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구약성서에 나타난 종말기대

 

 

1) 초기왕조시대의 구원사적·보편적 종말기대(야웨이스트, 이사야, 미가)

① 야웨이스트(J기자)의 역사서(BC 1000경)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전 인류의 포괄적 지평 안에 놓여졌다 : 이스라엘 백성의 족장사 이전에는 전 인류의 원역사가 있다. 역사의 미래도 전 인류에 속해 있다. 이 역사이해의 중심동기는 창 12:3에 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인류의 역사는 무엇보다도 커가는 저주의 역사로 기술되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선택은 역사 속에서 '축복의 씨'가 되었다. 아브라함, 그 후손 그리고 바로 이스라엘 백성을 통하여 역사는 보편적인 인류의 축복의 역사가 되었다. 이스라엘은 여기서 이 축복의 중재적 표지로서 이해되었기에, 죄와 저주의 역사의 끝에는 결국 하나님의 축복이 모든 자들에게 주어질 것이다.

② 이러한 희망은 이사야와 미가를 통해 수정되었다(사 2:2-4, 6, 11:1-16, 미 4:1-8, 7:12-13). 이제는 예루살렘과 다윗왕조가 중심적 기능, 즉 보편적인 미래구원의 중재적 능력의 기능을 떠맡았다. 하나님은 죄의 역사의 끝에 모든 백성들과 전 피조물에 그의 축복을 선사하실 것이다. 이 축복은 역사 내적인 약속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므로 이와 다른 미래와 완성의 범주가 전혀 없다. 하나님의 구원은 역사 속에서 경험되고 생각될 수 있다. 그것은 물론 죄와 저주가 끝에 다다라서 전 세계가 야웨의 통치의 영역이 될 때 등장하게 될 궁극적 구원에 대해서도 해당한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보편적 희망 안에서 하나님의 왕권 통치는 (처음으로) 종말론적 의미를 갖게 된다.

사 6:5 → 이사야의 소명환상에서 야웨는 王으로 칭해짐(연대측정 가능한 가장 오랜 王칭호 본문임), 이스라엘 한 복판에 있는 야웨의 통치

사 24:23 → 종말론적인 왕의 통치를 묘사함

사 33:22 → 王이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다.(야웨王 시편의 동기가 수용됨). 이스라엘의 해방, 구원은 王의 역사임

미 2:12-13, 4:6-7, 4:9 → 이스라엘의 회복, 하나님은 王으로서 다스리실 것이다.

예수의 구원선포의 핵심인 하나님의 통치는 1000여년의 前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 전역사는 이스라엘과 그 주변세계의 사회적 통치구조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다윗 이전 시대에는 이스라엘은 국가 이전의 형태로 조직화되어 있었다. 즉 통치와 강요수단을 갖춘 상부적인 중앙집권체제가 없었다. 그 대신 공동으로 야웨를 예배하는, 평등과 자유에 기초한 부족들의 결합이 존재했다. 한 부족은 대개 50-100명의 대가족이 동맹한 50개의 지역동맹체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런 가나안 농촌인구들로 이루어진 부족들은 가나안의 도시국가들과 대립되는 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들에게 야웨는 분명히 왕이었다(다른 백성들도 그들의 신들을 왕이라고 불렀다. El과 Baal의 명칭은 이 시대에 아마 야웨의 이름과도 동일시되었던 것 같다.) 야웨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음으로써 다른 신들보다 우월함을 실증한 의미에서 다른 신들보다 뛰어났다.(만군의 야웨 하나님)

놀라운 것은 야웨는 이 시대에도 아직 분명히 왕으로 칭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N.Lohfink(Der Begriff des Gottesreiches)에 의하면 그 이유가 다음에 있다. 즉 이런 하나님 칭호로부터 지상적 왕을 위한 그 어떠한 정당한 기능이라도 도출되어서는 안되겠다는 이유 때문이다. 부족들의 평등의 이념은 신학적으로 천상의 왕국의 지상적 대칭(상응)으로서 정당화되고 또 성역화되는 봉건계급적 구조를 가진 지상의 왕권에 대항했다. 그 대신 이스라엘은 야웨만이 홀로 직접 자신을 다스리고, 야웨 스스로가 직접 이스라엘의 전쟁을 수행하시며, 그의 군대는 자연의 힘과 이스라엘의 영웅들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야웨는 자신을 대변·정당화하는 어떠한 지상의 王을 필요로 않았다.(삼상 8-)

