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불멸이냐 죽은 자의 부활이냐?

이상훈

Ⅰ. 서론

한 사람의 죽음은 흔히 그 가족이나 친지들에게 깊은 충격을 주기도 하고, 더러는 한 사회가 지니고 있는 일상적인 안정을 흔들어 놓기도 한다. 죽음이 이처럼 보편적인 것이요, 절박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죽음에 관하여 많은 것을 모른다. 인간은 일회적인 자신의 삶과 더불어 자신의 죽음을 체계적인 탐구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 반복이 불가능하며 밖으로부터의 관찰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은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때때로 경험한다. 그러나 이 때 경험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죽음의 外的인 현상일 뿐이며, 그것도 밖으로부터 이루어진 간접적인 경험일 뿐이다. 이같은 외적이며 간접적인 경험은 확실성과 논리의 필연성을 요구하는 현대인에게 설명불가능한 문제로 남게 된다. 엄밀하게 보아 우리가 직접, 그리고 안으로부터 겪게 되는 확실한 죽음은 자신의 죽음뿐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자신이 스스로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에피쿠로스(Epikuros)가 말한대로 인간은 살아 있거나 죽어 있거나, 둘 중의 어느 한 상태에 있다. 그런데 살아 있는 동안은 아직 죽음이 경험되지 않고, 죽어 있는 상태에서는 더 이상 우리의 의식이 살아 활동할 수 없다. 즉 인간의 모든 관계는 죽음과 더불어 단절되는 것이다. 에피쿠로스가 인간은 죽음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말한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에피쿠르스에게 있어서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표상된다.

그러나 신학자나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죽음을 알 수 없는 어떤 것이라는 단순한 정의에 만족해하지 않는다. 더욱이 현대에 이르러 죽음의 문제는 더욱 새롭게 부각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2차 세계 대전을 통해 현대인은 인간 이성에 대한 회의와 함께 죽음으로 인한 관계 단절을 맛보아야 했다. 이제 죽음은 저 멀리에 있는 그 무엇이 아닌 우리의 삶과 항상 공존하고 있는 "삶의 한 異面"으로 파악된다.

죽음이 없는 삶은 삶으로서의 의미를 상실케 된다. 죽음에 대한 반성과 사유 속에서 삶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게 된다. 삶의 의미와 가치는 죽음이 있는 곳과 죽음의 테두리 속에서 더욱 극명히 드러나는 것이다. 죽음이 있기에 인간의 삶은 그만큼 값진 것이며, 인간들 간의 관계(가족간의 관계, 친구들과의 관계 等) 역시 고귀한 것이 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죽음의 문제를 은폐하거나, 이에 대한 두려움에서 회피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기도 하다. 인간은 죽음을 직시하고 준비하며, 이에 대처해야 된다. 이 세상에 내던져진 순간부터 인간은 죽음에 내던져진 존재로 자리잡게 된다. 이제 죽음에 대한 무지에서 깨어나야 하며, 죽음을 올바로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우리는 죽음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갖가지 망상과 오해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된다.

이제 개신교도 죽음에 대한 이해와 개념 분석을 새롭게 재검토해야 될 시점에 도달한 듯하다.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성서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죽음과 사후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했으며, 여기에서부터 많은 오류가 발생되었다. 죽음과 종말에 대한 문자적 해석은 단순화되고 축소화된 종말이해를 낳게 했으며, 이러한 잘못은 아직도 자행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심지어 20세기가 시작될 무렵에 뮌스터(Münster)의 교리 신학 교수인 바우스(Baus)는 성서의 내용을 근거로 지옥불의 온도를 산출해 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이제 더 이상 현대인에게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하며, 현대적 해석과 이해가 필요하게 되었다.

더욱이 많은 기독교 사상이 헬레니즘적 풍토에서 비롯되고 발전되어 온 까닭으로 기독교 사상의 용어와 개념들이 대부분 헬라주의에 기초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영혼 불멸에 대한 사상이 대표적인 것으로 이것은 히브리나 유대적 관념하고는 거리가 먼 헬라적 사유 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는 특별히 교리적인 면에서 부활의 종교임을 표방하지만, 현대인들이 견지하고 있는 사생관은 부활이라기 보다는 영혼불멸에 더 가까운 개념이다.

