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개인의 종말론

 

1) 죽은 자의 부활기대(죽음과 삶에 대한 성서적 이해)

 

(1) 구약성서의 삶과 죽음 이해

① 최상의 은사로서의 삶(생명)

구약성서에서 생명(삶)은 은사, 실로 최상의 은사다. 장수, 충만한 삶, 후손에 이어지는 생명은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최상의 은사다. 삶은 축복과 동의어이다. 삶은 생명을 누리는 기쁨이며, 이 기쁨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구하는 자들에게 생명이 약속되었다(암 5:4). 그래서 빵과 다른 음식물만이 아니라 특히 하나님의 말씀도 삶의 양식으로 이해되기까지 했다. 이러한 생각 배후에는 하나님 자신이 오로지 살아있는 자라는 표상이 깔려 있다(하나님은 생명의 원천이다).

비교적 후기의 문서에서 "당신의 은혜는 생명보다 더 낫다"(시 63:4)라고 한 것은 이로부터 이해될 수 있다. 은총이 생명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은총과 생명은 함께 속한 것이었다. 은총은 생명을 의미했다. 하나님의 은총은 생명의 주이신 하나님에의 참여로 이해될 수 있다는 점에서 볼 때, 은총과 생명이 분리된 것은 이해할 만하다.

하나님이 오로지 살아있는 자로서 생명의 원천이라면, 하나님을 지나쳐서는 생명을 소유할 수 없다. 하나님만이 죽음을 주장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고 그것을 도로 취하신다(시 104:29ff, 욥 34:14f.).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생기를 주셨기에 인간이 살 수 있는 것처럼(창 2:7),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명의 연수도 주신다(창 6:3). 인간의 생명년수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시 31:16, 139:16). 인간의 생명은 이처럼 O.T에서 산 자의 소유가 아니라 은혜였다. 인간이 그 자신의 주인이 아니다. 인간이 자신의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인간적 결핍이 아니라, 인간은 오직 관계 속에서만 살 수 있다는 것,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맺지 않고서는 자기 자신과도 관계맺지 못한다는 것을 지시한다. 우리가 항상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과 세계와 관련을 맺고 있다면, 우리는 구체적 행동 가운데서 하나님과 세상과 관련맺는다. 인간이 세상과 자기 자신에게 이르려고 한다면, 다시 말하면 인간이 살고자 한다면,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와 관련을 지어야 한다. "들어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리라!"(사 55:3)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을 들음으로써 생명을 영위하는 모든 관계의 원천과 관계맺는다. 그렇게 관계를 올바로 맺고 사는 자는 의로운 자이고 그래서 제사장들에 의해 의롭다고 선언되었다. 그리고 의로운 자는 살 것이다(출 18:5, 느 9:29, 합 2:4, 겔 18:5-9). 올바른 관계를 맺지 않고 살고 그렇기에 의롭다고 인정받지 못한 자들은 죽을 것이라고 했다(그렇기 때문에 생명은 신학적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로 이해됨).

 

② 죽음에 대한 구약성서적 입장

그리스도교에서와 마찬가지로 구약성서(유대교)에서도 죽음이해는 매우 다양하고 때로는 모순되기도 하여, 일관된 죽음이해는 없다.

가장 오래된 증언에 의하면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과 맺는 생생한 교제 안에서 죽음이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보여진다.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서의 충만한 삶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불평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순종적인 삶이었다. 마찬가지로 죽음도 또한 하나님의 뜻(지령)으로 순순히 받아들여야 했다. 죽음은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서 오래 산 삶의 자연스럽고도 취소할 수 없는 종말로 간주되었다. 젊은 때의 죽음과 타지에서의 죽음은 하나님에 대항한 행동에 대한 형벌로 간주되었으나, 노년기에 맞는 '자연적인 죽음'은 그다지 충격적으로 느끼지 않았다. 그리고 죽은 후의 개별인간의 운명에 대해서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O.T에서는 죽음에 대하여 아주 담담하게 '모든 세상 길의 덧없음', '자기 선조들 옆에 누워 휴식함', '곡식이 영글어 타작마당에 이름'과 같은(욥 5:26) 성숙한 상태에서 무덤에 행진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다가 점차 죽음을 불행한 것으로 여기는 단계가 나타났다. 비록 죽음이 하나님의 개입의 탓이긴 하지만, 이제 죽음은 비통하고 힘겨운 것, 하나님과의 생명관계가 파멸되는 허무한 것으로 음울하게 묘사되기 시작했다. 잠깐 사이에 지나가 버리는 그림자, 아침이슬, 허무한 잡초, 흘러가는 물 등과 같이 짧은 인생을 한탄하기 시작했다(시 90:3-12, 전 9:1-6).

그러다가 죽은 사람이 내려가는 곳이라고 생각된 '지하세계'에 대한 이스라엘 주변세계의 표상이 이스라엘 안으로 스며들어온 것 같다. 비교적 후기에 이르러서 '쉐올(Scheol)'이라고 불리는 죽은 자들의 나라가 신학적으로 사유화되기 시작했다. 인간은 죽은 후에 먼지와 그늘의 나라, 지하세계인 쉐올로 내려간다. 인간이 땅에서 선하게 살든 악하게 살든, 부자든 빈자든, 늙어서 죽든 젊어서 죽든, 지하세계에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교제없이 그늘진 무상한 실존을 영위한다. 죽은 자는 더 이상 주를 찬양하지 못한다. 하나님도 죽은 자를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신다. 죽은 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벗어나서 망각의 땅에서 산다(시 88:6). 쉐올에 거하는 것은 지상의 비통한 삶보다도 더 가련한 것이다(전 9:3-6). 이러한 생각은 분명히 서양て헬라적 '영혼불멸'의 관념과 철저히 대립된다. 전 인간이 완전한 교제단절 속에서 죽는다.

?메소포타미아의 지하세계 신화가 O.T의 쉐올표상에 끼친 영향은 바벨론 신화와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이스타르가 지하세계로 내려간 이야기) - 이스타르(바벨론의 사랑과 전쟁의 여신)는 자하세계의 여신의 나라인 되돌아올 수 없는 나라를 생각하며 찾는다. 바벨론의 달의 신(神) 신(sin)의 딸은 아무도 떠나지 못하는 집, 되돌아올 길이 없는 도로, 빛이 없고 먼지를 먹고 흙을 양식으로 삼는 집, 어둠 속에서 새의 깃털로써 옷 입고 지내는 먼지로 가득찬 집을 생각하며 찾는다. 이스타르가 되돌아올 수 없는 나라에 이르렀을 때, 그는 문지기에게 그처럼 말했다. 그렇지만 메소포타미아의 신화표상과는 달리 O.T의 쉐올에는 신이나 신적인 권세가 없다.