야웨만이 이스라엘의 유일한 王이었다. 오직 평등과 자유로운 카리스만이 있을 뿐이었다. 야웨가 그 꼭대기에 계신다. 그러나 야웨는 王이 아니었다. 만약 사람들이 그를 '왕'이라고 불렀다면, 부족이나 씨족 혹은 개인들이 평등이념을 버리고 인간의 통치를 끌어들일 위험이 매우 컸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다윗과 솔로몬 아래 스스로 왕국이 되고 야웨가 예루살렘 중앙 성소의 하나님이 됨으로써 이러한 것은 바뀌어지고 말았다. 이제 지상의 王은 하나님으로부터 왕권을 부여받은 야웨의 '아들'이 되었다. 그는 지상에서 백성들을 복종시키도록 허락받은 야웨의 '기름부은 자'이다.(시편 2, 45, 72, 110, 144 비교)

이제 이스라엘의 지상王은 야웨의 왕권으로부터 자신을 정당화했다. 결과적으로 야웨도 그 백성의 왕이라 칭해지고 경배되었고, 그에게도 백성들과 온 땅 위의 왕이 되신다는 왕권이 인정되었다.(시 47, 96, 97)

물론 이스라엘 외의 神-왕권제의와는 정반대로 이스라엘에서는 야웨王과 그 지상적 대표자의 공의와 평화의지가 더 강하게 전면으로 부각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국가형태에 대항하는 숨은 저항도 살아 있었다.(삿 9:8-15, 8:23, 삼상 8:7, 12:12) 물론 이 저항은 어원적으로 역시 왕이신 야웨에게 호소했다. 그러나 야웨만이 참되고 유일한 王이고, 그는 지상의 왕의 지배를 정당화하지 않고, 오히려 날카롭게 비판하고 상대화한다.(사 6:1-9:6 비교)

그리고 지상적 왕권에 대한 예언적 비판은 종말시의 왕의 메시야적 구원약속의 출현의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그는 야웨의 왕권에 완전히 일치하여 자신의 힘으로써 영존하는 평화와 의의 나라를 다스릴 것이다.(사 9:1-6)

그는 평강의 주이다. 왜냐하면 야웨가 최종적·궁극적 해방의 행위 속에서 전쟁을 완전히 폐했기 때문이다.(사 9:3f) 이것이 야웨의 왕권의 종말론적 기본행위이다. 그것이 일어나면, 야웨는 모든 백성들의 왕으로 인정받을 것이다. 그의 평화의지와 공의의지가 관철됨으로써, 모든 인간적, 사회적, 자연적 삶 속에서 오로지 하나님과 그의 의지만이 지배하게 될 것이다.(사 2:1-5, 10:33-11:10)

다윗혈통에서 나온 인간적인 메시야-王은 이 야웨王의 충실한 관리자의 역할을 떠맡는다. 그에겐 하나님의 영이 충만히 머물러있다.(사 11:2) 하나님은 그에게 모든 이상적인 통치자의 덕을 부여한다. 이 메시야-王은 우선은 이스라엘에 대해 그 직책을 수행하지만, 나머지 백성들도 그의 평화통치 때문에 그를 인정할 것이며(사 11:10 ; "만인의 '기호'<Zeichen und Signal>로 설 것이며"), 이스라엘의 메시야 사회로 돌아서서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다.(백성의 순례표상, 사 2:1-9) 야웨는 이제 우주적인 왕이 되실 것이다. 여기서 약속된 메시야-王의 모습은 O.T에서 점차로 '겸손한'모습, 즉 목자와 종의 모습을 띈다.(미 5:1-5, 겔 34:23f) 결국 그는 당나귀 위에 탄 '겸손한 자'(가난한 자)로 묘사된다(슥 9:9f).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이 왕의 의무였던 반면에(시 72:12f, 사 11:4), 여기서 메시야는 스스로 도움받아야 할 가난한 자가 되었다.

