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고대교부들의 종말론

 

 

1) 속사도 교부들과 변증가들의 종말론

(1) 속사도 교부들(Clement, Hermas, Ignatius, Barnaba, Didache)

영지주의의 이원론과 헬라적 사고에 대항하는 생생한 전승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변화가 주목된다 : 옛 유대교의 율법주의적 사고가 되살아나서, 인간의 완성노력이 도래할 영광과 관련되었다. 세례의 종말, 부활, 심판의 임박함이 기대되었다.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도 큰 역할을 하지만, 이 나라는 사후의 보상으로 생각되었고(Cle.) 이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으로서 성례전(Her.), 선행(Cle.)이 제시되었고, 윤리적 공로신앙이 강한 동기를 부여했다.

속사도 교부들의 종말론의 특징 : 이들은 순전히 피안적이고, 세상을 평가절했다(이원론적, 세상에 대한 무관심, 세상변혁의 목적은 생소해짐).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은 형식상 퇴조하고, 미래의 희망에 제한되며, 내용상 공허해졌다 그 대신에 유대적 율법주의가 다시 효력을 끼쳤다.(하나님의 통치 대신에 인간의 행위, 도덕적 열망의 지배가 우수해짐)

(2) 변증가들(Tatian, Justin, Theophilus, Athenagoras)


① 종말론 : 심판의 두려움, 약속된 보상의 기대가 윤리의 주요동기로 작용했다(거룩함, 완전의 노력). 개인의 운명에 대한 물음이 전면에 나오고, 일반적 종말론은 퇴조하는 경향을 보였다.

② 하나님의 나라 : 변증가들의 문서에 이 개념은 거의 나타나지 않고, 개인의 완성에 관한 질문이 우세했다(구원의 희망이 헬라적 불멸, 영생, 완전한 인식 안에서 표현됨).

 

2) 초대교부들의 종말론

(1) Irenaeus(200년경 사망)

이레네우스는 영성화된 종말론과 지상적 영광에 관한 거대한 종말 표상을 결합한 요한과 일치된 입장을 보인다. 그러나 이 옛 표상에 새로운 이해가 덧붙여졌다. 즉 이레네우스에게는 이제 종말의 거대한 재앙이 중심에 차지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점진적 발전의 완성이 중요히 다루어졌다. 이레네우스는 처음으로 구속사를 '발전'의 관점 하에서 본 신학자였다. 여기서 모든 단계는 지금까지 존재해 온 것의 종결이면서도 그 완성이고 새로운 것의 시작이다. 이레네우스에겐 이 발전 사상이 종말론과 결합되었다.

하나님의 나라 개념은 이레네우스의 종말론에 큰 역할을 한다(30번 이상 인용).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그리스도의 최초의 지상출현과 동일시되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과 대립되어 있는 하나님의 통치의 장소, 하늘나라로서 순수히 피안적て초지상적인 것으로서 표상되었다. 그곳은 구원과 축복의 장소이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대향연에 대한 성서적 표상, 메시야에 대한 다니엘의 표상도 생생히 살아 있으나, 그 내용적 특성은 '생명', '불멸', '하나님을 봄'과 같은 표현을 통해 신약성서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의 상태는 평화와 안식의 상태로 표상되었다.

하나님의 라라를 향한 발전의 사고는 이레네우스의 천년왕국적 표상을 특별히 특징짓는 요소이다.왜냐하면 그는 신비적인 피안적 종말론 외에도 그리스도의 재림과 이 땅 위의 영광에 관한 원시기독교의 표상도 이레네우스는 받아들였기 때문이다(두 표상들이 서로 엮어져 있음). 재림하는 그리스도, 세계의 갱신, 의인의 부활, 천년왕국, 일반부활과 심판의 기대는 이레네우스의 사색적て우주적 사고 속에 배열되었다.

이레네우스의 신학적 기본사고는 회복설(Recapitulatio; 복귀설)에 있다. 그는 엡 1:10로부터 회복의 개념을 받아들였다("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의 통치 아래 모든 피조물을 통일시킨다는 것이다. 이 사상은 역사신학적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의 역사와 전 피조물의 목표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성육신과 인간됨 속에서 전 역사를 '반복'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자신을 향해, 자신의 원형(로고스)에 따라 통일시킨다.