쉐올에서는 죽은 자들이 마치 학살된 자같이 드러누워 있어,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는 기억하시지 않고, 그들을 돌보시지도 않는다(시 88:6). 하나님은 죽은 이들을 위해 기적을 행하시지 않으며 죽은 이들은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한다. 무덤 속에는 하나님의 선하심, 성실하심이 이야기되지 못하고, 망각의 땅에선 하나님이 은총이 드러나지 않는다.(시 88:11-13) 사람의 운명은 짐승의 운명과 다를 바 없다. 다 티끌에서 왔다가 티끌로 돌아간다(전 3:18-21).

쉐올에 대한 이스라엘의 표상들은 '지혜문학'에서 희랍적 영혼표상과 유대를 맺기에 이르렀다. 하나님에게 쉐올을 지배하는 권세가 부여된 것이다("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 영혼을 지옥에서 구하시리니 이는 나를 데려가시려 함이로다" - 시 49:16). 죽고 난 뒤에도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의 영광 속에서 게속 살아나간다는 확신이 지혜서에서 표현되었다(지혜 3:1-9, "의인들의 영혼은 하나님의 손에 있어서 아무런 고통도 받지 않을 것이다 ? 사람들 눈에 의인들이 벌을 받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들은 불멸의 희망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 충실했던 자들이 사후에도 하나님이 계속 그들에게 충실하게 머물며 하나님과의 친교가 계속된다는 확신은 순전히 희랍적 영혼표상에만 의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갈수록(특히 포수기 후의 문서들, - 시편들, 제 2 이사야) 즉음에 대항하는 희망의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만약 삶이란 '하나님과의 친교'를 의미한다면, 그리고 만약 하나님이 생명과 죽음의 주님이시라면, 왜 이 친교가 죽음 속에서 끝장나야 할까? 왜 하나님은 죽은 자들을 더 이상 생각하시지 않고, 왜 그들은 하나님을 더 이상 찬양하지 못할까? 이것은 분명히 모순이다. 죽음이 자연스럽다는 것은 점차 문제시되었다. 왜냐하면 죽음의 자연성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이 실로 모든 현실의 주님과 창조자이시라면, '하나님과의 교제'와 '야웨 계약에 대한 충실'은 죽음보다 더 강한 것이 아닌가? 불멸에 대한 갈망이 사후의 계속적 생존을 투사한 것이 아니라, 야웨 신앙의 심화가 결과적으로 죽은 자들의 생존을 희망하는 질문을 야기한 것이다. 이로부터 전혀 다른 시편들이 생겨났다.

(시편 16:9-11) " ?그러므로 이 마음, 이 넋이 기쁘고 즐거워 육신마저 걱정없이 사오리다. 어찌 이 목숨을 지하에 버려 두시며, 당신만 사모하는 이 몸을 어찌 썩게 내버려두시리까. 삶의 길을 몸소 가리켜 주시니 당신 모시고 흡족할 기꺼움이, 당신 오른 편에서 누릴 즐거움이 영원합니다"

(시편 73:23-26) " 그러나 나는 항상 당신과 함께 있사오니 당신이 나의 바른 손을 붙잡으셨나이다. 당신은 당신의 충고로 나를 인도하시고, 마침내는 나를 영광 안으로 받아들이겠나이다. 하늘에는 누가 당신 외에 내게 또 있나이까? 또 내가 당신과 함께 있기만 하면, 땅이 내게 반가울 것이 없나이다. 내 살과 내 마음이 힘을 잃어도,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내 마음의 바위시요 나의 몫이시니다. ? 하나님의 곁에 있음이, 하나님이신 주께 내 피신처를 둠이 내게는 좋으니다"

불멸, 영혼, 부활 등에 관한 관념적 표상보다는 야웨의 생명능력에 대한 신앙으로부터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고 그와 함께 있다고 하는 것, 영생에 대한 신뢰와 희망이 생겨났다. 이러한 문맥에서 보편적 야웨의 '왕권'(Königtum Jahwes)이라고 하는 새로운 차원이 인식되었다 : 백성들이 그의 지배 아래에 있듯이, 죽은 자들도 그 앞에 구부려서 그를 경배할 것이다(시 22:29f.) 그의 통치와 그의 나라에는 어떠한 한계도 없고 죽음이나 지하세계의 한계도 없다.

" 만군의 주께서 시온산 위에서 모든 민족에게 잔치를 차려 주시리라. 살진 고기를 굽고 술을 잘 익히고 연한 살코기를 볶고 술을 맑게 걸러 잔치를 차려 주시리라. 이 산 위에서 모든 백성들의 얼굴을 가리우던 너울을 찢으시리라. 모든 민족들을 덮었던 보자기를 찢으시리라. 그리고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 " (사 25:6-8, 삼상 2:6, 신 32:39 비교)


(2) 부활의 희망과 야웨 신앙

죽은 후에 하나님과의 친교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개개인의 확신에도 불구하고 O.T의 초기문서들에는 아직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희망에 관한 분명한 증언들이 발견되지 않는다. 왜 그런가? 가장 결정적인 근거는 야웨신앙에 있다. 이스라엘은 그 주변세계로부터 죽은 자들의 부활기대와 같은 것을 알고 있었다. 바알신앙은 페르샤 종교와 가나안의 풍산신앙 속에서도 익숙한 것이었다. 이사야 묵시록(사 24-27)이 이를 증거하고 있다 : " 그래도 우리는 믿습니다. 이미 죽은 당신의 백성이 다시 살 것입니다. 그 시체들은 다시 일어나고 땅 속에 누워 있는 자들이 깨어나 기뻐 뛸 것입니다. 땅은 반짝이는 이슬에 흠뻑 젖어 죽은 넋들을 다시 솟아나게 할 것입니다"(사 26:19). - 호세아 6:1-3도 참조하라 : "어서 야훼께로 돌아가자! 그분은 우리를 잡아 찢으시지만 아물게 해 주시고, 우리를 치시지만 싸매 주신다. 이틀이 멀다 하고 다시 살려 주시며, 사흘이 멀다 하고 다시 일으켜 주시리니 우리 다 그분 앞에서 복되게 살리라 ? " 여기서 하나님의 부활시키는 능력이 땅을 적시는 봄비와 비교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부활신앙이 해마다 자연이 소생되는 경험과 접맥하고 있음을 본다. 이처럼 이스라엘엔 부활표상이 알려져 있었다. 죽은 자 예배와 죽은 자 소환(초혼)도 비록 공식적으로 배격되고 가증한 것으로 비판받았지만 백성들 속에서 유행하고 있었다(레 19:31, 20:6, 27, 신 18:10f. 삼상 28:3,9,17ff.).