이 메시야적 구원에는 전 피조물의 보편적 평화도 포함되었다. 동물과 사람 간의 평화에 관한 고대 신화적, 낙원표상이 다시 되살아났다(사 11:6ff, 겔 34:25ff). 하나님의 평화의 의지가 온 땅을 지배하면, 모든 종류의 폭력과 피흘림이 끝난다. 원시상태의 회복에 대한 희망은 우주적 보편적이다. 그것은 인간과 자연 간의 행복한 합일을 바라본다. 이 현실의 철저한 변화는 하나님의 평화의 의지가 모든 인간, 그 사회적 생활, 자연세계와의 교제의 마음을 지배하리라는 것을 전제한다.


2) 7C후반∼8C초(남왕국 멸망직전과 포수기시작)의 예언자들의 종말론(스바냐, 나훔, 하박국, 예레미야, 에스겔)

남왕국 멸망 직전에 그리고 포수기 시작 무렵(7C후반∼8C초)의 예언자들(스바냐, 나훔, 하박국, 예레미야, 에스겔)에게서 이스라엘의 희망은 매우 두드러진 다른 모습을 띄고 있었다. 그들은 부분적으로 고대 문서예언자들(아모스, 호세아)과 이사야의 전통에 접맥했다. 그들의 희망의 두드러진 특징: 우선 그들은 다가올 '심판'을 예고했다.(습 1:14-16, 3:9-20). 이전에는 항상 구원과 축복의 날로 기대되었던 '야웨의 날'이 아모스 이후로 불충실한 백성에 대한 야웨의 심판의 날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완고해지고 불충실해졌으므로 심판도 분명해졌다(외국의 침입이나 유형의 형태). 죄의 결과가 불가피하게 이스라엘에게 미친다는 것이다.

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형벌은 '야웨의 축복'에 의해 감싸여있다. 심판 후에는 회개하여 충성을 끝까지 지킨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위한 새로운 구원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미래는 반복적인 것으로 정해졌다. 즉 미래는 단지 백성의 행동에 따라 축복이냐 아니면 저주냐의 열려진 양자택일로 생각된 것이 아니라, 확고한 저주와 축복의 연속으로 생각되었다.

② 이러한 약속의(반복적인 구분의) 틀 속에서 모든 구원의 기대는 '미래'로 이전되었다. 지금까지의 이스라엘의 역사기술에서는 구원이라는 것이 무엇보다 과거의 야웨의 역사행위에 근거하고 있어서, 모든 세대들은 제의적으로 축하되고 사회적으로 영위된 현재화(Vergegenwärtigung)를 통해 새롭게 그 행위에 참여했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이젠 백성의 죄와 그에 따른 심판으로 인하여 이런 지속적 구원의 현실은 무너졌다. 과거는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구원이 주어질 것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어떠한 절대적인 근거, 보증을 주지 못한다. 그래서 이젠 점차 더 강하게 관심이 미래로 집중되어졌고, 실로 궁극적이고 파괴되지 않는 새로운 하나님의 구원행위로 향해졌다.

이러한 역사적 관점은 과거의 역사와 현재 및 미래의 역사 간에 분명한 불연속성을 가져다 주었다. 즉 그의 백성 중의 '남은 자'에게로 향한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가 고지된 것이다. 그 새로운 역사는 야웨의 옛 구원행위와 유사한 방식으로 -즉 새로운 출애급으로(호, 렘, 겔, 2.이사야), 새로운 땅 이스라엘로(겔), 새로운 계약으로(렘), 새 다윗으로(사)- 표상되었다. 이사야에게서는 점차 강하게 새로운 것이 과거에 접붙여졌으나, 포수기 이전과 포수기의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행동을 (비록 유사하지만) 야웨로 인해 이룩된 '새로운 시작'(Neu-setzung)으로 약속했다. : 즉 모든 것은 완전히 새로이 행해져야 한다는 전망이다. 이러한 새것은 과거를 표상하기 어렵도록 능가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궁극적이며 더 이상 해체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3) 후기 포수기와 포수기 이후의 임박한 종말기대(6C후반과 5C, 2·3이사야, 학개, 스가랴)

궁극적이며 완전한 희망의 형태는 특히 6C후반과 5C경의 예언자들(2·3이사야, 학개, 스가랴)에게서 자리잡고 있다. 그 희망의 특징은 해방시키는 하나님의 임박함(Nähe) 의식에 있다. 심판은 종말에 다다랐고, 새로운 구원시대가 바로 앞에 와 있다. : 새로운 탈출의 해방이 이제 시작한다.(사 43:16-20) 이런 예언자들은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었다. 여기서 성취의 열정을 지닌 NT의 종말론­"이제는 구원의 때이다."(고후 6:2), "오늘날 이 성서 말씀이 성취되었다"(눅 4:21)­이 가장 명백히 성취되었다.

