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

 

 

1)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 개념

이 개념은 분명히 예수의 선포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그렇지만 예수가 그것으로써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였는지 분명히 정의하기는 어렵다. 예수는 이것을 청중들에게 말할 때, 무엇보다 다니엘서와 후기 유대교의 문서들에서부터 유래한 이미 주어진 이해를 전제했었을 것이다. 그래서 비유들과 권능있는 행위들 속에서 예수는 우선 그 '현재적' 도래와 그 가까운 완성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중심적인 메시지의 개념적인 의미를 해명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포기할 수 없다.

"야웨는 다스리신다", "야웨는 왕이다"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왕 되심, 그의 왕권의 능동적 행사를 의미한다(역동적 특징, 운동의 동사의 주체). NT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는 역동적인 뜻으로 나타난다(가까이 왔다, 온다, 임하였다, 침노한다). 전승사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나라를 궁극적인 구원상태로 보는 표현은 더 후기에 속한 것 같다.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는 보고(막 9:1), 받아들이며(막 10:15), 도달하며(막 9:47), 유업으로 받고(마 25:34, 마 5:5), 구하는 것(눅 12:31)의 대상이 되어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또한 하나님의 주 되심이 완전히 인정되고 모든 인간 사회의 생활에 효력을 미치는 하나님의 통치 영역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개념사적으로 볼 때, 예수는 제 2 이사야(52:7)로부터 시작해서 포수기 이후의 예언자들(제 3 이사야 61:1-3, 미가 2:12f, 4:6-8, 스바냐 3:14f, 스가랴 14:9,16f)에 의해 수용된, 그리고 유대묵시문학(다니엘 2:7 등)에 살아 있는 전승, 즉 하나님의 통치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에 의해 특히 이스라엘 속의 '가난한 자'에게 선포되는 미래적, 종말론적 현실로 지금 그들에게 주어지는 구원으로 이해하는 전승 속에 있는 것 같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사 52:7) 혹은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사 61:1-3). 바로 이 예언자의 말을 예수는 그의 고향 나사렛에서 받아들였다(눅 4:16-18).

그리고 그것과 함께 밀접히 결합된 것은(슥 14:9, 겔 36:23ff에서 유래한) 하나님의 이름의 유일성, 거룩성의 사고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유일한 주, 온 세계의 유일한 주로 경배되었다(주기도문, 눅11:2).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방인들의 신들은 결국엔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드러날 것이라는 것이다. 그와 함께 이스라엘은 다른 백성들의 종살이로부터 해방받아 하나님에 의해 모든 방향에서부터 불러 모아져서 거룩한 백성으로 새로워질 것이다(겔 36:23ff). 이러한 하나님의 백성의 해방과 소집 속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신다. 질병과 전쟁은 영원히 종식되고, 이스라엘은 끝없는 구원과 평화를 맛볼 것이며, 야웨 왕 아래서 '샬롬'의 상태에서 살 것이다.


2) 예수 시대의 하나님 나라 기대(운동)

제 2. 3 이사야와 다른 포수기 후의 예언자들에게서 하나님의 왕권통치가 새로워진 이 땅과 이 역사 속에서 언젠가 완전히 관철될 것으로 기대된 반면, 후기 유대교의 묵시문학은 그 도래를 이 옛 세대(에온)의 멸망 이후에, 새 하늘과 새 땅의 새로운 창조에 이어 비로소 나타나는 것으로 기대했다. 철저히 새롭게 창조된 역사 속에서야 하나님은 유일한 주와 왕으로 인정될 것이다. 다니엘서에 기초해 있는 이런 묵시적 종말기대도 예수 시대의 모든 유대적 하나님 나라 기대의 지평을 만들었다. 그래서 다양한 강조점들을 지닌 다양한 운동들이 나타났다.

 

