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서의 사후세계

이상훈

Ⅰ. 서론

북쪽 지역에 있던 이스라엘은 B.C. 722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였고, 남유다는 B.C. 587년에 바빌론에 의해 멸망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바벨론은 신흥 강대국이었던 페르시아에 의해 곧 무너졌으며(B.C. 539),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은 페르시아 제국으로 넘어갔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 민족은 페르시아의 영향하에 있었고 페르시아의 멸망 후에도 종교, 사상적 영향력은 매우 크게 작용했다. 특히 페르시아의 이원론적 사상은 유대 묵시 문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한편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은 유대교는 다시 그리스도교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신약에 나타난 여러 가지 사상이나(특히 예수와 관련된 본문에 있어서) 관습들은 유대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삼자는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성서적 사후관의 많은 부분은 유대교적 사후관에 기초해 있으며, 유대적 사후관은 페르시아 종교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측면에서 성서적 사후관은 페르시아 종교의 사후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본 소고는 페르시아의 대표적인 종교인 조로아스터교의 사후관을 살펴보고 성서에 있는 사후세계를 상징하는 단어나 본문을 중심으로 성서의 사후관과 함께 당시의 유대교적 사후관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Ⅱ. 조로아스트 종교의 사후관

이란 종교를 대표하고 있던 조로아스터교는 이란 지역의 동쪽이나 남 중앙 아시아 지역에서 시작되었다고 추정한다. 전설에 의하면 조로아스터교의 새로운 창시자 였던 짜라투스트라(Zarathustra)는 아저바이잔(Azerbaijan)에서 왔다고 전해진다. 그는 그 동안 내려오던 여러 이란 종교들을 하나의 종교 사상 체계로 발전시켰다. 조로아스터교는 기본적으로 철저한 일신론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엄격한 이원론을 신봉한다. 그들의 이원론적 사상은 선악의 문제를 다룰 때 더욱 극명하게 나타난다. 이들은 아후라 마츠다(Ahura Mazda)라는 최고신이 있고 그 밑에 쌍둥이 형제인 스펜다 마이후(Spenda Mainyu)라는 선한 영과 앙그라 마인유(Angra Mainyu)라는 악한 영이 있다고 보았다. 두 쌍둥이 형제들에게서 선과 악이 발생되어진다고 그들은 설명한다.

한편 개인적인 그리고 우주적인 종말의 도래는 궁극적으로 각 개인의 종말과 연결된다. 각 개인은 역사적인 우주의 진행이 끝날 때까지 "잠정적인 상태"(provisional state)로 남아 있다고 믿었었다. 그들은 세계 역사를 아후라 마츠다에 의해 이끌어지는 빛이 세력과 앙그라 마인유에 이끌어지는 어두움의 세력이 투쟁하는 과정으로 보았으며, 종국적으로 아우라 마츠다가 승리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 때 악은 영원히 파멸 당하고 죽었던 사람들은 다시 부활하게 된다. 조로아스터교는 육체적 부활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고 믿었다. 아후라 마츠다가 이 세상을 지배할 궁극적인 역사의 종말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이 있었다. 구원자는 첫 조상과 전 인류의 뼈를 일으켜 세우고 생명과 살을 붙여 주실 것이라고 보았다.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나고 영광 속에서 다시는 파괴되지 않을 육체를 받는다. 구원자에 의해 신성한 의식이 치러지고 마지막 변형과 함께 육체가 부활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원래 짜라투스트라 자신은 이 땅에 정의의 왕국이 세워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후대로 갈수록 3천년 주기설 이론들(theories of three-thousand-year cycles)이 발전되어지면서 마지막 때와 인간의 죽음사이의 간격에 대한 해석이 늘어갔으며, 잠정적 처벌이나 축복 개념이 기대되어졌다.

조로아스터교 문헌에 보면 영은 죽은 후 3일 동안 자신의 무덤 묘비에 머물러 있다가 자신이 지상에서 행했던 일들에 의해서 좋은 환경이나 나쁜 환경 속으로 이끌어져 간다고 하였다. 이 때 죽은 자의 영은 이 세상에서 제일 높은 곳인 하라 산(Mt. Hara)에서 출발하여 하늘 여행을 하게 된다고 하였다. 죽은 자의 영은 빛의 강도에 의해 나뉘어진 별(선한 생각)과 달(선한 말) 그리고 태양(선한 행동)이라는 세 가지 단계에 의해 천국(Heaven)에 가게 된다고 하였다.