이러한 희망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구원과 구원의지의 육박해 오는 임박함의 경험이 표현되었고, 이로 인해 희망은 열정적이고 기대에 가득찬 것이 되었다. 이러한 가까운 구원은 본질적으로 야웨가 이스라엘의 '王'이시라는 선포와 결합되어 있다(사 52:7-10) : 영원한 王, 야웨가 이제 임박한 미래에 궁극적으로 효력을 미치는 새로운 방법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통치를 시작하실 것이다. 이것은 예루살렘으로 귀향하는 자들의 생활을 새롭게 만드는 중요한 근거이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인간적인 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야웨가 (국가 이전의 시대처럼) 이스라엘을 직접 왕으로서 다스리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을 예속시키는 대제국들은 오로지 하나님의 '도구'일 뿐이다. 그 제국들도 결국에는 버림받은 '하나님의 종'인 이스라엘이 그 하나님에 의하여 새로이 높이 들림받아 만방의 빛이 될 것임을 인식하게 될 것이며(사 52:13),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 속에 모든 자들을 위한 구원이 놓여 있음을 알 것이다(사 52:13-53:12).

어떻게 그것이 가능해지는가? "다른 세계에는 왕들이 위에 앉아 있지만, 이스라엘은 어떤 왕이나 국가도 가지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직접 왕이신 야웨 아래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야웨 외에는 다른 신들이 없기 때문에, 그리고 다른 백성들의 신들도 없기 때문에, 이 세상의 국가들은 자신을 정당화시켜 줄 아무런 신적인 영화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이 영광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야웨가 한 때 백성들에 의해 죽임당한 그의 종 이스라엘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했고, 시온은 그의 영광의 거처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왕이 없고 오로지 한 하나님만을 소유한 이스라엘은 왕들을 가진 백성들에게 자신의 영광을 전해줄 수 있는 것이다."(N.Lohfink, Der Begriff des Gottesreiches, 23)

스가랴 14장은 종말시의 예루살렘의 운명을 묘사한다 : 이방인들의 점령을 당한 예루살렘은 야웨의 개입에 의해 해방받고, 야웨는 감람산에서 마을로 들어오실 것이다. 더 이상 어둠이 없고 예루살렘에서 생수가 솟아나며, 태고시가 회복된다. 야웨는 천하의 王이 되시고 홀로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모든 땅이 평지가 되지만 예루살렘은 높이 들릴 것이다. 열방 중에서 남은 자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초막절에 만군의 야웨 王을 숭배할 것이다. 모든 땅이 거룩해질 것이다(14:6-20, 야웨의 날).

 

4) 묵시문학의 종말론

(1) 묵시문학의 평가와 기원

?묵시문학은 종종 '후기 유대교'의 산물이라고 평가절하되어 왔다. 그것은 포수기 이전의 대예언자들과 비교할 때 일종의 '변질'(Abfall)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엔 너무나도 많은 환상들, 알레고리들, 역사비관적인 표현들이 침투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판단에 따르면 포수기 이후의 종교성은 포수기 이전의 '위대한' 종교성의 계속적인 타락(Verfall)이다. 이 변질과정의 마지막 산물은 소위 '후기 유대교'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엔 오래된 것일수록 (더 원래적이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더 낫다고 하는 '복고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최근의 연구경향에서는 묵시문학을 올바르게 평가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희망의 형태는 완전히 변화된 역사적·정치적 상황에 대해 어떠한 해답을 주는가?에 관해 질문됨으로써, 묵시문학은 무엇보다 그 역사적 상황에서부터 판단되는 일이 시도된 것이다. 즉 야웨의 신실에 대한 믿음을 갖고 그 상황에 올바르게 대응했는가 아닌가? 라는 판단이 내려진 것이다. 이것이 이전의 판단척도보다 더 적절한 판단척도인 것처럼 여겨진다.

?묵시문학의 기원 : 여러 가지 묵시문학적 요소들은 이미 '예언자들'에게도 나타나있다. 즉 선견자의 환상, '지혜로운 자'에 의해 제시된 수수께끼, 저자가 과거의 위인의 이름을 빌려 쓰는 위명(爲名:Pseudonym), 과거와 현재의 사건을 미래시제로 묘사하는 것, 재앙이 온 이후의 궁극적인 구원예고 등등.

