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실존론적 체계



사람들은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의 하나님 이야기를 변증법적 신학의 비교리적인 변형으로 생각할 지도 모른다. 물론 불트만도 역시 하나님과 인간을 근본적으로 대립 관계로 본다. 하지만 그는 역사-비판적인 주석과 그 위에 세워진 해석학의 방법에 따라서 그리한다. 그는 주석가와 조직신학자를 한 인격 안에서 통합하려는 어려운 일을 시도한다.

그의 해석학은 어떤 과정을 밟는가? 그는 하이덱거의 실존철학을 넘어서 현대인의 자기 이해를 파악하기 위하여 우선은 그의 학파에 참여한다. 현대인은 자연과학적인 사고방식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불트만은 성서와 신앙고백서들의 주장들을 폭넓게 탈신화화(脫神話化)한다. 그는 본래적인 선포의 관심사와 신화적-상징적 언어의 표피를 냉정하게 구분한다. 신앙과 이해는 서로 긴밀하게 속해 있다. 그리고 성서를 읽는 자가 성서를 단지 역사적인 것, "신화를 벗긴" 것으로만 대하지 않고 자기의 실존적인 문제와 관련된 것으로 대할 때, 비로소 그는 성서를 이해한다. 그는 실로 시간과 공간, 탄생과 죽음 사이의 생애사 안에 있는 실존(Existenz), 현존(Dasein)이다. 선포된 텍스트가 그의 개인적인 문제(그의 질문 이상의 것)에 대한 해답을 주고, 그래서 그의 실존을 늘 새로이 결단할 수 있도록 할 때, 그 텍스트는 그의 실존에게 다가온다. 그리하여 선포된 말씀은 주석적으로 확실할 뿐만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도구가 된다. 그는 인간의 말의 형태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며, 이 말씀을 통해 도전을 받는다. 그는 이것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 자신 안에서, 그리고 그 자신으로부터 죄많은 세상성의 포로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이해하는 신앙인만이 그의 작은 세계와 "세계" 전체를 뛰어넘어 자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러한 "복음의 실존적 해석"에 봉사하는 조직신학자는 말씀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결코 취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이 사물처럼 무관심하게 다룰 수 있는 그런 단순한 정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존재를 향한 외침, 부름, 인격적인 요구이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인격적으로 관련된 것으로 듣는 자만이, 적절하게 깨달을 수 있고, 따라서 학문적으로 분명히 깨달을 수 있다. 불트만은 이러한 신학 태도와 칭의론 간의 유사점을 지적한다. 죄인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될 수 있듯이, 조직신학자도 자신에게 주어지는 실존적인 관련성으로부터 말씀을 올바로 알고 이해랄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신학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객관적인 형태로 존재하는 이런저런 교리가 아니라, 여기서, 그리고 오늘 실존적인 새 결단을 가능케 하는 새로운 언어 형태로 계시에 대한 해석학적 해명이다.

이런 실존적 출발점에 대한 비판은 먼저 개별적 인간으로 축소된 실존 이해와 이에 근거한 신앙의 "사유화"에 맞추어졌다. 실제로 불트만의 사고는 칼 바르트에게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공동체적, 교회적, 사회적, 정치적인 방향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교회가 책임적으로 응답한, 초개인적인 가르침인 교리는 별반 의미를 갖지 않는다. 끝으로 불트만과 그의 제자들은 신학을 인간학으로 축소하고, 계시의 의미를 인간의 자기 실현 안으로 증발시켜 버리는 경향성에 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