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Paradise) 대한 소고

배덕만


. 서론

낙원에 대한 관념은 모든 종교에서 중요한 요소로 나타나고 있으며, 기독교 내에서도매우 의미있는 표상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교회 현장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되고 있으며, 신자들의 차후 삶에 대한 중요한 표상으로 현재의 삶에도 적잖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적 중요성과 사실성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나 정확한 이해는 극히 부족한 상태이다. 이것은 현재의 기독교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역설 가운데 또 하나의 결정적 역설이다.

따라서 본 소고에서는 낙원표상에 대한 폭넓은 인식과 그것의 성서적 의미 이해를 위해, 먼저 비교종교학적 측면에서 이 문제를 개관하고, 성서에 나타난 낙원, 특히 신약에 나타난 세개의 본문(눅23:43, 고후12:4, 계2:7)에 대한 분석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 언어적 고찰

??????????는 고대 페르시아어 pairi-daeza에서 온 말이다. 이것은 본래 "울타리(enclosure)", "담으로 둘러싸인 정원" 등을 의미했다. 그리스어로는 크세노폰의 저작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데, 여기서는 페르시아 왕과 귀족들의 "공원"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리고 B.C. 3세기에 이르면 이 단어는 "공원"을 나타내는 말로서 이미 일반화되었다. 그런데 70인역에서는 특별히 창조설화 중에 "하나님의 정원"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것을 통해 이 용어는 세속적인 것에서 종교적 차원으로 그 의미가 변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이 종교적 의미는 외경에서 "삽입되는 감추어진 낙원"과 "낙원의 종말론적 재출현" 등으로 더욱 확대되었다.

. 비교종교학적 고찰

1. 낙원의 원초성

낙원은 흔히 원초적인 것으로, 즉 전설적인 시간에 존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신화 속에서 인간은 동물들의 언어를 이해하고, 그들과 화평하게 지낸다. 그들은 일할 필요도 없고, 음식은 가까운 곳에 얼마든지 있으며, 질병과 죽음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런 낙원적 상황을 끝장내 버리고 인간의 삶을 오늘날 같이 만들어 버리는 한 사건이 발생한다.

원초적 낙원에 대한 신화들은 대개의 경우, 태초에 하늘과 땅이 근접해 있었고, 이것은 나무나 사다리, 혹은 산과 같은 구체적 수단에 의해 올라갈 수 있었으며, 하늘과 땅의 분리 혹은 그들 간의 단절로 인해 의사소통이 상실되었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이로써 왜 낙원이 상실되었고, 인간이 현재적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려고 한다.

2. 원초적 낙원의 특징

원초적 낙원의 징표들 혹은 특징들은 완전, 순결, 풍요, 자유, 자연스러움, 평화, 즐거움, 아름다움 그리고 불멸 등이다. 그 각각은 일상적이고 낙원 이후의 인간의 삶의 특징들과 강한 대조를 이룬다. 그 외에도 동물들과의 조화 및 친밀한 관계, 신들과 천상 세계와의 손쉬운 의사소통 등도 언급할 수 있다.

태초의 미발달성과 불완전성을 강조하는 다윈의 진화론과는 달리, 원초적 낙원에 대한 신화들은 태초의 완전성을 예시한다. 더우기 만물의 본래적 순수성이 보존된다.

3. 낙원에 대한 향수

비록 원초적 낙원은 상실되었지만, 그것이 완전히 잊혀진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본래적 상태를 회복하고자 하는 바램의 표현들을 찾는다. 낙원의 원래의 모습은 사라졌으나 여전히 회복할 가능성은 남아 있다고 믿는 것이다. 따라서 낙원에 대한 향수는 인간의 삶에 나타나는 향수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이 되었고, 종교적 삶의 모든 수준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에 대해 엘리아데(Mercea Eliade)는 샤만들이 자신들의 꿈과 황홀경의 체험을 자세히 설명할 때 사용하는 낙원의 이미지들이 수 세기 동안의 그들의 종교적 추구를 생생하게 하는 데 기여해 왔다고 한다.