이제 죽음에 대한 성서의 문자적 해석을 지양함과 동시에 기독교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부활관에 기초한 죽음관이 새롭게 형성되어져야 할 시기에 왔다. 이런 점에서 본 소고에서는 영혼 불멸이냐 부활이냐 라는 문제를 불러 일으켰던 쿨만의 주장을 중심으로 여러 신학자들의 죽음관을 다루고자 한다. 동시에 이러한 주장들이 과연 얼마만큼의 타당성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검토해 보고 오늘날 우리에게 합당한 죽음관은 무엇인지에 대해 논해보고자 한다.

Ⅱ. 쿨만의 사상

쿨만은 「영혼 불멸과 부활」이라는 그의 책 서문에서 영혼불멸의 개념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신약이 영혼 불멸을 이야기했다는 오해는 성령이 믿는 자의 영혼을 부활의 삶으로 다시 살게 하신다는 현재적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며, 희랍 사상의 영혼불멸 사상과 결합하여 기독교적인 영혼불멸이 가미된 부활 사상으로 변질된 것이라 말한다.

우선 1章에서 쿨만은 죽음에 대한 성서적 견해는 처음부터 희랍적 개념과 많은 차이가 있음을 지적한다. 먼저 희랍은 이원론적 인간론에 근거하고 있음을 밝힌다. 육과 영혼은 근본적으로 다르며 각각 다른 세계에 속해 있기 때문에 육의 붕괴는 영의 붕괴를 의미하지 않게 된다. 죽음은 영혼을 육의 감옥에서 그의 영원한 집에 되돌아가게 해 준다. 죽음은 해방자의 역할을 감당해 내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으로 인해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죽음이야말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우리를 육체라는 감옥에서 해방시켜 주기 때문이다. 죽음은 영혼의 위대한 친구가 된다.

그러나 예수는 죽음을 두려워하였다. 그는 최대의 원수인 죽음에 대한 그의 모든 인간적인 두려움을 갖고 하나님을 의지하고자 하였다. 하나님의 대적이 그의 목전에 다다랐을 때 예수는 그가 아는 전능자에게 "당신은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거두소서"(마가 14:36)라고 부르짖는다. 예수에게 있어서 죽음은 전적으로 버림받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죽는 순간까지 예수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가 15:34)라고 외친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죽음 인식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죽음에 대한 의식은 곧 부활에 대한 의식을 이끌어낸다. 죽은 인간은 오로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하심(곧 부활)으로 생명을 회복케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2章에서 쿨만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죄와 죽음에 대한 개념을 설명하며, 희랍적인 영혼불멸 사상과 기독교적인 부활 사상의 차이를 더욱 극명히 나타낸다. 유대인들은 죽음을 인간의 죄로 인해 발생된 것으로 본다. 때문에 죽음은 하나님과 대적되는 그 무엇으로 표상 된다. 곧 죄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 무엇이라면, 죽음은 죄로 인해 발생된 결과로서 이것 역시 하나님과 대적되는 개념으로 나타난다. 죽음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인간의 죄로 인해 발생된 하나님의 대적자인 것이다. 따라서 죽음의 권세로 간다는 것은 곧 악의 세력으로 내던짐 당한다는 것을 意味한다. 이 때문에 예수는 가능한한 죽음을 회피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악의 세력으로서의 죽음에 대한 인식, 곧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로서의 죽음에 대한 인식은 부활을 요청케 하는 계기가 된다.

한편 희랍 사상에서의 죽음은 저주가 아닌 축복으로 나타난다. 죽음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사건이다. 희랍적 사유에 있어서 육체는 이데아의 세계를 가리는 장애물로 인식되어진다. 이데아는 우리가 빨리 육체의 세계에서 벗어나 영혼의 참다운 세상인 이데아의 세계로 올라오기를 바란다. 때문에 죽음은 저주가 아닌 축복인 것이다.