(2) Tertullian(150-225)

이레네우스가 신비가로서 하나님 안에 있는 영혼의 최고의 만족과 즐거움을 - 개인중심적으로 바라본 반면에, 터툴리안은 죄에 대한 승리, 거룩한 생활에 대한 '윤리적' 질문에 의해 지배받고 있었다. 그의 희망도 윤리로부터 형성되었다. 그의 윤리적 진지함은 그로 하여금 몬타누스주의로 기울게 했으며, 몬타누스 이전 시대의 문서에서도 그는 금욕적-세계 도피적 심정의 지배를 받았다. 그에게서 하나님의 보응적 공의가 일방적으로 강조되었고, 그러한 윤리적 강조는 유대적 율법주의에로 퇴보함을 의미했다.

터툴리안은 몬타누스주의로 발전해 가면서 세계 도피적인 종말론적 입장을 더욱 더 강조했다. 물론 그도 하나님께서 지금 이미 역사하시고 그의 통치가 손 안에서 이루어짐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는 노예적 생활인 이 세계로부터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가는 심정을 대변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공로에 대한 보상으로 이해되었고, 이 하나님의 나라는 세계의 변화 이후에야 비로소 의인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의 종말론은 심판사상의 특징을 갖추고 있었다. 비록 그는 천년왕국의 희망을 견지했으나 그것은 큰 의미를 갖진 못했고, 세상의 생활로부터 벗어나 의인들이 새 도시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할 영광스러운 생활을 바라보았다. 그 종말의 희망도 완전히 영성화된 표상을 지니고 있었다.

(3) Clemens(216년 이전 사망)

터툴리안이 몬타누스주의자였다면, 클레멘스는 영지주의의 영향을 심원하게 받은 자였다. 그리고 사도 후 시대에 그 어떤 누구도 클레멘스만큼 심원함과 순수함을 가지고 복음을 윤리적으로 파악한 자가 없었다. 영지(Gnosis)는 순수한 윤리성과 결합되었다(완전주의, 종말론의 펑가절하). 인간은 행위와 기도의 꾸준한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얻는다. 하늘 나라는 윤리적 생활의 보상으로 약속되었다. 영생은 만물의 변화를 전제로 하는 미래적 은사가 아니라, 분명한 영혼의 태도이다. 영지주의자는 생활을 사랑하기보다는 그것을 이용하여 영지를 소유하는 필수적 기초로 삼는다. 그는 이생에서 가능한 한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금욕적으로 생활한다(즉 하나님 안의 인식 = 신격화:Vergottung). 클레멘스에게서 영지와 불멸은 같은 개념이다.(윤리의 해체 - 요한의 영향, 신비주의)

인간은 육신을 벗은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을 실제로 얼굴을 맞대어 볼 수 있다. 클레멘스는 육신의 부활에 단순한 부정적인 입장을 가졌다. 그의 종말론에서는 그리스적 영향이 전면에 나온다(플라톤적 사고). 하나님의 나라 개념은 N.T뿐만 아니라 그리스 철학으로부터 형성되었다. 하늘의 예루살렘의 표상에서 클레멘스는 그리스 철학과 신화의 모형을 찾았다.(영성화, 신비적 표현)

(4) Origenes(185-254)

오리겐은 하나님의 나라를 발전의 시초와 종말에서만 본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항상 어디에나 활동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단순히 희망의 보화가 아니라 형성되어 가는 중에서 현존한다. 오리겐은 그리스도가 모든 것을 다스릴 때를 기대했고,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관해서도 언급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갑자기 돌입해오는 재앙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점진적 진보 속에서 충만한 데까지(하나님이 만물 안의 만물이 될 때까지) 성장한다. 이러한 발전개념은 결국 점차 종말론을 평가절하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엔 임박한 종말론적 특징이 내재적인 하나님 나라의 배후로 물러가 버렸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혼의 행복한 상태이고, 그리스도의 나라는 지혜와 의의 충만이다. 오리겐은 비록 초대기독교의 사고도 받아들였으나(예수의 산상설교, 인간마음 속에서 지배하는 그리스도의 통치, 살아서 역사하는 하나님), 예수의 복음을 축소시켰다(내면화, 역사의 평가절하, 죄의 평가절하). 그에게서 구속사는 윤리적 소명과 정결의 개인적 체험 배후로 물러갔다.(오리겐은 영지주의자이다!?)

