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현대신학의 종말론

 

 

1) 철저적 종말론(Die Konsequente Eschatologie)

(1) J. Weiß(Die Predigt Jesu vom Reiche Gottes, 1892)

A. Ritschl의 사위인 J. Weiß는 신학세계에 놀라움과 충격을 야기했다. 그는 예수의 메시지와 실존, 원시 기독교의 종말론의 중심적 의미를 재발견함으로써, 그 당시 관념주의적인, 본질적으로 세계 내적이고 윤리적 특징을 갖춘 하나님의 나라 이해(특히 Ritschl → Harnack)에 대해 묵시적이고 초월적인 하나님의 나라 이해를 날카롭게 대립시켰다. 특히 그는 그의 장인 리츨의 하나님의 나라 사고가 칸트와 계몽신학에 뿌리를 둔 것으로서 예수의 선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 개념과 아무런 연결점이 없음을 지적했다. 리츨이 옳은 점은 그가 하나님의 나라 개념을 그의 신학의 중심에 놓았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그의 사고는 예수의 선포와 다르다고 주장했다. Weiß는 예수의 선포 속의 하나님의 나라 개념을 연구하기 위하여 신약성서의 임박한 종말 기대의 구약성서적이고도 후기 유대교적인 원형에서부터 출발하여, 예언자들과 묵시문학가들에게서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 설립이 두드러져 있음을 확인했다. 여기서 본질적인 것으로 드러난 것은 하나님의 자기실증, 인간의 운명 속으로의 개입, 역사의 결정적 전환인데, Weiß는 이것이 예수의 선포 속에서도 드러나서,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통해 이 시대가 끝장날 것임을 예수가 기대했다고 믿었다.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나라는 항상 종말적인 실체이고, 현재에 관해서 말할 수 있다면 종말이 이미 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Weiß는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 표상의 유래를 후기 유대교의 묵시문학에서 찾았다. 구약성서에는 그 원형이 없고,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 표상을 지배하는 이원론은 포수기 후의 유대교의 절망의 표현으로서, 이것은 다른 기원, 즉 페르샤 종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 Weiß가 해명한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 표상의 원형의 3가지 요소는 : 하나님의 나라의 초월성, 이원론,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에 대한 희망이다.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 표상은 완전히 초월적인 것, 완성기의 천상의 축복의 총체로서 이해되었다. 예수는 그 초세계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곧 임박하게 도래할 것임을 선포했다. 그러기에 거기엔 세계 내적인 흔적이 전혀 없다.(C.Walter)

※ 여기서 예수는 산상설교의 도덕교사로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종말론적 메시지와 같이 묵시문학적 열광주의자가 되었다.(J. Moltmann, 45f.)

 

(2) A. Schweitzer (Von Reimarus zu Wrede, Eine Geschichte der Leben-Jesu-Forschung,1906)

슈바이처도 19C의 자유주의적 예수상에 드러난 현대적 이념에 대해 반기를 들고, 예수의 인격과 삶의 역사적 지식을 유대적 묵시문학에 비추어 해석했다. 슈바이처의 주장은 ①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의 이해는 묵시적인 본질을 갖고 있다. ② 예수의 메시지는 철저히 종말론적, 묵시적이다. ③ 예수는 이 하나님의 나라가 자기 생애 중에 곧 오리라고 믿었다. 이로써 슈바이처는 예수를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착각한 묵시적 환상에 맹신적으로 자기의 삶을 던져버린 미친 광신자로 이해하여, 그가 재발견했던 예수의 메시지의 종말론적 의미를 극복て폐지했다 :

"사방이 고요했다. 거기에 세례요한이 나타나서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외친다. 곧 그 뒤를 이어 스스로 와야 할 인자로 자각한 예수가 세계의 수레 바퀴살에 끼워져서 그것을 움직여서 최후적인 회전을 시키고 일반 세계사의 종결을 가져오려고 한다. 그러나 바퀴가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그는 거기에 몸을 던졌다. 그래서 바퀴는 돌고 그는 갈기갈기 찢겨졌다. 그는 종말론을 가져오는 대신 그것을 파괴했다. 그런데 세계라고 하는 수레바퀴는 계속 돌아가고, 자신이 인류의 영적 지배자이며 인류 역사를 자기의 목적대로 굽힐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만큼 강한, 측량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한 사람의 갈기갈기 찢어진 시체의 조각들이 아직도 그 수레바퀴에 달려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승리이며 통치이다."