또한 죽은 자의 영은 "구별의 다리"라고 불리워지기도 하는 신바트의 다리(Chinvat Brigde)를 건너야 되는 극적인 하늘 여행을 경험한다. 다리는 아주 협소하여 선한 일을 한 사람은 그 다리를 건너게 되지만 악한 일을 한 사람은 다리에서 떨어져 지옥에 가게 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자신이 지상에서 행했던 여러 가지 일들이 모여서 형성된 여인을 만나게 된다. 선한 행동을 많이 한 사람일수록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게 될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흉악한 여인을 만나게 된다.

한편 그곳에는 천국도 지옥도 갈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중간 상태가 있다. 선한 행동과 악한 행동을 저울질했을 때에 전체적으로 균형을 이루는 사람들이 가는 곳으로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이 곳을 혼합된 지역이라는 뜻을 가진 "하밍스타간"(Hamingstagan)이라 부른다. 또한 짜라투스트라의 찬송 "가타스"(Gadas)에는 불의 시련이 나와 있다. 선한 사람은 마지막 심판과도 연결되는"용해된 철물의 강"(river of molten mental)과 같은 불의 시련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상의 조로아스터교 사상은 유대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부활이나 종말에 대한 많은 개념들이 유대교 사상 안에서 유대적 배경을 가지고 나름대로 발전되어져 갔다. 메시아 사상 역시 조로아스터의 구원자 사상과 매우 흡사하며, 구원의 때 우리의 몸이 다시 부활하고 악의 세계는 멸망할 것이라는 묵시론적 사상 역시 조로아스터의 종말 사상과 비슷하다. 묵시 문학의 많은 부분은 조로아스터로 대표되는 페르시아 종교에서 비롯되었고, 역사를 숫자적으로 시대 구분하는 것 역시 페르시아적 요소이라 할 수 있다.

Ⅲ. 신약 성서에 나타난 사후관들

A. 낙원 표상

신약성서에는 "낙원"(??????????)이라는 단어가 세 번 나왔다(눅 23:43, 고후 12:4, 계 2:7). 누가 복음에 나와 있는 것은 예수가 한 말로 보통 죽는 순간에 낙원에 간다는 의미로 많이 해석되어져 왔다. 먼저 누가 복음에 나와 있는 것은 두 범법자 사화 속에 있는 것으로 누가 복음에만 나오는 누가 특수 자료라 할 수 있다. 불트만과 디벨리우스는 이것을 누가의 창작품이라 보았으며, 많은 학자들은 이 의견에 동조하고 있다. 설사 누가에 의해 완전히 창작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누가의 신학적 경향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두 범법자는 젤롯 당원일 가능성이 많고 한 범죄자가 예수에게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 때 나를 기억해 달라"고 한 요청은 종말의 때에 일어날 일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당시에 "나를 기억해 달라"는 강도의 말은 부활의 때, 곧 마지막 심판의 때를 의미하던 것이었다. A.D. 1세기경 팔레스틴의 많은 수의 무덤에는 "나를 기억해 달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으며, 이것은 부활의 때에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요청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졌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오늘"(???????) 낙원에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많은 문제점을 지닌다. 이 견해는 예수가 "하데스"로 내려갔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말들과(행 2:31: 마 12:40; 롬 10:7; 벧전 3:19) 상치된다. 그리고 예수가 부활한 이후에야 하늘에 올라갔다는 견해와도 반대된다.

