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복음에 나타난 천국과 지옥

김신일

서 론

예수의 종말론적 가르침에 대한 해석에는 전통적으로 두가지 견해가 유력시 되어왔다. 하나는 '미래적 종말론'이고 또하나는 '실현된 종말론'이다. 전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들이 앞으로 미래에 실현될 것이라고 보는 견해요, 후자는 그 나라가 예수 자신의 출현과 더불어 이미 도래해 있었다고 보는 견해이다. 그러나 이러한 양극단의 견해들은 언제나 예수의 말씀중 여러 부분에 대하여 억지스럽고 부자연스러운 해석을 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사실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설교속에는 "현재성과 미래성의 독특한 병렬"이 함께 존재한다. 바로 여기에서 매우 상이한 강조점들이 제기될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에 나타난 하나님의 왕국이 현재적 실체인지, 미래적 실체인지, 혹은 양면성을 지닌 실체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분명한것은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왕국은 현재적인(already) 동시에 미래적(not yet)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본 소고는 이 문제에 일차적인 관심을 두지 않는다. 즉 "현재냐 미래냐 ?"의 문제를 다루지 않을것이다. 오히려 여기에서는 "현세냐 내세냐 ?"의 문제가 관심의 대상이다. 이 질문은 다시 이렇게 표현될수 있다. "예수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설교들을 통해 청중들이 내세에 관심을 기울이기를 원하셨는가 ? 아니면 현실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기를 원하셨는가 ?" 이 문제를 염두에 두고서 이제 예수의 설교에 나타난 천국과 지옥에 대한 표상들을 연구해 보자.

본 론

1. 예수 설교에서의 천국

예수의 천국관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언급에서 쁹아볼수 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바실레이아'(????????)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는데 이는 일차적으로 주권에 대한 의미를 포함하며 이차적으로 공간적인 의미를 표현한다. 전통적으로 천국을 현세와는 전혀 다른 공간적 차원에서 이해하려는 시도들은 다음과 같은 예수의 언급들에 대한 해석에서 비롯되었다. 이들을 살펴보자.

(1) 부자와 나사로 비유 (눅 16:19-31)

본 비유는 크게 두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부분(19-26절)은 죽음 이후에 부자와 나사로의 위치가 역전된다는 내용이다. 두번째 부분(27-31절)은 부자가 이미 그 생전에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 회개치 않았을 경우의 운명에 대하여 이미 경고받았으며, 죽은자가 되살아나 이 일들을 말하여도 강팍한 자들은 받아들이지 않을것이라는 내용이다. 이 비유에서는 계속되는 고통, 목마름, 큰 구렁, 죽은자의 되살아남 등의 표상들이 등장한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 본문이 예수의 천국과 지옥관을 잘 나타내어주는 비유라고 보며 여기에서 현세와는 다른 차원의 내세를 주장한다.

이 비유의 초반부는 부자가 나사로를 도와주려고 문밖으로 나가지 않음을 보여준다. 나사로는 부자에게서 어떠한 자선적 행위도 받아보지 못한다. 재미있는것은 비유의 내용중에 나사로가 했던 의롭거나 경건한 행위에 대한 언급이 없다. 하지만 그 사람의 이름에서 그런 면모를 추측할수 있고(나사로라는 이름의 뜻이 '하나님이 도우시는 자'이다.) 누가가 가난과 경건을 일반적으로 일치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나사로의 천국행을 이해할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부자는 재물의 적절한 이용을 하지 못한 예로써 의도된것 같다. 두번째 부분은 만일 율법과 예언자들이 부자로 하여금 회개하는데 충분치 않다면 죽은 사람이 부활해서 돌아온다 해도 아무런 변화가 없을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비유는 하나의 예를 제시하며 인간 행동에 대한 경고를 제시하고 있다. 크로산(J.D. Crossan)이 이 비유의 원래형식에서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볼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신빙성이 거의 없다. 이 이야기는 창세기 15:1-2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엘리에셀을 연상시켜 준다.(나사로는 구약의 엘리에셀과 같은 이름이다.) 데레트(Derret)는 나사로라는 인물에서 유다인들이 친절을 베푸는지 알아보도록 아브라함이 보낸 종의 모습을 쁹는다. 케이브(C.H. Cave)는 엘리에셀이 이교도였음을 주목하면서 이 비유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회개치 않을때 당할 가혹한 심판에 대하여 가르친다고 해석한다. 즉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오히려 이교도들이 하나님의 자비를 받게 되는 사실을 볼 것이라고 여긴다.