3) 세례 요한과 예수

비록 세례요한의 모습을 다른 초기 유대교의 종말기대 운동에 소속시키기는 어렵지만, 우리가 복음서로부터 분명히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은, 세례요한은 '카리스마적 국외자(局外者)와 예언자'로서 철저한 회개설교 속에서 전체 이스라엘을 향하여 바로 임박해오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마지막 기회를 제공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눅 3:9). 혁명적 행동, 율법순종, 제의적·비전적 격리가 아니라 사죄를 위한 '세례'만이 구원을 베풀 수 있다. 그에게서 현존하는 이스라엘은 유일하고 완전한 '구원받지 못할 집단'이다. 아브라함의 자녀됨, 지금까지의 전 구속역사와의 연속성은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 "하나님은 능히 이 돌들로(부터)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눅 3:8) 세례요한은 묵시적 환상 속에서 전 이스라엘이 이제 돌입해오는 하나님의 '심판'에 떨어질 것임을 보았다. 이스라엘의 역사적 선택은 무효화되었다. 그래서 그것은 아무런 구원의 희망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이스라엘은 이제 오직 심판 속에서 버림받을 것만 기다릴 수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간적 불연속성 속에서도- 하나님의 신실의 연속성은 흔들림이 없다. 실로 요한에게서 이스라엘을 위한 구원의 전망은 배후로 물러나 있지만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었다. 죄와 절망을 스스로 고백하는 '회개'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마지막 기회이다. (종말시의 심판자의 '불의 세례'와는 반대로) '물세례' 속에서 이런 고백과 사죄는 현실적으로 이루어진다. 요한은 그것을 다가올 심판에서 승리할 수 있는,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조건으로 이해했다. 그러므로 물세례는 단순한 표시만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세례받은 자를 이스라엘의 구원받지 못할 집단으로부터 구출하는 효력있는 능력이다.

예수는 아마도 얼마간은 세례 요한의 무리에 속한 것 같다. 예수는 그로부터 세례받았고, 전 공생애의 선포 동안 항상 그를 높이 평가했다(눅 7:26-28). 추측컨대 세례 요한의 몇 제자들도 예수의 제자집단으로 넘어온 것 같다(요 1:35-42). 비록 예수는 -지리적·신학적으로- 요한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켰으나, 그와 함께 지금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에로 떨어졌다는 묵시적·역사 신학적 전제를 공유했다. 예수에게서도 이스라엘은 그 역사나 현 상태로부터 아무런 구원소망을 가질 수 없는 죄많은 세대였다(눅 13:1-5, 12:16-20, 54-56, 11:31f, 10:13-15 등).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전 백성에게 심판을 예고하고 회개를 요구했다.

그러나 심판은 요한에게서처럼 그의 선포의 중심에 놓여 있지 않았다. 예수의 선포의 결정적 구별은 잃어버린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긍정적 현실을 대면시켰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가까이 온 하나님의 통치이다. 예수는 잃어버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구원을 선포했다. 심판예고 대신에 구원약속이 등장했다. 이로 인해 회개의 요구도 새로운 관점을 가지게 되었다. 회개는 오로지 이 새로운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 선물로 받는 것에 있었다(마 18:3). 이렇게 볼 때, 심판예고는 더 이상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심판은 오직 이 구원의 약속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듭 마음을 완고하게 먹는 자들에게만 해당된다.

 

4)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선포)의 일반적 특징

(1) 하나님의 나라와 악의 권세(하나님 나라와 사탄통치 간의 대결)

비록 예수의 예언적·묵시적 전승의 문맥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발언이 이스라엘의 정치적 해방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것은 분명하고 현저한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해방이 더 근본적이었다 : '사탄'의 통치가 이미 무너졌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버림받고 잃어버린 백성이 아니라, 이미 악의 권세로부터 해방되어 새로운 구원으로 선택된 백성이다. 예수에게서 '억압받는 이스라엘 - 지배하는 외세' 간의 대립은 '사탄 - 악의 권세 아래 있는 백성들' 간의 더 위협적인 대립에 비해서 이차적이었다. 이 권세는 이제 완전히 무너졌고 그와 더불어 '모든' 불의한 이 땅의 지배로부터의 보편적 해방이 시작되었다.

※ 특히 '세상의 모든 나라들'(마 4:8ff, 눅 4:5ff)과 관련된 시험은 예수와 사탄 사이의 투쟁에서 제기된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사탄은 '세상의 통 치자'로 등장한다(요 12:31, 14:30, 16:11).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하는 자이다.(더욱 더 구조적·근본적인 세력과의 투쟁을 통한 이스라엘, 온 세계의 해방을 목표함)

이스라엘의 해방의 객관적 근거는 하나님에 의한 이스라엘의 새로운 선택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시 그의 백성으로 받아들여 구원의 상황으로 변화시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전적인 절망의 상황을 폐지하시고 새로운 구원의 미래를 열어놓으신다. 이러한 예수의 확신의 주관적 근거는 '사탄의 떨어짐'에 관한 환상이다. "나는 사탄이 번개같이 하늘에서부터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눅 10:18). 묵시문학에서 기대된 하나님과 사탄, 이스라엘 백성의 천사인 빛의 천사 미카엘과 어둠의 천사 벨리알 간의 천상의 종말론적 투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그 싸움은 미카엘과 이스라엘의 승리로 결정났다. 이런 천상의 사건에 상응하는 지상의 사건은 이스라엘이 이제 궁극적인 구원의 약속을 받았고,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므로 이미 지금 복 있다고 선포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눅 6:20ff.).

