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역사의 의미

 

1) 역사에 의미가 있는가?

"역사 안에서 의미를 판별하는 길을 찾을 수 있고, 따라서 역사적인 인간의 삶에 의미가 있을 수 있을까? 우리는 역사의 과정 안에서 법칙과 질서를 찾을 수 있을까?"(Bultmann, 역사와 종말론, 19)

"역사는 끝없이 변화하는 것이며, 따라서 예언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신념은 19C 역사가의 대부분이 그리고 오늘날의 많은 역사가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신념이다. 이 점에 관하여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역사에 무슨 의미를 발견한다든지 또는 그것을 파악하려는 것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혹자는 역사의 의미를 탐구하는 것은 가능할 뿐 아니라, 역사가에게 주어진 의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경우라도, 역사의 의미를 끊임없이 스스로 되풀이하는 견고한 불변의 모형으로 구성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이에 대하여 Toynbee는 주장하길, 자기는 과거 수세대 동안 서구의 역사가들 사이에 유행하던 역사의 무의미론에 찬동할 수 없으며, 역사적 사실의 의미를 찾아서는 안된다는 이유는 없다고 말한다 : " …우리는 그러한 패배주의를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 주장은 인간정신의 위대성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인간정신의 과거의 업적은 그것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의미를 탐구하려는 이 사업은 오늘날 가장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사업의 하나입니다.(역사의미의 탐구가 불가능하다는 Geyl 교수와의 방송토론)

역사의 의미유무에 대한 각자의 태도가 대부분 그의 종교적인 신앙이나 또는 사상체계로 결정되는 것이요, 따라서 과학적인 검토를 배제하게 된다는 것도 명백한 일이다."(J.G. de Beus, The Future of the West, 서양의 미래, 96)

H.Berkhof : "예수의 교회는 성경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마 땅히 역사의 의미에 관한 그 해답을 알고 있어야 한다. …20C의 예수의 교회는 그 교회가 역사는 예수의 지배 아래 있다는 관점을 배우지 못했기에, 교회 주위에서 일어나는 급속한 변화들과 싸워 영적으로 굳건히 설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단지 임시변통의 자선가로서의 역할만을 하게 되었다."고 말한다.(개혁주의 종말론, 38f)

※기독교적 역사의미의 근거 : 하나님의 역사지배(OT :하나님의 왕권, NT : 하나님의 나라, 혹은 그리스도의 나라 : 역사의 완성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희망

하나님은 역사를 끝장내시는 게 아니라(be-enden), 하나님은 역사를 완성시키시는 분이다(voll-enden).

 

2) 역사내재적 의미인가 역사초월적 의미인가?

 

(1) '피안희망'의 의문성

근대에 이르기까지 실재(현실: Wiklichkeit)는 2개의 세계, 차안과 피안의 도식으로 이해되었다.(이중적인 세계·공간으로 표상됨)

차안은 구조면에서 불변하는 하나의 고정적 공간으로 이해되었다. 이 공간 내부에서 인간역사 그 자체는 아무런 의미, 목표지향성을 지니지 않은 채 생성과 소멸을 지속하며, 이 역사의 의미란 인간을 위한 시험기간, 피안세계를 준비하기 위한 하나의 전제로 이해되었다. 차안적인 것은 피안 속에서 비로소 충만에 이르며, 인간의 본질은 이 피안세계에로 이주하는 것에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차안-피안의 분리의 세계관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교적 희망은 세계, 역사와는 격리된 채 배타적으로 피안 즉 '위'를 향하여 있다.(비현세적, 추상적, 현세 삶과 역사를 등한시함)

이 전통적 실재이해는 오늘 날 더 이상 존속하지 못하게 되었다. 근세는 이 세계 자체를 역사로서 이해한다. 즉 이 세계는 인간이 자신의 목적과 표상에 따라 조형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주관적 형태:맑시즘, 인본주의, 실증주의) 그러한 결과로 기독교의 희망이 무력해지고(교회비판), 교회는 비판 아래 놓이게 되었다.

예) Feuerbach : "피안에 대한 신앙은 세상을 포기한다."  K.Marx :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

(2) 그리스도적 '차안희망'

최근의 신학에서는 차안-피안 균열의 극복을 위한 노력이 제기되었다.(희망의 신학, 정치신학, 혁명의 신학, 해방신학, 흑인신학, …민중신학) 이것들은 상이점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 피안적인 천국, 세계의 종말은 역사(실재=현실)를 지양하는 것은 아니다.(우리 세계와 관련된 유토피아)

이런 신학은 차안-피안(공간적 도식)이 아닌, 현재-미래(시간적 도식)로 생각하고 있다.