아뭏든 예수의 이 비유는 단순히 피안적인 의미에서 다루어 질수만은 없다. 리바니오와 빈제메르가 말하듯 하나님의 나라는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접근이기도 하지만, 또한 인간의 근본적 결단이기도 하며, 새로운 존재방식(삶의 모양)을 가지고 투신하는 일이기도 하다. 예수에 의하면 선포된 하나님의 나라는 심오한 내적 태도를 요구한다. 즉, 예수의 이 비유는 그 비유를 듣는 청중들이 내적으로 어떠한 반응과 결단을 하는가가 중요하다.

(2) 주님이 예비하시는 처소 (요 14:1-3)

죽음을 앞둔 예수는 불안해 하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죽어야만 하는 당위성을 제시하기 위하여 '내 아버지 집에 거할곳', '처소를 예비함' 등의 이유들 말씀한다. '거할곳'(?????, 모나이)는 '머무르다'라는 뜻의 헬라어 '메노'(????)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거할장소', '안식처'등을 의미한다. 이 말을 라틴 벌게잇(Vulgate)이 '만시오네스'로 번역했으며 영역 성경중에 KJV가 '맨션'(mansion)으로 번역했다. 이는 단순히 '거주하는 장소'의 의미를 지닌다.(Webster's Dictionary) 이를 근거로 천국은 다분히 현세와는 다른 공간적 개념으로, 초림과 재림 사이에 주님에 의해서 준비되어지는 '어떤 장소'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다른 견해도 있다. 예수는 하늘에서 그가 거할 자리를 마련하며 그를 사랑하는 자들을 예비된 처소로 영접한다는 종말론은 변형된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가 추측컨대 그의 죽음을 통해 그가 신자에게 다시 올 것이고 또 그들을 하늘의 처소로 영접하리라는 것은 개인주의화된 종말론이다. 마틴은 요한이 하늘의 집에 대한 희망을 지상의 집의 실재로 변형시켰다고 말한다. 본문의 '내 아버지의 집에는' 이라는 말과 눅 2:49의 '아버지 집'(어린 예수가 부모에게 한 말), 그리고 요 2:16의 '아버지 집'(성전 청결시 장사군들에게 한 말)은 모두 성전을 지시한다. 하늘이 하나님의 거처라는 사상은 대개의 종교들에 내포된 광범위한 사상이다. 또한 '거할곳'(?????, 모나이)에 대해서 고대나 현대의 일부 주석가들은 이 말이 생명이 하늘에서도 계속됨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였다. 바레트(Barrett)는 요한이 여기서 '처소'라는 용어를 사용할때 그것을 '방들', 혹은 '거처들'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머무는 행위' 혹은 '머무는 상태'를 생각한 것이라고 본다. 즉, 아버지와 친교를 나누는 영속적이고 보편적인 가능성들을 언급한다. 처소는 피안적인 장소개념보다는 아버지와 함께하는 상태를 지칭한다는 견해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연세계와 초자연세계를 분리하는 이원론적 이층 사고방식을 탈피해야 할 필요가 있다. 천국은 아주 먼 훗날 시작하게 되는 이질적인 실재가 결코 아니다. 천국은 지금 이미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한 인간이 주님으로 인해 책임적 존재로 사랑의 삶을 시작하는 곳에 이미 시작되어 확장되어 간다. 반면에 한 인간이 이웃을 물리치고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배척한다면 그의 삶은 이미 현세에서 파멸되어 그의 삶 안에는 지옥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의미에서 천국이나 지옥은 인간 삶의 내재적인 논리이다. 천국과 지옥은 인간의 현존재가 지금 자신을 성취하는 바와 같이 자신을 긍정적 혹은 부정적으로 완성시키게 됨을 의미한다. 요한에게 있어서 종말적 최종적인 실재란 이미 도래한 현재를 뜻한다. 믿고 사랑하는 가운데 생활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다.(요 3:36; 5:24; 6:47) 믿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지금 이미 죽음과 심판 속에서 생활한다.(요 3:14; 12:31) 요컨대 천국이나 지옥은 모두 현세에서 이미 우리의 삶 가운데 성장하고 있으며 이미 전개되고 있고 또 될수 있다.