여기에서는 예수가 능히 그 범죄자를 낙원으로 이끌 능력이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예수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아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누가의 신학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엘리스(E. E. Ellis)는 이것을 누가의 종말론적 시각에서 해석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누가가 현재적이며 동시에 미래적인 종말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신약에서 "오늘"(???????)이나 "날"(?????)이라는 말은 "지금"(now)이라는 말과 같은 것이었다. 눅 4:21에는 "이 글이 오늘날 너희에게 응하였다"고 기록되었으며, 행 13:33 역시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라고 쓰여져 있다. 이처럼 신약 성서의 많은 부분이 "오늘"이라는 개념을 "지금"이라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것을 볼 때, "오늘 너는 낙원에 함께 있을 것"이라는 예수의 말은 곧 "지금 너에게 구원이 일어났다"는 의미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현재적 구원관은 누가의 현재적이면서 동시에 미래적인 종말관에 기초한 것이었다. 또한 여기에서 "오늘"이라는 단어는 예수의 부활의 날을 어느 정도 암시하는 것으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낙원의 문은 열려졌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편 고린도 후서에서 말한 낙원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당시 고린도 교회의 구성원 대부분이 이방인이었다는 점과 바울의 대적자들이 헬라적 유대 크리스천이라는 점을 먼저 전제해야 할 것이다. 고린도 후서에서 바울은 전반적으로 율법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주의 영을 강조하고 예수의 대속적 죽음을 전 인류를 위한 보편적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하나님의 의를 전 인류로 확대시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는 이방인의 에토스(ethos)에 맞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바울은 이들의 성향에 맞게 예수를 그려내고 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헬라적 소양이 충분히 있음을 이야기하면서 고린도 교회의 구성원들과 동질감을 형성하려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고후 12:1-10까지 나와 있는 바울의 낙원 여행을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당시 고린도에 있었던 이방인들은 환상이나 신비적 체험을 소중히 여겼으며, 고린도 교회에 침투한 바울의 적대자들 역시 자신들이 몰아적인 경험을 했다고 자랑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자신도 그러한 경험과 능력이 있음을 자랑한다.

바울은 여기에서 "세 번째"라고 말을 하고 있으며, 이것은 그 이상의 하늘도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유대 묵시 문학가운데는 바울과 같은 경험을 서술한 부분들이 많이 있다. 또한 자신이 경험한 천상의 것들에 대한 통찰에서 미래에 선취될 나라를 기술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제 1에녹 39:3-4에는 "그 날에 회오리 바람이 나를 땅에서 날라다 하늘 끝에 갔다 놓았다…"고 기록되었으며, 제 2에녹서에서 열 번째 하늘까지 여행했음을 밝히고 있다.

한편 바울은 3절에서 "세 번째 하늘"이라는 말 대신에 "낙원'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의미상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제 2에녹서 8장에 의하면 낙원은 세 번째 하늘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모세 묵시록 37장 5절에서도 하느님이 미카엘에게 "그(죽은 아담)를 세 번째 하늘의 낙원으로 들어올리라. 그리고 내가 이 세상에서 심판할 그 두려운 날까지 그를 거기에 내버려두라"고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요한 계시록에 있는 낙원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박탈된 생명나무와 연관되고 있다. 원래 낙원이라는 말이 에덴 동산을 번역하면서 생긴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이 본문은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낙원에 가서 생명 나무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은 후대적 영향인 듯 싶다.

한편 원래 낙원이라는 말은 페르시아 귀족의 정원이나 과수원을 뜻하는 것이었는데 칠십인역에서 에덴 동산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로써 이 말은 죽음이나 혹은 최종적인 심판 이후에 축복 받은 자들이 사는 거처로 쓰여졌다. '낙원'은 사후에 의로운 자들이 가는 곳으로 후기 유대 사상에 나타나고 있는 개념이다. 랍비 문헌에 의하면 게힌놈과 에덴은 창조 전에 존재하던 곳으로(Pes. 54a) 게힌놈은 하나님의 왼편에 에덴은 오른 편에 있는 것으로 표상 되었다(Mid. Ps. 90:12).