4. 낙원의 재생

낙원은 역사적으로 방향지워진 종교 뿐만 아니라 우주적으로 방향지워진 종교들 안에서도 발견된다. 즉 그 시간이 직선적이고 역사적인 종교들 뿐만이 아니라 순환적인 종교들 안에서도 발견되는 것이다. 순화적 시간구조를 갖고 있는 종교 내에서, 낙원은 상실됐을 뿐만 아니라 영원히 돌아 가는 시간의 수레바퀴와 더불어 종종 다시 나타난다.

종교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예는 세계시대(yugas)에 대한 힌두교의 교리이다. 이것은 브라만 신의 삶의 시대와의 관련 속에서 신화적 언어로 형성된 것이다. 간략히 말하면 각 세계의 순환은 4개의 시대로 구분된다. 힌두교는 주사위 게임을 사용한다: krta(4), treta(3), dvapara(2), 그리고 kali(1). 한 시대가 다른 시대를 대체하면서 쇠퇴와 퇴화가 진행된다.

Krtayuga는 완전한 시대, 4의 시대이다. 4라는 숫자는 흔히 힌두교에서 완전, 풍요, 총체성의 상징이다. 그 시대는 또한 satya("진실되고, 참되고, 진정한")yuga로도 알려져 있다. krta시대 동안에는 dharma(근원적인 우주적 도덕 질서)가 총체적이며 자발적으로 준수된다. 이 때가 바로 황금시대, 진리의 시대, 정의와 번영의 시대, 인간 완성의 시대이다. 다른 말로 하면 다른 종교 전통의 원초적 낙원의 시대에 상응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불가피하게 krtayuga는 끝나고 말며, 점차적 쇠퇴인 3의 시대가 되따른다. 이것은 kaliyuga에서 그 정점에 다다르며, 세상과 인간은 최악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 현재 우리의 시대가 바로 kaliyuga 인 것이다. 어느 계산에 의하면, 이것은 432,000년 동안 지속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이 시대도 끝나고 krtayuga, 완전의 시대, 황금의 시대가 다시 돌아올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낙원이 다시 출현할 것이다.

5. 경건한 자들의 삶의 공간으로서의 낙원

낙원의 성서적 개념이 원초적인 에덴 동산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유대인의 신앙이 출현하면서-대략 200 B.C-, 낙원은 단지 원초적 에덴동산 뿐만 아니라 의인의 영원한 거처를 언급하게도 되었다. 즉 의롭게 죽은 자들은 그들의 부활 이후의 거처로서, 사악한 자들의 처벌처인 Gehenna보다는 에덴동산 혹은 낙원을 소유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래서 파라다이스와 게헨나는 대립적인 한 쌍을 이루었다. 더우기 낙원은 부활 이전까지 의로운 자들의 중간거처를 의미했다.

의로운 자들의 중간거처인 낙원의 위치는 부활 전이든 후이든 여전히 지상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점차 그것을 하늘 혹은 다중적 하늘에 위치시키려는 경향이 출현했다. 신약에서는 낙원에 대한 실존적이고 종말론적인 개념들이 출현한다. 그리고 낙원은 황홀경을 통해 들어가는 천상적인 차원의 것으로 여겨진다. 뿐만 아니라 낙원은 특권을 얻은 자들(예를 들면, 순교자들 눅23:43의 "선한 도적" 등)이 들어갈 수 있다.