묵시문학은 또한 '지혜사상', 즉 의로운 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문제를 채택했다. 묵시문학을 조직적으로 분석하면, 물론 어떤 '페르샤적' 영향도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바벨론 포로기의 말엽에 유대인들은 고대 페르샤의 짜라투스트라의 종교와 두 세대에 관한 그 이론과 접촉했기 때문이다. 여기엔 '지금의' 세계와 '다가올' 세계의 이원론이 전개되었다. '지금의' 세계는 짜라투스트라 이후 3000년에 굉장한 세계화재 속에서 멸망할 것이고, 이 세계심판은 초월적이고 종말적인 구원자를 통해 일어난다. 그런 후에 죽은 자들이 부활한다. 의로운 자들은 고통없이 불바다를 통과하지만, 불신자들은 정화되거나 불에 타 없어진다. 그 반면에 의로운 자들과 정화된 자들은 세계화재 이후에 정화된 새 땅에서 살 것이다. '두 세계'의 이원론과 함께 몸과 영혼, 자연과 문화의 이원론도 있다. 인간은 몸을 가지고 '지금의' 세계에 속해 있고, 영혼으로서 '다가올' 세계에 속한다. '자연'은 사라질 '지금의' 세계의 형태이다. 그 반면에 '문화적인 일'은 자연과 '지금의' 세계의 극복으로 여겨진다. 동시에 그것은 '다가올' 세계의 심부름꾼으로 평가된다.

포로기에 페르샤 왕 고레스가 하나님의 해방의 도구, 메시야로 환영받을 때(사 45:4), 이런 사상세계가 유대인 유형자들에 의해 어느 정도 수용되었다. 그때는 어떤 의미에서 페르샤인과 유대인간에 상호적인 동정이 생겼을 때였다. 양자는 정치적으로 바빌론에 적대하고 있었고, 종교적인 영역에서는 전통적인 죽은 자 예식과 풍산(출산)제의를 배격했다.

특히 제 2·3 이사야가 짜라투스트라의 종교와 접촉한 점이 드러난다. :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사 43:18-19) 혹은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 할 것이라."(사 65:17)

물론 이런 예언서에는 페르샤 사상과 다른 유대의 희망도 볼 수 있다. ① 페르샤의 노동·업적의 자랑과는 달리 여기엔 하나님의 값없는 은총에 대한 신뢰가 부각되었다(사 43:22, 25). 페르샤의 빛­어둠의 이원론과는 달리 예언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유일한 원인성에 대한 고백이 있다(사 45:6f). ② 페르샤의 두 세계의 이원론과는 달리 세계의 처음과 끝, 창조자와 구원자인 유일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세계의 단일성이 보증되어 있다(사 43:10, 44:6).

비록 다양한 구약성서적 ·이스라엘 외적 영향이 묵시문학에 미쳤음을 부인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고 묵시문학의 형성을 특별한 문학쟝르와 통일된 신학적 '희망설계'의 형성으로 설명할 순 없다. 오히려 그것은 기원전 2-3C의 특정시대사의 상황에서 하나의 독자적인 새로운 출발점을 나타낸다.

(2) 묵시문학의 신학적 특성

① 시대사적 형성의 상황

셀류키드 치하의 그리스 통치는 시간이 갈수록 극단적으로 제국주의적인 형태로 변해갔다. 그것은 정복한 백성들을 완전히 헬라화하려는 의지를 관철했다. 그리고 백성들의 종교적·사회적·민족적 전통을 폭력으로 해체시키려는 시도도 이에 가세했다. 이로 인해 팔레스틴뿐만 아니라 에집트와 페르샤에도 동일한 묵시(문학)적 저항운동이 일어났고, 안티오쿠스 치하에서 많은 자들이 신앙과 율법으로부터 이탈하는 것도 헬라화의 과정에서 경험되었다.(175-164)