게힌놈은 거대한 지옥(hell)이며 큰 구덩이로 묘사되었다. 게힌놈은 단지 처벌뿐만 아니라 정화 작용도 하는 곳으로 보았으며, 샴마이 학파는 선과 악이 서로 균형을 이루는 사람들은 게힌놈의 불에 의해 정화된 다름에 에덴에 들어간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다소 완화적인 힐렐 학파는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고통을 면하고 에덴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다(Tosef. Sanh. 13:3 : RH 16b-17a). 사악한 자들은 게힌놈에서 열 두달 동안 고통을 받은 후에 소멸되어지고 더 이상 고통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유대 민족이나 유대 신앙의 기본적 교리를 부정한 이들은 영원한 고통을 받게 된다(Tosef. Sanh. 12:4,5: RH 17a). 아키바(R. Akiba) 역시 이사야 66:23절과 관련시켜 열 두달 동안 사악한 자들도 그들의 죄를 심판 받은 후, 에덴에서 의로운 자들과 합류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브라함은 또한 게힌놈의 입구에서 그들의 자손들이 게힌놈에 들어가는 것을 막는다고 생각하기도 했으며(Er. 19a; 눅 16:23의 '아브라함의 품'과 연결됨),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죄인들은 안식일에는 처벌로부터 연기된다고 하였다(Sanh. 65b).

한편 사악한 자들은 하늘에 있는 에덴을 바라보며 게힌놈에서 고통을 받는다고 하였다(Mid. Ps. 6:6; 31:6). 사악한 자들과는 반대로 정의로운 자들은 금 테이블에 앉아서 호화스러운 연회를 갖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BB 75a). 묵시 문학에서도 불에 의한 사악한 자들의 처벌이 자주 나와있다.(1 En, 90:26ff., 4 Ezra 7:36: Testament of Abraham (A) 12).

또한 때때로 지옥(hell)을 음부(sheol)로 표시하기도 했다(1 En. 22:8ff). 물론 성경에는 음부가 죽은 자들이 가는 곳으로 이야기될 뿐 처벌을 받는 곳으로 의미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묵시 문학에 들어와서는 처벌의 개념이 첨가되기도 하였다. 바룩 묵시록과 에스라는 구약적 의미를 고수하며 음부를 마지막 심판과 죽음 사이에 가는 곳으로 표상 한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많은 문헌들이 시간이 끝날 때까지 고통을 당하는 장소로 표시되고 있으며, 모세의 가설들(Assumption of Moses) 10:10에는 정의로운 사람은 게힌놈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악한 자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고 기록 되었다.

이상의 것을 볼 때, 성서의 낙원 표상은 당시 유행하던 유대 묵시 문학에서 연유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서의 기자들은 이것을 그대로 도용하지 않고 각자의 상황에 맞추어 나름대로 자신의 신학을 정립하며 이를 해석하였다. 누가는 자신의 종말론적 관점에서 이를 해석하였고 바울은 적대자들과의 대립을 통해서 천상 여행을 서술하고 있다. 계시록 저자 역시 교회와의 관련성 속에서 이를 해석한다. 따라서 신약에 있는 낙원 표상이 전적으로 유대 ?시 사상에 근원한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들의 낙원 개념에는 근본적으로 유대적 배경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들은 유대 묵시적 표상 속에서 자신의 신학적 관점을 서술하고 있음을 전제할 때, 신약 성서의 낙원 표상은 다분히 유대적이라 할 수 있다.

B. 변모 사화에 나타난 표상

변모사화는 아주 다양하게 분석되어진다. 이 단화는 부활절 현시 설화였다는 견해가 널리 퍼져 있다. 막 9:2절에 나오는 높은 산은 마 28:16절의 산을 가리키는 것이고, 예수가 다시 인간의 형태로 변모되었다는 구절이 없다는 점, 그리고 예수가 구름 속에 있었다는 것 등은 예수 승천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변모사화는 원래는 부활절 사화라고 학자들은 주장한다. 특히 에디오피아의 베드로 묵시록과 피스티스 소피아(Pistis Sophia)에는 이 단화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후에 나온다는 측면에서 부활절 사화임을 강조한다.

한편 부비어(G. H. Boobyer)는 변모 사화가 재림에 대한 기대로서 발생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엘리야와 모세의 등장을 이에 맞추어 해석한다. 그는 신약 성서에서 구약의 뛰어난 인물들이 종국적으로 하나님 나라가 실제적인 실현에 참여한다는 내용이 많다는 사실을 전제한다(마 8:11: 막 7:25-27). 모세와 엘리야의 등장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되며 최소한 엘리야의 등장은 이러한 관점에서 설명 가능하다고 말한다.

