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톨릭 신학의 죽음과 부활

-죽음 속에서의 부활-

배덕만

. 여는

죽음은 한계상황이다. 실존으로서 피할 수 없는 절대절명의 위기의 순간이다. 이 한계상황에 부딪히면서 인간은 동물과 구별된 그들만의 고유한 세계를 발견했고, 그와 관련된 문화를 창출해 왔다. 비록 운명적 위기로 경험된 것에서 출발했지만, 점차 그 현실적 물리적 차원을 넘어서, 그 이면의 또 다른 의미를 밝혀내고 그것을 기초로 현재와 역사를 새롭게 조명하려는 부단한 노력이 전개된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것은 종교의 중심맥을 형성했고, 삶의 방향성을 정립해 주는 새로운 에네르기로 작용하게 되었다.

카톨릭 신학도 그동안 이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진지한 자세로 연구해 왔다. 근래에 이르러서는 새로운 각도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면서 뛰어난 통찰과 혜안을 보여 주고 있다. 죽음을 단지 죄의 결과로 보던 시각을 과감히 떨쳐버리고, 영혼 불멸과 육신의 부활이 미묘하게 혼합되어 있던 사후의 운명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명쾌하게 정리하는가 하면, 한발 더 나아가 부활을 개인의 사건에서 전우주적 역사적 사건으로까지 그 지평을 확대하면서 부활의 의미와 그 범주를 크게 확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개신교신학에도 중요한 도움이요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본 소고에서는 Ⅱ.에서 죽음을 바라보는 카톨릭의 시각을 살펴보고, Ⅲ.에서는 영혼불멸과 육신의 부활에 대한 카톨릭의 의견을, 그리고 Ⅳ.에서는 부활의 시간적 문제를 논하며, 마지막으로 Ⅴ.에서 부활의 다양한 의미와 차원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이로써 죽음과 부활에 대한 카톨릭 신학의 입장을 대략적으로 살펴보고, 이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점검해보는 기회를 삼고자 한다.

. 죽음에 대한 천주교의 이해

A. 라너(Karl Rahner)

라흐너는 인간의 존재 속에 필연으로 내재하는 죽음의 성격과 그 신학적 의미를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설명한다. 그는 무엇보다 죽음을 죄의 결과로 생각한다. 인간이 자연스럽게 자기 생을 종결짓지 못하고 죽음을 맞는다는 사실은 인류 역사의 시초에 생겨난 죄의 결과요, 인간 각자가 원조의 죄를 곧 자신의 죄로 만드는 모든 죄들의 결과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죽음은 죄에 대한 벌일 뿐만 아니라 죄의 극치이며, 이 죽음을 통해 죄가 드러나는 것으로 이해한다.

한편 라흐너는 개인의 종국적 사건으로서의 죽음을 개인의 일상적 삶의 행위 속에 현존하는 현재적 사건으로 재해석하기도 한다. 즉 그는 "인간은 자기 자신의 종결로서 이 죽음을 결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인간의 행동들 속에 현존하고 있다.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 하나 하나에, 그 행위 전부에 죽음이 현존한다. 인간이 자신의 전인격을 자유로이 정위(定位)시키는 행위들 속에 죽음이 현존한다."라고 죽음의 현존성을 규명하려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이런 해석에 기초하여 라흐너는 죽음을 올바로 맞이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즉 죽음이 갖는 그 어두운 속성 때문에, 인간은 그 속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처신을 행치 못하므로 하나님의 불가해한 결정 처분에 자신을 온전히, 또 조건없이 열어 놓고 내어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죽음에 대한 인간의 올바른 태도라고 한다.

이처럼 라흐너는 죽음을 죄의 결과로 이해하면서, 그것을 인간의 일상적 과정 속에 현존하는 실존적 사건으로 재해석해 내고, 그 연장선상에서 죽음에 대한 우리의 올바른 태도까지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B. 그레샤케(Gisbert Greshake)