5. 낙원의 표상

a. 정원

정원은 낙원의 가장 일반적인 표상이다. 이런 표상이 중동에서 기원한 종교들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대승불교의 낙원인 아미타 불이 거하는 "정토"가 있다. 아미타불의 낙원은 기름지고, 풍요로우며, 안락하고 기쁨에 가득찬 것으로 묘사된다. 그 곳은 매우 다양한 꽃들과 과일들로 가득 차 있다. 많은 깊고 넓은 강들이 그 곳을 통과하고, 새들은 즐겁게 노래한다. 고요와 평안이 이 정원 낙원에 충만하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서쪽 끝에 있는 헤스페리데스의 정원 혹은 과수원이 나온다. 그 곳은 황금 사과로 인해 새롭게 된 곳이다. 기후은 온화하고 겨울은 없다. 대양이 신선한 바람들 사람들에게 제공한다. 그 곳의 삶은 가장 안락하다고 한다. 또한 페르시아에서도 이런 모티브가 나타난다. 페르시아 정원에서는 가장 중심적이고 핵심적 요소인 물과 재생 혹은 불멸 및 승천의 가능성을 상징하는 나무와의 관계가 중요하다. 사후의 보상인 그 축복의 정원은 페르시아 정원의 모델이 되었다. 페르시아의 정원은 상징적으로 위에 닿아 있는 나무와 잔잔한 물결 그리고 향기로운 꽃들을 지니고 있으며, 결코 세속적이 될 수 없다.

이처럼 정원이 죽은 자들의 낙원 뿐만이 아니라 원초적 낙원의 구조를 제공하게 된 이유를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농업의 발견 이후 만들어진 것이든 아니면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든, 낙원은 놀라운 현상인 것이다. 전형적으로 그것은 주변의 영토와 때때로 극적으로 대조된다. 그것은 주변의 일상적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형성한다. 그 세계에서는 씨, 흙 그리고 물이 분명하게 비옥함, 생명력 그리고 풍요의 현현과 연관된다. 인간을 위해 그것은 영양과 활력을 공급해 주며, 인간존재의 매혹적 측면을 나타내 주기도 한다.

b. 섬

정원이 낙원의 유일한 표상은 아니다. 섬이나 산과 같은 다른 표상들도 존재한다. 이런 몇 가지 표상들은 "정원같은 섬 낙원"처럼 함께 결합되기도 한다. 이것은 고갱의 그림에서 와 같이 남태평양 섬들의 신기하고 환희에 차 있으며, 생생하게 채색된 섬 낙원이다.

또한 그리스 신화의 축복받은 섬들도 잘 알려져 있다. 그것은 신들의 산인 올림푸스와 상반된 것이다. 우리들은 정원과 더불어 섬이 낙원의 이미지로 사용되고 있는 케트족의 신화에서도 병행구를 찾아 볼 수 있다. 플라톤의 아트란티스와 비슷한 가라앉은 섬의 신화 또한 발견되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들은 뭔가 잘못되어 파도 밑으로 사라져버린 낙원적 세계의 모티브를 발견하게 된다.

한편 섬은 격리를 상징한다. 그것은 낙원의 동떨어져 있음과 그곳에의 접근의 난해성을 쉽게 상징화할 수 있다. 그 곳에 가기 위해서는 흔히 강이나 바다를 통과해야만 하며,. 이런 맥락에서 여행 모티브가, 흔히 어렵고 위험한 여행의 모티브가 나타난다.

c. 산

산도 가끔 낙원과 연결되어 있다. 예를 들면 낙원적 차원에서 예루살렘의 시온산과 힌두신화의 Meru산 등. 밀톤(John Milton)도 [실락원]에서 낙원을 하나의 산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산의 두드러진 특징은 그것은 높이다. 그 것은 땅 위로 솟는다. 그래서 쉽게 초월을 상징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낙원이 초월적 영역으로 생각될 때, 산은 적절한 이미지가 되는 것이다.

5. 종말론적 낙원

낙원은 일반적으로 과거의 것으로 생각되긴 하지만, 또한 일부 종말론들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요한 계시록에서는 하느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새예루살렘, 새 하늘과 새 땅이 예시된다. 유대 메시아니즘에서는 낙원에 대한 회상이 강력한 필체로 표현되고 있다. 쿤(Norman Cohn)은 The Pursuit of the Millennium(1957)라는 중세와 종교개혁시대 유럽에서 발생했던 혁명적 메시아운동에 대한 자신의 연구에서 낙원적 요소들을 발견했다.