마지막 날에는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등장하는데(막 13:21), 엘리야 선지자는 과거에 거짓 선지자들과 강하게 싸웠던 사람으로 주님이 재림할 때 등장할 많은 거짓 선지자들과 싸울 예언자로 나타나게 된다. 엘리야는 예수님과 함께 거짓 대적자들과 싸울 것이고 궁극적으로 예수가 승리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엘리야는 여기에서 예수를 돕는 보조적 인물로 묘사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리네(A. R. C. Leaney)는 모세와 엘리야가 고난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신약에서 모세와 엘리야는 고난을 상징하는 사람들로 자주 나타난다(마 9:11-13; 행 7:17-24: 히 11:23-29; 계 11:3-10). 이것은 유대적 문헌에도 자주 나타나는 양상으로 변모사화에서 모세와 엘리야의 등장은 결국 앞으로 당할 예수의 고난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더욱이 마가복음은 박해를 받을 당시에 쓰여진 것으로 순교자들이 맞이할 영광을 암시하고 있다고 리네는 말하고 있다.

한편 니네함(D. E. Nineham)은 엘리야는 예언자들의 대표자로 등장하고 모세는 율법의 대표자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마가는 율법과 예언자들보다 예수가 더 높은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했음을 지적한다. 라이트푸트(R. H. Leightfoot)는 베드로가 예수, 엘리야, 모세를 동등하게 취급하고 세개의 초막을 짓자고 한 것은 잘못이었다고 말한다. 이에 7절에서 예수에게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며, 하나님의 아들임을 밝히고 있다고 주장한다. 예수는 단지 하늘 나라에 있는 여러 사람 가운데 하나가 아니며 메시아이자 구세주라고 하는 것이 이 글의 중심 내용이라고 말한다.

구약에 의하면 엘리야는 초자연적 힘에 의해 죽지 않고 하늘나라에 올라갔다고 한다. 이에 따라 많은 유대 신비가들은 죽지 않고 하늘에 올라갔다고 전해지는 에녹과 엘리야의 천상 생활을 신비스럽게 설명했다. 어느 유대 문헌에 보면 엘리야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도운 천사들 가운데 하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일시적으로 지상에 내려 왔으며, 다시 하늘에 올라갔다. 에녹의 몸은 불로 형성되어 있으며 하늘의 가장 높은 천사로 자리 잡고 있는데 반해 엘리야는 지상의 몸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따라서 에녹은 최고의 천사로써 인간의 모습과는 상관없이 나타나지만 엘리야는 유대 민족들 사이에 계속 이름을 남겼으며 유대 전설에도 자주 등장한다.

구전되거나 기록되어진 유대 전설에는 엘리야가 아주 친근한 영웅으로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랍비 문헌에는 이스라엘이 구원될 시기를 알려주는 하나님의 전령자로 나타난다. 그는 이 세 상에 존재하는 사회적 불의에 맞서 싸우는 천국의 전령자인 동시에 부자들에 의해 착취 받고 고난받는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로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엘리야가 항상 옮고 그름을 판단하고자 하며 랍비라 하더라도 불의한 짓을 하면 주저하지 않고 처벌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엘리야가 종교적 정치적 박해 속에서 당하는 유대 민족의 고통을 완화시켜 줄 것이라고 믿었다.

C. 예수의 정체 물음에 나타난 표상

막 6:14-16과 눅 9:7-9에서 예수의 정체에 대해 많은 의견들이 제시되고 있다. 세례 요한이 다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났다는 설, 엘리야가 나타났다는 설, 옛 선지자 중의 하나가 다시 살아났다는 설로 구분된다. 누가 복음은 마가 복음에 있는 자료를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되어진다. 우선 예수를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근거로 윤회적 사상을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당시 죽은 사람이 다른 생명체로 재생한다는 사상은 통용되지 않았으며, 유대교의 일반적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더욱이 이 본문은 사실적이라고 보기 힘들다. 이 본문에 따르면 예수의 공생애는 세례요한의 죽음 후에 시작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여러 가지 상황을 볼 때 예수는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후 공생애를 시작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세례 요한의 부활은 불의하게 죽은 자는 하나님이 일으켜 세워 주실 것이라는 유대적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구조는 그리스도교적인 부활의 선포에서 유사하게 나타난다.