이어 3章에서 쿨만은 예수의 부활과 현재의 성도와의 관계성을 구원사적 입장에서 서로 연결시킨다. 예수의 부활 사건은 이미 이루어진 사건으로 우리에게 한 표본으로 제시된다. 예수의 부활을 통해 우리는 죽음의 권세가 무너졌음을 깨닫는다. 아직 우리의 부활은 실현되지 않았으나, 이미 그 결과를 알고 있다는 측면에서 부활은 우리에게도 이미 이루어진 사건이 된다.

마지막으로 4章에서는 인간은 죽음과 부활 사이에 어떤 상태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물음이 나와 있다. 이에 대해 쿨만은 바울의 설명을 예로 들며, 우리는 마치 "잠을 자는 것"과 같은 상태로 존재할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수면 상태는 완전 무의식으로서의 상태나 하나님과 관계 단절된 상태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부활을 체험한 상태에서 성령을 가지고 있는 까닭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으로 상징화 된다. 결론적으로 쿨만은 인간이 사후에도 성령이 함게 한다는 측면에서 완전한 죽음으로서의 형태가 아닌 수면 상태로서의 중간 상태를 이야기 한다.

Ⅲ. 존 힉의 思想

존 힉은 예수의 來世觀이 불분명한 까닭으로 기독교적인 사후관 역시 불분명하게 해석되어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따라서 기독교적인 내세관은 성서적 근거보다는 조직 신학적, 철학적 思考를 더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존 힉 역시 성서적 사고 체계에 가장 합당한 죽음관은 영혼불멸 보다는 육체적 부활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존 힉의 부활 개념은 곧 인간의 완전한(육체-심리 합일체로서의) 죽음을 전제로 한다. 즉 살아 있는 육체-심리 합일체는 죽을 때 완전히 소멸되지만, 바로 그 순간에 혹은 다른 어떤 순간에 神이 어떤 개인이 가지고 있던 기억 자취들을 포함하는 완전한 육체적 구조를 갖는 심리적인 물질 복제를 창조하는 것이 곧 부활이라고 존 힉은 말한다.

"…… 이 세상에서 살았던 인간과 부활 세계에서의 그의 복제(replica) 사이에는 완전한 인격 동일성이 지속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양쪽이 모두 기억을 포함하는 육체적, 정신적 특성의 연속 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복제로서의 부활 理論를 증명하기 위해 힉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例를 들고 있다. 첫째로 미국에 살고 있는 스미드(John Smith)라는 사람이 갑자기 사라져서 같은 시간에 복제 인간이 되어 인도에 나타났다고 가정한다. 인도에 나타난 사람은 미국에서 사라진 사람과 육체적 및 정신적인 특성, 감정적인 특성까지 완전히 똑같다. 더 나아가서 복제인간 '존 스미드'는 그 자신이 미국에서 없어진 원래의 존 스미드라고 생각한다. 이 때 우리는 그 복제 인간이 원래의 존 스미드가 아니라고 반박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존 힉은 말한다.

둘째로 이번에는 미국에 있는 스미드가 신비스럽게 없어지지 않고 죽었으며, 그 순간에 모든 기억과 특성을 그대로 소유한 복제 인간 '스미드'가 인도에 나타났다고 가정한다. 그러면 우리는 비록 미국에 있는 스미드의 시체를 보고서도 새로 나타난 '스미드'를 죽었던 존 스미드로 인정해야 한다고 존 힉은 주장한다.