※ 같은 것의 영원한 순환의 상징인 '역사의 바퀴'가 역사의 종말론적 화살의 방향을 대신한다. (J. Moltmann, 46f.)

 

2) 실현된 종말론

(C. H. Dodd : The Parables of the Kingdom, 1936)

이 종말론은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와 그의 활동 안에서 이미 왔기 때문에, 미래는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가져오지 못한다는 입장에 서 있다. 여기서 가까운 미래와 관련된 듯한 모든 텍스트가 현재적 성취로부터 이해되었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가 자기 자신의 삶, 죽음, 부활, 승천 그리고 재림에서 현존해 있는 것을 보았다. 이들은 여러 개의 사건들로 볼 수 없고, 예수의 사상에서 하나의 복잡한 사건의 여러 면을 나타내는 것이다. 예수의 선포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가 왔다"는 것이었다. 예수의 비유들은 심판의 위기가 미래에 오는 것이 아니라 현재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오랜 기간의 성장은 끝났고 결단의 시간이 도래했다. 남아 있는 것이란 낫을 대어 추수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Dodd는 J.Jeremias의 비판을 받아들여 자기의 견해를 조정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의 실제적인 미래성을 허용했다(The Founder of Christianity, The Coming of Christ, 1954)

(G.E.Ladd, 32ff.)

 

3) 구속사(Heilsgeschichte)의 종말론

(O.Cullmann : Christus und die Zeit, 1946)

이 종말론의 대변자들은 예수의 선포에서 현재적 요소와 미래적 요소를 통합하려고 노력했다. 이들은 '이미'와 '아직 아니' 사이의 긴장관계를 유리하게 구사했다.

특히 O. Cullmann은 역사를 창조와 종말에 직결되는 직선으로 보고 그 한 중간지점을 그리스도의 임재로 보고 있다. 그는 예수 사건과 재림 그리고 그 중간시기를 D-day와 V-day라는 은유로 구별하고 있다. 곧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은 공격개시일(D-day)로부터 시작하여 결정적인 전쟁의 승패가 판가름난 것을 예시한다. 그러나 아직도 역사가 진행되고 있는 것은 최후의 완전て승리의 날(V-day)까지 소탕전을 하는 것과 같다.(C.Braaten, 215f.)

이외에도 미래적 종말론과 실현된(현재적) 종말론을 종합한 신학자들은 다음과 같다.

J.Jeremias(Die Gleichnisse Jesu, 1947)

W.G.Kümmel(Verheißung und Erfüllung, 1956)

G.Gloege(Das Reich Gottes im N.T. : 1928, Reich Gottes und Kirche im N.T., 1929)

H.D.Wendland(Die Eschatologie des Reiches Gottes bei Jesus, 1931)

R.Otto(Reich Gottes und Menschensohn, 1943)

E.Percy(Die Botschaft Jesu, 1953)

R.Schnackenburg(Gottes Herrschaft und Reich, 1958)

G.Bornkamm(Jesu von Nazareth, 1956)

H.Riddervos(The Coming of the Kingdom, 1962)

N.Perrin(Rediscovering the teaching of Jesus, 1967) 등이 있다.

(미국학자들 중에는 T.W.Manson, J,Hering, A.N.Wilder, A.M.Hunter 등이 있다.)

 

4) 실존적 종말론

(R. Bultmann : Geschichte und Eschatologie, 1955)

R.Bultmann의 신학에서 종말론은 역사의 종말로서 미래성을 잃고 있다. 왜냐하면 그에 의하면 "매 순간이 종말론적이기" 때문이다.