J.Moltmann : 하나님은 우리 위에, 안에, 뒤에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 앞에 계신 분, 세계를 전적으로 변화시키는 분, 오시는 분이다.

희망, 약속된 미래는 우리를 미래를 향해 행동하도록 용기를 북돋아준다.(역사 속에서, 역사 의 미래를 위해 투신하게 함). 하나님은 "약속의 청중들이 그들을 에워싸고 있는 소외된 실재에 안주하지 않고 약속된 미래를 향하여 희망하고 봉기하며 자신을 내뻗도록 작용하 신다." → 미래의 先取, 豫期(Antizipation)

"신앙은 이 현실을 넘어서 하늘나라와 유토피아적인 것으로 향하거나 다른 현실을 꿈꾸거나 하지 않는다. 신앙이 아픔과 죄와 죽음의 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삶의 한계를 넘어갈 수 있 는 것은 그것들이 참으로 부서지는 곳에서만 이루어진다.(19f ) …희망은 항상 신앙을 새롭 게 하며 활기를 주고 신앙이 마지막까지 견딜 수 있기 위해서 계속해서 힘이 솟아나게 한 다.… 신앙은 기대적인 희망 속에서 십자가에 죽은 자의 부활을 통해서 무너진 그 한계들 을 넘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신앙은 세상을 떠난 체념이나 기피와는 아무런 관계를 가질 수 없다.(21f)

…희망은 그리스도 안에서 고난 속의 위로일 뿐 아니라,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반항 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에게 희망을 둔 사람은 주어진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고, 현실에서 고난을 당하고 현실에 대항하기 시작한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세상과의 불화(투쟁) 를 의미한다."(22)→ 저항, 대속.

D.Bonhoeffer : "하나님의 미래, 즉 인간을 충만케 하는 하나님과 인간의 일치는 실재 한 가 운데 있으면서 실재에 피안적으로 나타난다."

R.Schaull(혁명신학) : " …하나님은 투쟁 가운데 계신다. …하나님은 구체적인 삶의 역사 안에서 인간의 자태를 취하였고, 이 도정에서 당신을 따르도록 우리를 부르셨다. 이 맥락 속 에서 그리스도인은 혁명이 발발하는 대로 이에 투신하도록 부름받았다."(그레샤케, 48) →동역(同役)

E.Shillebeeckx : "우리가 …이전에 완전한 타자라고 불렀던 하나님은 이제 우리의 미래이 고 인간의 미래를 새롭게 만드는 '전혀 새로운 자'임이 드러난다. …새로운 세계는 미리 제 조된 채 준비되어 있지 않고, 역사 속에서 역사적 세계로서 형성된다."(Pöhlmann, Abriß der Dogmatik, 315)

K.Rahner : "하나님은 창조의 가장 내재적인 원리, 근거 및 그 본래적 목표이기 때문에, 영 적인 문화의 내재적 완성과 초월적 완성은 동일한 것이다. 하나님은 절대적 미래다. …하나 님은 인간의 모든 세계내재적 부분목표를 능가하는 '전체'이다."(316)

J.B.Cobb(과정신학) : "하나님은 세계의 성장과정을 촉진하고 우리를 새로운 가능성들을 향 해 앞으로 부르는 거대한 외침이다. 그분은 과거의 하나님이 아니라 미래의 하나님이 다."(319f)

L.Boff(해방신학) :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시는 하나님 나라는 단순히 하늘에서부터 떨어지 는 것이 아니라, 여기 땅 위에 숨겨진 채로 현존하기 때문에… 그 하나님 나라는 라틴아메 리카의 해방의 과정에서 활동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세계로부터 벗어나 발전하는 것 이 아니라 그 속으로 돌입해 들어간다."(320)

G.Gutierrez(해방신학) : "하나님 나라는 오직 현재의 구조들이 사회변혁을 통하여 파괴될 때만 실현된다. 아무리 하나님 나라가 우선적으로는 여전히 선물이라고 해도 그것은 역사적 인 해방의 주도가 없이는 성장할 수 없다."(320)

 

(3) 역사 내재적 희망의 한계

H.G.Pöhlmann : "하나님은 내재성 속에서 초월적이라는 것, 하나님은 역사를 뛰어넘어서나 혹은 역사를 지나쳐서 자신의 나라를 세우시는 게 아니라, 역사 속에서 역사를 통하여 세우 신다는 것은 옳다." …이러한 종말론의 위험은 신약성서에서 엄밀히 구분되는 두 나라와 두 시대를 혼합하는 것이다.(428)