셋째로 존 스미드가 죽었고 '스미드'라는 복제 인간이 인도가 아닌 현세와는 완전히 다른 부활한 인간들만이 사는 '부활된 세계에 부활된 복제 인간'으로 나타났다고 가정한다. 이러한 '부활된 세계에 부활된 복제 인간'의 개념은 하나님의 재창조물(부활체로서)이 어떻게 현세의 인간과 동일성을 가지게 되는가에 대한 문제에 해답을 비쳐 준다고 존 힉은 말한다. 그는 자신의 복제 이론이 부활에 따르는 신비롭고도 난해한 문제점을 최소한도로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그는 죽음 뒤에도 우리가 또 다시 살게 되는 것이라면(영혼불멸이든 부활이든) 왜 하나님은 죽음이라는 운명을 만들었는가라고 묻고 있다. 이에 존 힉은 버나드 쇼(Bernard Show)의 희곡 「메튜세라로 돌아가라」(Back to Methuselah)에 나오는 타락 전 아담의 대사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는다 : "나 자신과 더불어 영원히 산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야. 나는 이제 다른 사람이고 싶다. 이제 이런 나 자신에게는 진저리가 난다." 존 힉은 버나드 쇼의 생각에 전적인 동의을 하며, 죽음은 인간에게 새로운 출발점을 제공해 주고, 또한 생명이 제한되어 있음을 깨달을 때, 생에 대한 깊은 애착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죽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된다고 주장한다. 죽음은 마치 수면과 같이 우리에게 새로운 활력소를 제공해 준다는 것이 존 힉의 설명이다.

Ⅳ. 과정 신학자들의 사상

과정 신학은 화이트헤드의 과정 철학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과정신학자들의 사상을 다루기에 앞서 과정 철학자인 화이트헤드의 사상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선 죽음이나 그 이후의 문제에 대해 화이트헤드가 직접적으로 말한 것은 없으나, 그의 「종교론」에서 데카르트의 이원론적 사고 방식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화이트헤드는 "존재하기 위해서 그 자체 외에 다른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 존재란 결코 없는 것이며, 비록 신일지라도 예외는 아니라고 말한다.

이러한 화이트헤드의 사상에는 "철저한 공존개념"이 밑받침되고 있다. 즉, 화이트헤드는 물질과 떨어진 순수 정신으로서의 영혼 개념을 거부하고 물질과 정신이 공존하는 인간을 받아들인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물질의 각 소립자와 그리고 각 정신은 하나의 '상호 종속적 공동체'를 형성한다. 이러한 생각은 죽음 이후의 영속성의 문제에 있어서도 같은 논리로 적용된다.

화이트헤드는 지금까지의 정통적 교리에서는 죽음을 통해 물질적 과정은 희박하거나 소멸되어지고 정신적 과정만이 지속된다는 측면에서 영혼불멸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비판하며, 자신의 이론에서는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해 주는 어떤 보증도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 인간은 죽음으로서 끝이 나는 존재이고, 죽음 후에는 어떤 지속성도 가질 수 없는 존재인가? 여기에서 화이트헤드는 과거의 사건은 현재의 생성 과정의 모티브를 마련해 주고 스스로를 활성화시켜 주고 있다는 측면에서(즉 현재에도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과거의 현재적 지속성을 주장한다.

이러한 사상 속에는 인간이 죽은 후 어떻게 지속적 삶을 살 수 있는가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답변이 숨겨져 있다. 인간은 죽더라도 그러한 과거는 오늘에도 계속적으로 힘을 발휘하며, 오늘의 현실을 지탱케 해 주는 동시에 앞으로의 방향성도 제시해 준다는 측면에서 '지속성'이 유지된다는 것이 화이트헤드의 생각이다.

이러한 화이트헤드의 사상에 근거하여 하트숀(C. Hartshorne)은 "사회적 불멸관"(Social immortality)을 발전시킨다. 사회적 불멸관에서는 개인이 죽더라도 그것이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입장에서 불멸을 설명한다. 가령 케네디 대통령은 비록 죽었으나, 그는 아직도 많은 미국인들의 가슴에 남아 있으며, 또한 그들의 행동에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는 측면에서 아직도 살아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반면에 박물관에 남아 있는 A.D. 1세기경의 투구를 썼던 로마 병정이 우리에게 주는 영향력은 극히 미비한 것이다. 어느 누구도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따라서 전통적인 사회적 불멸관에는 불멸의 차이가 다양하게 나타나며,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점차 그들의 영향력은 사라져 버리게 된다는 약점이 있다.

