으로 매수한 후 예수의 시체를 옮겨놓고 예수 부활을 허위로 퍼뜨렸다는 주장이다. 두번째는 무덤오인설이다. 몇명의 여인들이 향유를 준비하여 예수의 시체에 발라줌으로써 마지막 이별을 하려고 쁹아갔으나, 그들은 매우 흥분했고, 새벽미명에 갔으므로 엉뚱한 무덤에 갔었다는 주장이다. 세번째는 기절설이다. 즉 십자가 위에서 예수는 운명한것이 아닌 기절한 것이었고 무덤속에서 깨어나 일어났다는 추측이다. 또 제자들이 심히 피곤하였기에 예수의 환상을 보고 예수의 부활을 믿게되었다는 환상설도 있고, 신비설이라 하여 부활에 관한 바벨론의 신화를 예수께 적용하여 꾸몄다는 주장도 있다.

이밖에도 렛싱(G.Lessing)은 모든 종교적 진리가 이성의 판단하에 있어야 하는데 예수부활의 논리는 이성이 용인하지 않기에 인정할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부활을 포함하여 기독교의 모든 이적사건은 신화일뿐이라는 슈트라우스(D. Strauss)나 예수부활이 실의에 빠져있던 베드로에 의해 꾸며진 이야기라고 하는 훌쯔만(H. Holtzmann), 그리고 예수는 메시야 의식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자기를 신적 존재라고 생각치도 않았기에 부활도 있을수 없다는 한 봐이스(F. Weiss) 등도 있다.

이러한 부활불신론은 몇가지 결정적인 문제점을 안고있다. 먼저 그들은 우리의 역사적 자료인 성경의 신빙성을 부인한다는 점. 둘째로 그들은 상상력에 의존하여 근거없는 해석을 내린다는 점. 제자들이나 여인들을 거짓말장이로 몰아세우고,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변화된 뒤의 저들의 인격을 무시한다는 점. 넷째로 모든 비판학자들은 이성을 부활사건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점. 등을 들수 있다. 이성은 종교적 사건을 판단하는 유일한 표준이 될수 없다. 왜냐하면 종교적 사건은 합리적 차원과 초합리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종합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결국 저들의 약점은 '성서의 정경성과 표준성을 부인한다는 점'과 '이성이 가장 중요한 표준'이라는 극단의 태도로 볼수있다.


2. 바울의 부활이해 (고전 15장에 나타난 부활을 중심으로)

A. 예수의 부활에 대한 이해

바울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부활과 나타나심에 대한 초대교회의 전승을 전해주고 있다. 고린도서는 A.D. 55년 내지 56년경에 쓰여진 것으로 부활에 대한 그의 중요한 멧세지가 담겨져 있다. 즉, 고전 15:3-8 의 말씀이 그것이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있고 어떤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이 귀절은 신약에서 예수님의 부활후 나타나심에 대한 가장 직설적이고 중요한 기사이다.

바울이 언급하는 예수의 부활에는 두가지 중요한 특성이 나타난다. 첫째는 그 중심이 다분히 성부 하나님에게 있다는 점이다. 예수의 부활에 대한 그의 글에도 항상 하나님이 그를 살리셨다는 것을 전제하고 예수가 '일으키심을 받았다'(was raised)고 기록한다.(고전 15:4; 살전 1:10) 즉, 그는 예수의 부활을 하나님 권능의 행위로 이해하고 있다. 두번째 특성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사람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친밀히 연합되어 있다는 점이다. 고후 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를 비롯하여 롬 8:34 살전 5:10 등의 구절에서 이러한 점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바울은 예수의 부활을 예수가 스스로만을 위해 받은 사건으로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종말적 하나님 관계가 중심이 되고 동시에 인간의 영원한 구원과 멸망이 중심이 되는 사건으로 설교하였다. 그의 부활을 통하여 예수는 종말적인 직위 즉,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의 구세주가 되었다. 이후 하나님은 그가 그의 신실한 자들에게 약속했던 종말에 있을 그의 구원행동을 부활하신 예수께 위임하셨고, 그후 예수는 하나님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님이었던 것같이 그를 믿는 무든 사람들에게 "주님"이 되었다. 부활하신 분은 소위 전권자(全權者) 곧,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받은 대표자이다.