근대에는 멜라네시아와 미키로네시아의 "cargo cults"가 낙원적 모티브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해 왔다. 간략히 말해서 이것은 곧 조상들이 탄 배가 많은 수화물을 실고 도착할 것이며, 이것을 고대하고 준비했던 자들이 이 수화물을 받을 것이라는 신화적 예언에 기초한 것이다. 조상들의 귀환과 수화물의 당도가 근원적인 변화를 상징한다. 가난이 없어지고 옛 세계에 속하던 것이 파괴된다. 근원적인 뒤바뀜이 일어난다. 노예가 주인이 되고, 노인이 젊은이가 되며, 얌이 나무에서 자라고, 코코넛이 땅에서 자랄 것이다. 이 세계에서는 법과 전통, 일, 가난, 질병, 노쇠 그리고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이 있을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런 극단적 변화 혹은 세계의 갱신이 낙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 성서적 고찰

1. 구약

전통적인 히브리 신학에 의하면, 죽은 자들은 쉐올로 내려 갔다. 그 곳에서의 삶은 그늘지고, 선악의 구분은 하찮은 것이었다. 그러나 B.C 200 경, 죽은 자들 혹은 죽은 자들의 일부의 부활에 대한 신앙의 출현으로 이런 견해는 극적으로 수정되었다. 사고가 진척됨에 따라, 부활 이후 의로운 자들의 거처가 에덴 동산 혹은 낙원일 것이라는 데에 의견의 합의가 이루어 졌다. 한편 사악한 자들을 위한 거처는 Gehenna이며, 흔히 이 둘은 하나의 짝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죽음의 순간과 최종적 부활 사이에 죽은 자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구분없는 쉐올에 대한 옛 견해는 격리된 쉐올에 대한 견해에 의해 대치되었다. 즉 의로운 자들은 사악한 자들로부터 분리된다. 최종적으로 의로운 자들은 쉐올로부터 에덴동산 혹은 낙원으로 옮겨진다.

여기에서 "낙원"은 세 가지 방식으로 사용된다. (1)창세기 2-3장의 원래의 에덴 동산, (2)부활에 앞서 의로운 자들의 거처로서의 정원, (3)의로운 자들의 영원한 집로서의 정원. 그러나 이것은 서로 다른 세 개의 낙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낙원이 자신의 역사 속에서 갖는 세 단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시대에 다른 기능들을 충족시켰다. 그렇지만 둘째와 세째 낙원 사이의 낙원의 지리적 위치에 대해서는 일치된 견해가 없다. 어떤 이들은 지상에 있다고 주장하며, 다른 이들은 하늘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생명 나무에 대한 공통적 언급이 나타나고 있다.

2. 신약

a. 누가복음 23:4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니시라

회개한 강도가 예수께 부탁한다: "당신이 왕으로 오실 때-즉 최후의 심판 때에-, 은혜롭게 나를 기억하소서." 그러나 예수의 대답은 부탁의 기대치를 넘어 선다. 왜냐하면 그는 그 강도에게 이미 오늘 그가 낙원에서 예수와의 교제를 만끽할 것이라고 약속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낙원은 죽음 이후 분리된 의로운 자들의 영혼을 받아들이는 곳이 된다. 즉 낙원은 구원받은 자들의 영혼이 죽음과 부활 사이의 중간 상태에서 거하는 곳인 것이다. 여기서 본문이 당시 유대적 개념에 의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감춰진 낙원이기도 하며, 종말론적 의미에서 이것은 구원의 시대가 "지금 여기" 도래했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사죄의 약속에서 "어느 날"이 완성의 "오늘"이 된 것이다. 도저히 구원될 수 없이 잃어버린 자에게 마저 십자가 상에서 낙원이 열려진 것이다. 그 강도는 메시야와의 교제를 약속받았다. 이것은 구원의 때에 죄의 경감의 정도가 얼마나 무한한지를 보여준다.