그레샤케는 죽음을 죄의 결과로 단선적으로 규정하는 종전의 그리스도교 죽음관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 그는 "우리가 죽음이 곧 죄의 결과라는 명제를 분별없이 마구 이어받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이 의도를 보전하기는 해야 할 것이다."라고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이중적으로 표현하면서, 이에 대한 자신의 새로운 해석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죽음은 인간이 생성되어 왔고, 생활하게 되어 있는 진화적 세계구조에 필연적으로 속하여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진화적으로 성취해나가는 세계 속에서 죽음 없는 삶이란 전혀 생각할 수 없다. 진화과정에서 생성되었다가 소멸하는 유한한 자들의 무상함이 바로 새로운 삶과 새로운 삶의 형태의 전제조건이다. 때문에 인간의 죽음이 지상의 삶을 시간적으로 한정한다는 의미를 지니는 한, 죄의 결과일 수는 없다. 다만 인간이 죽음을 체험하는 유형양식은 죄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진화론적 도식으로 죽음을 새롭게 해석하고, 죽음 자체에 대해 부정적 의미를 부여하던 종전의 해석에서 탈피하여, 오히려 죽음이 지닌 실존적 유익성을 부각시키면서 죽음 자체의 긍정적 측면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단지 이런 죽음을 대하는 인간들의 태도 속에서 발견되는 죄의 결과적 양상으로서의 죽음의 부정적 측면을 보고 있다. 이에 대해 그레샤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삶 속에서 자신을 폐쇄시키거나 충분히 개방시키지 않는 사람에게는 죽음이라는 어둠 속에서 하느님을 매우 가까운 분으로 체험하지 못하고 인간으로부터 벗어나 소원하고 비켜나는 '죽은' 하느님으로 체험하게 된다. 이처럼 죄인의 죽음 체험, 즉 우리 모두의 죽음의 체험은 죄에 의하여 철저히 규정되어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죽음은 죄의 결과이다. 죽음은 삶의 무의미하고 어두운 단절로서, 의문투성이이고 위험스럽고 인간을 공포 속으로 휘모는 무시무시한 실제로 체험된다."

. 죽음을 넘어선 희망

인류에게 있어서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러나 인류는 죽음으로 인한 존재의 해체를 그대로 수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를 넘어선 또다른 세계와 그 삶을 희망하게 되었고, 이에 대한 다양한 표상으로 자신들의 종교사를 채색해 왔다. 이것은 대체로 영혼의 불멸과 육신의 부활로 정리될 수 있으며, 카톨릭 신학 내에서도 유사한 경향이 발견되고 있다.

A. 육신의 부활

육신의 부활관념은 인간을 통일체로 인식하는 히브리인들의 사고(思考)에서 기인한 것이다. 즉 이들은 죽음을 견디어 내고 지속하는 불멸의 영혼을 알지 못했기에, 인간을 영과 육의 결합체가 아닌, 오직 하나이며 불가분리적인 존재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죽음을 단지 영혼을 제외한 육체에게만이 아닌, 이 온전한 전인(全人)에게 닥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처럼 그들이 영혼의 불멸을 인정치 않았음으로,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은 오직 하느님의 주권에 의한 그들의 부활에 있었던 것이 당연하다.

이것이 이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그 궁극적인 의미와 힘을 부여받게 된다. 이로써 인간의 무한성의 체험과 동경이 충만케 되는 근거가 확립된 것이다. 그레샤케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확신있게 진술하고 있다:

"희망이 인간을 지향하거나 불멸하는 영혼의 힘을 지향한다는 흔적이 신약성서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희망은 오로지 예수의 부활에 근거하고 있으며, 일깨우시는 하느님의 권능을 향하고 있다."

B. 영혼의 불멸

이것은 플라톤 철학에서 직접적으로 유래한 것으로, 인간의 육신 속에는 불멸하는 어떤 것, 죽음에 의해서도 소멸되지 않는 불멸의 영혼이 있다는 확신으로서 정식화된 것이다. 인간은 이 불멸하는 영혼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신적 생명에 참여하며, 육신이 죽으면 이 불멸의 영혼은 물질의 사슬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신적 생명의 나라로 귀환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히브리적 사고와의 본질적 차이로 인해 그리스도교 내부에서 끊임없이 경계되고 때론 거부되기도 했지만, 선교 현장에서의 현실적 요구와 매력으로 인하여 교회의 태두리 내에서 그 영향력을 계속적으로 행사해 왔다. 심지어 근래에 와서 라징거(J. Ratzinger)는 영혼의 개념을 포기할 수 없음을 제시하면서 동시에 그와 함께 플라톤을 복권시키려 시도하고 있다. 이런 라징거의 주장에 대해 포그리믈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영혼개념이 그리스도교적 희망의 전체적인 성격을 표현하기 때문에, 라징거는 이 개념을 포기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교적 희망은 피조물인 인간이 구원되기를 갈망하고 있다. 라징거에 의하면 이 희망이 의지할 수 있게 되는 하나의 요체가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 요체는 부단한 변화를 이룩하는 지상적 삶의 질료 안에서는 존속할 수 없고, 하나님에 의해 불림받은 정신 안에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라징거는 개별인간의 죽음 속에서 발생하는 부활과 역사의 완성에 대한 생각을 배격한다."