B. 일반인들의 부활에 대한 이해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미래에 관한 견해는 헬라적이다. 즉 마지막 구원은 우리가 죽어 하늘나라에 가서 주와 함께 살때 이루어진다고 본다. 물론 바울도 중간기 상태에서 신자들의 영이 몸을 떠났을때 주와 함께 거함을 믿었으며 따라서 그는 이렇게 희망한다.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게 거하는 그것이라"

여기서 바울은 주와함께 거하는 곳이 어디에서 이루어지는지 말하지 않았으나 분명히 주와 함께 있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죽은자의 신분에 대해서는 "벗은자"로 표현되었는데 이는 죽음으로 인해 삶에서 분리된 존재의 상태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덧입어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일단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요 그후에는 어떤 종류의 생명도 있을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또한 부활은 몸의 부활이 아니라 "영"의 부활이 있을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사후 영의 불멸성은 받아들이지만 몸의 부활에 대해서는 부인하는 헬라의 이원론적 가르침에 직면했을 것이다. 이런 가르침을 반박하면서 바울은 우선 그리스도의 부활과 말세에 믿는 자들의 부활을 불간분리의 것으로 연결짓고 있다.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그리스도인들의 부활도 없으며, 지금까지 그가 전한 모든것이 거짓이 된다. 그리하여 그는 믿는자들에 대한 부활에 대하여 두가지의 것을 주장하게 된다. 즉, 믿는자들에게 임할 부활은 "몸의 부활"이지만 그 몸의 부활은 또한 "변화된 몸의 부활"이라는 것이다.

그는 "죽은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고전 15:35) 는 질문을 예측했다. 여기서 우리는 이전의 부활사상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먼저 부활체는 지상에서의 생존시 몸과 동일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반면에 우리가 땅에서 지니고 있던 몸이 다시 살아나면 완전히 변형된 부활체의 몸을 지니게 될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런 문제에 대한 바울의 첫번째 답은 "장차 임할 부활이 몸의 부활이 될것이다"는 것이다. 이 대답을 입증하기 위해 그는 한 비유를 사용한다. 즉 땅에 묻혀 죽지만, 그 죽음의 현장에서부터 다시 몸이 나오는 씨를 뿌리는 것에 관한 비유가 그것이다.(고전 15:35-38절) 바싹 말라버렸고 죽은것만 같아 보이는 곡식의 씨앗 하나가 땅속에 묻혀 아름다운 초록 색깔의 싹을 돋게 하는것은 참 신기하다. 물론 이 비유는 약간 부적합한듯하다. 왜냐하면 씨앗은 그 안에 자생력이 있는 자연현상이지만 부활은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장차 임할 나라는 자연의 과정에 의해서가 아닌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이 나라의 현재의 양상과 미래의 양상 사이에 대조가 되는 것들을 가르쳐주기 위해, 예수님도 곡식 씨앗에 대한 비유를 사용하셨다.(막 4:26-29) 요약컨대, 결국 한 몸은 땅 속에 묻히고, 다른 몸이 솟아 올라온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바울의 말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몸)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고전 15:38절)이 의미하는 바다.

바울이 제시하는 두번째 답은 "부활체는 현재 우리의 몸과 같이 죽을 몸과는 다를것이다"라는 것이다. 그는 모든 육체가 다 같은 육체가 아니라는 말을 꺼냄으로 이 문제를 풀어나가기 시작한다. 육체중에는 인간의 육체가 있고 짐승의 육체가 있으며, 새의 육체, 물고기의 육체가 있다.(39절) 여기서 바울은 육체(flesh)와 몸(body)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쓰고 있다. 그 후에 바울은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수 없다"(50절)라고 단언한다. 즉, 우리가 현재 이 땅에서 지니고 있는 죽고 썩을 몸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영광스러운 세계를 상속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썩은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을수 없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단지 육체적 몸이 있고 영원한 몸이 있다는 것이다. 부활체는 죽어서 묻힐 당시의 몸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육의 몸(고전 15:44)은 분명히 썩을 것이고 죽을것이다. 그러나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어야"(고전 15:54) 한다. 그렇다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 바울에게 있어서 이 과정이 "그리스도로 옷입는것"(롬 13:14; 갈 3:27)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새사람을 입는것"(엡 4:24)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 새사람은 그리스도이며(엡 2:15; 4:12) 둘볁 아담이다.(고전 15:45-47) 그 부활의 몸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우리의 몸이 회복되고 영광을 받도록 우리와 연합한다.(고전 6:14-15) 부활한다는 것은 "하늘에 속한자의 형상을 입는것"(고전 15:49)이다.