신약성서는 중간상태에 대한 독특한 기독교적 견해로서 죽음 이후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계속해서 표현한다. 스데반은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다. 바울은 보다 오래된 편지에서 중간상태에 대해 단언할 아무런 권한도 갖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오직 재림 이후에 죽은 자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기대했다(살후4:17) 그리고 그가 중간상태에 대해 언급할 때에도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주된 내용이다(고후5:8, 빌1:23, 딤후4:18) 비록 바울이 낙원전승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그는 그것들을 무시하고 직접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희망을 언급한다. 감춰진 낙원과 그 곳의 환희에 대한 모든 환상적인 생각은 무시되고 있다.

b. 고린도후서 12장 4절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나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이 본문은 앞의 2,3절과의 관계성 문제가 중요하다. 그것은 4절이 앞의 두 절과 병행관계에 있는지의 여부가 낙원의 의미와 그 공간적 위치에 대한 해석에 있어 중요한 차이를 가져 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자들마다 이 부분에 대해 상당히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예레미아스는 "12:2절의 삼층천으로의 들어올려짐이 바로 4절의 낙원으로의 들어올려짐인지 우리는 확실하게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바울이 삼층천에 낙원을 위치시켰는지의 여부도 알 수 없다."라고 말한다.

맥아더도 "2절과 3절이 병행구라면, 그 때는 바울이 낙원을 삼층천에 위치시킨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자신의 경험을 주님의 계시로 묘사하는 동안, 자신이 낙원에서 주님을 직접 보았는지 아니면 주님이 자신을 나타내지 않고 계시만을 허락했는지의 문제는 불확실한 채로 남겨 두었다."고 언급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텐하르트와 브라운은 제법 용감하게 다음과 같이 단정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바울은 자신이 낙원으로 들어 올려지고, 그 곳에서 말씀을 들었던 성령의 경험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 진술은 2절에서 그가 말한 것과 병행을 이룬다." 그러나 이처럼 단정지을 수 있는 지는 아직도 연구과제로 남는다.