때문에 하트숀은 사회적 불멸론을 강화시키기 위해 인간들의 기억이 아닌 神의 기억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그는 모든 사람의 삶이 완전하고 영원하게 기억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삶은 신의 완전하고 오류 없는 기억 속에 이미 입력되었기 때문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삶은 신의 의식 속에 100% 완전하고 정확하게 들어가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불멸성은 오로지 神의 전지성(omniscience)에 의존해 있는 것이다. 하트숀은 우리의 죽음이 마치 어떤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종결점을 찍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 책에 종결점을 찍었다고 그 책이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니다. 죽음 역시 결코 파멸이나 사라짐을 뜻하는 것이 아니며, 어떤 과정 속에 한 부분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하트숀의 입장이다.

한편 멜러트(R. B. Mellert)는 죽음이나 불멸은 어떠한 증거로도 입증될 수 없는 까닭으로 과정 신학파 안에서도 신학자들이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음을 전제하며, "주체적 불멸성"과 "객체적 불멸성"의 가능성을 모두 제시한다. 우선 "개체적 불멸성"은 사회성에 강조점을 둔 것으로 타자 안에서 존재하는 한 영속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즉 개개인들은 신 안에서 영속적으로 불멸화되며, 신 자신의 현실성을 구성하는 자료의 일부가 된다. 이 때 세계는 과거에 의해 영구적으로 풍요로와지며, 신 자신은 개개 인간들의 선으로 인하여 확대(찬양)되어 질 수 있다.

두 번째로 "주체적 불멸성"은 한 개인의 주체적 자아가 계속 존속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이 때 죽음은 자아를 형성하고 있던 여러 과정들(과거 사건들)이 몸을 구성하는 보조적인 물질적 일련체로부터 독립해 나감을 의미한다. 이러한 "주체적 불멸성"을 채택할 때, 죽은 자는 자신의 생애를 평가받을 수 있고, 자신의 삶의 결과가 그 영향을 경험할 수 있으며, 자신이 실현하고자 했던 것들을 제한적으로나마 계속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여기에서 멜러트는 두 가지의 해석이 서로 조화를 이루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각 각 나름대로 철학적 일관성이 있기 때문에 상황에 맞추어 취사선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Ⅴ. 칼 하임의 思想

칼 하임은 1936년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소책자를 통해 부활에 관한 자신의 사상을 발표했다. 여기에서 그는 죽음이 인간에게 엄청난 공포로 다가오고 있으며, 이것은 죽음의 독특한 특성인 '침묵'으로 인해 야기된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무엇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그 무엇에게로 뛰어들지 않으면 안되는 "죽음에로의 존재"인 것이다. 이 때 사람들은 이러한 죽음의 불안에서 탈출하는 수단으로 영혼불멸을 이야기하지만, 이것 역시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칼 하임은 주장한다.

"……영혼 불멸 사상에서는 죽음이 인간의 협소한 육체에서 벗어나는 것일 뿐, 죽는 사람은 아 무 일도 없고, 오히려 보다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고 말한다. 그러나 오늘날 이런 관념을 고집 하려 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현대 생리학과 뇌병리학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어떤 육체 없는 정신을 표상 하기란 점점 불가능하게 되었다. …(중략)… 이것은 정신이 두뇌에 의존하는 바가 크다는 것을 보 여준다."

따라서 우리가 다시 영속적인 지속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영혼불멸이 아닌 하나님의 전적인 힘이 필요한 부활임을 칼 하임은 강조한다. 더욱이 우리의 죽음은 죄로 인해 발생된 것으로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는 우리들을 죽음에서 해방시켜 주셨으며, 또한 부활하심으로써 사망 권세를 물리치셨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우리가 진정한 영속성을 얻기 위해서는 영혼 불멸 개념보다는 부활의 개념을 택하는 것이 더욱 현명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의 전 장래와 우리 주위의 모든 피조물의 장래는 단 하나의 토대, 즉 하나님과 그의 무한한 창조력 위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하고자 하시면 우리를 無 가운데로 버리실 수도 있으며, 또한 우리를 불러내어 한 새로운 존재로 만드실 수도 있다. 우리의 장래는 오직 하나님의 창조력에만 달려 있는 것이다.