G.Greshake : "역사 내적이며, 인간을 통해 이룩될 수 있는 복된 미래 위에 세워진 희망은 필연적으로 실재의 전체 영역을 절망에 내맡기지 않는가? …단지 역사만을 보고 있는 '최 종적인 것'에 대한 신학적 관념은 이 질문에 아무런 해답을 줄 수 없다. …몰트만만은 예외 이다. 그는 예수의 부활에서, 인간적으로 볼 때 헤어날 길 없는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 들 그리고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도 최종미래의 지평이 열려있다고 분명히 강조하고 있 다."(51)

K.Barth : "세계역사가 전체적으로 발전한다는 목적론의 단정은 늘 되풀이되어 시도되었는 데, 이 시도가 훨씬 더 불가능한 것으로 반복해서 증명되었음은 무서운 사실로 남는다. … 인간은 그 역사적 자태와 활동의 모든 변천에도 불구하고 '진보적'이 아니다."(G.Greshake, 54)

※ 결론 :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 확정할 수 있다는 생각은 NT에서 생소한 것 이다. "인간은 하나님 나라가 오기를 기도하고(Mt.6:10), 구하고(Mk.12:31), 이를 위해 준 비해야 하지만(Mt.24:44, 25:10,13),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를 촉진, 전달, 방해할 수 없 다.→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로부터 온다."(J.Finkenzeller, Von der Botschaft Jesu zur Kirche Christi, 15)

하나님의 나라≠인간의 나라, 세상의 나라 (두 나라, 두 세대의 구별은 필요함)

 

(4) 역사내재적 행동을 통한 희망의 매개(희망과 행동)

그러나 하나님의 희망은 역사 내재적 희망, 사회개혁적, 사회혁명적 행동에 전혀 매개되지 않는가? 하나님의 나라는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가?

희망은 모든 것을 인간 스스로 이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자유롭게 한다.(Greshake, 59) 그러나 희망은 이 세계에서의 삶을 수동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이끌어서는 안된다.(58) …하나님에게서부터 오는 미래희망은 역사적 책임을 지고, 오히려 세계 안에서, 세계를 위해…책임있는 행동을 하는 자유를 부여한다.

성서에는 희망이 최종적인 것을 지향하는 동시에 지금 그리고 여기서 성취해야 할 과제를 수행해야 하는 위탁을 받고 있음을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다. ( Gabe + Aufgabe , 기다림 + 서둘러 마중나감 )

하나님의 약속(풍요한 땅, 후손, 평화 즉 샬롬)을 사람들은 스스로 강요하여 끌어들일 수 없지만 자신의 투신 없이는 부여받지 못한다. 선물+과제, 약속+행동.

예) 에집트해방: 자유는 하나님의 선물이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유의 땅으로 가기 위해서 험난한 사막의 길을 가야 했다. 자유의 선물은 인간에게 과제를 부과한다. 희망은 약속된 미래를 단지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만이 아니라, 목표를 향한 인간적 투신을 통하여 완성시켜 야 할 역동적인 시작이다(미래를 위한 착수금).

예) 예수의 하나님 나라 희망 + 종말론적 투신행위로서의 십자가.(하나님의 주권을 위한 극단적 봉사, 제자들의 하나님 나라 기대·선포 + 예수의 뒤를 따름(제자도, 헌신)

※ 결론 : 희망≠세속적 계획, 세계 내적인 미래상, 유토피아\수동적 기다림, 수수방관, 세계책임 을 비신자에게 일임, 존재하는 것에 만족함

희망=예수의 나라를 위한 위탁, 봉사, 하나님 나라에의 마중, 준비, 희망하는 사람의 행동 속에서 이미 작용하고 있는 희망(성령의 충동을 받아 미래의 출현을 위해 노력함) 지 금 이미 체험하고 있는 실재를 조형함으로써, 약속된 완성을 미리 보여 주려는 전력 을 경주함(Moltmann:先取的 삶, 60ff). 그러므로 역사 초월적(=미래적) 희망이 없다면 역사내재적 희망은 무력해 질 것이며, 역사내재적 희망이 없다면 역사 초월적 희망은 관념 적, 비현실적인 것이 될 것이다.(Vorletzt : 준궁극적인 것, 하나님 나라의 유비를 위해 투신하고 노력해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