. 죽음 속의 부활

비록 영혼 불멸의 관념이 부활의 관념과 혼재하여 교회 내에서 통용되고 있지만, 대부분의 카톨릭 신학자들은 육신의 부활을 교회의 입장으로 공식화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대전제 하의 세부 사항에 있어선 역시 다양한 이견들이 공존하고 있다. 즉 부활을 개인적 사건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우주적 사건으로 볼 것인가? 부활이 죽음 속에서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것인가, 아니면 인류의 우주적 종말시에 극적으로 발생할 것인가? 등에 대해 서로 다른 전제와 논리를 가진 다양한 주장들이 나름의 세력군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A. 죽음 속의 부활

죽음 시에 '영혼과 육신의 분리, 육신의 소멸과 영혼의 보존 그리고 역사의 종말에 이르러 육신의 부활 및 영 육의 재결합 도식'을 거부하는 일군의 입장은 죽음 속의 부활을 주장한다. 이 입장을 대변하는 그레샤케는 "앞으로는 죽음 속에서 영혼이 육신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느님께로 건너가고 세상종말에 육신이 영혼을 뒤따른다고는 더 이상 말할 필요 없다. 오늘날 모든 신학자는 아니라 하더라도 많은 신학자들과 함께 그리스도인은 죽음 속에서 부활이 이루어짐을 희망한다고 말할 수 있다."고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피력하였다. 그는 계속해서, "죽음 속에서 부활이 일어난다는 견해는 오늘날 대부분의 신학자들에 의해 대변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공식적이라 할 만한 교회문헌들에서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고 하면서, 그 예로 [화란 교리서], [독일의 가톨릭 개신교 공동 교리서] 그리고 그외의 장례예식서 등을 들고 있다.

B. 인류의 종말적 사건으로서의 부활

육신의 부활보다는 영혼불멸을 선호하는 입장 역시 교회 내에서 나름의 확고한 입장을 견지해 왔고, 근래에는 라징거를 중심으로 플라톤 철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며 이런 경향의 확산을 꾀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적 희망의 전체적인 성격을 표현하기 위해선 영혼개념을 포기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오히려 그래샤케의 '죽음 속에서의 부활'은 논리적 모순을 이유로 강하게 배격한다. 오직 역사의 종말적 사건으로서의 부활만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즉 죽은 자들의 부활은 죽음 속에서 동시적 사건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歷史)를 종결하는 하느님의 역사(役事)에 유보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포그리뮬러는 이런 입장들에 대해 "'최후심판의 날', '세계의 종말', '육신부활' 등은 이 진화과정의 완성된 종말을 시사하는 표상이며, 역사과정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달할 수 없으나 선물로 다가오는 목표임을 나타내는 표상이다."라고 그 특징을 묘사한다. 이어서 이를 요약적으로 "죽은 자들의 부활이라는 개념 역시 영혼이 전우주적이 되는 과정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상세하게 표상할 수 없는 이 종말에만 비로소 해당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지적한다.

Ⅴ. 역사 완성으로서의 죽음과 부활

개인의 죽음을 바라 보는 시각이 다양함은 위에서 이미 지적한 바 있다. 그러기에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이론도 다양하고 나름의 자기 정당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죽음을 단지 육신만의 소멸로 간주하고, 부활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하는 일부의 주장과는 달리, 대부분의 카톨릭 신학자들은 전인적 죽음, 즉 단지 육체의 소멸만이 아닌 영혼과 육체의 완전한 죽음을 그리고 부활도 영혼과 육체의 전인적 완성으로 희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여기서 한 발 더나아가 부활의 지평을 단순히 인간의 개별적 완성의 차원에 그치지 않고, 전우주와 인류역사의 완성으로까지 확장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A. 전인적 사건으로서의 죽음과 부활

그래샤케는 복음선포의 핵심적 내용과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의 진실을 규명하면서, 단순한 영혼의 부활이 아닌, 육신을 포함한 전인의 부활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적 복음선포는 영혼만으로서가 아니라 전인적 부활에서 비로소 죽음이 극복되고, 인간은 그의 의의충만에 이른다는 점을 처음부터 고수한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신경에서도 '나는 불멸하는 영혼을 믿는다'고 하지 않고 '나는 육신의 부활을 믿는다'고 일컫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당시의 문화세계와 그 세계가 선포하는 새로운 희망에 반대하는 그리스도교의 항변이 보인다. 인간의 일부인 영혼만이 완성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육신을 가진 전인인 인간과 그의 육신의 힘에 의하여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전체세계도 완성에 이른다는 것이다."