결국 바울은 부활체에 대하여 어느 신약성경 기자 못지않게 상세히 그리고 세밀히 묘사하고는 있다. 그러나 그는 그 몸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즉 어떤 물질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부활의 주요특징만을 언급하는데 만족한다. 현재 우리의 몸은 죽어 썩을것이며 영광스럽지 못하며 약하다. 반면 부활체는 쇠하지 않으며 영광스럽고 능력이 있다.(42-43절) 이런 몸은 지상적이고 역사적인 관점에서는 전혀 생각할수도 없다. 바울이 몸에 대하여 언급한 이 귀절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하는 데서 해방된다"는 귀절과 맥락을 같이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구원은 단순히 혼이나 영만의 구원이 아니라 인간 전체의 구원을 의미한다. 여기서 바울은 구약의 인간관과 일치하고 있다. 바울은 자기의 주장을 다음의 말로 요약한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44절)

3. 그외의 논점들

A. 교부들의 예수부활이해

베드로와 바울 이후 초대교회 교부들의 부활에 대한 이해는 그들이 남긴 신앙고백서를 통해 고찰해 볼수 있다. 먼저 안디옥에서 순교한 이그나티우스(Ignatius)는 자기 개인용으로 신앙고백서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내용은 현재 교회가 사용하는 사도신조의 내용과 비슷하다. 그 중에 예수의 부활에 관해서는 "겉으로가 아니라 실제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가 실제로 삼일후에 죽은자로부터 일어나셨다"고 고백한다. 여기에서 그는 "참으로. 실제로"라는 말로서 예수의 부활을 강조한다.

영지주의로부터 초대교회 정통신앙을 지켜낸 이레니우스(lrenius)도 두개의 개인용 신앙고백서를 가지고 있었는데 두가지 다 이단을 논박하는 글로서 함께 예수의 부활에 대하여 언급한다. "처녀의 몸에서 탄생하고 고난을 당하시고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육체적으로 승천하셨다". 터툴리안(Tertullianus)은 세가지의 신앙고백서에서 모두 예수가 죽었다가 3일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했다고 말한다. 오리겐(Origen)은 비록 나중에 이단으로 정죄받기는 하였지만 신학원리론(De Principiis)의 그리스도론에서 예수의 부활에 대해 언급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탄생하시고 진짜 고난을 당하셨다. 그리고 겉으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공통으로 참으로 죽는 그 죽음을 당했다. 그리고 진짜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그의 부활 후에 그의 제자들과 대화를 나눈 후 위로 올라가셨다." 그는 신플라톤 철학에 심취하였었음에도 예수가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한 것에 대하여 주저하지 않고 믿고 고백하였다. 유세비우스 또한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다.

이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모두 성경의 증언을 따라 예수의 부활사건을 역사적 사건으로 믿고 그 믿음을 신앙고백서들에 담았다. 만일 그들이 조금이라도 이 사실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다면 그 부분을 포함시키지 않을수도 있었다. 그러나 한사람도 이를 의심치 않고 신앙고백서에 포함시켰다. 이런 신앙고백서들이 결집되어 급기야 사도신조가 형성되었고 그 속에는 교회가 함께 받아들여 믿는 예수의 죽음에서의 부활이 포함되었다.

B. 죽은자의 부활

신약성서는 분명하게 모든 죽은자들의 부활을 가르치고 있다. 즉 믿는자와 안 믿는자 모두가 부활하여 자기들의 행적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된다.(요 5:28,29; 행 17:31; 롬 14:10; 고후 5:10; 계 11:18; 20:11-15) 인간은 그 전체로 볼때 영원을 위해 지어졌다. 반면에 심판이란 각자가 그 몸으로(있을때) 행한것에 관계할 것이다.(고후 5:10) 따라서 죽은자의 부활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일수도 있고, 하나님의 진노에 의한 영원한 심판에 이르는 길일수도 있다. 그런데 그의 부활에 의해서 영생이 보증된 것은 그의 신도들의 부활뿐이다.(고전 15:20 이하; 살전 4:14) 성서의 요체는 구원의 복음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없는 자들의 부활에 관해서는 성서에 언급이 별로 없다. 모든 강조점은, 성도들의 부활에 맞추어져 있다.

