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현상학적 체계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Hans Urs von Balthasar)는 우리가 "현상학적"이라고 부르는 그의 조직신학적 출발점으로써 인간학적인 축소의 가장 작은 흔적까지도 단호하게 저항한다. 계시의 현상은 인간 안에서 영, 혼, 의지와 감정 생활까지 감동시킨다. 구원사의 개별적 현상들은 신앙인에게 하나님 안에 있는 "존재의 형상"을 볼 수 있게 하는 안내자와 같다. 심지어 발타자르의 말대로 하면,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의 참 존재를 깨닫도록 하나님이 그리스도 형상 안에서 "현상"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존재만이 아니라 현현(顯現)적 특징을 갖는 현상들도 결정적으로 주체 이전과 그 바깥에 존재하고 있다. 그것들은 객관적인 힘을 소유하고 있으며, 주체에게 다가온다. 주체는 이에 대해 단지 감사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주체가 자신을 넘어설 수 있겠는가?

발타자르의 출발점에서 하나님이 진(眞)과 선(善)만이 아니라 미(美)의 최상적 실현과 그 무한한 힘이기도 하는 확신이 특이하다. 하나님은 이러한 관점 아래서도 인식되고 인정되어야 한다. 경배와 감사는 신학적 기능을 한다. 이와 동시에 신학은 형상을 그리는 관조(觀照)와 이해하는 청종(聽從)으로 변한다. 물론 이 신학적 관조와 청종의 대상은 플라톤주의자들의 최고의 이념(Idea)처럼 인간에게 등장하지 않는다. 모든 조화의 하나님은 인간에게 단순히 미학적으로만 다가오지 않고, 드라마와 같이도 다가온다. 그는 자기 자신을 신격화하기 위하여 구원의 존재를 무시하는 모든 사람들의 심판자로서 계시된다. 그는 무엇보다도 십자가의 드라마 안에서 자기 폐쇄의 죄를 향해 다가온다. 하지만 거기서 십자가에 달린 아들을 통하여 단지 하나님의 심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가페도 실연된다. 이 아가페의 힘으로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활동적인 사귐으로 드러나며, 하나님의 희생의 사귐이 일어난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가페 됨은 최종적으로 예수의 부활의 빛 안에서 일어난다. 이 사건의 힘은 교회의 인간적 사귐을 창조하며, 절대적인 모범을 제공한다. 교회와 교회의 지체들은 자신의 피조적인 특성과 본질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선하고 아름답고 참된, 삼위일체적인 존재를 유비(類比)의 다양한 방법으로 반사해야 한다. 신앙인의 사귐과 제도인 교회의 특별한 임무는 계시의 형태를 성실히 보존하고 전달하고 지시하는 것이다. 교회가 이 "현상학적인" 사명을 지니는 목적은 모든 인간적 사귐을 구원하기 위함에 있다. 이러한 관점 아래서는 마리아가 교회의 사귐의 원형(Typos)이고, 그녀의 자궁은 사랑하며 보아야 할 영광의 성체현시(聖體顯示)라는 교부들의 사상도 이해된다.

발타자르의 출발점은 특히 사랑의 신학을 교리적으로 적합하게 발전시킬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신학을 "교회적 신앙의 내실(內室)" 안으로 분명히 후퇴시킨다는 점에서 그도 역시 비판을 면치 못한다. 신적인 본질에 대한 관심은 다시금 세속 사회를 너무 성급히 다양한 우상 숭배의 장소로 보게 한다. 만약 이 비판이 맞다면,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세계 공동체의 힘들과의 "상호교류적인" 공동생활, 공동활동, 공동추구의 질문이 심각하게 제기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 질문에 일차적인 비중을 두었던 것이다.

