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월론적 체계

 



칼 라너(Karl Rahner)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n von Aquinas), 더 정확히 말하면, 새로운 토마스주의(Thomismus)의 바탕 위에 서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열망"을 그 근본 주제로 삼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을 향해 질문하지 않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도록 만들어졌다. 명시적이든, 잠재적이든, 어떤 형태로든지 인간은 항상 자신의 창조주인 하나님을 향해 손을 뻗는다. 이것은 피조물로서의 그의 본질 안에 각인되어 있다. 다른 한편으로 토마스주의자들에 따르면, 인간을 함께 말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에 관해서도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은 인간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중심적인 지향성"을 갖는다. 그래서 신학자도 인간 실존의 분석으로부터 출발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 바로 그러므로 라너도, 예를 들면, 그가 칸트의 정신적인 발자국을 따라 "초월적"(선험적: transzendental)인 방법으로 생각할 때, 다시 말하면, "가능성의 조건들"을 질문할 때, 단숨에 인간의 행복과 그의 하나님에 관해 말하려고 애쓴다. 이와 동시에 라너는 하이덱거(Heidegger)와 함께 인간을 자기 자신에 대한 살아 있는 질문으로, 앞을 향해 항상 자신을 항상 넘어서는, 바로 그래서 또한 언제나 이미 하나님을 추구하고 있는 존재로 파악한다. 그의 본질적인 존재가 미래적으로(zu-künftig: -에게 오고 있는) 자신 앞에 있는 한, 하나님도 그 앞에 있다.

라너는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의미에서 이러한 초월적인 출발점을 사용한다. 바로 이 출발점으로써 그는 자신의 체계까지 세운다. 모든 교의학적 주제를 다룰 때마다, 그는 인식론적으로 인간의 정신의 속성 안에서 이 주제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요인들을 추구한다. 이런 맥락에서 라너는 "범주적(kategorial: 개념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계시"로서 인간에게 명시적인 의식을 제공하기 전부터 "암시적인 의식"의 영역 안에서 움직이는 "초월적인 계시"에 관해 말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그리스도이든 비그리스도이든, 혹은 심지어 인간적인 무신론자이든, 그에게 항상 은밀하게 다가가는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바로 이 길, 즉 표명되지 않은 것에서 표명되는 것으로, 희미하게 감지된 것에서 분명히 의식되는 것으로, 반성(反省) 이전의 것에서 반성적으로 전개된 것으로 나아가는 길에서 자신을 알리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즉, 하나님의 범주적인 자기 계시를 분명하게, 감사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신인식(神認識)의 "전역사"(前歷史)는 모든 조건들을 자신 안으로 통합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 존재의 "최상의 사례", 참 인류와 참 인간성의 절대적이고 역사적인 봉우리일수록, 이러한 승리의 인식론은 인간 정신의 가능성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래서 초월적인 출발점은 인간론과 그리스도론, 신론을 다함께 성찰하고 체계화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교회론과 그 '부록'인 성사론(성례전에 관한 이론)도 역시 이런 방법으로 체계 안으로 수용될 수 있다.

신앙과 사랑과 소망의 사람이 자신을 실현하려고 가는 길은 존재론적으로(다시 말하면, 존재자의 존재에 관한 한) 초월적인 인식의 길에 상응한다. 여기서 "초월"이라는 개념은 역동적인 의미를 지닌다. 초월은 항상 자신을 넘어서서 미래로 나아가려는 정신적 존재의 행위이다. 비록 "원죄적 상황"이 장애물처럼 인간 앞에 드리워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실존적인"(즉 실존의 불가피한 구성 요소인) 존재인 그의 존재가 그를 괴롭힌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로운 자기 전달은, 그를 "초자연적인 실존"으로 만들고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그를 돕기 위하여, 그에게 강력히 제공된다. 이리하여 은총을 경험한 인간은 자기 앞에 활짝 열린 길을 갖게 된다. 그는 의미있게 자신을 계획하고 실현할 수 있다. 토마스의 말을 빌리면, 은총은 자연을 높인다.