2. 예수 설교에서의 지옥

예수설교의 지옥선포에 대하여는 더 많은 오해들이 산재한다. 즉, 예수는 그의 심판설교들에서조차 사람들이 실제로 멸망당하는지, 혹은 어느 정도의 사람들이 그렇게 될것인지에 관해서 전혀 명확하게 밝히지 않고있다. 이 설교들은 청중들에게 그 선포를 통하여 그들 삶의 결단을 권고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 예수가 언급한 몇가지 지옥표상의 예들을 살펴보자.

(1)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 18:8-9)

본문의 전문은 이러하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여기에서 '지옥불'(?????? ??? ?????, 게엔나 투 퓌로스)은 문자적으로는 '불붙는 게엔나'라는 표현이다. 이는 히브리어 '게힌놈'(?????) 에서 나온 말이다. 이곳은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는 이방신 몰록과 그 제사의식과 관련된 장소이다. 이 의식은 요시야 왕에 의해 폐지되었고 그? 그는 이 골짜기를 오물과 죄인의 시체를 버리는 곳으로 만들어서 더러운 곳이 되게 하였다.(왕하 23:10) 후기 전승에 따르면 1세기에도 이 골짜기는 쓰레기를 쌓아두는 곳이었고 연기와 불이 꽉 찬 곳이었다. 따라서 이 골짜기는 종말론적인 심판이 행해지는 장소를 상징하게 되었다.

특별히 이곳을 죽음의골짜기 또는 형벌의 골짜기로 부른 이유는 아하스와 므낫세 왕의 시대에 사람들이 몰록의 제사를 위해 사람을 번제물로 불속에 넣었던 곳이기도 하여 그런 점에서 예레미야는 힌놈의 골짜기를 살륙의 골짜기라고 저주하였다.(렘 7:31) 이같은 배경 속에서 유대교는 이 골짜기에서 형벌의 심판이 행해질 것이라고 기대했으며 최후의 심판이 꺼지지 않는 불꽃 속에서 있을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특히 유대인들은 중간사 시대에 와서는 훨씬 분명하게 '게엔나' 개념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 예로 위경 에녹서에서는 '이 저주받은 골짜기는 영원도록 저주받은 자들을 벌하기 위하여 있는 것이다. 이곳에 꼴사납게도 하나님을 거스려 말하던 자들이 모일 것이니, 이곳은 그들이 벌받는 곳이기 때문이다'(에녹 27:2)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땅 한 가운데가 열리고 깊은 구덩이 같은 것이 나타났는데 이곳에는 불이 가득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심판을 받아서 죄 있는 자들이 그 불타는 구덩이에 던져져서 불로 태움을 받았다'(에녹 90:26) 신약시대에도 여전히 죽음이후의 세계에서 벌을 받는 곳으로서 '게엔나'를 언급하며 본문도 같은 의미에서 이를 언급한다.

예수는 이미 당대에 편만해 있던 이런 개념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예수가 이 게엔나의 표상을 사용했을때 동시대의 청중들은 어떤 피안적 차원에서 실제적인 불속으로 들어간다기 보다는, 그것을 종말적 심판의 상징으로 이해했을 가능성이 높다.

