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원시그리스도교적-묵시문학적 모형

 

 

Ⅰ. 서 론

모든 신학은 저마다의 신학적 특성과 모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모형들은 인간 삶의 현장(Sitz im Leben)에서 발생하는 신학적 주제와 내용들이다. 그런데 이 신학의 내용들은 각각 고유한 틀과 유형들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시대의 상황과 삶의 현장에 걸쳐 있는 인간의 문제를 해답을 주기 위한 신학적 주제와 내용을 담고 있는 것들이다. 어떤 한 주제를 겨냥하거나, 그것들이 담고 있는 주제와 내용을 '신학적 체계'라고 부르기로 한다.

반면에 신학적 체계를 통하여 그 신학을 담고 있는 그릇 혹은 틀을 우리는 '신학의 모형'이라고 한다. 역사적으로 신학은, 시대가 변하고 문화가 변하고 역사가 바뀌고 이데올로기가 바뀌면서 신학의 방법론이 각각 다르게 나타났다. 신학적 모형은 그 시대를 담아내는 일련의 방법론적 틀이며, 그릇이요 뼈대이다.

본 소고는 원시 그리도교적-묵시문학적 모형을 전제로 하여 신학적 내용과 유형을 살피고, 묵시문학을 담고 있는 신학적 모형을 분석하고자 한다. 묵시문학은 삶이 평안하고 정상적일 때에는 결코 번성하지 않는다. 그러나 견디기 어려운 상황하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최종적이고 완전한 해결을 강조하는 것은 삶을 활기 있게 만든다. 이에 원시(초기) 그리스도교회는 어떠한 삶의 자리에서 묵시문학적 신학의 모형을 형성할 수 있었는가? 그리고 그 신학적 내용은 무엇이고, 어떠한 제한점 내지는 약점들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하여 연구하고자 한다.

Ⅱ. 본 론

1. 묵시문학의 정의

"묵시문학"(Apocalyptic)이란 용어는 요한계시록 1장 1절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그것은 "벗기다" 또는 "계시하다"란 의미를 지닌다. 이런 명칭을 담고 있는 문학도 주로 숨겨진 것을 계시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첫 번째 경우, 그것은 주로 B. C. 2세기와 A. D. 1세기에 유행했던 것으로 우리가 곧 주목하게 될 여러 특징들을 가진 일단의 저술들에 적용된다. 두 번째 경우 그것은 이런 종류의 문학에 매우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개념들과 사상들을 지시한다. 그러므로 이런 범주에 속하지 않는 저술들에도 "묵시 문학"사상이 존재할 수도 있는 것이다.

2. 묵시문학의 배경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기독교와 "규범적 유대주의"라고 불리는 독특한 특징을 소유한 유대주의가 최종적으로 출현하게 되는 그 형태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유대주의는 바리새적 입장의 발전된 한 형태로 이해되었으며, 바리새인은 복음서에서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의 치명적인 적대자로 등장한다. 일부 사람들이 그렇게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차이점은 기독교 운동이 바리새주의로부터 발전되어 왔다는 견해를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이 주장은 기독교 운동이 그 당시 유대인 가운데 존재하였던 하나 혹은 그 이상의 다른 삶의 양식들을 취했던 신봉자들 중의 일부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두개파, 헤롯당과 엣센파와 같은 다른 유대 그룹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것들에 관하여 아는 바가 거의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의 저술들이 보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독교 운동을 바리새주의의 한 발전으로 간주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여러 집단들 속에 위치시키는 것은 매우 분명한 사실이며, 또한 이것은 충분히 알려져 있다.

이런 다른 종류의 그룹들 중 일부는 "열광주의"로 특징지워진다. 말하자면 그들은 새로운 계시와 그와 비슷한 것들에 상당한 강조점을 둔다. 그들은 하나님이 인간의 매사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시기를 기대하며, 또한 그들 자신의 영역 안에서 아런 활동의 증거를 추적한다. 그들은 직접적인 종교 경험과 하나님의 영의 활동을 강조한다. 그들의 종교는 대제사장이나 사두개인 혹은 바리새인의 경우처럼 공식적이 아니다. 그것은 자발성이라는 현저한 요소를 포함한다. 그들은 율법에 대하여 대단한 존경심을 가졌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바리새인들과 같은 동일한 방식으로는 이해하지 않는다.