"매 순간은 하나의 종말론적 순간이 되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이 가능성은 실현된다. ? 역사의 의미는 항상 현재에 있다. 그리고 이 현재가 그리스도교 신앙에 의해서 종말론적 현재로서 파악될 때 역사의 의미는 실현되는 것이다" ? "항상 네 현재 속에 역사의 의미가 있다. 그리고 너는 그것을 방관자로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너의 책임적인 결단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매 순간 속에 종말론적인 순간이 되는 가능성이 잠들고 있다. 너는 그것을 불러 일으켜야 한다."(Bultmann, 195f.)

인간이 하나의 궁극적으로 의미있는 결단을 하는 그 순간은 언제나 종말론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불트만은 이처럼 종말론을 각자의 현재에서의 실존적인 만남(하나님 앞에서의 본래적 실존을 위한 결단)으로 철저히 전환시켰는데, 그는 바울 특히 요한의 철저한 종말론의 현재화에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그리고 그는 제 4 복음서 속의 미래적 종말론(시간과 관련된 종말론)을 후대교회의 개작이라고 추측했다.

불트만에 의하면 종말은 인류역사의 미래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고 나의 현 실존에 부딪혀 오는 매 순간, 곧 그 순간을 의미있게 채우는 바로 그 눈 앞의 미래에 있다. 케리그마를 통해서 선포된 용서는 하나의 종말론적 사건이고, 이 신앙 가운데 있는 실존은 종말론적 실존이다(C. Braaten, 217)

※ 비판 : "이 해석에서 ? 종말론은 역사의 목표로서는 완전히 그 의미를 상실하고 결국 개인의 존재의 목표로서 이해되어 있다." (J.Moltmann. 희망의 신학. 76)

"신앙은 그 자체가 역사의 사실상 종말이고, 신앙인은 그 자신이 이미 성취된 자일 것이다. 그에게서 더 이상 기다려야 할 것이 없을 것이고 그가 세상에서 육체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그것을 향해서 가는 도중에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미래성'은 '영원한 것'일 것이고, '도중에 있는' 인간의 개방성도 역시 '영원하고' '끝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써 이러한 방식에서 '종말론적으로' 이해된 신앙의 실존은 '영원한 현재의 나타남'의 새로운 형태로 바뀌어질 것이다." (J.Moltmann, 83) - "우주적인 종말론이 없이는 인간의 종말론적 실존을 말할 수 없다."(84f.) Heidegger의 시간과 역사개념에 의존하여 미래의 범주를 인간실존의 한 속성으로 보고 있다(Braaten, 221). 이와 같은 윤리적 역사이해가 얼마만큼 그 본래의 종말론적 성격을 보유하고 있을지는 극히 의심스럽다. 하나님의 미래가 인간의 정체성으로 환원되고, 현재가 우리에게 주어진 요청이 되고, 과거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행해야 할 결단의 모델이나 귀감으로 이해되었다.(Braaten, 223)

 

5) 변증법적 종말론

(1) K. Barth (초기 ; 변증법적, 초월적, 가치론적 종말론)

"하나님의 통치가 시간의 의미라고 한다면 그것은 시간 속에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며 다른 사물들과 나란히 있는 시간적 사물도 아니다. 시간 속에 있는 것은 죽음의 한계에 아직 이르지도 못했고 하나님에 의해서 장악되거나 통치되지도 않는다. ? 마지막 나팔의 소리가 들리고 죽은 자들이 일어나며 살아있는 자들이 변화되는 순간, 이러한 시간의 순간, 물론 시간의 마지막 순간이 아니라 그 종말, 그 무시간적 목표와 끝. ? 그리스도의 부활 혹은 ?그의 재림, 이것은 시간적인 사건이 아니다. ? 새 시대의 도래, 그때 있었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 올 것의 통치, 이것이 부활절이다." (Biblische Fragen, Einsichten und Ausblicke ; 1920)