"육신부활이란 육신 없는 영혼이 하느님 안에서 최후의 고향을 찾기 위해 세상에서 이주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전인으로서의 인간은 자신의 불완전한 행동과 함께 완성을 희망해도 좋다."

또한 그레샤케의 입장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로힝크도 죽음 속에서의 육신의 부활을 긍정하는 입장에서 전인적 완성으로서의 죽음과 부활을 주장한다. 여기서 그는 영혼-육신의 도식을 포기하고, 전인으로서의 인간은 죽음 속에서 하느님께 이르게 된다고 주장한다:

"죽음 속에서 인간은 그의 '육신과 영혼'과 함께 그의 전체적 삶과, 그의 인격적 세계 그리고 교환될 수 없는 자신의 삶의 전체역사와 함께 하느님께로 나아간다."

한편 위의 입장과는 각도를 달리하는 라흐너-그는 육신보다는 영혼에 강조점을 둔다-도 부분적인 죽음과 부활이 아닌, 전인적 죽음과 부활의 신앙을 주장한다. 그러면서 죽음은 무조건 부정하고 거부해야할 것이 아니라, 인류의 완성을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희구해야 할 것으로 제시한다:

"죽음이 인생의 내재적 목표를 성취시키면서도 죄벌의 낙인을 선명하게 띠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죽음을 인생 목표의 완료라고 보아야 한다. 부활로 얻은 새로운 육체적 형태가 사람이 죽음으로 얻는 전체 세계를 향한 영의 개방성을 포기하는 것으로 간주하면 안된다. 이 견지에서 생각한다면 계시에 나와 있는(고전 15장) 영광을 입은 육신의 속성에 대한 이해가 더 무난해질 것이다."

B. 역사완성으로서의 죽음과 부활

죽음과 부활을 단지 개인의 종말적 사건으로만 간주하려는 시각을 극복하고, 이것이 지닌 역사완성으로서의 의미로 까지 그 지평을 확대하려는 노력이 카톨릭 신학 내의 보편적 현상으로 나타나는 듯 하다. 비록 세세한 표현방식상의 차이가 보이긴 하지만 그것의 본래적 의도와 의미는 대체로 일치된 양상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그레샤케는 "이렇듯 육신의 부활은 결코 개인적인 사건이 아니다. 부활은 보편적인 과정에 놓여 있다. 이 과정에는 개인과 공동체 그리고 역사와 완성이 서로 혼합되어 있다. 부활은 전체 실재가 사랑 속에서 충만에 이르는 과정인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부활의 의미를 개인적 차원에서, 역사완성의 궁극적 차원으로 확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레샤케와 유사한 신학적 입장에 서 있는 로핑크도 "기타의 세계와 전체역사는 우리 자신의 인격적 세계와 불가분리적인 유대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죽음 속에서 우리 자신과 함께 나머지 전체역사가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고 하면서, 개인의 죽음과 전체역사의 완성을 연결시키고 있다.

끝으로 '죽음 속에서의 부활'에 대하여는 이들과 대립적 입장에 서 있는 라징거도 이 문제에 있어서만은 이들과 일치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즉 그는 "죽은 인간은 역사로부터 벗어 난다. 역사는 그에게 있어서 (잠정적으로) 종결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맺은 역사와의 관련성 마저 상실하는 것은 아니다. 관계성의 망은 그의 본질 자체에 속하기 때문이다."라고 하면서 개인과 역사의 불가분리적 관계를 '망(網)'의 개념을 통해 연관짓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의한 선물로 이해하면서, 이 때에 성취될 개인과 역사의 종국적 완성을 꿈꾸고 있다.