 

 

현상학


윤경묵(Th. M 1차)

1. 후설의 현상학

에드문드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의 위대한 공적은 하나의 새로운 철학 방법인 현상학을 기초함으로써 20세기의 철학의 확고한 방법으로 예비하였으며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그는 이미 수립된 학문들과 관련하여 철학을 학문적 '연구 철학'으로서 이해하였는데, 이 연구 철학이란 말은 후설의 현상학을 특징짓는 말로 흔히 쓰인다. 전통적인 철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많은 명제와 연역들로 이루어진 체계적인 철학과는 달리 연구 철학이란 의식 현상(마음에 나타나는 것)들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고자 하는 현상학의 특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 자체로 보여진 것을 기술하려는 데 있어서 의식현상이란 무한한 연구 영역이다. 그 때문에 결코 하나의 완결된 체계를 내놓을 수 없는 일이다. 체계적인 완결을 시도하는 모든 철학은 독단론에 빠지기 쉽다고 보는 것이 현상학의 입장이다.

학문적 인식활동의 단계적 구조는 경험적인 자연 과학, 정신 과학 같은 학문 유형과 영역 존재론들과 같은 형상적 본질학의 학문 유형 및 선험적 주관성과 세계의 보편적 상관 관계에 관한 선험 현상학을 다 포괄한다. 이러한 학문적 인식활동에 있어 현상학은 경험 사실의 세계 내에 있는 하나의 구체적인 사물에는 전혀 관계하지 않는다. 현상학에서 교탁에 관하여 말한다면, 그것은 교탁이라는 존재, 교탁의 본질, 에이도스(Eidos) - 원래 플라톤에 있어서는 '이데아'를,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는 질료와 대립되는 형식적 원리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형상이라고 번역되는데, 후설에 있어서는 본질 특히 내용적 본질과 같은 의미 -를 의미한다. 선험 현상학적 관찰 방식은 결국 본질의 영역이 아니라 경험적인 대상과 본질의 모든 의미가 거기에서 형성되고 '구성되는' 선험적 주관성을 대상 영역으로 삼는다.

후설의 현상학에 있어서나 현상학적 사유 일반에 있어서나 '태도(Einstellung)'의 문제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즉, 일정한 대상 영역에 주목하고자 한다면, 그 영역에서 유효한 상관 관계로 '옮기는' 것, 말하자면 바로 그 대상이 주어지는데, 그리고 그것에 함께 속하는 파악 유형에 적용되는 '놀이 규칙'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수적이다.

앞서 언급한 각 학문 유형에(그 대상 영역에 주목하고자 한다면) 수행되어 있어야 할 하나의 태도가 상응한다. 사실과 본질에 따라 개별적인 경험 과학과 본질학, 즉 형상적 학문이 구별되는데 사실과 본질이라는 상관관계가 형상적 학문의 주제로 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학문의 영역을 넘어서는 하나의 관계 요소가 필요하다. 그에 대해서는 선험 형상학적 태도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선험 현상학적 관찰 방식이 비로소 대상 일반뿐만 아니라, 대상을 파악하는 각 의식 작용 유형의 가능 조건을 밝혀내기 때문이다.

그러면 선험적 영역에 이르는 길과 선험 형상학자의 태도는 어떠하며, 선험 현상학자가 연구에서 사용하는 선험적 방법은 상세하게 어떻게 규정되는가? 개별 과학, 형상적 학문, 선험적 주관성의 학문, 이 세 학문에 있어서 형식적으로 보아서는, 그 각기의 태도 방식을 지닌 세 학문 유형이 문제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말하기를, 세 학문 유형들은 각기 다른 상관 관계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구별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 학문들이 어느 정도로 상관 관계의 본질을 스스로 그 궁극적인 선험적 근거로부터 학문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의하여 구별된다는 것이다. 선험적 학문이 그것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다른 두 학문 유형의 태도로부터 명확히 구별되는 특별한 태도 유형을 전제로 한다.