두 번째로 예수를 엘리야와 결부시킨 것은 엘리야가 "주의 크고 두려운 날에 앞서" 나타나리라는 기대와 결부된다(말 3:23). 엘리야가 능력 있는 기적 행위자로서 설화에 나타나 있는 까닭으로 예수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그의 종말론적 설교와 기적활동에 근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엘리야는 하늘에 올라간 존재인 까닭으로 부활할 필요성이 없는 인물이며, 따라서 그의 출현은 적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수가 "종말적 예언자"로서 나타나 종말을 알리는 엘리야의 역할을 했음을 암시하는 본문이기도 하다.

한편 눅 7:24에서 예수는 세례 요한을 선지자로 묘사하고 있다. 이 구절은 전-누가적 전승(pre-Luke tradition)이라 할 수 있으며, 메시아의 예비자로 생각했던 엘리야를 연상시킨다. 많은 사람들은 메시아가 오기 전 엘리야가 반드시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믿었었다. 스타키(J. Starky)는 네 번째 쿰란 동굴에서 "……전에 내가 엘리야를 보낸다"라고 적혀 있는 파편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전 기독교 시대에 이미 엘리야 전승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세 번째 견해는 옛 예언자들 가운데 하나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는 자신이 새로운 예언자라고 주장한 사람들이 많았으며 예수를 이들 중 하나로 보았음을 뜻한다. 또한 당시에 엘리야 뿐만 아니라 예레미야도 다시 나타날 것이라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다(마 16:14: 마카베오 2서 2:4-7: 15:13-14: 제2에스더 2:18) 특히 제2에스더에는 이사야도 언급되고 있다. 따라서 어떤 특별한 내세관이나 사후관에서 예언자들의 부활이나 등장을 이야기 했다기 보다는 종말이 일어날 때 발생될 일들에 대한 표상들을 논하면서 이러한 본문들이 자연스럽게 도출되어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D. 악마론과 천사론

다신론에서는 악마(demon)를 악한 일을 하는 신들로 규정한다. 그러나 유일신을 신봉하는 종교에서는 악마를 신의 심부름꾼으로 정의 내린다. 때때로 악마를 신의 적대자로 규정하며 악한 힘들의 상태로 정의하기도 하지만 다신론에서 이야기하는 악마하고는 차이가 있는 것을 생각한다. 한편 구약에서는 악마의 개념이 별로 발달하지 못했으나, 중간기에 들어오면서 악마에 대한 이론이 발달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도 나름대로 유일신론을 고수했으나, 많은 부분 이원론적인 이란 종교가 침투하였고 하늘을 지배하는 하나님의 세력과 악마과 지배하는 지상의 세계를 구분하기 시작했다.

물론 사탄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며 악마에 대한 이론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으나 체계적으로 발전되지 못했다. 중간기 시기에 접어들면서 우주에서 악한 영의 역할이 증대되었고 악마에 대한 이름도 벨리알(Belial), 마스테마(Mastemah), 사탄(Satan) 등 다양하게 나타났다. 사해 사본이나 고후 6:15 에 나오는 벨리알이라는 이름은 어원학적으로 "선한 것이 없는", "발전되지 않는"이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에서 비롯된 것이다. 중간기 시대에 벨리알은 "타락의 영", "어둠의 천사", "멸망의 천사"를 뜻하는 것이었다. 한편 마스테말은 "적대자"라는 뜻을 지닌 것으로 다섯 사본들(Five Scrolls)에 나와 있으며, 희년서(Jubilees) 11:5, 11: 17:16 등에는 악마를 "마스테말 임금"으로 표시하기도 했다.