(2)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

우리가 이미 보아온 대로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미래의 종말론적 실체로 기대했던 고대 이스라엘 전통 안에 서 있다(주기도문: 나라이 임하옵소서. 눅 11:2 혹은 눅 6:21의 축복선언 - 주린 자는 배부름을 얻을 것이요, 우는 자는 웃을 것임이요). 그러나 이 미래는 예수에게서 독특한 특징을 가진다. 그는 가까이 왔기 때문에 현재 안으로 들어와서 그것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키는 미래에 관해 말한다. (※ 가까왔다: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뜻에서 시간적인 의미로 전용됨)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이미 구원을 선포하셨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의 상황은 급진적으로 새로워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의 이스라엘의 지상역사 속으로 이미 뚫고 들어온다. 이러한 구원의 '신학적인'(다시 말하면,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현재성은 희망의 근거를 직접적인 시간적 임박함에 둔다. 즉 소위 예수의 '임박한 기대'는 우리의 역사적 경험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약속이 관철되므로써 지상의 상황을 '변혁시키는' 완성된 사건을 향하고 있다. 이것이 언제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는 예수는 닫아놓지 않고 열어놓았다. 자유로운 하나님의 약속과 자유로운 인간의 동의의 합치는 모든 시간계산이나 그런 시간계산을 목표로 삼는 행위로부터 자유하다(즉 그 시기는 은폐되어 있다). (막 4:26-29; 저절로 자라는 씨의 비유, 눅 17:20; 하나님의 나라는 눈에 볼 수 있게 오는 게 아니다. 막 13:32; 아무도 그 날과 그 시는 알지 못한다. 하늘의 천사도 아들도 알지 못하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

이스라엘 속의 하나님 나라의 돌입은 이미 개시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적인 신학적(하나님의 결의 안에 있는) 실체일 뿐만 아니라, 이미 시간적·역사적인 현재를 획득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나라를 그의 말씀과 행위 속에서 현재하는 것으로 '선포하고',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으로 선포하며, 그것을 감지하고 경험할 수 있는 형태가 되도록 함으로써다. 그래서 그는 악귀추방을 하나님의 나라가 이스라엘 속에 돌입해 오는 것으로 이해했다(눅 11:20;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탄이 이미 무력화되었기 때문에, 예수는 악한 귀신의 추방을 하나님 나라의 역사적 실증(현시)으로 선포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실제적인 상징적' 방법으로 현재화되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 완성된 어떤 하늘 속의 상태처럼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 역사를 점점 더 하나님의 구원적·해방적 생명 속으로 받아들이므로써, 우리의 역사적 현실 속에서 점차 더 많이 투영되는 하나님의 사랑의 사건으로 드러난다. 복음선포와 예수의 권능행위(병자치유, 죄인들, 세리, 창기들과의 식탁교제, 굶주린 자를 먹이신 것, 죄인의 용서 등)는 여기서 이미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의 투영이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공의와 평화의 의지 속에서 완전히 실제적으로 현재하고 있다. 물론 그 완성된 목적 형태로 나타난 것은 아니다("totum, sed non totaliter", 성취이지만 완성은 아님: G.Ladd. 상징적 선취, 실제적인 상징: M.Kehl.). 이런 예수의 행위 속에서 이스라엘에게 선사된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은 손에 잡히듯 경험된다. 하나님은 예수의 인격과 행동 속에서 백성에게 매우 가까이 오셨기 때문에, 예수는 백성과 함께 식탁에 앉고, 문둥병자들을 접하며, 병자들을 치유하고, 죄인들을 용납했다. 예수는 그의 제자들도 동일한 하나님 나라의 현재화의 권세를 가지게 했으며, 그들을 다가온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함께 병자치유를 위해 파송했다(눅 10:9).