자연적 태도, 실천적인 일상 생활에서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관심과 욕구를 일깨워 주는 일정한 대상들에 관계되어 있다. 현상학에서 밝히는 바와 같이, 대상들은 바뀌어지나 대상에 관계하는 우리의 관계양식은 언제나 같다.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관계되어 있는가 하는 것은 자연적인 일상 생활에서는 결코 주제로 되지 않는다. 이러한 태도를 후설은 '소박성'이라고 특징짓고 있는데, 왜냐하면 일상적인 삶의 수행에는 그것의 본질인 많은 것, 주관적인 측면, 지향하고 있음 같은 것이 지속적으로 기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상에 빠져있는 가운데 은폐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험 현상학에 있어서는 대상 영역에 이르는 길 그리고 그것을 위해 필요한 태도를 취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선 일상 생활과 객관적인 과학들을 규정하는 바와 같은 그러한 소박성, 대상에 빠져 있음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빠져있음의 소박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대상들이 즉자적으로 현존하는 세계 내에 있다는 이 견해, 이 믿음을 후설이 말하는 바와 같이 타당성 밖에 두어야 한다. '제거하여야 한다' 또는 '괄호 속에 집어넣어야' 한다. 세계를, 세계가 존재한다는 '보편적인 믿음'을 단번에 침몰시키는 이 처리 과정을 후설은 그리스의 회의론으로부터 유래하는 말인 '판단 중지(Epoché)라고 부른다. 이것은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현실 세계에 대한 믿음의 보편적인 중단이다.

판단 중지를 수행한다는 것은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존재와 비존재에 관하여 아무런 결정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세계와 세계 내적인 것의 존재는 경험에 의해 증명되어 있으며, 현상학이 그것을 문제삼는 것은 억지인 것처럼 보인다는 이미 표명된 의문에 대해서, 현상학에서는 세계의 사실적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세계가 그러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현상학에서 중요한 것은 그 자체의 존재 방식을 지닌 세계와 모든 세계의 내적인 것이 의식의 형상물임을 밝혀내는 것, 즉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것, 초월적인 것이라는 세계와 세계 내적인 것의 의미를 구성한 지향적 의식 수행의 상관자임을 밝히는 것이다.

현상학적 인식은 후설도 말하듯이 일종의 '직관 활동', '보는 것', '직관'으로서 수행된다. 현상학에도 분석하고, 추상 작용으로써 연구하는 개념적인 절차가 있다. 그러나 현상학자는 결코 개념적인 사유 진행으로 출발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다른 철학적 접근 방식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그 첫걸음인 판단 중지는 자연적인 삶의 양태에서 대상들에 붙어 있는 차폐물로부터 대상을 해방시킨다는 뜻이다.

현상학적 판단 중지는 세계를, 말하자면 단번에 괄호 속에 집어넣어야 한다는 것, 타당성 밖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 말은, 비록 현상학자가 세계 내적인 내용과 함께 세계의 존재 전체와 그 의미를 해명하는 엄청난 과제를 해낼 수 있다 하더라도, 그의 연구를 완결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현상학은 어떠한 의식 수행이 그 의미 내용에서 기술된 현상을 가져오게 하는가를 밝혀냄으로써 이 현상이 '독단적인 것', 즉 자연적 태도에서 증명되지 않은 확신에서 고수하는 그러한 현상임을 보여준다. 현상학은 철저하게 비판적인 철학이고자 하는 요구를 증명한다. 현상학은 그 무엇을 무엇으로서 드러냄으로써, 나타나는 것, 의미 있는 것으로서 현상하는 것을 그 의미 연관에서, 그리고 그것의 이루어짐과 의미 역사에서 명시해 줌으로써 해결하고 분석하는, 원래의 뜻의 비판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현상학은 끊임없이 모든 독단론과 싸우며, 자명성을 깨뜨리고자 시도하며, 그런 뜻에서 이성을 심화하는 보편적 이성 비판으로 이해되어 왔다. 이성을 더욱 더 심화시키는 데에 유럽 인류의 목적이 있음을 후설은 통찰하였으며, 이것을 특히 그의 후기 저서 [위기]에서 현상학의 비판적 문제 제기로부터 인류 전체의 근본적인 변경 가능성과 인류 자체에게 부과되어 있는 최대의 실존적 변화를 기대하였다.

2. 하이데거의 현상학

1916년 그 전해에 하이데거는 프라이부르크대학의 리케르트 밑에서 사강사의 자격을 얻고 있는데, 16년 리케르트가 하이델베르크에 전임하고 그 후임으로 후설이 초빙된다. 이렇게 해서 하이데거는 그후 23년에 마르부르크대학의 교수로 부임할 때까지, 후설 가까이에 있으면서 그의 지도를 받게 된다.