이러한 해석상의 어려움 때문에, 학자들은 본문에 대한 단정적 진술을 피하면서 단순한 정보제공 차원에 머물고 있다. 따라서 맥아더는 "그가 낙원에서 주님을 만났다는 진술이 사실이라면, 바울은 의롭게 죽은 자들이 이미 낙원에서 주님과 함께 살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초기 단계에서 바울은 죽은 자들이 주의 재림 때까지는 주와 연합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는 했지만, 이것은 고후5:8, 빌1:23 과도 조화를 이룬다."고 하였다. 여기서 그는 낙원을 의롭게 죽은 자들의 중간거처로 조심스럽게 규정하였지만, 낙원과 삼층천의 관계성 문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비텐하르트와 브라운도 "고대의 우주론은 비록 셋이 공통적으로 받아들여진 수였지만, 그 외에도 다섯, 일곱, 열, 그리고 다양한 수의 하늘을 나타내고 있다. 그렇지만 바울이 이 숫자와 낙원을 사용한 것은 그의 우주론에 대해 아무 것도 명확히 지시해주지 못하고 있으며, 그는 단지 자신의 설명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공통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던 이미지를 사용했는지도 모른다. 물론 셋이라는 숫자가 완전을 의미하기는 하지만 말이다."고 역시 불확실한 설명만을 덧붙이고 있다. 따라서 정말 바울의 삼층천이 바울의 독특한 견해인지, 아니면 자신의 신비 경험에 대한 설명도구로 차용한 당시의 일반적 이미지였는지도 수수께끼로 남는다. 예레미아스도 "오직 우리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계시가 낙원에서 그에게 주어졌다는 사실뿐이다."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c. 요한계시록 2장 7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본문의 낙원과 관련해서 몇 가지 중요한 문제들이 논의되고 있다. 먼저 예수는 하느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 나무의 열매를 먹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낙원의 문을 열고, 아담을 위협했던 검을 제거하며, 성도들에게 생명나무를 주어 먹도록 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그러면 이 약속은 언제 성취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이중적으로 주어진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낙원이 도래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종말의 때에 최종적으로 이루어 진다는 것이다. 특히 후자에 대해서 맥아더는 "계시록 2-3장의 병행구들도 역사의 끝을 지향하고 있다. 더우기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는 것은 전통적으로 최종적 구원과 연관되어 왔다. 그러나 물론 생명나무가 부활 이후를 위해 보존되긴 하지만, 최소한 의로운 자들의 일부가 최종적 부활에 앞서서 천상의 거처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계시록이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러한 약속의 성취 문제는 부분적으로는 현재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대체적으로는 종말론적 의미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본문은 누가 낙원에 들어가느냐의 문제에 답하고 있다. 이에 대해 비텐하르트와 브라운은 "이 세상의 유혹과 시련을 극복하는 자(특히 니골라당에 대적하여), 아담이 잃어버렸던 것의 회복과 아담은 결코 접근하지도 못했던 방식으로 생명에 도달하게 된다."고 이 부분을 풀었다. 종래부터 반복되어져 왔던 의롭게 죽은 자들에게 허락된 낙원의 이미지가 여기서도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끝으로 크라프트(H. Kraft)는 본문에서 십자가와 생명나무 그리고 성례전을 연결시키고 있다: "요한에게 있어서는 생명나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상의 어떤 다른 것일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십자가는 생명나무의 모사이며, 그 자체로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인식될 수 있다. 낙원에서의 생명나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늘에서 일치한다. 생명나무의 열매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선사된 생명이다. 그러나 분명히 뜻하고 있는 것처럼 이 열매가 먹혀지기 때문에, 따라서 여기서는 미리 성례전적인 또는 성례전에 인도되는 표상이 주목되어 있다."고 해석한다. 예레미아스도 이런 주장에 대해 "정말 중요한 문제는 낙원의 축복이 아니라, 아담에 의해 깨어졌던 하나님과의 교제의 회복이다."라고 동조적 반응을 보인다. 이것은 눅23:43절의 해석에 나타난 것처럼 그리스도와의 교제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와 그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인다.


. 결론

이상에서 낙원의 다양한 표상들과 그 의미들을 개략적으로 살펴 보았다. Ⅱ장에서는 낙원의 의미를 어원학적 측면에서 살펴보았고, Ⅲ장에서는 비교종교학적 측면에서 낙원의 다양한 의미와 표상들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Ⅳ장에서는 성서적 측면에서 이 문제를 분석해 보았다.

특히 유대전통에서 역사의 진행과 더불어 기존의 쉐올 개념이 죽음과 얽힌 복잡한 문제들에 대해 만족스런 해답을 제공하지 못하게 됨에 따라 부활 개념이 강력히 등장하게 되었고, 이와 더불어 악하게 죽은 자들의 거처인 게헨나에 대한 대립개념으로서 의롭게 죽은 자들의 중간거처인 낙원 개념이 발생하게 되었다. 타 종교들에서도 현재적 삶에 대한 보상개념으로서 낙원모티브가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해석에 있어 많은 문제가 미결로 남아 있다. 낙원이 성취되는 시기의 문제, 그 것의 지리적 위치 문제 등에 대해서는 아직도 합의된 견해가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성취시기의 문제에 대해서는 현재적 실현설과 종말때의 최종적 완성설 등이 병존하고 있으며, 지리적 문제도 천상적 관념과 지상적 관념이 공존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난해하고 복잡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낙원표상은 여전히 의미있고 중요한 종교적 가치를 담보하고 있다. 그것은 종말적 완성에 대한 희망 뿐만 아니라 그것의 현재적 실현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인간의 삶 전반에 걸쳐 역동성을 부여하는 기능을수행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의미에 대한 깊은 탐구와 그 것의 현실적 적용을 위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