"어떠한 시간 속에서도 일어나지 않는 그분의 출현,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시간의 신비, 지양, 기초 및 영원이기 때문이다." (Rö-2, 402) - "시간이 영원과 같이 되었고 영원이 시간과 같이 된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는다면, 바로 그 때 이 가능성이 생긴다. 그것은 '순간의 인식' 속에서 일어난다. 왜냐하면 그것은 시간들 사이의 한 '순간'이며, 결코 시간 속의 한 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 속의 모든 순간이 이러한 순간의 완전한 가치를 지닐 수 있다. 이 순간은 과거가 물러가고 미래가 다가올 때 과거와 미래가 멎게 되는 영원한 순간, 지금이다. 시간은 그 신비를 노출한다." (Rö 2, 481)

여기서 시간의 전환이 종말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순간에 '시간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수직적으로 개입하는 창조적인 하나님의 행동이다. 모든 현실을 포괄하는 종말은 이미 현존하고 있다. 미래는 곧 현재이며, '부활의 미래'는 '영원한 순간'과 동일시된다. 영원한 하나님 안에서 종말론은 태초론과 동일하다. 여기서 종말은 초월과 같은 뜻을 의미한다 (N.T, Bakker, In der Krisis der Offenbarung, 39). 역사의 종말은 모든 시간과 그 시간에서 일어나는 것의 근거가 되는 원역사(Urgeschichte ; Overbeck)와 동일시되었다. 시간의 한계는 모든 시간의 한계이고 그렇기 때문에 시간의 기원이다. "참된 종말에 관해서는 매 시간마다 말할 수 있다 ; ? 종말은 가까이에 있다! 그것은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에 관해서도 원칙적으로 해당된다."(Die Auferstehung der Toten, 1924, 61f.)

※ 비판 : "로마서 강해 제 1 판에서는 동적이고 우주적인 전망에 대해서 박정하지 않았던 종말론이 그 뒤부터는 바르트에게서 뒤로 물러가고 시간 - 영원의 변증법에 의해 움직이고, 칸트의 초월적 종말론의 영역 안에 있는 것은 이 영향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여기서 '마지막'은 '근원'과 같은 뜻이 되었고, 종말은 영원을 통한 시간의 초월적인 한계가 되었다." (Moltmann, 희망의 신학, 61)


(2) P. Tillich (영원한 지금, System. Theo.Ⅲ)

P. Tillich도 역시 종말론의 문제를 영원과 시간의 변증법적 개념으로 생각하였다.

"... 우리의 시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시간은 우리가 '현존'하고 있는 시간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시간을 끝없는 흐름으로 생각하면 '현재'는 없다. 현재의 수수께끼는 시간의 모든 수수께끼 중에서 가장 깊은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모든 시간을 포함해서 그것을 초월하는 것, 즉 영원한 것을 제외하고는 대답이 없다... 우리는 현재에 산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위하여 언제나 새로운 '현재'로 갱신된다. 이것은 시간의 모든 순간이 영원한 것에 도달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우리를 위하여 시간의 흐름을 멈추는 것이 영원한 것이다. 이 현재는 우리를 위하여 일시적인 '지금'을 마련하는 영원한 '지금'이다. ? 모든 시간의 소모된 힘을 뛰어 넘는 오직 하나의 힘은 영원이다. 그는(예수는) 전에 있었고, 현재도 있으며, 앞으로 오실 분 - 처음이며 나중이다... 그는 '그'의 영원한 '현재'에서 우리로 하여금 쉬게 하신다." (영원한 지금, 139ff.)

과거와 미래는 현재 속에서 만난다. 둘 다 영원한 '지금' 안에 포함되어 있다. 종말은 그 미래적 차원을 상실하지 않고서도 현재적 체험의 일이 된다. 우리는 '지금' 영원의 얼굴 속에 서 있다. ? 역사의 완성은 영원히 현재적인 역사의 끝에 놓여있다(하나님의 나라의 초월적 차원 : 영생). 역사의 끝은 시간이 영원으로 이끌려 올라가는(고양되는, 초월되는) 것이다. (System. Theo. Ⅲ. 359f.)