이스라엘에는 묵시적 희망표상을 가진 두 종류의 집단이 두드려졌다. 하나는 하시딤 운동자들로서 자신을 '경건한 자'로 의식하여 헬레니즘의 현대전통과 종교를 배격하고 이스라엘의 옛 전통을 준수하려고 노력했다. 예루살렘의 성소제사장 무리들 중에는 그들을 강력히 추종하는 보수주의 신학자들이 있었다. 그들로부터 2C 경에 '바리새인'과 '쿰란공동체'가 파생되어 나왔다. 쿰란공동체가 성전제의를 지향하는 제의적 정결의 이상을 대변한 반면에, 바리새인은 묵시문학적 사상체계를 더 강하게 유지했다(즉 죽은 자들의 부활, 특히 순교자들의 부활). 그들은 다윗적인 메시야 전통도 수용했다. 다른 묵시적 저항가들은 마카비인들(유다 마카비, 요나단, 시몬)에 의해 주도된 무리들로서, 그들은 폭력혁명으로 억압적인 헬라화 정치에 대항했다. 그들은 하시디안들과 공통적인 묵시적 기본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 두 그룹들은 서로 떨어져 나갔고, 결국 경건한 하시디안들이 정치현실주의적으로 행동하는 마카비인들을 대항하기까지 이르렀다. 이런 저항으로부터 바리새인들이 옛 메시야 약속을 비판적으로 재수용했음은 이해할 만하다.

② 신학적 기본사상

묵시문학에서는 이 역사와 이 세상 속에서는­야웨기자(J기자)와 예언자들의 희망에서 기대되었던 바와 같은, 하나님으로부터의 구원이 없다. 지금의 역사와 하나님의 구원 간에는 어떠한 관계도 없다. 왜냐하면 죄로 인해 궁극적인 단절이 이미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와 더불어 바로 이 역사 속에는 구원을 희망하던 옛 이스라엘의 역사이해는 철저히 해체됐다. 그 대신에 묵시문학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 곧 이루어지는 이 세상의 종말을 통해서만 구원을 기대했다. 거기서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그 이전 세계와의 어떠한 유사성도 없이 도래한다. 역사 내재적인 하나님과 인간의 행동은 큰 심판 이후에라도 결코 구원을 가져오지 못한다. 하나님 혼자만이 '이' 세계를 끝장내시고 전혀 새로운 새 세계를 창조하신다.

묵시적 희망을 가졌던 두 그룹(하시디안→바리새인, 쿰란공동체)은 이 옛 세대의 마지막에 있다고 생각하고, 이러한 기본태도로부터 상이한 전망을 이끌어내었다. 경건한 하시디안들을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만 기대했고, 그렇기 때문에 경건한 내면성 안으로 후퇴했다. 왜냐하면 이 세계에서는 더 이상 구원받을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은 완전한 '종말론적 유보'로부터 점령세력에 맞선 수동적 저항을 위한 큰 힘을 이끌어 내었다. 그와 달리 혁명적인 마카비 추종자들은 현존하는 질서를 능동적으로 파괴하기 위해 노력했다. 왜냐하면 그것에는 보존하거나 갱신할 가치가 있는 것이 전혀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정치적 체념과 혁명, 이 두 가지는 그 나름대로 경험하는 역사를 철저히 부정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오직 그것으로부터의 탈출만이 구원을 가져올 수 있다.

③ 개별적인 특징적 강조점들

지금까지의 이스라엘의 '구속사'는 거의 절대적으로 부정적으로 이해되었다. 그것은 순전한 재앙으로 여겨졌다. 왜냐하면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가운데서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리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지배해 온 이런 보편적인 죄악은 역사의 통일성을 멸망의 역사로 창조했다. 인류의 '보편사'란 묵시문학에서 창조 때문이거나 혹은 하나님의 신실의 연속성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점점 보편적으로 확장되는 인간의 죄 때문에 존재한다. 죄로 인해 역사는 재앙의 역사로 타락하고, 이스라엘이나 다른 백성들 모두가 그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묵시문학적 관찰자가 보기에는 거듭 하나님의 징계의 형별이 주어지는 역사는 바로 지금 멸망과 타락의 극한점에 다다랐다. 현재로부터는 어떤 것도 기대될 것이 없고, 오로지 마지막 심판 이후의 재앙적인 파괴로부터만이 무엇이 기대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역사이해에는 역사와 피안, '지금의' 세계와 '다가올' 세계 간의 '완전한' 이원론이 지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새로운 세계의 철저한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유대적 묵시문학은 심판재앙의 이편과 저편에 있는 두 세계 간의 관계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두 세계에서는 율법이 유효하고, '지금의' 세계 속의 책임적 율법순종은 다가올 세계 안으로 구원받는데 있어서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경건한 하시디안들은 자신들, '거룩한 남은 자들'을 위해 이를 기대했으나, 전 이스라엘을 위해서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 멸망의 역사는 의미가 있다. 즉 새로운 시대에 참여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율법순종의 자리가 되는 의미가 있다.