이러한 거부는 두 가지 이유에서 설명된다. 이스라엘에서 야웨는 삶(생명)과 역사의 하나님으로 예배되었지, 죽은 자들과 쉐올의 하나님으로 경배되지 않았다. 하나님은 죽은 자들의 신들의 기능을 떠맡을 수 없었다. 이웃들과는 다른 역사와 생명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백성들 속에 점차로 강력히 관철되었다. 그러기에 모든 종류의 사자예배와 조상숭배는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또 다른 근거는 사자예배는 시간이 흐를수록 이방백성들에게서 고등신들에 대한 신앙을 흡수시켰고, 그래서 사자예배는 실존적으로 매우 더 중요하고도 쉽게 표상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야웨의 유일성의 요구에 맞섰다는 데에 있다. 야웨 신앙을 왜곡시키지 않고 순수히 보존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불멸표상과 부활표상은 배격되었다. 죽음극복을 위한 열망에 맞서서 이스라엘의 신학은 역사적으로 행동하시는 유일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수했다. 후기에 부활희망이 이스라엘 속에서 일어났을 때도, 그것은 결코 영적인 '자기보존욕구'의 투사로서 해석되진 않았다. 불사하고 싶기 때문에 그 욕구를 실현할 목적으로 하나님을 투사한 것이 아니다. 불멸의 열망이 야웨신앙과 어떻게 결합될 수 있는지를 몰랐기 때문에, 사람들은 오래도록 불멸이론을 포기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침묵하는 죽음의 비밀을 그대로 놓아두었다. 하나님이 삶과 죽음의 주로서 경험됨으로써, 비로소 이스라엘은 죽음을 넘어선 희망을 죽은 자들의 부활로서 설명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러한 희망이 신학적으로 전개되는 형태를 이루게 되었는가? 우리는 보편적인 야웨의 생명능력과 죽은 자의 허무함 간의 대립이 일찍부터 인식되었고, 그것은 죽음의 자연성도 상대화했다는 것을 보았다. 부활신앙에 대한 체계적 신앙이 일어난 것은 죽음의 문제를 하나님의 義의 문제와 결합함으로써 비로소 이루어졌다. 의로운 하나님이 어떻게 죽은 의로운 자들과의 친교를 단숨에 무너뜨릴 수 있는가? 그리고 순교자들의 조기사망은 무의미한 것으로 경험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한 죽음에 죄인들이나 의인들이나 다 똑같이 굴복한다면, 그것은 오로지 저주, 죄의 결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고 하나님을 모르는 죄의 실증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운명이 어떻게 의로운 자에게 닥쳐올 수 있는가? 여기엔 하나님의 義와의 분명한 모순이 있지 아니한가? 그러한 갈등 속에서는 소박한 직접적 응보신앙이 무너질 수 밖에 없었다.

이 세상 속의 하나님의 義에 관한 질문 즉 '신정론('神正論) 문제'는 신앙의 위기를 초래한다(포수기 후의 문서들, 시편, 지혜서, 욥기, 전도서). 전도서에는 이 문제가 깊은 회의로 인도한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삶의 의미에 대한 궁극적 신뢰를 무너뜨리진 못한다. 그와 달리 욥은 경험되는 하나님에 맞서서 신앙된 하나님을 희망하고서 알지 못한 자를 신뢰한다. 제 2 이사야는 하나님의 종의 노래에서(52:13-53:12) 아마도 이 문제에 대해 가장 심원한 대답을 준 것 같다. 하나님의 종의 치욕스러운 죽음은 다른 이를 위한 대리적 고난으로 해석됨으로써, 긍정적 의미를 얻는다. 의인은 다른 이들을 위해 고난당하고 죽으며, 그리하여 그들에게 생명을 얻도록 열어주며 의로 인도한다. 여기선 의로운 자에게도 새로운 생명이 하나님에 의해 약속된다. 하나님은 바로 의인의 죽음 속에서 죄인들과 의인들을 위해 의로운 자로 드러내신다.

이러한 대리적 고난의 신학에는 부활희망의 핵심이 분명히 담겨있다. 의로운 자의 처참한 죽음과 하나님의 義는 서로 결합되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의로운 자에게 새 생명을 선사하시기 때문이다. - 죽음의 고난을 통해서라도. 하나님과의 친교는 죽음보다 더 강하다. 이 본래적인 친교의 현실 앞에서 죽음의 현실은 물러갈 수 밖에 없다.

이로서 부활신앙의 신학적 근거가 놓여지게 된다. 이러한 희망의 다양한 표상들은 이스라엘 바깥세계의 다양한 영향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유대적 묵시문학의 체계적 발전으로부터 유래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분명한 희망의 모습이 생겨난 또 다른 근거는 새로운 역사적 상황이다. 셀류키드 통치(약 주전 200년)는 이스라엘 백성을 새로운 역사경험(완전한 정치적 무력)으로 인도했다. 그러므로 이젠 역사로부터, 역사 속의 하나님의 행동으로부터 아무런 것을 기대할 수 없었다. 희망이 있다면, 이 역사의 너머에서부터 새로운 역사와 세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희망 뿐이다. 그 속에서만 하나님의 의가 관철될 것이다. 역사 내적인 응보관계가 무너졌기 때문에 오로지 새 창조 이후에야 진정한 의미의 '생명'이 하나님과의 친교로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다가 특히 충실하고 의롭게 경건한 자들에게 가해진 처참한 박해의 경험이 주어졌다. 이제는 육체적 생명을 택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율법에의 충실 즉 하나님과의 친교를 택하여 결국엔 육체의 죽음을 치르느냐 하는 결단 앞에 놓여졌다. 그들은 후자를 선택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로지 그 속에서만 본래적인 생명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 생명은 이러한 상황에선 특히 '죽은 자의 부활'의 표상에서 표현되었다. 그 속에서 진정한 생명, 하나님과의 친교가 지속된다(마카비 후서 7:9., 14, 22f. 29, 36, 다니엘 12:2f., 13). 순교는 진정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가능케 한다.

?묵시문학 속의 죽은 자의 부활의 표상 : 대개의 문서들에서 부활생명의 영역으로서 희망된 곳은 새롭게 창조된 세계였다. 부활은 비역사적, 천상적 피안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이 옛 시대가 무너진 후 이 땅은 낙원과 같이 새롭게 창조될 것이다. 후기 묵시문학에서는 물론 부활생명의 영역에 대한 표상이 점차 영성화되기도 했다. 그래서 그 영역은 절대적으로 초월적인 천상적 세계로 옮겨가기도 했다.

