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변증법적 체계




카톨릭 신학자 칼 라너와 마주보는 개신교 신학자로서 우리는 칼 바르트를 분명히 들 수 있다. 즉 바르트의 변증법적 출발점은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의 부조화(不調和)를 교의학적 원칙으로 삼는다. 제한된 의미에서 이것은 헤겔(Hegel)에 의존하고 있다. 바울의 로마서 주석을 토대로 하여, 바르트는 세상적인 모든 것을 심판하는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제시한다. 거역하고, 믿지 않는,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 피조물은 창조주의 진노 아래 있다. 바르트는 세상적이고 "자연적인" 실체, 즉 인종, 민족, 진보, 권력, 자본, 교만한 종교를 무익하고 소용없는 것으로 폭로한다(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이를 깨닫게 한 배경이 되었다). 그 밖에도 여기서 마틴 루터(Matin Luther)의 "십자가의 신학"(Theologia crucis)이 새롭게 전개된다. 하나님의 위대함과 그 신성은 항상 은폐, 비하, 겸허의 길을 간다. 왜냐하면 세상 속의 하나님의 길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실로 하나님과 세상의 철저한 대립으로부터 하나님의 타자성(他者性)을 읽게 된다(하나님은 "전적 타자"이다). 십자가에 달린 이 하나님에게 도달하는 가능성은 바로 이런 것에 의해 조건 아래 예속된다. 피조적인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오직 그리함으로써만 그것을 옳게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한때 어거스틴을 따르던 칼빈(Calvin)도 날카롭게 지적하였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주권적인 능력이다. 하나님을 찾거나 구하기는커녕 도리어 도피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배척하는 인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된다. 하나님의 행동은 불경한 자들을 은혜로 사로잡는다. 인간, 인간성, 개개의 인간들은 철저히 죄의 권세 아래 있고, 올바로 깨닫고 행동할 능력이 없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사전에 그 어떤 유익한 행위도 할 수 없다. 자신이 선택한 그의 종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관철하는 현실 안에서만 구원과 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고 이것도 변증법적으로 일어난다. 심판받은 그리스도가 높임을 받고, 버림받은 자가 승리한다.

바르트는 이론적으로 하나님을 증명하려고 시도해도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이성(理性)에 대한 칸트(I. Kant)의 비판을 전적으로 수용한다. 이런 시도들은 현대의 무신론으로부터 조롱을 받기 십상이다. 이런 조롱을 바르트는 당연한 벌로 본다. 왜냐하면 이론적인 이성이 "종교적인" 이성의 모양을 취하여 하나님을 탐욕스럽게 끌어당길 때, 하나님에게서 지식과 권력, 안녕의 욕구를 만족시키려 할 때, 그것은 하나님에게 범죄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는 바로 이처럼 하나님을 수단으로 삼는 행위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세계의 어떤 종교도 이런 행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처분불가능성에 걸맞은 유일한 행위는 종교가 아니라 신앙이다. 신앙은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그의 말씀을 경청한다. 이로써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만난다.

변증법적 교의학이 지닌 사회비판적인 힘을 여기서 일일이 다룰 필요는 없겠다. 실로 이것은 나치에 대항하여 "고백 교회"를 만들 수 있었으며, 나치의 멸망 후에는 세속주의의 다른 거짓 우상들을 심판할 수 있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의 심층 차원에 관한 한, 바르트의 신학은 분명히 하나님의 신성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것에서 점차로 하나님의 인간성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방향으로 발전되어 나갔다.

이러한 변증법적 교의학이 현대인에게 열정적으로 과도한 요구를 하는 것은 아닌지, 현대인의 자유로운 질문을 거부하는 것은 아닌지, 종교의 정당성(권리)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성서 텍스트의 진정한 관심사를 따르기보다는 흥분 속에서 비약하는 것은 아닌지, 오늘날 특히 개신교 진영에서 논의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 처음엔 "변증법적 신학 진영"에 속해 있었던 - 불트만의 출발점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칼 바르트의 변증법

허성업 (Th.M 2차)

세계 신학계에서 차지하는 칼 바르트라는 이름은 마르틴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이해 가장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우리가 알다시피 에드바르드 투르나젠(Edward. Thurneyzen)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을 이끌었던 조직신학계의 석학이며, 사람들은 바르트 신학을 변증법적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 자신 역시 초기의 몇몇 논문들을 통해서 이 주제에 관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변증법(Dialektik 辨證法)은 종래의 형식 논리학의 궁극적 붕괴를 선언하고 종전에 진리로 통용되던 것과는 반대되는 것, 어긋나는 것, 심지어는 모순되는 것으로부터 새로운 사상이 파악된다는 것을 주장하고 나선 사상이다. 변증법의 특징은 사고의 운동이 직선적 혹은 연역적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로 움직이고 주장과 반대의 대립이 나타나므로 써 모순에 넓은 영역을 제공하는 데에 있다.

그리고 변증법을 방법론적으로 채택하는 동기는 3단계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화자(話者) 혹은 인식하려는 자의 주관성(인간의 인식의 제한성)이고, 둘째는 대상의 우월성이며, 셋째는 대상의 주관성 혹은 인격성이다. 신학에서 방법론적으로 변증법이 요구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계시는 오직 하나님만이 말씀하실 수 있는 말씀의 사건이기 때문에,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계시는 자연적인 인식능력으로 파악될 수 없고 오직 신앙 안에서만 인식되고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 신학은 항상 철저히 보충될 필요가 있고 원칙적으로 열려 있어야 하기 때문에 변증법은 항상 은폐되어 계시는 신비의 하나님을 지시하기에 적합하다는 사실, 그리고 변증법은 하나님의 신성(神性)뿐만 아니라 그 분의 말씀의 신성도 보호해 주려고 한다는 사실에 있다.

바르트는 그가 1920년에 행한 강연 '성서적 질문, 통찰 및 전망'에서 성서적인 사고와 발언의 특성을 변증법적인 것이라고 기술했다.

"성서적인 사고와 발언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그것은 예를 들면 창조와 구속, 은혜와 심판, 자 연과 영, 땅과 하늘, 약속과 성취와 같은 종교적인 개념의 대립너머에 있는 샘으로부터 흘러나온다. 그것은 때로는 이 대립의 이편에서 출발하기도 하다가 때로는 저편에서 출발하기도 하지만, 결코 옹졸스럽게 끝장내지 않으며, 결코 결론에 집착하지도 않고, 명제(命題)나 반명제에 고착되지도 않으며, 결코 궁극적인 긍정이나 부정을 완강히 주장하지도 아니한다. 그것은 오늘의 답답한 시대가 '정직한 양자택일'이라고 말하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이 긍정의 편에 든다고 해서 부정보다 더 낫다거나 못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긍정이나 부정 속에 있지 않고 긍정과 부정의 원천인 시초를 인식하는 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원초적 사고와 발언이며, 전체로부터 와서 전체로 지향하는 사고와 발언이며,....영을 통한 영이다. 그것은 온통 변증법적이다."

여기서 '변증법'은 결코 자신만을 고집할 수 없는 인간의 사고의 개방성을 옹호한다. 인간의 사고는 그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그것이 유래한 피안 적인, 결코 파악할 수 없는 근원을 지시한다. 이처럼 바르트는 예언자들과 사도들의 하나님 진술의 독특한 생동성을 강조했다.

* 이신건 저 "칼 바르트의 교회론" 1989. P118-123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