묵시문학의 부정적 역사이해의 근거는 이스라엘의 절대적 '하나님 중심주의'의 확신에 있다. 창조주 하나님이 그 피조물에 대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신다. 하나님의 권리, 하나님의 법은 이 세계와 다가올 세계에서도 불변하다. 물론 이런 '하나님 중심주의'가 묵시문학에서는 '하나님 단일주의'로 변화되었다. 즉 인간의 율법순종은 이 세계가 거룩해지는 데 있어서 아무리 작은 것도 기여할 수 없다. 이 세계를 위한 구원에 관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적절한 행위란 없다. 하나님 혼자만이 구원을 이루시고, 그것도 이 세상 속에서가 아니다. 이 세상은 그 자신의 운명에 그리고 인간의 막강한 죄악에 내맡겨져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점차 부정적 태도를 취한 이유를 이해하게 된다. 하시디안들에게서는 하나님의 구원행동은 이 죄많은 세계의 종말에야 비로소 드러난다.

하나님의 왕권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신앙은 묵시문학의 범주 속에서 다시금 새로운 형태를 취했다(단 2:28-45). 야웨는 이제 '천상' 세계의 왕과 '지상' 세계의 왕으로서 경배된다. 이제 전면으로 부각되는 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그의 왕권이 아니라 지상왕국에 대한 그의 보편적 통치이다. 하나님은 그 지상왕국들에게 자신의 통치권을 넘겨주셨다. 물론 그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는 실로 야수와 같은 통치의 형태로 전도(왜곡)되었다. 바로 그것이 혼돈의 장소인 바다로부터 올라온 동물형상들의 상징적 의미이다(단 7:1-8). 그것들은 바빌론, 메대 페르샤, 알렉산더 제국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 제국들을 놀랍게 끝장내시고, 불 속에서 멸망시키거나 큰 돌맹이로 산산조각내신다. 물론 완전히 혼자서, 어떤 '인간의 손의 도움도 없이'(단 2:34,45) 그렇게 하신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은 '하늘의 구름으로부터' 그의 새로운 통치를 세우시는데, '人子'의 형상 속에서, 즉 참으로 인간적인 통치질서와 사회질서의 형태로써 통치하신다. 예루살렘 성전의 세계정치적 무의미와 그 성전의 이질세계로의 완전한 적응을 본 다니엘서는 무엇보다도 보편적인 세계사회를 하나님의 통치의 관점 안으로 받아들였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유사한 개념이 얼마나 그 구체적 역사적 경험의 형태에 의존되어 있는지를 본다(당대의 인간적 왕국, 국가). 이런 세상적 차원이 수용되면, 곧 이어 거기에는 하나님의 왕권의 개념이 따른다. 즉 세계에 편만하지만 아직은 완전히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통치라는 개념이 생겨난다. 그것을 적절하게 설명하기 위하여 이제는­미래차원에 덧붙여서­이중적 하나님의 통치의 사고가 모험적으로 이용된다.

악(惡) 속으로 떨어진 하나님의 통치에 반해 진정한 하나님의 통치가 대립적으로 배열된다. 그 하나님의 통치는 큰 불심판 바로 직후에 땅으로 미친다. 이 새로운 하나님의 통치는 지금까지의 세계사와는 철저히 다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통치는 단지 보이지 않는 천상적인 '피안'이나 '순수히 종교적인' 모습 속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이 땅의 완전한 재창조로서 기대되며, 궁극적인 해방도 완전히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役事)로서 기대된다. 하나님은 자신의 보편적인 통치권을 몇몇 왕들에게 넘겨주시지 않고, 그에 대한 충성을 지킨 하나님의 백성,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에게 (집단적으로) 넘겨주신다. 하나님의 백성은 만 백성들을 향하여서 하나님에 의해 임명된 옛 왕들의 역할을 수행하는 기능을 떠맡는다. 다시 말하면 온 세계(온 땅)를 향하여서 하나님 대신에 통치한다(단 7:18, 22,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