묵시문학은 육체적 부활을 기대했다. 그래도 이 희망은 몸과 영혼의 재결합의 형상으로 표상되진 않았다(이것은 유대교에선 낯선 인간학이다). 오히려 이 희망은 쉐올의 그늘진 육체 없는 존재를 다시 생기있게 만드는 것, 몸, 다시 말하면 '전' 인간과 그 생명의 새 창조로서 표상되었다. 이 새 창조는 자궁 속에 있는 몸의 첫 출생과 유사한 것으로 간주되었다(마카비 후서 7:22).

죽은 순교자들의 부활희망이 늦어지는 경험은 부활이 일어날 때까지 머무는 장소에 관한 다양한 표상들을 산출했다(중간상태에 관한 생각). 이로 인해 물론 쉐올을 세분화하는 결과가 초래됐다. 에디오피아 에녹서에서는 쉐올은 서쪽에, 즉 해지는 곳에 있다. 그것은 4개의 다른 동굴을 가진 산인데, 죄인들은 죄의 중함에 따라 어두운 방에 가고, 의인들은 밝은 방으로 가서 산다. 게다가 이 방은 시원한 샘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랍비 유대교에선 죽음 바로 후에 심판이 일어나고, 그 심판에 근거해서 인간들은 두 종류의 길을 간다고 생각되었다. 한 부류는 에덴 낙원(눅 23:43)으로 가고, 다른 부류는 게힌놈, 저주의 장소로 간다.

의인들의 거처에 대한 다른 표상들도 유행했는데, 예를 들면, 하나님과 함께 있는 영혼의 보물실, 하나님의 보화, 제단 아래서 대기함(계 6:9) 혹은 아브라함의 품에 안김(눅 16:19-29)이 있다.


(3) 신약성서의 죽음 이해, 부활 이해

N.T에서는 O.T에서 주변적인 위치를 차지했던 것 즉 죽은 자들의 부활이 강력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죽음에 대해 승리하셨다는 확신에 뿌리박고 있다. N.T에서는 하나님과 죽음이 서로 대적, 원수로 쓰여졌다. 하나님과 죽음간의 대결을 보여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이다. 죽음에 대한 N.T의 태도는 온통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에 대한 입장에 의해 결정된다. 죽음에 대한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결정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결정된 것은 그의 부활 속에서 계시되었다.

*막 12:27 -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인간이 죽은 뒤에도 그를 버리지 않으며, 충실한 자들과 삶의 친 교를 계속 유지하신다는 확신)

*마 8:11 - 많은 사람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 께 잔치에 참석할 것이다.

바울은 감옥에서 임박해오는 순교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그리스도가 선포됨을 기뻐하고,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영광받을 것임을 확신했다. 왜냐하면 그에게서 생명은 그리스도이고 죽음도 유익이기 때문이다(빌 1:20f.). O.T와는 반대로 여기서 삶과 죽음이 상대화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O.T에서는 죽은 자는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한다(사 38:18f.). 그러나 바울은 예수가 주는 의미를 통해 다르게 판단했다. 예수를 통해 삶과 죽음의 관계가 새로이 정립되었다. 삶과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규정된 것이다. 그와 일치하는 바울의 다른 말들도, 우리가 사나 죽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에 있고, 그래서 죽음도(그리고 어떠한 권세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놓을 수 없노라고 했다(롬 14:8f. 8:31f.). 삶과 죽음은 더 이상 하나님과 인간 간의 관계의 척도가 아니다. 유일한 척도는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에 대한 믿음이다. 그리스도는 죽고 살아나서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었다(롬 14:9). 그리스도는 죽은 자로부터 일으킴 받아 더 이상 죽지 않는다. 죽음이 이젠 더 이상 그의 주인노릇을 하지 못한다(롬 6:9).

이러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받은 자가 그와 함께 죽었고 또 그와 함께 살게 될 것임을 확신하는 근거가 되었다. 믿는 자는 비록 그가 죽게 되더라도 이젠 이미 죽음을 극복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지금의 삶은 그 자신의 삶이 아니다. "내가 산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속에서 그리스도가 산 것이다"(갈 2:20) 예수 그리스도가 그에게 속한 자들에게 자신의 생명에의 참여를 허락한 의미에서, 그들도 비록 죽어야 하지만 죽음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죽음은 이제 생명과 경쟁하지 못한다. 믿는 자에게 저주의 죽음이 방면되었다. 인간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후 5:17).

요한도 말했다 :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라 "(요 11:25f.).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낸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심판을 받지 아니하리니, 그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웠음이라"(요 5:24).

 

2) 완성의 개인적 주체

이 절의 주제는 경험적인 죽음체험(인간의 육체는 해체되고 사라짐)과 신학적 죽음해석(죽음은 인간이 궁극적으로 하나님 곁에 들림받는 출입구임) 간에 존재하는 모순에서부터 나온다. 누가 혹은 무엇이 실제로 멸망하는가? 누가 혹은 무엇이 들림받는가(고양되는가)? 그것은 인간의 기본입장, 생애사, 인격적 - 영적 자아, 영혼, 전 인간인가? 그런데 사실 분명한 것은 몸은 없어지는 게 아닌가?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 속에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을 신뢰함으로써, 그리고 이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을 신뢰함으로써, 과거에 추측과 예상 속에서 죽음 속에서 일어나는 완성의 사건을 이야기하던 것들에 관해 해명해 보고자 한다. 그런 추측과 예상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의 참여희망을 이해하고 해명해 보려는 시도였다. 이 희망의 전통 속에서 완성의 개인적 주체에 관한 질문이 강력히 제기되고 다양하게 답변되었다.

 

(1) 영혼의 불멸 - 육신의 부활(교부들)

고대 교회는 영지주의와 대적하면서도 매우 이원론적인 인간학을 대변하고 있었다. 영혼은 인간 속에 있는 천상적て영적인 영원한 실체, 인간의 본래적 자아로 이해되었고, 그 반면에 몸은 단지 지상적て육체적인 무상한 인간형태 즉 타락한 자아의 형태로 이해되었다. 역사란 이에 따라 영혼이 몸과 결합하도록 추방된 것으로 이해되었고, 그 반면에 죽음은 영혼이 몸과 역사로부터 해방되는 것, 영원한 영의 나라로 귀환하는 것, 천상에로의 여행의 시작으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영지주의적 이원론의 체험토대는 부분적으로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모든 물질적 존재의 무상함, 부패성의 체험 + 몸의 부패성을 초월할 수 있는 영적て인격적 인식て의지원리의 체험).

