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재구성과 해석

 

 

조직신학은 그 모든 연구과정에서 신학적으로 구속력을 갖는 것을 정연하게 표현하는 것, 때로는 이를 새로이 표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1) 텍스트

조직신학의 텍스트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은 일차적으로 신학적인 구속력을 갖는다고 주장하는 진술들과 진술들의 복합체들이다. 먼저 성서 카논, 교리사 발전의 결과들, 신학적인 규범으로 인정되는 고백문서들이 텍스트가 되고, 그 다음에는 교의학적인 가르침들이 텍스트가 되며, 마지막으로 그리스도교적 신앙을 표현하는 모든 종류의 문헌들도 텍스트가 된다. 이러한 텍스트가 언제나 문학적으로 고정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2) 해석의 규칙

조직적인 사고의 요구에 부응하려면, 해석은 대개 두 가지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

첫째 해석 규칙은 형식적인 것이지만 실질적으로 매우 중요한 것이다. 모든 조직신학적 담론은 논증(Argument)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텍스트에서 논증을 끄집어내어야 한다. 텍스트가 논증적인 특징을 전혀 갖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이 갖는 논증적인 내용을 질문하여야 한다.

이 규칙은 확고하고 자명한 것이다. 전제로부터 출발하여 단계적으로 설명하면서 결론을 내리려는 담론적 사고는 논증을 필요로 한다. 즉 분명하고 규칙적인 사고 과정 속에서 서로 연결되고 설명을 통해 입증되기에 적합한 진술들을 필요로 한다. 논증은 강조(Impression)와 의사 표현(Expression)에서 드러난다. 또한 논증은 주장, 의도 설명, 논쟁에 대한 주해, 입장 표명, 반성적 고찰 중에서도 드러난다.

이것은 조직(체계)적인 면밀함과 분석적인 꼼곰함을 요구하는, 매우 힘든 해석 작업이다. 하지만 (특히 현대의) 신학 텍스트들이 실제로 논증적인 특징을 점점 더 많이 생략하는 만큼, 신학적 이해를 위한 해석 작업은 더 큰 중요성을 갖는다. 그 밖에도 신학적 진술들의 대화적 특성을 고려하고, 이를 다른 학문의 대화적 구조와 비교할 때, 앞에서 말한 해석 규칙이 얼마나 중요한지 더 분명히 드러난다. 문학적인 특성을 갖든지, 구두적인 특성을 갖든지 간에, 신학적 진술들은 단순한 사실 전달을 넘어서 풍부한 언어적인 자료들을 지닌다. 신학적 진술들은 일반적으로 매우 복합적이며, 단순한 정보내용 외에도 말하자면 고음(高音: Oberton)과 저음(低音: Unterton)을 포함한다. 이 점은 한편으로 신학적 진술들이 대체로 연상이 풍부한 의미연관성(Sinnzusammenhang) - 이것은 전승(傳承)에서, 그리고 일상세계와의 다층적인 관련성에서 생겨난다 - 안에 있다는 사실로부터 설명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신학이 - 기구적인 대화와는 달리 사실을 확인하는 데 그치지 않고 - 해석, 가치와 규범을 표현하는, 이른바 명시적인 대화를 고려해야 한다는 사실로부터도 설명된다.

신학적 정보전달의 이런 특성은, 그것이 제한된 내용을 분명하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과 청중들, 대화 상대자들에게 동의(同意)를 요구한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만약 이런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해의 어려움이 생겨난다. 그렇게 되면, 신학의 진술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이것은 종종 진술들의 논리적인 구조와 관련이 있다기보다는 이해가 이루어지는 대화의 조건들과 대화의 과정에 의존해 있다. 실로 텍스트가 없어도 그 논증적 내용을 전달할 수 있으려면, 대화적인 관계의 그물(Net)을 발견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바로 그럴 때, 비로소 그 내용은 이해될 수가 있는 것이다.

둘째 해석 규칙은 논증의 해명에서 그 검증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다. 이것은 진리가 될 수 있는 진술들(wahrheitsfähige Aussage)을 전달한다.

조직-신학의 검증을 위해서는 이 진술들이 신학적 진술들로 인정될 수 있어야 한다. 신학적 진술들을 확정하는 일은 언제나 간단한 일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신학적 내용을 포함하는 것과 신학자들이 말하는 것이 모두가 신학적 진술들은 아니기 때문이다.그리고 어떠한 진술을 신학적 진술로 보아야 하는지도 자주 논쟁되어 왔다. 이런 논쟁은 보통 교의학 서론(Prolegomena)에서 다루어질 수 있다. 하지만 하나의 진술이 실제로 신학적인 진술로 표현되었는지는 대개 사안별로 검증할 수 있고 결정할 수 있다.

"무엇이 신학적 진술인가?"라는 물음에 대해서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학사로부터 서로 다른 주장을 들을 수 있다.

쉴라이어마허(F. Schleiermacher)에 따르면, 어떤 진술이 신학적 진술로 인정되려면, 그것이 인간의 하나님 관계를 다루어야 한다. 물론 쉴라이어가 하나님 관계를 규정하는대로, 종교적인 (절대적인) 의존감정의 의미에서 그러하다. 물론 신학이 단지 이런 의존감정만을 말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쉴라이어마허는 신학적 담론의 형식을 세 가지 관점에서 말한다. "그리스도교적인 신앙론을 주장하려는 모든 문장들은 인간의 생활 상태의 묘사로, 혹은 하나님의 속성들과 활동 방법에 관한 진술로, 혹은 세계의 본질에 관한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모든 형식들은 항상 서로 병존해 왔다."(Glaubenslehre, Berlin 1830). 하지만 방법론적으로 보면, "경건한 감정 유발에 관한 성찰의 세 가지 형식"은 언제나 "감정 상태의 직접적인 묘사" 위에서 이루어진다. 즉 이것은 의존감정에 관한 진술, 혹은 의존감정을 통해 정립되는 인간의 자기 의식에 관한 진술 안에서 표명될 수 있다.

칼 바르트(K. Barth)는 쉴라이어마허에와 대립되는 명제를 확고히 내세웠다. "오직 하나님에 관한 진술, 혹은 그러한 진술 안에서 형성될 수 있는 유사한 진술만이 신학적 진술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에 관한 발언을 신학의 대상으로 결정할 것을 제안한 적이 있다. 따라서 신학적 진술은 하나님에 관한 발언로 정의될 수 있다.

* 비교

1) 쉴라이어마허는 죄의식을 고려하는 가운데서 하나님과의 사귐의 의식(意識)에 관한 진술 안에서 화해론을 말한다.

2) 바르트는 그의 화해론에서 사귐을 창조하는 하나님의 행동(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에 관해 말한다. 이 행동은 그의 자기 결정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바르트는 이 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계시되었는지에 관해 말한다.

3) 신학의 대상이 하나님에 관한 발언이라는 정의를 따른다면, 우리에게 약속되고 그래서 우리에게 현실화된, 화해됨의 상태 안에 있는 인간의 하나님 발언이 바로 신학적 화해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