 

6) 보편사적 종말론, 선취된 종말론

(W.Pannenberg : Offenbarung als Geschichte,1961; Theologie und Reich Gottes,1971)

Pannenberg는 G. von Rad의 구속사 개념을 확대시키고(역사는 전통의 전승과정이고, 신학은 역사의 해석이다 : 구속사 신학), 묵시론적 역사이해에 근거한 보편역사와 예수의 출현(특히 부활)의 종말론적(예기적) 성격에다가 헤겔적인 계시이해(역사의 종국과 완성에서 역사의 통일성을 추구하는 사고 : 역사철학)를 종합함으로써, 보편사적 역사와 계시의 이해, 보편사적 종말론을 전개하였다.

Pannenberg는 그의 논문 '역사로서의 계시'에서 Barth의 말씀 계시(하나님이 말씀하셨다. Deus dixit)에 반대하고, 또 다른 한편 Bultmann의 실존적 계시이해(객관화할 수 없는 인간의 자기의식에서 증명되어지는 하나님. 실존의 의미성 속에서 하나님이 계시됨)에 반대하여, 하나님의 계시가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행동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Pannenberg는 v. Rad의 구속사 신학을 수용, 발전시켜서 역사를 하나님의 보편역사의 관점에서 보았다. 역사는 인류의 창조에서부터 시작해서 인류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이르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에 의해 그 정점에 도달하는 전체로서의 역사로 간주되었다. 하나님의 계시는 이러한 보편역사적 지평 속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Pannenberg에 의하면 계시는 계시의 역사의 처음에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그 마지막에 일어난다. 야웨의 신성은 계시의 사건들이 완전히 종결된 때에 비로소 증명된다. 묵시록의 역사표상에 따라 Pannenberg는 세계의 전 역사가 마지막까지 이르는 종말사건에 의해서 비로소 하나님의 최종적 계시(신성의 인식)가 일어난다고 보았다. Pannenberg는 유대교의 묵시록이 이러한 보편역사에의 개관을 표상했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한 하나님 인식은 역사의 종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가능하다고 확정했다.

그런데 이러한 보편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계시는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에 의해 인식될 수 있다고 Pannenberg는 주장했다. 그러므로 Pannenberg는 Hoffman, Cullmann과 같이 역사를 세속사와 구속사로 구분하지 않고 역사를 보편사로 간주하여, 신앙을 지참하지 않고서도 인식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Pannenberg에 의하면 역사의 종말은 (즉 하나님의 신성의 보편적 계시는) 나사렛 예수 안에서 예기적으로 일어났다. 예수의 지상적 선포는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예기(Prolepse)였고, 예수의 부활은 세계 종말시에 일어날 부활의 先取(Antizipation) 행위이다. 물론 예수의 역사 속에서 최종적으로 일어난 계시는 완결된 것이 아니라 예기적인 것이지만, 그래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그 선취적 형식에서 최종적인 계시이다. 예수의 촐현은 종말론적 성격을 지니고, 그의 운명은 종말론적 성격을 지닌다. 그의 인격 속에서 모든 시대의 종말에 나타날 하나님의 신성의 최종적 계시가 먼저 사건이 되었다(Vorwegereignis : 先取적 종말론). 예수는 종말적 하나님의 계시자이고 예수의 부활은 종말자체의 도래(여명)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항상 이미 역사종말의 선취에서부터 살고 있다.

7) 계시의 종말론

(J. Moltmann : Theologie der Hoffnung/희망의 신학, 1964)

몰트만에 의하면 기독교의 종말론은 기독교의 희망론을 의미한다. 종말론은 올바른 신학의 마지막, 부록이 아니라, 그 시작이다.