Calvin : 죽음은 혼과 육의 분리로 표현됨. 영혼의 불멸, 육의 감옥으로부터의 석방, 육체 로부터의 해방, 육체는 영혼의 감옥. - 칼빈의 영성화 경향, 이원론, 몸의 평가절하. 성서는 인간본성의 일부분으로서 영혼이 불멸한 것으로 창조되었다고 전혀 언급하지 않음(비성서 적, 플라톤적). N.T에서 죽음의 문제는 부활(육체의 부활)에 의해 해결됨.< 칼빈의 종말론, H.퀴스토르프 >

그렇지만 기독교신학은 결코 이원론적 경험에서 귀결되는 역사와 몸(육체)의 신학적 평가절하에 만족할 수 없었다. 기독교 신학은 그 첫 단계에서는 물론 헬라て영지주의 철학의 몸 - 영혼의 도식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 주제에 대립하기도 했다 : 즉 죽음 속에서 영혼은 몸과 분리된다. 그러나 몸은 단지 썩기만 하는 게 아니라, 희망은 몸, 물질, 역사에게도 속해 있다. 영혼만이 아니라 몸, 실로 이 육체까지도 구원, 즉 부활에 이르도록 결정되었다. 물론 지금이 아니라 역사의 마지막에. 미래적인 육신의 부활에 대한 고백은 너무 영성화된 완성의 표상을 회피하기 위해 반영지주의적, 논쟁적 역할을 수행했다. 675년 톨레도(Toledo) 교회총회의 신앙고백은 바로 이 점을 강조했다 : 우리는 우리의 주(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에 따라 모든 죽은 자들이 참으로 육체로서 부활할 것임을 고백한다. 그러나 우리는 공기형태로나 다른 몸으로서 부활할 것을 믿지 않고 우리가 살고 존재하며 움직이는 이 모습 속에서 부활할 것을 믿는다!! 이를 통해 무덤이 열리고 거기 있는 땅속의 주검들이 변화될 것을 포함하는 물질적, 경험적 종말완성의 표상도 암시되었다. 그 당시 상황에서 죽음에서 곧장 영혼과 몸이 완성된다고 가정하는 것은 영지주의나 다름이 없었을 것이고, 부패하는 몸을 멸시하고 완성을 불멸하는 영혼에게 귀속시키는 의도를 표현하는 셈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몸이 부활하기까지 몸과 분리된 영혼에겐 무엇이 일어나는가? 이 문제에 대답하는 시도는 세 가지로 나타났다.

① 죽음과 일반부활 사이에 의인과 순교자가 머물 복스런 중간상태에 관한 유대적て묵시문학적 관념.

② 죽은 자들도 그리스도와의 친교 속에서 숨겨져 있고 그와 함께 거한다는 신약성서의 희망.

(살전 5:10, 롬 14:8)

③ 죽은 자와 산 자와의 동일성을 보장하는 영혼불멸에 관한 플라톤 전통.

먼저 영혼불멸에 관한 표상을 더 상세히 고찰하기로 하자. 이 표상은 오르페우스교(고대 그리스)의 신비종교로부터 본래 유래한 것이고 기원 후 6세기이래 그리스와 소아시아에 널리 퍼졌다. 철학적으로는 그 표상이 먼저 피타고라스와 엠페도클레스에 의해 채택되었고, 그 이후 플라톤에 의해 (소크라테스와의 대화를 다룬 Phaidon에서) 정신사적인 의의를 남긴 희망의 형태로 확장되었다. 플라톤이 종교전통과 생의 사색적 체험으로부터 영혼불멸론을 제시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① 영혼은 인간이 변하는 것들 중에서 불변한 것 즉 선, 진리, 정의의 이데아를 인식할 수 있는 정신적 인식의 능력이다. 영혼이 이것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이데아를 출생이전에 보았기 때문이고, 그런 지식을 그때부터 가지고 있어서 지금은 이 세계의 대상들 속에서 회상의 형식으로 그것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선험적 영혼의 지식은 지상생활 이전의 영혼의 선재(先在)에 기인한 것이다.

② 영혼이 불변한 것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영혼이 이러한 불변성과 친근하고, 실로 그 자체가 불변하고 영원하다고 플라톤은 추정했다. 왜냐하면 고대 인식이론에 의하면 같은 것은 오직 같은 것에 의해서만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③ 그러나 가장 결정적 이유는 영혼이 삶(생명)의 원리라고 플라톤이 본 점에 있다. 영혼 개념은 불가피하게 생명 개념을 함축한다. 그와 함께 죽음 개념은 영혼개념과 화해할 수 없는 대립 속에 있다. 영혼을 가지고서도 죽는 존재란 없다. 인간에게 죽음이 닥치면 영혼은 되돌아가거나 멸망해야 할텐데, 후자가 불가능한 것은 영혼이 생명의 원리로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직 영혼이 죽는 몸으로부터 분리되어 제 자신에게로 되돌아가는 길 밖에 없다. 이 길은 죽음 속에서 주어지는데 그것은 몸의 감옥에서 해방되어 자기 자신의 본래적 상태로 되돌아가는 길이다.

2세기부터 일어난 플라톤의 불멸이론의 기독교신학에의 수용으로 인해 분명한 '수정'이 생겼는데, 특히 인간의 영혼이 단순히 나면서부터 저절로 불멸성을 부여받은 것이 아니라 그 불멸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은사로서 인간이 하나님의 영생에 참여하게 된 은혜의 결과로 간주됨 점이 그러하다. 또 중요한 수정이 일어난 것은 영혼의 '중간상태'에 관한 이론의 발전 속에서이다. 한편으로는 죽음 이후에 그리고 마지막 부활 전에 인간의 숙명이 어떠할 것인가를 해명하는 데에 있어서 그 당시의 헬라적 상황에서 영혼 불멸의 확신이 도움을 줄 수 있었다. 만약 죽음이 영혼과 몸의 분리로 이해된다면, 몸은 조용히 부패하게 되다가 결국 종말에는 부활하여 영광 속에서 변화되어 영혼과 재결합될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과는 반대로 이 불멸하는 영혼은 사후에 즉각 이데아를 보는 축복을 누리지 못한다. 오히려 영혼은 하데스 속에서 일종의 대기상태로 마지막 축복을 기다려야 한다. 이런 대기상태는 자연히 지상의 생활방법에 따라 세분화되었다. 여하튼 그 상태는 무엇보다도 매우 '약화된' 영혼의 축복이다. 처음엔 이런 약화상태로부터 순교자, 애국자, 예언자들은 제외되었다. 그들은 사후 즉시 부활한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영접된다.