그러므로 예수는 묵시적인 하나님 나라의 표상지평을 결정적으로 폐기하였다. 이스라엘의 현 역사는 더 이상 멸망의 역사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새로운 구원의 역사이다. 옛 시대가 무너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된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의 구원사건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이 역사 한 복판에서 그 실현의 공간을 창조한다. 그러나 그것은 엄정한 율법순종이나 경건한 공동체에로의 제의적 후퇴 혹은 젤롯당과 같은 폭력행위를 통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공의와 평화의 의지가 보여지는 그러한 표징활동(Zeichenhandlung)을 통해 일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 선포는 이 역사의 끝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변혁시키고 해방시키는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를 통한 역사의 변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비록 이런 행위가 우리 인간에게는 너무 작고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일지라도(겨자씨나 누룩), 그것은 자신을 '관철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끊임없는 힘(Dynamik)에 의해 움직인다.

이것이 어떤 계속적(점진적) 진보 속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약속된 것은 아니다. 역사목표의 압도적 완성은 중단 없다. 비록 그것이 꼭 이루어지는 것으로 전망되지만, 그렇다고 일반적인 진보의 법칙이 주어진 것은 아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공의와 평화를 위하여 자신과 그 개인적·사회적 세계를 투명하게 만드는 곳이라면, 인간이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소집되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안으로 뚫고 들어온다.

(3) 하나님 나라 복음의 수신자: '가난한'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

예수는 의심할 나위 없이 전 이스라엘을 향해 선포하였고, 새롭고 구원받은 야웨의 12부족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을 궁극적으로 소집하려고 했다(12제자 소명의 표징).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은 지금 개시해 오는 하나님 나라의 일차적 담지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예수는 예언자들의 구원약속의 전통 안에 철저히 서 있다. 그러나 그는 이 전통의 한 특징을 특별히 강조했다. 그에게서 이스라엘은 단순히 백성, 국가, 신앙공동체로서가 아니라, '가난한' 백성으로서 새로운 구원가능성의 주체였다. 산상축복은 무엇보다 먼저 가난한 자들에게 선포되었다(눅 6:20-23의 원초적 형태).

이 가난한 자들, 굶주리는 자들, 우는 자들, 버림받은 자들은 무엇보다 예수의 제자들에 의해 대표되는 이스라엘 백성과 동일하다. 이 백성은 그 경험적 형태에서는 아직도 여전히 사탄의 권세아래 있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많은 병자들, 외세로 인한 장기적인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억압 속에 드러난다. 이사야서 61:1 이하의 이사야 예언과의 예수의 유사한 관계가 이 해석을 입증한다. 이사야의 가난한 자들을 위한 기쁜 소식은 포수기 때의 가난한 이스라엘에 해당된다. 이스라엘은 야웨 백성이라는 것 때문에 이방백성들에 의해 핍박·멸시받았다. 예수 시대에도 이스라엘은 같은 상황에 처해 있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의 정치적·사회적 가난은 죄의 권세에 의존한 것에 그 신학적 이유가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이 의존을 사탄정복을 통해 무너뜨린 한에서, 예수는 이 백성을 (제 2 이사야처럼) 축복할 수 있었다. 이런 구원의 선포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가난한' 이스라엘에게 현실적으로 이르렀다. 그것은 예수를 뒤따르므로써 하나님의 나라의 구원도래를 이미 경험한 예수의 제자들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예수에게서 이스라엘 백성은 단순히 무차별적으로 전체가 가난하고 굶주리며 애통하는 자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 속에서 가난, 굶주림, 질병, 슬픔, 사회적 배척을 가장 고통스럽고 생생하게 경험하는 사람들 안에서 가난한 이스라엘이 가장 분명히 대변되어 있다. 그러므로 바로 이들이 예수의 산상축복의 우선적 수신자들이다. 로마지배와 그리고 그와 결탁한 상급계층 때문에 경제적으로 크나큰 곤궁에 빠진, 바로 그 현실적으로 가난한 자들에게(그들로부터 예수의 제자들의 다수가 나왔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주체됨을 허락한 것이다.