(5) Augustinus(354-430)

어거스틴에 의하면 카톨릭 교회는 진리의 보증자와 구원의 매개자로서 하나님의 도성(Civitas Dei)이다. 카톨릭 교회는 참되게 믿고 희망하며 사랑하는 자들 가운데서, 그리고 그 계급구조에서 이미 벌써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지배를 자신 안에서 실현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어거스틴은 Cyprian의 입장에 따라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clesiam nulla salus)고 하였다.

교회는 성도들의 교제다(communio sanctorum). 물론 동시에 교회는 불순종과 순종의 혼합이 없는 하나님의 지배가 완전히 이루어지는 도상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Civitas Dei는 보이지 않는 교회이고, 현 교회는 섞여진 그리스도의 몸(Corpus Christi Permixtum), 섞여진 교회(ecclesia permixta)이다. 여기서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는 원리는 근본적으로 무너진다. 구원의 조건은 성찬수납, 교회소속에 있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결의 안에 있다. Civitas Dei는 예정된 자들의 친교이다.

여기서 두 가지 관점이 병존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Civitas Dei는 카톨릭 교회라는 역사적 실체이면서, 동시에 성도들, 예정된 자들의 친교라는 초역사적인 영원한 실체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에게서 이 구별이 분명하지 않다. 보이지 않는 예정된 자들의 교회인 Civitas Dei는 여전히 역사 속에서 볼 수 있는 실체이다. 초월적인 영원한 Civitas Dei는 거듭 역사 속에서 비로소 형성되고 발전된다. 카톨릭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는 이미 그의 첫 강림 이래로 통치한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벌써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이다. 그리스도의 통치는 이미 실제적인 교회 안에서 실현된다.

그런데 질적으로 새로운 그리스도의 통치의 단계는 오직 역사의 너머에서, Civitas Dei의 완성 속에서 도달된다. 어거스틴에게서 종말론은 역사적 발전의 사고 속에 용해되기보다는 강하게 퇴조되었다. 그에게서 임박한 종말기대의 열정이 없다.

물론 어거스틴은 Civitas Dei와 Civitas Diaboli의 투쟁이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적그리스도의 박해 후에 그리스도가 마지막 심판을 위해 오시고, 죽은 자들이 부활하며 선인과 악인의 영원한 구분, 세계의 갱신(세계의 불심판 후)이 일어난다고 믿었다. 그때에 Civitas Dei는 그 순례의 목표에 이르고 하나님의 나라를 물려받는다. 이처럼 세계와 교회의 목표를 묘사할 때, 역사적 고찰이 전면에 부상된 반면에, 종말론적인 표상은 개개인의 완성에 더 가까이 초점을 맞추고 있다. 비록 어거스틴은 교회가 세상에서 갖고 있는 과업을 긍정했지만, 그의 이상은 여전히 본질적으로는 세상 도피적이다. 지상의 삶은 우리에게 약속된 유산을 바라보고 견디어야 할 형벌, 시련의 연속이다. 이생은 투쟁의 시기이고, 승리와 행복은 미래에 있다. 세상은 하나님이 교육시키시는 교육수단이다. 우리는 고통 속의 인내를 통해서 하늘의 좋은 처소를 물려받는다.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의 마지막에 있을 만물의 새 창조가 아니라, 개개인의 죽음 후에 들어가는 피안이다. 종말론적인 표상은 개개인이 보상(몫)을 바라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어거스틴의 종말론의 특징은 헬라의 영성(Spirtuality)과 성서적 사실주의(Biblical realism)의 결합이다.(칼빈의 종말론, 2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