C. 선물로서의 부활

죽음과 부활의 역동적 과정 속에서 발생하는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성 문제 또한 죽음과 관련된 카톨릭 신학 내의 중요한 논쟁점 가운데 하나이다. 즉 부활이 하느님의 선물이냐, 아니면 인간의 결단에 의해 성취되는 것이냐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카톨릭 신학의 경우,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인간의 구체적 행위가 결코 단회적 사건으로 무의미하게 처리되지 않고, 자신의 종국적 완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심지어 어느 학자들의 경우엔 개인의 완성과 역사전체의 완성을 동일선상에 두고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그 궁극적인 주도권과 결정권은 하느님에게 귀속되어 있으며, 그러기에 부활은 개인에 의해 획득되어지는 것이라기 보다는 하느님의 자비에 의한 선물로 이해하는 것이 학자간의 일반적인 의견인 것 같다. 이에 대한 학자들의 구체적인 의견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라징거는 '최후의 심판', '세계의 종말', '육신의 부활' 등은 개인과 역사의 완성된 종말을 시사하는 표상이며, 역사과정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달할 수 없으나 선물로서 다가오는 목표임을 나타내는 표상인 셈이라고 주장했고, 이어서 "하느님의 나라도 순수한 선물이고, 이에 대해서 인간이 이룩할 수 있는 자세는 '기대의 준비'일 뿐이다"고 하면서, 선물로서의 종말, 부활, 신국의 개념을 묘사했다.

또한 그레샤케도 라흐너의 최종결단의 개념을 비판하면서, 하느님의 절대주권에 의한 선물개념을 간접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이 가설에서는 죽음이 결정적인 삶의 행위로 극화되어 있어 죽음 이전의 삶의 역사는 후퇴하게 된다. 그리고 인간이 자신의 완성된 동일성과 그 삶의 의의형태를 결코 자기 자유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느님으로부터 선사받음으로써 이룩하게 된다는 확신이 흐려진다."

. 맺는

이상에서 카톨릭 신학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주장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무엇보다 카톨릭이 죽음의 문제를 중요한 신학적 주제로 삼고, 이에 대한 본격적이고 깊이 있는 연구를 계속하여 상당한 수준의 학문적 성과를 이루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러한 그들의 입장을 요약적으로 다시 검토해 보면, 먼저 죽음을 죄의 결과로만 규정해 오던 과거의 해설을 더이상 고집하거나 그것에 매이지 않고, 진화론적 시각을 도입하여 이를 바탕으로 죽음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과학시대에 적응하려는 탄력성을 보여주고 있다. 또 히랍적 영혼불멸과 히브리적 육신의 부활을 구별하고, 육신의 부활이 지닌 전인적 특성을 규명해 냄으로써, 종래의 신화적 사고를 극복하려 함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부활의 의미를 개인적 차원과 우주적 차원의 입체적 개념으로 조명함으로써, 부활의 현재적 의미와 종말적 의미를 제시하고 있으며, 그것이 지닌 역동성 또한 놓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끝으로 개인과 그의 역사 그리고 인류의 보편적 역사를 총체적으로 연결지어 이들 상호간의 필연적 관계망을 형성함으로써 개인의 운명을 우주적 역사적 차원으로 승화시킬 뿐 아니라, 한 실존으로서의 지상의 삶에 큰 의미와 가치 그리고 책임감을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깊이 있는 주장들에도 불구하고, 카톨릭의 대신학자들 사이에 이 문제들에 대해 상이한 주장들이 공존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물론 이런 다양한 주장들의 공존이 학문적 자극제로서, 독선을 방지하는 바로미터로 기능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과연 카톨릭의 입장은 도대체 무엇이냐는 곤혹스런 질문을 초래하기도 하는 것이다. 학자들마다 자기의 독자적 입장을 고수하고, 제각기 상이한 주장들을 제시함으로써 신자들에게 더 큰 혼란만을 가중시킬 위험이 있다. 또 문제의 지평을 너무 확장시키고 고도로 형이상학화 함으로써 일반 신자들의 관심을 오히려 저하시킬 위험도 있다. 따라서 학자 간의 이견을 좁히고 공통된 접촉점을 찾아, 보다 공식화시킬수 있는 의견의 접근을 이루는 것, 그리고 대중적 언어로 그 깊이 있는 사상을 표현해 내고 보급함으로써 일반 대중의 그릇된 관념을 적극적으로 개선해 나가는 작업이 중요한 과제로 요청된다.

끝으로 우리 개신교신학은 이런 카톨릭의 노력에 자극을 받아, 이 분야에 보다 진지한 신학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우리들의 깊이 있고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신학을 생산키 위해 성실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 분야를 더이상 신비한 신화의 영역이나, 언급하기 거북한 묵시적 주제로 금기시 하지 말고,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탐구되고 논의되며 선포되어야할 메세지로 우리의 의식을 전환해야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현대적 감각과 사고틀을 무시하지 않는 범주 내에서 탄력적이고 분명한 언어로 표현하는 신학적 작업이 뒤따라야 함은 물론이다. 이로써 우리의 고유성을 담보하면서도 시대적 보편성을 상실치 않는 건강한 신학이 탄생되리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