그렇기에 예수는 특히 가난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약속한 고전적인 예언자들의 전통에 아주 의식적으로 접맥했다. 가난(???) 개념은 O.T에서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처음에는 예언자들에게서 가난이 개인적 재산의 결핍에 대한 사고로부터 이해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야웨만이 가나안 땅의 소유주였고, 땅은 모든 사람들에게 아무런 구별없이 그의 계약 안에서 소유하도록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하늘과 하늘 위의 또 하늘, 그리고 땅위에 있는 것 모두가 하나님 야웨의 것이다"(신명기 10:14). 땅은 본래 야웨의 것이고 따라서 토지의 수용·경작자는 하나님 야웨에게 "몸 붙여 사는 식객"에 불과했다(레 25:23). 가난한 자들이란 본래 전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야웨의 계약규정을 어김으로써 땅의 분배권을 잃어버린 자들, 실로 '야웨의 약속 때문에 속임 당한' 자들이 생겼다. 그러므로 본래 야웨의 권리보호와 계약준수는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와 의로운 지배를 가장 열망하며 기대했다. 그러기에 고대 예언자들은 야웨의 계약신앙 때문에, 오로지 하나님의 보호 능력만을 의지하고 자신의 힘의 수단없이 그의 약속의 보증만을 신뢰하던 가난한 자들의 권리를 위해 단호히 옹호했다. 그런 한에서 '가난' 개념은 이미 항상 사회적 차원(실제적 곤경상태)과 신학적 차원(야웨신뢰)을 포함한다.

포수기 후의 문서들에서는 계약사상에 대한 관련보다 오히려 율법준수가 더 전면에 나온다. 야웨의 율법을 충실히 지키는 자가 '가난한 자'로 여겨졌다. 그래서 '가난한' 자들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 뿐 아니라 개개의 의로운 자들, 토라를 엄수하는 경건한 자들과 동일시되었다. 이들이 사 66:2의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는' 자들이며, 이 내용은 마 5:3에 의해서 예수의 산상축복의 변형형태로 수용되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 나라가 저희 것임이로다". 이런 전통은 예수 시대 때 쿰란 공동체에서도 계승되었다. 이 공동체는 자신을 '가난한 자들의 공동체'로 이해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율법은 행하는 자들'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듯에 부응하는 자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하나님의 공의도 주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예수는 이런 가난이해로부터 분명히 결별했다. 예수에게서 경건한 엘리트 그룹이 참된 이스라엘의 핵심으로서 가난한 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갱신된 전 이스라엘과 특히 그 안에 있는 실제로 가난하고, 병들고, 슬퍼하며, 경멸·배척받는 자들이 가난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예수의 주위로 모여들어 다가올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약속을 기꺼이 수락했다.

비록 예수에겐 '이스라엘의' 가난이 직접적 의도에서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으나, 그는 그의 선포로써 국가적 한계를 철두철미하게 분쇄했다. 왜냐하면 율법의 문자적 실천이 아니라 고난을 당하는 이웃들에 대한 사랑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에 알맞는 행동의 척도이기 때문이다(마 25:31ff: 마지막 심판비유). 그러나 그런 행동은 원칙상 모든 이에게 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의 약속은 그 탁월한 의미에서 이 땅의 가난한 자들 전체에게 해당한다. 실로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만 선포는 '복된' 선포(복음)이다"(H.U.v.Balthasar). 왜냐하면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희망하고 자신이나 인간들로부터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전혀 없는, 실제로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옛 예언자들의 약속의 성취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을 죽음 후의 영생을 보게 함으로써 위로하지 않고 여기서 지금 가난한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개입'(J.Jeremias)을 선포하고 보여준다.

가난한 자들과 그들의 권리를 위한 예수의 예언자적 당파성은 그의 전체 선포의 중심동기로서 그것을 관통하고 있다. 하나님의 새로운 권리규정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것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의로운 자들, 부자들, 권력자들, 지혜로운 자들과 건강한 자들이 거기로부터 제외된 것은 아니다. 그들을 위해서도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그들도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함을 인정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선사 받으며, 스스로 '큰' 자가 되려고 하지 않고, 그리하여 아주 실제적이고 분명한 방법으로 가난한 자들의 운명에 참여할 준비를 갖추도록 철저한 회개가 요구되었다. 하나님의 나라 안의 어린이와 같이 되는 태도에로의 전향(회개)은 실천적으로 예수의 길을 따라가는 것, 가난한 자들과의 연대성을 포함한다. 우리가 예수와 같이 바로 가난한 자들, 소자들을 위해 행동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역사 안으로 도래한다.