"기독교는 다만 부록으로서만 종말론이 아니라, 전적으로 완전히, 앞을 향한 희망, 전망 및 실천이고,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또한 현재의 변혁과 갱신이다. 종말론적인 것은 기독교에 덧붙여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매체이며, 모든 소리가 집중되어 조율되는 원음(原音, Ton)이고,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 기대되는 새날의 여명의 색깔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래도록 종말론을 '마지막 일들에 관한 가르침'이나 '최후적인 것들에 관한 가르침'으로 불러오면서, 이 마지막 일들을 언젠가 마지막날에 세상, 역사 및 인간 위로 돌입해 올 사건으로 이해했다. 이 사건들은 역사의 피안에서부터 차안으로 뚫고 들어와서, 모든 것들이 일어나고 움직이는 장소인 역사를 끝장 낼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이러한 사건들이 '마지막 날'로 연기됨으로써, 그것들은 종말의 이쪽에서 역사 속에서 영위되는 모든 날들을 위한 그 지시적, 고무적, 비판적 의미를 상실하고 말았다."

기독교 신앙이 전수해 준 성서적 증언은 이 땅을 위한 메시야적 희망으로 넘쳐흐

르는 것인데, 자신을 지탱하는 이 미래의 희망을 그 삶으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이 희망은 곧장 교회로부터 벗어나가게 되었고 결국에는 희망의 왜곡된 형태로써 항상 교회를 대항하면서 되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종말론은 본래 기독교교설의 한 부분일 수가 없다. 오히려 모든 기독교적 선포, 기독교적 실존, 전 교회의 특징은 종말론적인 성격을 갖추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신학은 오직 하나만의 실제적 문제, 즉 미래의 문제만을 가질 뿐이다. 왜냐하면 희망에 관한 성서적 증언들 속에서 우리에게 타자로서, 즉 우리가 주어진 세계와 기존 경험으로부터 고안하고 묘사할 수 없는 자로서 다가오는 것은 새로운 것의 약속,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은 세계 내적인 하나님이나 세계 외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희망의 하나님'(롬 15:13), '미래를 존재의 속성으로' 가지는(E. Bloch) 하나님이다.

그런데 기독교의 종말론은 미래 일반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고 특정한 역사적 현실에서부터 출발하여 그 미래, 그 미래적 가능성, 그 미래적 힘을 고지한다. 즉 기독교의 종말론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미래에 관해 말한다. 그것은 예수의 부활의 현실을 인식하고 부활한 자의 미래를 선포한다. 그러므로 미래에 관한 모든 진술을 예수의 인격과 역사 안에서 정초하는 일이야말로 종말론적, 유토피아적 정신의 시금석이다.(11-13)

그런데 몰트만에 의하면 기독교의 종말론의 본래적 언어는 그리스적 로고스가 아니라 약속이다. 이 약속은 이스라엘의 언어, 희망, 경험에 의해 각인된 것으로서, 이스라엘은 영원한 현재의 나타남의 로고스에서가 아니라 희망을 기초하는 약속의 언어 속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발견했다. 그러므로 약속의 언어 속에 있는 기독교의 종말론이야말로 기독교 진리를 풀 수 있는 본질적인 열쇠가 된다.(34-35)

몰트만은 V.Maag(Malkut Jhwh), W.Zimmerli(Verheißung und Erfüllung, Offenbarung im Alten Testament), G. von Rad (Theologie. des A.T), M.Buber(Königstum Gottes, Der Glaube der Propheten) 등의 신학의 입장에 동조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말과 명제는 철저히 '하나님의 약속'의 명제와 결합되어 있다"고 했다. 하나님은 자신을 약속의 방식으로, 약속의 역사 속에서 계시하신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신앙의 특이한 특성인 '약속의 종교'가 이스라엘 주변세계의 계시된 신들의 '에피파니의 종교들'로부터 구별되게 된다.(36)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나타남은 직접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의 사건과 결부되어 있다.(89)

그런데 신학적 사고의 매체인 종말론을 상실한 것은 결국 기독교가 그 주변세계에 적응하고 그리하여 스스로 신앙을 단념(포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위한 조건이 되었다. 즉 신학적 사고에서 기독교가 그리스의 정신 속으로 흡수됨으로써 자신의 종말론적 희망의 비판적 능력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35) 몰트만은 현대신학에서도 여전히 종말론의 사고가 온통 그리스적 정신의 사고형태를 띄고 있다고 지적て비판했다.