그러나 신플라톤사상이 점차 영향을 미치면서 대략 키프리안(3세기 중반)과 특히 어거스틴 이래로(4세기) 이 축복은 모든 선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사후 즉시 약속되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곁에서 누리는 완전한 영혼의 축복이다. 아직도 몸의 부활이 없는 한에서 그것은 아직도 대기상태 속의 축복이다. 그래도 몸의 부활이 영혼의 축복을 어떻게 더 크게 해 주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명확하지 않다.

(그레샤케가 말한 대로) 중간상태론은 기독교의 입장을 영지주의로부터 분리시키는데 유용했다(몸도 구원에 포함된 것). 그러나 이로 인해 종말론적(그리고 영적) 이원론의 성립을 감수해야했다. (실존적으로 경험된 희망은 점차로 죽음, 즉 몸과의 분리 이후에 기대된 영혼의 완전한 축복을 지향했다. 몸으로부터 떠난 이런 영혼이 완성의 주체로 부상된 것이다. 먼 종말로 연기된 몸의 부활의 희망은 점차 희박해지고 힘을 잃어갔다) 오늘날까지도 이런 이해가 남아 있어서, 아직 신플라톤적 구조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조류가 있다.

(2) 부활한 몸의 형태로서의 영혼(토마스 아퀴나스)

스콜라철학 특히 T. Aquinas(1225-1274)에 의해서 종말의 주체는 새롭게 규정되었다. 그는 새로운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을 통해 신플라톤주의의 이원론을 완화시켰다. 그의 인간학적 기본공식은 영혼이 몸의 형태라는 것이다. 영혼과 몸은 본래부터 독립적이었다가 나중에 결합된 두 실체가 아니라 본래 서로 속해 있고 의존되어 있는 한, 인간의 존재원리 즉 형상과 질료다. 형상( =영혼= 인간의 개별적, 영적, 인격적 본질)은 지상과 세상의 가능성을 가진 질료로부터 인간의 몸을 만들어낸다. 영혼은 질료 속에서 나타나고 실현된다. 몸은 영혼의 자기표현이 되고, 영혼은 형상을 주는 몸의 기원이 된다. 오직 두 존재원리의 일치 속에서만 인간은 존재한다.

존재론적으로 불가피한 이러한 일치는 죽음 속에서 깨어진다(죽음은 Thomas에 의해서도 영혼과 몸의 분리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이 분리는 몸으로부터 영혼이 해방되는 것으로 해석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인간됨의 파멸로 해석되었다. 이런 분리 속에서 몸은 무너지지만 영혼은 무너지지 않는다. 영혼은 부활 때까지 부자연스러운 생존을 영위한다. 몸이 부활할 때에만 비로소 한 인간의 완성이 이루어질 수 있다. 지상적 인간과 완성된 인간의 동일성은 오직 이 불멸하는 영혼, 인간됨의 개인적 형태를 통해서만 보장된다. 동시에 마지막 날의 부활 때에 새로운 몸을 일으켜 형성시킬 수 있기 위해서 영혼은 인간의 동일성의 그릇으로서 몸과의 분리 이후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보존된다. 이로부터 완성된 부활의 인간이 생긴다. 영혼은 그 자신의 영적, 불사적 존재의 능력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부름에 근거해서 완성된 부활의 몸의 형상원리가 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학과 신플라톤적, 이원론적 종말론을 독특하게 결합한 토마스는 풀 수 없는 모순을 초래했다.

① 몸과 영혼이 존재론적으로 불가피하게 서로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죽음에서는 양자가 다 사라지는 게 아니라 몸만 사라진다(여기엔 분명 신플라톤적 이원론이 작용하고 있다. → 인간론)

② 사후에 영혼은 몸과 분리되어 부자연스러운 존재로 존속한다. 그러나 그 상태는 동시에 매우 복된 상태로 표현되었다. 그와 달리 몸의 부활은 우연히 축복을 더 높이는 것일 뿐이다(신플라톤적 이원론의 영향 → 종말론). 여기선 기독교의 희망의 비중도 사후의 영혼의 완성에 놓여 있다. 몸과 부자연스럽게 분리되었으나 완전히 복된 영혼은 (새롭게 이루어질 부활의 몸의 형태로서) 본래적인 완성의 주체로 간주되었다.

(3) 선사된(전제되지 않은) 불멸(개신교 - 카톨릭 논쟁)

현대의 개신교 신학에서, 특히 '변증법적 신학' 이래로 순전히 철학적 뿌리를 갖는 불멸이론에 대해 상한 의의가 제기되었다. 즉 인간에게 본래적으로 귀속되는 불멸성이 있다고 하고, 그 본성에 근거한 자기 소유물인 영혼 속에서 불멸을 바라는 것은 죽음마저 넘어서려는 인간의 절대적 자기주장, 자기능력의 의지를 드러낸다. 이 영혼불멸론에는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항하는 죄인의 저항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비난이 꼭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어거스틴에게서 영혼불멸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에 기인한다. 토마스와 교부신학도 영혼이 지상적 몸의 형상원리로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불멸하다고 보았다. 이런 점에서 영혼의 본성도 하나님에 의해 선사된 현실이다.

그렇지만 계몽철학과 독일 관념주의에 대항한 개신교 신학의 항의는 그 나름대로 정당성을 지니고 있다. 많은 자들은 불멸을 인간의 도덕성의 요청으로 간주했다. 인간의 불멸은 윤리적 행동의 긍극적 성취와 완성의 요청으로서, 끝없는 진보의 의미에서, 이성적 본질의 무한히 영속하는 실존과 인격성의 의미에서 인간의 도덕성의 본질에 속한다고 그들은 보았다.(칸트, 실천이성비판)

이런 종류의 불멸이론에 대해 특히 최초의 개신교신학은 저항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무이기 때문이고, 이것은 죽음 속에서 인간이 무로 사라진다는 점에서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인간은 전체적 죽음을 죽는다. 사후에는 신적인 것이나 피조적인 것이나 어떤 것도 남지 않는다(칼 바르트, KD Ⅲ/2, 428) 하나님은 죽은 자들의 부활 속에서, 인간 속에 있는 계속적인 동일성의 그릇이 없이도, 새로운 피조물을 창조하신다. 유일한 피조물의 동일성의 그릇은 하나님이고 그의 피조물에 대한 그의 신실이다. 불멸하는 영혼의 축복 대신에 죽은 자들의 부활이 종말론의 중심에 놓여졌다.

W. Elert에 의하면 부활은 완전한 새 창조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상실존의 완전한 마지막인 죽음을 전제하기 때문이다(Der christliche Glaube, 527).