또한 칼 하임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에서 이미 부활이 우리 가운데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새로운 창조는 하나님이 우리의 양심을 해방시키시고, 우리를 자기의 아들로 용납하시는 순간 이미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으로 칼 하임은 보았다.

Ⅵ. 비 판

우선 쿨만은 영혼 불멸적 죽음관이 희랍 사상에서 파생되었다고 주장하며, 소크라테스의 죽음관을 대표적인 예로 들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희랍 철학 내에는 많은 사상들이 함께 공존해 있었음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더욱이 우리에게 많이 전해진 소크라테스의 사상들은 그의 제자 플라톤에 의해서 많이 과장되고 편향되게 서술되어져 있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될 것이다.

쿨만 역시 결론에서 암시하고 있듯이, 희랍 철학의 에피쿠로스 학파는 영혼 불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죽을 때 영혼 원자는 흩어지고, 더 이상 육체에 모여 결합되지 않는다는 것이 에피쿠로스의 사상이었다. 이것이 에피쿠로스에게는 커다란 위안으로 작용했다. 사후에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만이, 지옥에 대한 공포에서 해방시켜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에피쿠로스에게 큰 위로가 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소크라테스의 사생관을 중심으로 영혼 불멸 사상을 희랍의 대표적인 사상으로 인정하는데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두 번째로 쿨만은 예수가 죽음을 거부했다는 예로 마가 15장 37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을 소개하였다. 그러나 이 문장은 원망의 절규라기 보다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함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카스퍼(W. Kasper)는 주장한다. 당시의 관례에 의해 어느 시편의 첫머리를 인용한다는 것은 그 시편 전부를 인용한다는 의미였으며, 예수가 인용한 시편 22편은 원망보다는 감사하는 내용으로 담겨져 있다고 카스퍼는 주장한다.이러한 카스퍼의 주장은 매우 타당하며, 특히 요한 복음에는 예수가 죽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측면에서 예수가 죽음관이 부정적이지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세 번째로 쿨만은 죽음 속에서도 성령이 작용하시기 때문에 죽음 후 중간 상태가 있음을(완전한 파멸이 아닌) 암시하며, "수면 개념"으로 이를 설명한다. 더욱이 쿨만은 죽은 자들은 생존자들과는 다른 시간 개념이 주어지기 때문에 부활 전까지의 대기 시간이(죽은 자들에게 있어서) 압축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쿨만은 그의 수면 개념 속에서 죽은 자들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관계를 맺으며, 친교를 이루는가에 대해서 제대로 해명을 못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것은 마치 새로운 차원의 영혼 불멸을 연상시킨다.

한편 존 힉은 3가지 예를 들며 자신의 부활 이론을 증명코자 했다. 그러나 심리 철학자인 페네름(T. Penelhum)은 존 힉의 주장을 강하게 비판한다. 그는 첫 번째 설명의 경우, 만약 신체의 사라짐과 발견 사이에 지극히 짧은 시간의 간격이라도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이 상당히 먼 거리를 빛과 같은 속도로 순간 이동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또한 만약 시간의 간격이 전혀 없다해도 인간 신체는 시공간적 연속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새로운 개념을 받아들임으로써 인도의 '존 스미드'를 미국이 존 스미드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두 번째와 세 번째 설명은 타당하지 않다고 말한다.

페네름은 인격적 동일성을 포함하는 부활이 성립되려면 신체 동일성이 필연적으로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존 힉의 두번째 설명은 타당하지 못하다. 두 번째 설명은 영국에 아직 시체가 남아 있기 때문에 신체 지속성은 성립될 수 없으며, 따라서 인격 동일성 역시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이 페네름의 설명이다. 세 번째 설명 역시 우리의 죽음과 동시에 시체가 파괴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세계에서 썩어 가는 시체와 부활의 세계에 나타난 신체를 동일시할 수 없게 된다. 더욱이 페네름은 "만약 자신이 죽은 후, 비록 자신의 의식을 가지고 있거나 자신과는 다른 신체를 가진 인간이 새로이 복제되어 존재할 것이고, 자신의 신체는 소멸할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과연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뉘우치겠는가"라고 묻고 있다. 복제된 인간 역시 자신의 신체와는 다른 어떤 존재가 지은 죄에 대해 책임지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주장하며 존 힉의 부활이론을 반박한다.