한편 신약의 악마론은 당시의 대중들의 생각들과 랍비 문헌에 있는 기록돌을 부분적으로 반영했으며 쿰란에 있었던 악마론도 수용했다. 악마를 랍비 문헌에서 말하는 것처럼 "더러운 영"이나 "악한 영"으로 취급했으며, 그것들은 더러운 곳에서 산다고 생각했다. 악마가 들어간 곳에는 병이 깃들고 특별히 인간의 인격을 타락케 하며, 인간의 행동과 말을 직접적으로 조정하기도 한다(막 1:23, 26; 9:17-29)고 보았다. 예수님이 악마들을 쫓아 더러운 돼지떼로 보냈다는 이야기와 더러운 일곱 악마에 대한 비유(마 12:43-34)는 당시의 보편적인 생각들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예수와 그의 대적자들이 모두 사용하는 바알세불(Beelzebul)이라는 말은 어원학적으로 확실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왕하 1:2에 나오는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Baal-Zebub)을 뜻하는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며, 또한 "바알이 임금이다", "신당의 주"라는 말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한편 천사론(Angelology) 역시 중간기 시대에 들어와서 많이 발전되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이나 계시를 위대한 예언자들이 받고 이를 전했으나 중간기에 들어와서는 천사가 이러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인간의 미래나 세상의 종말에 관한 것은 천사를 통해 전달되어진다. 이러한 천사에 관한 개념은 헬레니즘 시대에 들어온 혼합주의 사상의 영향에 의해 형성되어졌다고 할 수 있다. 헬레니즘의 다신론적 사상의 도전으로부터 유일신론을 지키려는 입장에서 천사론은 더욱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유대교의 많은 종파들에 있었던 지식의 교사는 천사로부터 그들의 비밀스러운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쿰란의 에세네 학파 같은 비밀스러운 집단에서는 천사론이 매우 발전되었다. 요 3:12-13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상이 들어 있다. 예수는 니고데모와 대화하는 중에 하늘의 일을 이해하지 못함을 한탄하며, 하늘에서 내려온 인자만이 다시 하늘에 올라갈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믹크(W. Meeks)는 13절에 있는 "올라감"과 3절에 있는 "위로부터 태어남"(bon from above, ?????????? ??????)이라는 말이 "천상 여행"(Heavenly journey)과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예수에게만 주어진 독점적인 계시의 강조는 유대교나 다른 세계와는 분리된 분파적인 공동체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인자만이 하늘의 비밀에 접근할 수 있고 그의 공동체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비밀을 가르쳐 준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그들이 더 우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Ⅳ. 결론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페르시아 종교와 유대교의 사후관이 부활관과 관련하여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더욱이 신약 성서의 많은 부분이 유대교적 배경하에서 형성된 까닭으로 신약 성서는 당시의 보편적인 유대적 개념으로 사후관을 묘사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악마론과 천사론에 있어서는 거의 대부분 유대교적 사유를 그대로 따르고 있었음을 보았다.

그러나 유대교와 신약 성서의 사후관은 아직도 많은 부분이 체계화되지 못했으며, 예수의 사역과 관련하여 별다른 개념 없이 사후관을 묘사하거나 언급하는 경우들도 있었다. 또한 때로는 예수를 추종했던 사람들에 의해 예수를 부각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사후세계와 관련된 부분들이 수정, 혹은 각색하기도 했다.

따라서 신약 성서의 사후관을 체계적으로 논하기는 매우 어려우며, 유대교적 사후관과 종말관 등에 근거해서 단편적이고 개별적으로 사후관을 살펴보아야 하는 한계성이 있다. 이처럼 사후 세계에 대한 개념이 정리되지 못한 이유는 예수나 그를 따르던 무리들이 종말이 곧 도래할 것이라고 강하게 믿었던 탓에 굳이 사후 세계를 조직적으로 체계화할 필요가 없었던 것에 기인한다고도 할 수 있다. 더욱이 사후관이 기독론에 의해 수정, 변형되기도 하여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기독교적인 사후관이 다소 모호한 원인 중에는 근본적으로 기독교가 정확한 사후관을 가지고 출발하지 못한데서 비롯된 면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며, 기독교의 본질을 잃지 않으면서 동시에 현 시대에 맞는 사후관을 새롭게 정립해야 될 것이다. 사후세계관은 항상 당시의 시대와 상황을 반영하고 있으며, 시대적 환경 속에서 끊임없이 발전되어가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현실과 괴리된 사후세계관은 이미 생명력을 잃어버린 폐물에 지나지 않는다. 사후 세계관이 인간의 현실과 개개인의 생활에 영향을 끼칠 때, 그것은 인간에게 역동적인 힘을 제공해 줄 것이다. 기독교적인 사후관 역시 현실 세계와 괴리된 채로 머물러 있으면 곧 그 가치를 잃게 되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