(2) 지옥에 던지우는, 죽지않는 구더기, 꺼지지 않는 불 (막 9:43-48)

범죄한 신체를 잃는것이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낫다는 본문의 내용은 앞에 언급한 예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죽지않는 벌레와 꺼지지 않는 불은 파멸을 의미한다. 제 3 이사야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심판은 일회적인 행위가 아니라 영원한 상태, 영원한 파멸로 이해되었다. 그곳에서 이 심판은 하나님을 거스리는 자들에게 내린다. 그리고 시온산의 성전에서 드리는 영원한 예배가 이 심판에 대응한다.(66:20-23) 벌레와 불의 표상은 유대교에서 널리 알려진 것이며 따라서 마가도 이표상을 사용할수 있었다. 그러나 이 본문을 해석할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 오해를 피해야만 한다. 첫째, 인간신체의 부분들에서 오는 유혹들이 성적 충동에 한정되어서는 않된다.(삶의 모든 부분의 죄들을 지칭하는 것 같다) 둘째, 이 본문은 신체를 경시하도록 가르치고 있지는 않다. 따라서 우리는 이 말씀을 결코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고 오히려 악에 대해 단호한 조처를 취하도록 촉구하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한다. 세볁, 이 어구들이 피안의 세계를 해명해 주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규칙들을 제시한다는 것을 명심하는 것이다. 결국 여기에서도 예수의 지옥표상은 청중들의 현실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3) 슬피 울며 이를 갊 (마 22:13; 13:42, 50)

본문은 이렇게 기록되어져 있다.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마 22:13)"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닌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13:42, 50)" 본문에서 '사환들'은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보좌하고 영원천국에서 성도들에게 수종들 천사들이다. 그들이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의 수족을 결박하는 것은 반항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며 그가 바깥 어둠에 내어 던져지고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것은 마지막 심판의 형벌에 대한 일관된 묘사이다.(8:12; 13:42; 24;51; 25:30) 그것은 즉각적이고 철저한 형벌이며 영원한 형벌이어서 더이상의 자비나 기회가 없다. 그러나 그들의 의식은 생생하여 절망과 한탄과 분노로 불타오른다. '풀무불'은 마태의 기록중 이곳 두군데에서만 언급된 말로서 직역하면 '화덕', '불을 지피는 아궁이'를 가리킨다. 이는 하늘의 심판을 받는 사람들이 무서운 불로 영원히 형벌을 받는 장소를 가리키며 이것은 흔히 '불못', '지옥'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여기에서 모든 불의한 것들이 징게되고 일소(一掃)되며 악인들은 종말적인 영원한 운명에 쳐해지게 된다. '울다'의 의미인 '클라우드모스'(????????)는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를 가리키며 '이를 갈다'의 뜻인 '브뤼그모스'(???????)는 '물어뜯다'의 뜻인 '부뤼코'(?????)에서 나온 말로 굶주림에 계속 으르렁 거리는 짐승의 모습이나 분노로 씩씩대는 사람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이러한 표상은 단순히 자책이나 분노 및 놀라움에 대한 동양적인 태도를 서술하는지, 아니면 저주받은 곳이 "불처럼 뜨겁고 눈처럼 차갑다"는 사실과 연관되는지는 결정될 수 없다. 바깥 어두운데 쫓겨난것은 잔치가 하나님과 함께 있는 친교의 상태를 말한다면 바깥 어두움은 그 상태에서의 분리를 뜻한다.

이상과 같이 예수는 그의 설교에서 친히 지옥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으며 지옥이라는 주제는 그의 복음선포 속에서 의미심장한 기능을 갖고 있다. 앞에서 살폈듯이 "자기 형제더러 미친놈이라고 하는 사람은 불붙는 지옥에 던져질것이다"(마 5:22)는 산상수훈의 한 명제나 "오른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손을 찍어 던져버려라. 몸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마 5:30; 18:8)는 말씀이 예수의 설교속에서 나왔다면 예수는 이 말씀을 통하여 무엇을 의도하고 있었겠는가 ?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이러한 지옥에 관한 이야기가 어떠한 내용과 관련되어 예수에게서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지옥은 회개를 촉구하는 예수의 소명과 관련되어 거론되고 있다. 예수는 지옥에 관한 이야기 중에서 인간이 스스로 만사를 획득하거나 상실할수 있음을 천명하고 있다. 예수는 이 이야기에서 인간은 구원될 수도 버림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다시 말해 예수는 지옥에 관한 선포를 함으로써 청중이 처해있는 상황의 심각성을 드러내고 근본적인 결단을 내릴 것을 촉구하고자 하였다. 예수가 선포한 복음에 담긴 지옥의 메세지는 하나님의 주권에 자신을 양도하라고 엄중하게 촉구하는 결단의 기능이 있다. 그러나 예수는 죽은 뒤의 지옥문제에 대하여 알고 싶어하는 인간의 호기심을 결코 만족시켜 주지 않았다. 소수의 인간만이 구원될 것인지의 여부에 관한 물음에 대해서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있는 힘을 다하여라"(눅 13:24)고 언급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를테면 지옥에 관하여 여하한 정보도 제공하지 않고 인간의 호기심도 만족시켜 주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현실의 인간에게 책임을 지우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예수는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이런 방식으로 설교를 하였는가 ?