한편 사회적 불멸설이나 자연적 죽음 역시 많은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우선 사회적 불멸설에서는 죽은 사람의 사회적 기여도에 따라 그 사람의 불멸 시간이 차이가 생길 수 있으며, 결국 시간이 흐름에 따라 불멸되는 양도 차츰 희박해져서 나중에는 영원히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따라서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불멸설이라 보기 힘들며, 육체적 부활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난점이 있다. 물론 철학적으로는 육체적 부활이 꼭 있어야 될 필요는 없으나 성서적 입장에서(특히 바울의 입장에서) 육체적 부활이 없는 부활은 진정한 의미의 부활이라고 보기 힘들 것이다.

이러한 난점을 피해 하트숀은 하나님의 기억을 통한 부활 이론을 주장하고 있으나, 이 역시 문제가 있다. 우선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은 결국 세상의 악과 인간의 악한 마음과 행위들에 대한 의식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기억이나 의지 속에는 선한 개념과 악한 개념은 거의 같은 비율로(혹은 오히려 악한 개념과 의식이 더 많이 깃들여) 있음을 인정해야 된다는 난점이 있다.

Ⅶ. 결론

쿨만은 영혼불멸보다는 부활이 더욱 기독교적이라고 주장하며 영혼 불멸과 혼합된 부활 사상을 비판하였다. 이러한 비판은 맹목적으로 부활을 믿었던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새로운 이해의 지평을 마련해 주었다. 또한 쿨만의 논문으로 인해 개신교의 죽음관 정립에 대한 요청이 더욱 절실히 요청되었다. 한편 존힉이나 여러 개신교 신학자들은 부활 이론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특히 과정 신학자들은 부활과 불멸에 대한 개념을 사회적인 시각에서 새롭게 해석하고자 했다. 칼 하임 역시 기독교의 죽음관은 부활관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영혼불멸보다는 부활이 더 합리적 개념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들은 대체적으로 사후에도 영속될 수 있는 물질적 혹은 정신적 연속체를 전제로 하고 있다. 영혼 불멸보다는 부활이 기독교에 적합하다고 주장하면서도 영혼 불멸적인 요소들을 상정해 놓고 이를 토대로 부활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독교적인 부활은 전적인 육체-정신적 파멸을 전제로 해야된다. 사후 어떠한 영속체도 가정해서는 안된다.

물론 죽은 사람이 제한된 시간에서나마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고, 어떤 힘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영혼을 에너지와 같은 물질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이 신체 구조에 대한 과학적 지식의 발달로 많은 사람들은 인간의 신체 속에 이러한 물질적인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합리적인 관점에서 죽음은 전적인 파멸이고 완전한 무의 세계로 들어감을 의미한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이해가 전제될 때 부활이 강하게 요청될 수 있다. 칼 하임의 주장대로 우리는 무의 세계로 떨어지며, 하나님의 창조력에 의해서만 새로운 형체로서 다시 태어나게 된다(그러나 칼 하임은 하나님이 계시는 한, 비록 무 안에 떨어진다고는 하나 그것은 전적인 무가 아닌 하나님의 품이라고 함). 인간의 사후 운명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지 안에 놓이게 된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자신을 내맡겨야 된다. 이러한 죽음관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더욱 강화시켜 준다. 또한 현 세상에서의 삶이 단 한 번 뿐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더욱 적극적인 삶을 살 수 있으며, 인간관계 역시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완전한 무로서의 죽음관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요청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 다시 한 번 자신의 삶을 반성케 한다는 측면에서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적합한 사생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