그러나 마르부르크대학으로 부임한 후 하이데거는 후설과 「현상학의 이념과 의식에의 환귀」라는 표제의 서론을 작성하면서 후설과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 서론에서 하이데거는 초월론적인 구성을 사실적인 인간존재의 실존의 가능성으로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을 거듭 후설에게 말하고 있다. 후설에게 있어서 초월론적 환원이란, 세계의 존재를 소박하게 전제하는 자연적 태도를 벗어나 주관에 의한 초월론적인 세계구성의 작업을 밝히는 방법이지만, 하이데거에 의하면 초월론적인 구성의 자리로서의 주관의 존재는 실존의 수행에 의해서만 개시될 수 있다. 즉, 현상학적 환원은 결코 특수한 방법적 조작이 아니라 인간적 실존의 한 가능성인 것이다.

「존재와 시간」은 당초 후설이 주재하는 「현상연구 연보」의 제8권(1927년)에 예정된 전체의 『전반(前半)』이라 이름 붙여져 게재 발표되었다. 발표한 당초부터 압도적인 평가를 받아 마치 번개처럼 번뜩여 눈깜짝할 사이에 독일 사상계의 형세를 바꾸었다고 전해진다. 발표의 무대가 된 「현상연구 연보」그 자체도 이후 두드러지게 그 편집방침을 바꾸게 되며, 이른바 현상학파도 하이데거를 중심으로 움직이게 했다.

하이데거는 인간적 현존재에 대하여 존재의 참된 의미를 묻고자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 이 현존재의 실존, 즉 '그 존재를 자신의 존재로서 존재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고유의 존재방식을 분석하고 또한 정화(淨化)적 반성이라고도 해야 할 것에 의해 그 가장 본래적인 존재방식을 떠오르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바꿔 말하면, 우리가 '우선 대개의 경우' 거기서 살고 있는 '자연적 태도'-하이데거는 이것을 '일상성'이라 부른다-에 현상학적 환원을 가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의도를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철학은 보편적인 현상학적 존재론이며 현존재의 해석학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이 해석학은 실존의 분석론으로서, 모든 철학적 물음의 실마리를, 그 물음이 발원하고 또한 되돌아 가는 그곳에 굳게 결부시켜 줄 것이다.'라고 말한다. 하이데거는 후설이 의식의 세계경험이라 생각한 것을, 한걸음 나아가 현존재의 기초적인 존재구조로 재정립하려 한다.

하이데거는 철학적 주체가 무동기의 반성에 의해 돌연 모든 것을 투시하는 절대자의 입장에 설 수 있는 그런 초월적인 주관성이 아니라, 그 자체가 세계 안에 던져 세계 내부적 존재자와 관계하면서 자기를 투영하고 세계에로 초월해 가는 그 실존의 수행 속에서 자기 자신의 존재를 해석하고, 동시에 거기에 개시되는 존재의 의미를 해득하는 각자적인 인간적 현존재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존재와 시간」의 2년 후에 행해진 프라이부르크대학의 취직강의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에서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은 인간의 본성에 속하며, 현존재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하이데거의 현상학이 '실존에 관한 현상학'이 아니라 '실존에서 비롯되는, 실존으로서의 현상학'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후설의 초월론적 현상학을 거부하고 현상학을 독자적인 방법으로 재정립했다고 한다면, 바로 이러한 부분일 것이다. 후설에 있어서 학의 기초로서 구상된 현상학이 나중에 실존주의와 결부되어 거의 그것과 일체를 이루게 되는 것도 하이데거에 있어서의 이러한 사상적 전향을 통해서일 것이다. 철학의 이념의 대담한 변경, 즉 후설에 있어서조차 어떤 절대적인 주관의 일로 여겨져 왔던 철학적 반성을 철두철미 자기의 실존을 사는 인간존재 안에 뿌리내리게 하려 했던 하이데거의 결의가 현상학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것은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