?바르트의 종말론 비판 : 바르트의 초월적 종말론(마지막은 근원과 같은 뜻이 되었고, 종말은 영원에 의한 시간의 초월적 제한이 되었다. 모든 시간에 종말이 가까왔다고 말할 수 있다. 종말은 원역사와 같은 뜻이 되었다.)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와 결부되어 있다. 즉 하나님은 하나님을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는 바르트의 명제는 신플라톤적 영지주의에서 온 것으로서 중세기 신비주의의 명상과 헤겔의 종교철학에서도 나타났다. 그것은 그리스의 종교철학의 지반 위에 있는 절대자의 자기반성의 최고의 단계를 표현한다. 여기서 종말개념에 관해서도 계시개념에 관해서도 하나님의 진리가 약속된 미래의 묵시로서가 아니라 영원한 현재의 나타남으로 생각되었다.(49) 그 하나님은 파르메니데스(Parmenides)의 하나님이다 (유일한 존재는 현재에 전체로서 존재한다. 그의 진리는 '현재에' 있고, 그의 영원은 현재이다).(23)

?불트만의 실존적 종말론, 실존적 신증명 비판 : 종말론은 역사의 목표로서는 완전히 그 의미를 상실하고 결국 개인의 존재의 목표로서 이해되어 있다.(53f.) 주관적 확실성의 체험 안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반성철학의 산물이며(55), 신앙 그 자체가 사실상 역사의 종말이고, 신앙하는 자는 이미 그 자신이 성취한 자이기 때문에 더 이상 기다려야 할 것이 없다는 식으로 이해된 종말론은 '영원한 현재의 나타남'의 새로운 형태로 바뀌어진 것이다.(59)

?Pannenberg의 하나님의 간접적 자기계시로서의 역사이해 비판 : 역사로서의 계시는 전체의 현실에의 물음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물음으로서, 우주로부터의 하나님의 증명에서 비롯한 것이다.(67) 이 보편사적 신학은 분명히 그리스의 우주론적 신학의 확대와 그 추월이다.(68) 역사가 역사의 마지막에서 하나님의 간접적인 계시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전체로서의 실재인 역사이해), 이것은 희랍의 우주론적 신학의 사고구조가 종말론적으로 적용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69)

그리고 만일 예수의 부활의 운명만이 역사의 종말에 앞서서 일어난 사건, 그 선취, 예기라고 한다면, 부활한 예수 자신은 어떤 미래도 가지지 못할 것이며, 교회가 기다릴 것은 예수 자신이 아니고 그의 운명의 반복일 뿐일 것이다.(72f.) 여기엔 약속과 성취라는 근본인식이 포기되어 있다. 그러나 몰트만에 의하면 부활사건은 근본적으로 종말론적인 약속과 그 약속의 미래의 성격을 갖는다. 예수의 부활은 단지 종말의 만인부활의 첫 사례(Fall)가 아니라 그 시작(근원 ; Anfang, Ursprung)으로 이해되어야 한다(73). 그리고 신학자는 단순히 세계, 역사, 인간을 다만 다르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갱신의 기대 속에서 그것을 갱신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74) 역사의식은 파송(사명)의식이고, 역사에 관한 지식은 변혁의 지식이다.(79)

기독교의 종말론의 근거와 시금석인 부활한 예수의 미래가 가지는 약속의 내용은 무엇인가? 예수의 약속의 빛 아래서 그의 미래는 다음과 같은 것으로 앞당겨 비추어진다.

ⅰ) 하나님의 義의 약속 :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의 사건 속에서 자기의 의로움을 획득하신다.

ⅱ)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부터 비롯되는 생명의 약속 : 하나님에 의해 버림받은 것의 극복, 심판과 저주의 극복, 약속되고 찬양 받는 생의 완성의 시작, 부정의 부정(헤 겔).

ⅲ) 새로운 존재의 전체성 속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약속 :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지배의 약속 : 인간의 자유, 만물의 구원과 평화, 행복, 생명을 의미함.(184f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