신약성서에서 부활에 대하여 언급할때 그것은 죽은자의 부활을 말하는 것이지 결코 단순한 육체의 부활을 말하는것이 아니다. 육체의 부활은 클레멘트와 저스틴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나타났다. 그러므로 항상 의미하는 바는 인간 전체이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바울은 단순한 이 육체의 부활을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전 15:50) 는 말씀으로 거부하고 있다.

현재의 많은 개신교 신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죽음은 불멸하는 영혼이 몸으로부터 분리되어 그 자체로서 계속 생존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이해하고 있는 바 죽음의 전체적인 특성은 인간 전체가 죽음에 손상되고 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죽음과 부활사이에는 어떠한 중간적인 상태도 없으며, 부활은 하나의 완전히 새로운 창조이다.

C. 언제 죽은자들이 일어나는가 ?

신약성서의 일반론과 특별히 바울의 사상(고전 15:51,52; 살전 4:16)에 의하면 죽은 성도들의 부활은 주의 재림때에 일어난다. 이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존 성도들 역시 변화를 받게 된다. 모든 시대의 모든 성도들이 하나의 영광스런 성도 공동체를 이룬다. 이들은 공중에서 자기들의 구주를 만나게 된다.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보좌앞에서 먼저 무죄선언을 얻고 하나님 아버지의 왕국에 영접된다음(마 25:31-40), 이들은 불신자들과 타락한 천사들을 심판하는 데 참여하게 될것이다.(마 25:41 이하; 고전 6:2,3) 그러나 성도와 불신자들이 동시에 부활하게 될지 혹자들의 주장대로 성도들이 먼저 부활하게 될지는 확정할수 없다.

영국과 미국의 보수주의자들 간에는 동시부활과 시차 부활에 관한 논란이 있다. 먼저 일부가, 그후에 나머지 전체가 부활한다는 시차부활론 주창자들은 계 20:4 이하를 근거로 들고 나온다. 거기에 보면 적그리스도가 통치하는 동안 신실했던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동안 왕노릇하니 이는 첫째 부활이라"고 했다. 그러나 동시 부활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위의 대목 외에는 신약성서 어디에도 첫째 부활과 둘볁 부활을 구분해서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들고 나온다. 따라서 이들은 첫째부활(계 20:5)이란 그리스도를 믿던 신실한 자들이 죽음과 동시에 중간상태로 즉시 승천하여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화로운 삶을 누리는 사실을 가리킨다고 본다.(참고 빌 1:23; 히 12:22)

나오는 글

이상에서 우리는 신약성서에 나타난 부활신앙에 대하여 간단하게 고찰하였다. 사복음서에 나타난 일반인들의 부활은 제한적이며 조건적인 부활(rising)이다. 즉 다시 죽게 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이에 비하여 예수의 부활(resurrection)은 영원하며 완전한 부활이였다. 이는 그의 부활체가 육신을 입기는 하였지만 영화롭게 된 조건속에 있었고, 시공의 법칙에도 무관하게 활동적이었다는, 나아가 승천하였다는 기적속에서 알수있다. 예수의 부활에 대한 전승들은 빈무덤 설화나 발현설화 모두에서 보듯 서로 조화시킬수 없는 차이들은 있지만 한가지 사실 - 예수는 당신의 죽음후에 특정의 몇몇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는 사실 - 에서는 완전히 일치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의 권능의 행위로 이해되었다는 점, 그리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사람들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친밀히 연관되어져 있다는 특징이 있다. 한편 바울에게 있어서 일반인들의 부활은 두가지로 정리할수 있는데 먼저는 장차 임할 부활이 몸의 부활이 될 것이라는 점과 동시에 그 부활체는 현재의 우리 몸과는 다른 차원의 영광스러운 몸이 될것임을 말하고 있다.

신약성경은 모든 사람들이 부활할것임은 부인하고 있지 않지만 그 관심이 명백히 성도들에게 ?추어져 있으며, 그 부활이 신자와 불신자와의 두번에 걸쳐 일어날지 아니면 동시에 일어날지는 아직도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