 

5) 하나님의 나라와 이데올로기

① 예수가 '가난한' 이스라엘에게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신앙은 예수가 처음으로 창안한 새로운 내용이 아니었다. 예수는 이미 그의 선포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전 이해를 전제했다. 특히 예언자들, 묵시적 미래기대의 운동들에 의해 계승·확장된 하나님 나라의 신앙은 예수 당시에 여러 경향의 운동에서 생생히 살아있었음을 우리는 이미 보았다. 예수의 주기도문 "나라가 임하옵소서!"는 그 당대 이스라엘의 기도문 "당신의 나라를 지고 가게 하옵소서"(쉐마낭송 때에 함께 드리는 기도)의 틀을 물려받은 것이다. 역시 유대인이었던 예수는 이 기도를 기도의 모범으로 제자들에게 제시했다. "이름 거룩하게 하옵소서"(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의미의 수동적 금령권고가 아니라, 이방백성들이 야웨의 주권을 조롱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간구이다. 에스겔 36장 18-20절에는 이스라엘의 파괴로 인해 이방인들에게서 하나님의 이름이 경멸되는 것에 관해 언급되어 있다 : "? 그들의 이른 바 그 열국에서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인하여 더러워졌나니 곧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이르기를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이라도 여호와의 땅에서 떠난 자라 하였음이니라")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이다)도 다같이 하나님의 주권실현에 초점이 모아져 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도 같은 정신에서 이해된다.

하나님의 나라란 하나님의 통치, 아니 하나님의 주권임을 뜻한다. 이것은 O.T에서 야웨에게만 오로지 왕의 칭호를 적용시키는 신앙의 그리스적 표현이다. 그런데 O.T에서 야웨를 왕으로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의 유일성과 보편성을 표현한 것으로서, 구체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실제적인 삶에서 하나님 이외의 일체의 다른 세력에 의한 지배를 거부한 정신을 담고 있다. 즉 야웨를 유일한 왕으로 섬기는 것(오직 야웨주의, Mono-Yahwism)은 지상에서 인간적인 왕이나 군주의 지배 하에 속하는 것을 거부하는 반군주사상의 정신적 이념(이상?)을 내포하고 있다. 이 이념은 물질적 번영이나 문명, 기술보다는 평등과 정의에 더 우의를 둔 것으로서, 권력을 사유화하려는 왕조체제를 거부하는 평등주의이다. 국가체제나 왕의 지배가 없더라도 이스라엘은 지파동맹과 야웨와 맺은 계약에 의해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러 본문에서 왕권수립에 대한 이스라엘의 거부반응을 엿볼 수 있다(나무들의 왕 추대 우화는 초기 이스라엘의 반왕권적 의식을 반영함, 사사기 9:7-15/ 기드온의 왕 취임거부/ 왕정체제의 압제적·수탈적 구조를 경고한 사무엘 연설, 삼상 8:4-5, 10-17 등)

※ N.K.Gottwald (The Tribes of Yahwe, A Sociology of the Religion of Liberated Israel, 히브리성서 Ⅰ-Ⅱ, 사회 문학적 연구)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기원은 가나안 땅 의 군주국가의 계급사회를 탈출하여 계급 없는 사회를 세우려던 아피루('apiru)와 에 집트 왕과 그가 부과한 강제노동에서 (그들을) 구출해 낸 야웨와 계약을 맺은 히브 리(Ibri)가 합세하여 가나안 한 복판에서 야웨의 나라를 세운 것에서 설명된다(정복-입주 모델이 아닌 혁명모델) (Vgl. G.V. Fixley, 하느님 나라)

② 야웨의 나라에서 모든 사람이 동등한 사회를 이룩하려던 이스라엘의 혁명적 열정은, 생산과 공납을 담당하던 하층민들에게 의존되어 있었던 가나안 도시국가들이 농민들을 더 이상 뺏기지 않기 위해 이스라엘을 억압해오자, 이런 계속적 압력에 대항하기 위해 국가를 형성하려던 시도에 부딪쳤다. 군주체제에 대한 증대되는 욕구는 왕권을 확립하려고 처음 시도한 아비멜렉(3년간 지속되다 암살당함, 이스라엘 동맹체에 기반을 두고 강력한 군대를 갖추지 못함), 사울(군주체제를 확립함, 그러나 왕조나 왕실을 수립 못했음), 다윗(공물요구, 군대조직강화, 예루살렘 탈취, 왕궁건설), 솔로몬(사치, 궁중관료체제와 조세의 확대, 성전건축과 강제노동)에 의해 점차 반혁명적 경향으로 굳어져갔다. 그런데 이들은 지상에서 어떠한 인간적 지배를 배제한 평등과 정의의 이상향을 담고 있던 야웨의 왕권개념을 자신들의 통치를 정당화(합리화)하는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이용(변형)하였다. 특히 솔로몬 왕에 이르러 이스라엘의 혁명이념에 상치되는 점들(화려한 성전건축을 위한 노동자 강제징집과 혹독한 노동, 세금의 과다한 부과 등)이 야웨에의 헌신이라는 허울 좋은 구실 아래 은폐되었다. 솔로문의 성전건축은 해방자 야웨를 다윗왕조의 후원자 야웨로 만들려는 시도 아래서 이루어졌고, 본래는 이스라엘과 맺어진 야웨의 계약이 왕조보존을 위한 이데올로기로서 변형되었으며(야웨께서 다윗과 그 후손들에게 영원히 그리고 전적으로 총성을 바치신다는 것: 시 89:31-34), 특히 왕을 야웨의 아들(양자)이라고 부르는 왕조 이데올로기(시 2:2-7)뿐만 아니라, 왕을 대관식에서 하나님으로 부르고(시 45:6) 왕을 들판의 풍요와 가축의 번성을 부여하는 자로 부르는(시 72:6) 데까지 왕조 이데올로기가 강화되었다. 이처럼 평등의 이념을 가진 하나님의 나라는 그와 정반대가 되는 현실을 은폐·강화하는 데 이바지한 것은 이사야에 의해 철저히 폭로,비판되었다.(사 1:21-26, 6:10-13. 10:32-34, 11:1-4)