R. de Puri에 의하면사후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 만약 죽음이 완전한 것이 아니라면, 부활은 완전하지 않는 반쪽의 하나님의 사역이다. 하나님은 몸과 영혼 전체로서 우리를 살리신다. 왜냐하면 우리는 몸과 영혼 전체로서 죽기 때문이다(Die Gegenwart der Ewigken, 117).

Jüngel에 의하면 사후엔 모든 것이 끝장이다. 죽음은 삶의 관계를 완전히 부수어 버리는 관계상실의 사건이다(Tod. 145).

이러한 전멸(全滅)과 무로부터의 완전한 새 창조에 관한 주장에 대한 반론도 제기되었다.(특히 카톨릭 신학에서) 카톨릭 신학도 영생이 인간의 자기능력, 불멸하는 영혼, 혹은 영적 자아의 의지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은사로서 주어진 것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 선물(은사)은 이미 창조에 근거하고 있다. 왜냐하면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다름 아닌 창조자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 속에서도 하나님의 피조물로 남는다.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인간은 하나님에게 의지하면서도 독립적인 존재로 만들어졌다. 이런 선사된 인간의 자아상태는 죄나 죽음을 통해서도 결코 폐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적 긍정은 취소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긍정은 하나님의 의식과 행동 속에만 있지 않고, 피조물에게 파괴될 수 없는 성격을 부여하셔서 하나님의 사랑의 영원성에 참여케 하심으로써, 피조적 현실 가운데 자리잡는다. 그러므로 죽음 속에서 피조물이 전멸할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에 대한 참여의 은사를 도로 거두어 가실 것이 틀림없는데, 그것은 자체 상 모순이다. 이것은 취소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스스로 폐기한 것이 되고 마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 속의 새 창조는 옛 피조물의 완전한 멸망을 거쳐서 일어나지 않고, 전도된 창조관계를 궁극적인 축복의 상태로 되돌려 놓음으로써 일어난다. 그 속에서 최초의 창조자 - 피조물 간의 관계가 유일회적 형태 속에서 성취되었다(그리스도가 아버지에 대한 순종 가운데서 영위한 축복의 상태로 회개함으로써 새 창조가 일어남). 인간이 그리스도에 의해 성화되고 갱신된 창조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한에 있어서, 그는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한 그리스도의 새 창조에 참여한다.

개신교 측에서는 H.G. Pöhlmann도 파괴될 수 없는 인간의 인격성과 형식적 형상(책임적 존재) 안에서 죽음 이전과 이후의 인간존재의 연속성을 보려고 했다. "죽음은 관계상실이 아니라(Jüngel), 인간을 전혀 새로이 자신의 심판자와 구원자와의 관계 속으로 놓는다. ? 하나님은 우리의 지상적 생애의 마지막을 통하여 무로부터 생명으로 불러내신 인격(Person)을 계속 보존하시고, 그것에게 새로운 형태를 주신다. ?기독교 안으로 수용된 고대의 불멸의 개념은 하나님이 인간을 자신과 취소할 수 없는 관계 속에 두신다는 것, 인간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폐기될 수 없는 인격,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 앞의 인간이라는 것, 몸의 죽음마저도 이러한 인간존재의 결정적인 현실을 파괴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확신의 표현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Pöhlmann은 플라톤의 불멸만이 아니라 모든 형태의 불멸을 배척하고 인간의 부활을 내세우는 주장을 신학적으로 그릇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약성서는 이 두 표상을 다 긍정하고, 양자를 종종 하나로 본다는 것이다. Trillhaas에 의하면 "부활신앙은 불멸의 희망을 배제하지 않고 그것을 포함한다. ?전자는 순전히 불멸에 대한 신앙의 형태이다. 불멸과 부활의 관계는 껍데기와 내용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O. Cullmann의 중간상태론(잠자면서 몸의 부활을 기다림)

쿨만은 한편으로 영혼불멸에 대한 신앙을 기독교에 대한 가장 큰 오해로 생각하면서, 이에 맞서서 부활신앙을 대립시켰다 : " 초대 기독교의 사상은 구속사에 근거되어 있으며, 사망과 영원한 삶에 대한 모든 말씀도 시간 안에서 생긴 실제적인 사건에 대한 ? 신앙에 의존한다. ?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영혼은 본질적으로 불멸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통하여서 불멸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 여기에서 희랍사상과의 근본적인 차이가 드러난다고 쿨만은 보았다.

영혼이 불멸하지 않다는 증거를 쿨만은 종종 예화로 사용된 소크라테스와 예수의 죽음을 비교함으로써 끄집어내었다. 소크라테스에겐 육체는 한갓 영혼의 외적인 의복에 지나지 않았고, 그래서 영혼은 육체의 감옥을 벗어남으로써 영원한 세계로 해방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므로 죽음은 위대한 해방자이다. 죽음은 영혼의 고향회귀이므로, 육의 붕괴와 함께 영혼이 붕괴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두려워함이 없이 당당히 죽었다.

그러나 예수는 철두철미 인간이었기에 죽음의 공포를 가졌다. 그는 죽음을 목도하고 답답히 여겼고(눅 12:50), 그 죽음을 피하길 간구했고(막 14:36), 마지막 날엔 홀로 있기를 두려워하여 제자들도 깨어있길 요구할 만큼 연약했으며(막 14:37), 죽음에 직면하여 울부짖었으며(히 5:7), 죽음을 맛보면서 하나님께 절규하며 죽었다(막 15:37). 여기에 희랍사상과 기독교 사상의 차이가 분명히 드러나 있다고 쿨만은 보았다. 쿨만에 의하면 인간은 통전적 인간(統全的 人間)으로서, 단순히 불멸의 영혼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육체와 영혼이 죽은 후 하나님께서 새로운 신적인 창조행위를 통해서 다시금 통전적 인간으로 살게 됨으로써 영원히 살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쿨만은 우리가 희랍사상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했다. 부활, 진실로 죽었던 통전적 인간이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행위로 생명을 회복하는 데서 창조의 기적이 일어난다.

그런데 쿨만은 다른 한편으로는 죽음과 부활 사이의 중간상태를 나타내는 은유들(?) - 그리스도와 함께 있음(빌 1:23), 낙원에 있음(눅 23:48), 아브라함의 품에 있음(눅 16:22), 제단 밑에서 자고 있음(계 6:9), 죽은 자들이 잠자고 있음(고후 5:1-10) -을 근거로 삼아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도 부활에 참여하고 있고, 비록 잠자는 상태에라도 죽은 자들이 그리스도와 가까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어 저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궁극적 부활에 더 가까이 가 있다고 말함으로써, 여전히 희랍사상과 유사한 개념들을 사용했다. 즉 쿨만은 영혼불멸에 대한 유사성을 특히 요한복음에서 찾을 수 있다고 했다(3:36, 4:14, 6:54 - 희랍사상의 영향이 아닐까?). 영혼은(즉 속 사람은) 그 변화된 상태에서, 잠자는 상태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산다.