그레사케(Gisbert Greshake)는 여기에 대하여 독특한 의견을 제시한다. 즉, 예수의 언어는 "성취적인 말"이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언어학자들은 소위 정보적인 말(informativer Satz)과 성취적인 말(performativer Satz)을 구별하고 있다. 정보적인 말이란 말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제 삼자적 실황을 전달하려는 것이며 이와는 달리 성취적인 말은 다른 사람에게 실황을 정립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나는 너를 용서한다'고 누군가에게 말한다면 나는 그에게 '용서한다'는 말로써 새로운 실재를 성취시킨다는 것이다. 결혼식장에서 신랑이나 신부가 '예'라고 대답하는 말은 다른 이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실재, 즉 법적으로 유효한 결혼의 실재를 정립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개념을 빌어 이렇게 말할수 있다. 예수의 지옥에 관한 말은 성취적인 말이다. 즉 통지하는 말이 아닌 성취하는 말이다. 이 말은 청중이 내리는 결단의 최종적 책임이 지옥의 실재를 정립함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이 말이 최종적으로 철저한 신앙결단을 동원시키려고 한다. 예수가 죄에 관하여 언급할 경우 관건이 되는 것은 미래에의 전망이 아니라 현시각의 심각성이다. 이런 논리에 의하면 예수의 설교를 통한 천국과 지옥은 청중들의 반응과 결단에 의하여 확정된다.

결 론

지금까지 우리는 예수의 설교에서 볼수 있는 천국과 지옥들에 대한 표상들을 살펴보았다. 이제 우리의 처음 논점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의 논의는 예수의 내세관에 대한 시간적인 관심이 아닌 공간적인 관심이었다. "예수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설교들을 통해 청중들로 하여금 내세에 관심을 기울이기를 원하셨는가 ? 아니면 현실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기를 원하셨는가 ?" 이에 대한 대답은 한마디로 "현실의 책임적인 삶"에대한 강조이다. 예수에게 있어서 미래는 현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현실과 무관한 미래는 없다. 즉, 현재의 책임있는 삶이 없는 피안적인 천국은 없다.

이상의 연구에서 보듯이 예수의 천국과 지옥에 대한 언급들은 서술적인 주장이 아닌 실천적인 논의이다. 그것은 말로하는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인간에게 책임감을 불러 일으키고, 그 실재 앞에서 분명한 태도를 취하도록 촉구한다. 그것은 천국뿐이 아닌 심지어 지옥에로의 저주선포에서조차 그러하다. 지옥선포들은 현실적인 결단을 촉구하는 측면에서 선포되었다고 이해되어져야 한다. 그러기에 선포하시는 예수의 관심은 다분히 청중의 현실적인 삶이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책임적인 삶의 강조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논외로 한가지를 더 언급하자면 종말에 대한 시간적인 관심도 이런 삶의 자세와 무관하지 않다. 즉, 이미와 아직 사이의 관계는 극단적이고 반대적인 대조관계로 볼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연속성이란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전자는 후자의 전초일뿐이다. 우리의 현재적 삶의 질과 죽음 저너머의 삶의 질 사이에는 매우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콘젤만은 예수의 선포들에게서 시간적으로 현재와 미래적인 요소를 동시에 보고있다. 그리고 이 두 진술들이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실존적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즉 예수이 하나님 나라 선포는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인간의 순간적 태도 결정을 뜻하며 회개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가 말하는 천국과 지옥은 이미 우리의 현재적인 삶속에서 이미 시작되었고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청중들이 예수의 그 말씀에 어떻게 반응하고 결단하는가 하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