이런 종류의 교의학에 대한 가치판단을 내린다면, 우리는 라너의 획기적인 공로를 객관적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신스콜라주의가 새롭게 등장하여, 철저히 역동적이고 대화적인 사고 방법을 발전시킨다. 만약 라너가 교회의 공식적 주장들, 명제들, 사고 과정들, 개념들을 정당화하려고 굉장히 노력했다고 한다면(그는 분명히 성서적인 근거에 비교적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그의 공로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즉 그는 "원죄", "화체설", "실체적 연합"과 같이 매우 어려운 주제들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리하여 라너는 신스콜라주의적으로 경직된 교리 체계들을 안으로부터 개혁하였으며, 비기독교적인 정신 사조에 이르기까지 초교파적인 대화를 가능케 하였다.

 

라너의 초월론적 인간학

남성천(M.A. 2차)

1. 라너는 누구인가?

그의 말년에 "자기 자신의 양심을 따르고 있는 사람이라면, 굳이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다 혹은 아니다라고 생각하든 말든, 무신론자라고 생각하든 그 반대로 생각하든 상관없이, 그런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교 신앙의 목표로 고백하고 있는 영생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이라고 定義한 「익명의 그리스도인anonymes Christentum」이라는 개념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칼 라너(Karl Rahner, 1904.3.05∼1984.3.30)는 금세기 선도적 신학자들 중의 한 사람이다. 가톨릭의 학자이자 신부이기도 한 라너는 프라이부르크(Freibrug im Breisgau)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여기에서 줄곧 살다가 1922년 4월 예수회에 입회한 후, 다시 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해 호넥커(Martin Honecker)와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문하에서 철학을 수학하였다. 2차대전이 끝나자 학자로서의 본격적인 임무를 시작한 라너는 당시 가톨릭 신학이 너무나 자주 '신비'라는 이름으로 신학적 사유를 그치는 데에 반대해 "더 나아가는" '합리성'을 추구하였다. 1949년부터 15년간 인스브루크에서 교수생활을 한 후, 뮌헨에서 잠시 그리스도교 세계관과 종교철학 강좌를 열고, 뮌스터로 가서 거기서 1971년 은퇴할 때까지 교의학과 교회사 교수로 재직하였다. 라너의 신학 저술은 다양한 주제와 풍부한 착상을 담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신학과 자연과학 사이의 대화, 그리스도와 타 종교들과의 관계성, 그리스도교와 무신론 혹은 맑스주의와의 대화는 특기할 만하다.

2. 초월론적 인간론

2.1. 문제제기

라너는 인간의 경험에 집중한다. 이 분은 "하느님이 사람이 되었다" 등의 전통적인 신앙 진술을 직접적으로 표명하는 것은 현대인의 인간 실존과는 상관없는 단순한 신화가 될 뿐이라고 여겼다. 전통적인 신앙 진술들의 고유한 의미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기 위해서는 현대의 의식지평 위에서 재전개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비신앙적이며 지적 다원주의가 만연한 인간중심의 시대 상황에서는 인간의 경험과 실존을 분석하는 인간학을 기점으로 신학을 전개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라너는 인간의 경험을 분석하여 그 경험 안에서 비명제적으로(unthematisch) 의식되는 인간 실존의 요소를 밝혀내고, 이를 통해 신학의 주제들을 전개시켜 나가려 했다.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현 시대의 요청에 따라 신학은 인간학적으로 전환될 필요가 있으며, "인간에 대한 질문과 대답은 교의학 전반에 걸친 내용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2.2. 필요근거

라너는 이런 신학적 전환이 필요한 이유를 세 가지로 밝히고 있다.

첫째는 사실의 본질에 따른 이유인데, 신학적인 것은 물론이고 정신적인 인식의 본질에서 비추어 보아, 인식 대상에 대한 물음은 곧 인식하는 주체의 본질에 대한 물음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오늘날의 새로운 상황이 초월론적 인간학의 문제설정과 그 방법론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 칸트, 독일 관념론에서부터 근대 현상학, 실존주의에 이르기까지 철학이 초월론적 인간학 - 이 말은 조금 뒤에 다룰텐데 - 으로 방향전환을 한 상황을 거스를 수 없다. 이런 정신사적 상황 때문에 그리스도교 신학은 인간 중심주의를 거부할 수 없다고 라너는 전환의 필요성을 말한다. 셋째로, 신학의 인간학적 전환은 호교론적 측면에서 요청된다. 현대인은 신학적 진술들을 신화로 여기며 이를 더 이상 신중히 믿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 계시 진리의 신비를 직접적으로 긍정하면서 전하는 것은 현대인에게 거부감을 줄 따름이다. 그래서 호교론적인 효과를 거두도록 신학을 전개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본성과 은총의 관계를 재정립함으로써 가능하다. 본성과 은총의 관계 재정립이란 이것이다: 본성 안에는 은총을 이해할 수 있는 은총이 이미 부여되어 있다. 라너는 이런 세 가지 이유로 신학의 인간학적 전환이 현시대에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2.3. 인간