그러나 쿨만은 이 잠자는 중간상태는 영혼불멸과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의 상태는 아직도 불완전한 것, 벌거벗은 상태, 잠자는 상태, 몸의 부활을 기다리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 이상 자세한 언급은 N.T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여하튼 죽은 자들도 잠자는 상태 속에서 '시간 안에서' 부활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견해는 전제되지 않은, 선사된 불멸에 대한 쿨만의 독특한 해석지만, 여전히 모순과 긴장을 자체 안에 안고 있다.(통전적 인간 이해와 몸이 없는 벌거벗은 상태의 영혼 간의 모순!!)


(4) 죽음 속에서의 부활(현대 카톨릭 신학)

(J. Ratzinger, L. Scheffczyk, G. Greshake 등)

지난 40여년 간 카톨릭 신학에서는 '영혼 불멸'과 '몸의 부활'의 관계를 새롭게 해석하려는 시도들이 이루어졌다. 특히 K. Rahner에 의해 영감받은 새 해석의 기본관심을 요약하자면 : '하나의' 인간은 (몸을 가진 인격체로서) 그리스도로부터 오직 '하나의' 죽음극복의 희망, 즉 예수의 부활에의 참여인 '부활'의 희망을 가지고 있다. 몸을 떠난 불멸하는 영혼의 축복이 희망의 목적이 아니라, 죽음을 극복하는, 부활한 그리스도와의 전인적 친교가 희망의 목적이 될 수 있다.

원초적인 성서의 희망사신에 되돌아감으로써, 인간론과 종말론에서 매우 강한 영향을 끼쳤던 이원론적 경향은 이전보다 더 많이 지양되어야 한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 영혼불멸과 몸의 부활을 서로 동일시함으로써, ⓑ 그리고 이러한 '하나의' 완성사건이 이미 개개인의 죽음에서 일어나기 시작함으로써 가능하다. 다시 말하면, 신앙하는 인간이 죽음 속에서 희망하는 완성(즉 인간의 생애사가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긍극적으로 들림받는 것)은 '죽은 자들의 부활'과 동일시된다.

인간이 죽음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희망하는 것은 단순히 몸을 벗어난 영혼이 누리는 첫 번째 완성의 단계의 축복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개인적 완성의 처음이며 전부이다. 바울이 말한, 죽음을 넘어 존속하는 '그리스도와의 친교'는 - 모든 시대적 제약을 받은 묵시적 표상들이 제거된 것 - 동시에 죽은 자들의 부활이기도 하다. 성서와 고대교회의 다양한 종말론표상들이 그 내용에서 동일시되고, 단지 시대적으로 연속적인 표상들로서 체계화되지 않는다.(즉 영혼의 그리스도와의 친교 → 마지막 날의 몸의 부활과 전 인간의 회복의 연속으로 체계화되지 않음)

그렇지만 이러한 동일화엔 분명한 문제가 있다 : 사실상 경험적으로 볼 때 죽음 속에서도 분명히 부활하지 않는 인간의 '몸'(Leib)은 어떻게 되는가? 몸은 결국 완성의 희망이 없이 완전한 부패에 내맡겨지지 않는가? 그런데 현금의 카톨릭 신학은 부패한 시체가 다시 살아나거나 변화 혹은 재창조된다는 표상을 버렸다. 이것은 신체(Körper)와 몸(Leib) 사이를 분리하는 인간학에 근거해 있다. '신체'란 공간과 시간 속에 자리잡고 있는 순수한 물질적인 인간의 현실을 말한다(즉 피부, 살, 피, 뼈와 같이 생물학적て화학적 실체로서 지구상의 다른 생명체와 함께 공유하고 있는 것). 그와 달리 '몸'이란 훨씬 더 넓은 개념으로서 인격체로서의 인간의 전체적인 세상적, 역사적, 물질적 자아(Selbst)를 표현하는 것이다. 이 몸은 완성된 부활생명의 본질적인, 포기할 수 없는 요소다. '신체적인 것'은 그 자체 상 땅과 부패와 재생의 생물학적 법칙에 예속해 있다. 그렇기에 시공간 속에서 경험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현재의 몸과 같이 볼 수 있는, '신체적인' 모습을 띤 부활의 몸에 대한 표상은 포기된다 : "죽음 속에서 이루어지는 부활이란 가시적인 육신이 변모한다는 의미에서의 부활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현 육신은 시체로서 땅 속에 매장된다. 육신(몸)의 부활이 신체의 부활이나 시체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육신부활이란 전인이 죽음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의 구체적인 세계와 함께 새로운 미래를 부여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 미래를 상상할 수가 없다. ? 우리는 죽음을 초월하는 미래가 어떤 것인지를 모르며, 또 알 필요도 없다"(G. Greshake, Srärker als der Tod. 심상태, 종말신앙, 100). 이러한 부활의 몸의 재해석에도 분명히 몸의 신체적 요소를 '영성화'(Spirirualisierung)하는 문제가 있다(영혼의 불멸을 인간론, 우주론적으로 청소함?).

평가

 

장 점

단 점

(1) 이론

 존재의 동일성에 대한 확신을 보존함

 비성서적, 이원론적임

(2) 이론

 유대적 인간이해에 충실함(全人的)

 존재의 연속성(자아?)-하나님과의(예수 그리스도와의) 친교의 연속성을 단절함

(3) 이론

 종합적, 수용적, 선교적임, 자아의 연속성, 책임성을 보존함

 혼합주의, 동화적(同和的)임, 중간상태이 표상은 불분명(모호)하고. 인간의 표상을 초월함

 (4) 이론

 생물학적, 화학적 이론에 충실함, 자아의 연속성을 보존함

 비성서적임(종말시의 만인부활을 탈신화화함), 현대적 재해석을 통한 영성화 위험. 몸의 신체적 특징약화,연속성의 표상은 애매함


※잠정적 결론 : 인간의 동일성 혹은 영생은 하나님(혹은 그리스도)의 지배권 안에 있음. 그리스도인은 사나 죽으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임(그리스도인의 삶과 죽음은 그리스도의 주 권 아래 있음). 그 이상의 표상들은 인간의 이성을 초월함(상상, 비유, 은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