③ 다윗왕조를 지탱해주던 왕조 이데올로기는 BC 587년의 예루살렘의 파괴, 왕실의 추방으로 인해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 대신 이제는 요시아의 종교개혁(BC. 621) 이래로 사제계급에 의해 구축된 사제 중심적 종교 이데올로기가 팔레스틴의 계급지배를 정당화·은폐하기 시작했다. 요시아는 모든 민족적 삶을 예루살렘 주변으로 집중시킨 개혁을 단행했다. 이런 집중화로 인하여 예루살렘 성소 외의 모든 성소들은 파괴되었고 예루살렘의 사독 제사장들이 합법적인 종교적 제의를 독점했다. 페르샤의 지원을 받은 사제계급은 제국과 백성들 (생산 담당자들) 사이에서 완충역할을 수행했다. 페르샤 제국의 지지를 받은 사제계급은 성전을 그들의 지배를 견고히 하는데 필요한 기반으로 삼아 사제 중심적 사회를 구축했다. 그리하여 야웨의 지배는 성전을 통해 표현되었으며, 많은 종교규칙들이 제정되었다. 그리고 시내산 계약은 종교적 삶과 예배를 계시한 것으로 개작, 변형되었다. 그리고 사제 계급은 왕궁을 대신해서 공물을 징수할 권한을 가졌고, 잉여노동의 착취, 성전의 상업행위, 환전제도 등을 통하여 6C 동안 지배계급으로 군림하였다.


6)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와 인간의 현실

(1) 보편적인 사회적 역전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

예수가 그 당대의 억압적·수탈적 현실에 맞서서 선포했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현 구조로부터 미래적 희망으로의 탈출을 야기하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또 한편으로는 고대 이스라엘의 이상으로의 복귀를 의도했다. 그것은 보편적인 사회적 역전, 즉 상황이 반전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달하고 축하하며, 희망을 가질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역전이라는 주제를 뚜렷하게 부각시켰다(R.M.Brown, 뜻밖의 소식, 125).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 현실 속으로 파고들어와 그것의 역전을 준동시킨다.

눅 4:18-19 →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선포되고, 포로된 자들에게 해방이, 억눌린 자들에게 자유가 선포된다.

마 20 : 25 → 이방인의 집권자들처럼 임의로 주관하고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낮은 자로 선포된다. (지배, 억압, 계급이 없는 이상적 평등사회)

눅 4 : 19 → 가난하고 억눌리고 포로된 자들에게 주의 은혜의 해(희년 복음)가 선포된다: 토지휴경, 빚진 자 탕감, 종살이의 해방, 집과 땅의 소유권 회복 (경제적 착취, 수탈, 불평등이 없는 공동사회)

눅 7 : 34f → 죄인들, 세리, 창기들의 친구, 함께 먹고 마심(식탁 공동체)

(멸시받는 자들과 나눈 메시야 잔치의 기쁨 - 사회적 소외, 차별이 없는 개 방된 사회)

섬김과 나눔, 더불어 함은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적 규정이다. 이것을 위하여 예수는 당대인들에게 해방과 자유, 평등과 정의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자신의 인격과 행위 속에서 이것을 가시화ㅗ표징화했다. 그러나 예수는 억압,수탈의 제 1원인인 로마보다는 이것을 체제화하고 있는 성전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우선적으로 겨냥했다(성전청결 사건, 성전파괴 예언). 그리고 세상의 통치자요 억압적 구조의 근본악인 사탄과 대결하여 이의 결정적 패배를 보았다. 즉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하고 있는 사탄의 나라와의 대결을 더 근본적으로 생각했다. 이리하여 예수는 전 세상의 해방을 목표로 삼았다. 하나님의 나라는 보편적인 인간사회의 완전한 해방을 위하여 이 땅 속으로 개입해 들어온다는 사실을 예수는 선포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인격과 사역, 행태 속에서 이를 실천하고 선취(先取)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단순히 미래적인 유토피아로만 머물지 않고(비묵시화, 탈묵시화) 사회전반의 악의 구조를 역전시키고 들어오는 강력한 능력으로 실증되었다.