2.3.1. 신비

인간의 경험을 살펴보면, 인간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초월해나가는 초월적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이 인식, 사랑 등에 대한 경험을 할 때, 동시에 인간은 인식하고 사랑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의식한다. 그리고 더불어 자신의 인식과 사랑이 한계를 갖는다는 사실을 의식한다. 이런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들은 모든 인간 경험에 동반되고 또한 인간 경험의 조건이 되는데, 라너는 이와 같은 근본적인 경험을 초월론적 경험(transzendentale Erfahrung)이라고 한다. 초월론적 경험은 인간이 자신의 범주적 대상을 넘어서 존재 일반에 개방되어 있다는 원초적인 경험인데, 그 목표는 신비 자체이신 하나님이다. 따라서 인간은 하느님을 지향하며 하느님께 도달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이 하느님을 지향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이신 신비 자체가 인간에게 전달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라너는 신비를 아직 발견되지 않은 미지의 존재라는 통념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에게서 신비란 엄연히 존재하지만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 또한 신비이다. 라너에게 인간은 그 본질에서 보아 부족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이해하며 무한한 충만을 지향하는 존재이다. 이렇듯 어떤 정식으로도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인간은 자기 자신을 자각하며 하나님을 지향하는 존재라고 정의내릴 수 밖에 없다. 다시금 인간이 하느님을 지향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이신 신비 자체가 인간에게 양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2.3.2. 은총

그러므로 라너에게는 "인 간자체가 하나님의 절대적 자기 전달(Selbtmitteilung) 사건"이다. 인간의 자각, 초월론적 경험, 존재의 선취는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전달한 덕분이다. 하지만 라너는 은총이 외부에서 다가온다는 은총-외입주의에 반대한다. 은총은 인간에 지속적으로 내재해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은총은 인간과 세계에 이미 스며들어 있다. 인간은 은총을 통해 그의 인식과 사랑 안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스스로를 초월한다. 이 은총은 하나님의 행동일 뿐 아니라,인간에게서 존재하는 하나의 실재이며, 인간의 존재론적 구조이다.

3. 초월적 그리스도론과의 관계

라너는 인간의 초월론적 경험으로부터 출발하여 그리스도론을 전개한다. 인간의 본질 실현은, 하나님을 향한 텅빈 지향성인 인간이 자신을 충만한 신비에게 넘겨주어 자신을 비우고 포기하여 하나님 자신의 본성이 될 때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로고스가 인간 본성을 취할 때 발생하였다. 곧 육화는 인간의 본질이 최고도로 실현된 사건, 곧 충만한 구원 사건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라너가 전개하는 그리스도론은 '초월적 그리스도론'(transzendentale Christologie)이다. 이는 인간의 존재 구조에서 출발하여 그리스도 신비를 해명하고자 하는 그리스도론이다. 라너의 초월론적 그리스도론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밝히고 있다.

1) 초월론적 경험이 가능한 것은 인간에게 이미 인식과 사랑을 위한 선험적인 지평이 주어져 있기 때문인데, 이 지평이야말로 절대 존재인 하나님이시며, 나사렛 예수를 통해 만나는 하나님이다.

2) 하나님은 모든 경험이 가능하도록 하는 지평으로서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전달하시며, 인간은 이 지평 위에서 그리고 이 지평을 향하여 자기 자신을 넘어선다.

3) 인간의 기본적인 존재 구조는 하나님의 자기 전달과 인간의 자기 초월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이 두 가지 운동이 최고로 실현된 모범이다. 이처럼 라너는 그리스도론을 인간학의 관점에서 전개하면서, 인간학적으로 전환된 그리스도론이야말로 현대의 의식 지평에 부합한다고 강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