(2) 하나님의 주도권과 인간의 참여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나라는 어떠한 인간의 노력에 의해 달성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て주도적 행위에 의해 일어나는 하나님의 통치였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노력을 통해 이 땅에 실현될 수 있는, 사회적 혁명을 통해 급진적으로나 인간의 계획을 통해 점진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인간의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제 스스로의 힘에 의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부터 들어온다(스스로 자라나는 씨의 비유). 하나님은 그의 나라를 인간에게 주신다(눅 12:32, 22:29). 인간이 제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 확장, 촉진, 건설할 수 있다는 생각은 예수에게서 낯선 것이었다(Vgl. 천국의 침노? - 마 11:12f. 눅 16:16). 인간이 세우는 어떠한 이상적 세계도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고, 인간의 모든 혁명도 결코 완전한 것이 아니라 옛것의 연속, 낡은 것의 수립일 뿐이다. 하나님의 혁명은 세상에서 혁명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의 혁명이다(K.Barth).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에 대해 수동적으로 머물러 있음으로써 그 나라를 소유할 수 없다. 인간은 하나님의 나라가 오기를 기도하고(마 6:10), 구하고(눅 12:31), 준비해야 한다(마 24:44, 25:10, 13). 인간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찾고 그 문을 두드려야 한다(마 7;7-11). 예수는 제자들에게 단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기대하라고 말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뒤를 따라오라고 분부했고(제자의 길), 이를 위해 봉사하게 했고(헌신), 그들에게도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는 능력을 부여했다(막 6:12f.). 그런 의미에서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해 섬기고 이에 협력하는 자로서 위임받았다. 마지막 심판의 비유(마 25:31-46)에서 보듯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수신자들인 가난한 자들에 대한 헌신을 실천하지 않은 자들은 그 나라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나님 나라의 주도권은 인간의 회개, 결단, 책임과 헌신을 요구한다. 하나님 나라의 혁명은 인간의 참여를 촉구한다. 인간은 선취적 희망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단지 선포할 뿐만 아니라 이를 앞당겨 준비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매개를 필요로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혁명을 매개로 하여 이 땅 속으로 파고 들어온다.

(3) 하나님의 나라의 종교적 의미

하나님의 나라는 엘리트 그룹(바리새인 그룹: 율법주의/ 에세네 그룹: 선민사상/ 젤롯당 무리: 폭력주의)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율법에서 볼 때 죄많은 자들, 율법을 모를 뿐 아니라 지킬 능력도 없는, 아니 율법적 바리새주의에 의해 죄인으로 취급받기까지 소외된 자들, 스스로 선민으로 자처하기에는 너무나 암담한 절망 속에서 체념하는 자들, 오히려 버림받고 병들어 있는 자들, 폭력을 행사할 아무런 도구도 의욕도 없이 철저히 무력화되어 있는 자들에게 기쁜 소식으로 다가왔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잃어버린 양의 목자, 병든 자들의 의원, 집 나간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로 계시되었다. 복음은 사죄와 용서, 치유와 회복을 가져다 준 은혜의 원천이었다. 이러한 은혜의 빛 아래서 모든 종류의 율법주의, 선민주의, 폭력주의는 빛을 잃는다. 하나님은 율법보다는 인간을, 특히 상실된 인간을 더 위하셨고, 선민보다는 군중을, 특히 죄많은 인간을 더 위하셨고, 폭력보다는 인간성을, 특히 폭력 아래 있는 인간을 더 위하셨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자, 죄인, 무력한 자들의 편에 서셨다. 인간은 잃어버린 자, 혹은 이 잃어버린 자와 연대하는 자로서만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다. 위선, 교만, 허세, 폐쇄주의는 철폐되고, 무력, 절망, 미움, 패배주의는 극복된다. 인간은 잃어버린 자로서 하나님에 의해 발견된 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