기독교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은 바로 유대주의의 이런한 측면이다. 기독교와 유대 종교를 다소 공식적이고 정형적인 형태의 발전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의 원래 추종자들은 주로 그 국가의 이 "열광주의적" 종파로부터 유래했다. 케제만의 제안에 의하면 "열광주의적" 분파를 파상적으로 연구해서는 안되며, 또한 기독교가 출현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일반 종교의 한 분파로부터 유래했다고 말해야 한다. 그들은 우리가 특별히 묵시 문학을 기독교 신학의 모체로 언급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마 이것은 바리새주의와 묵시 문학주의 사이의 관계에 주목해야 한다는 입장인 것 같다. 이 주제는 매우 어려운 난제이며, 가장 다양한 의견들이 개진되었던 주제이기도 하다. 무어는 발전되어온 바리새주의와 유대주의를 완전히 묵시문학과 일치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는 "묵시문학을 유대주의 종말론을 위한 주요 원천으로, 나아가 유대주의 신학을 묵시문학에 채색된 것으로 간주된다고 지적한다. 그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초기 부분이 권위적인 유대전통을 증거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반면, 묵시문학을 사상과 삶의 주요한 흐름 외부에 있는 여러 집단들이나 혹은 적어도 여러 경향들은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반면에 토레이는 "묵시문학 작품들은 어떤 분파나 학파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것들의 관점은 대체로 팔레스틴의 전통적인 관점이며, 바리새인들이 이런 관점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들이다."라고 말한다. 최근에 판단된 해스팅스 저작 「성경사전」1권의 증보판도 이런 동일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 사전에서 "묵시문학가들은 바리새주의의 토라와 구전 율법주의에 만족하지 않고 종교적인 소망들의 실현을 과감히 신뢰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1) 묵시문학의 출현

래드(G. E. Ladd)는 이런 부류의 문학이 세 가지 주된 요소들을 가지고 등장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첫째, "의로운 남은 자"의 출현에 대한 사상이다. 둘째 요점은 악에 대한 문제이다. 셋째 요인은 예언의 중단이었다. 간혹 "선지자들은 잠들어 버렸다"는 말들이 공공연하게 언급하기도 했다. 러셀은 묵시문학들을 어려운 시대의 기록들로 이해한다[역사적인 사건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그 국가가 요청받고 있는 믿음의 응답의 관점에서이다. 묵시문학은 종교, 정치와 그 당시의 경제적인 상황의 문제와 분리해서는 이해될 수 없고, 또한 그 시대 자체는 그들의 소망과 경외심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의 믿음을 반영하고 메아리치는 그 책들과 별도로 이해될 수 없다.〕이 요점이 중요하다. 묵시문학은 정말로 그 당시의 상황에서 비롯하였다. 그 묵시문학은 그것이 일어난 특별한 시대나 상황들과 별개로 존재하기는 거의 불가능하였다. 이 상황들은 저술의 새로운 형태가 왕성해지는 환경을 야기하였다. 묵시문학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소유로 이해하였지만, 그들이 처해 있는 곤경에 당황하고 있었던 고통받은 사람들을 주로 지시하였다. 묵시문학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용기와 신뢰를 주며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방법들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들은 혼란과 근심 중인 사람들의 삶에 의미를 집어넣어 주었다. 한편 여기에 대하여 핸슨(Paul D. Hanson)은 묵시가들은 다양한 집단으로부터 유래하는데, 이 집단들은 권력에서 소외되었다는 공통점으로 가진다고 지적하였다.

2) 원시(초대) 그리스도교의 배경 (A.D 33∼120)

주후 120년은 신약의 마지막 서신이 쓰여진 시기라고 알려진 때인데, 예수님이 죽은 후부터 이 기간까지를 원시(초대) 그리스도교라고 할 수 있다. 성서는 3세기에 비로소 66권으로 정경화되지만, 이 시기에 복음서와 서신들이 쓰여졌고, 여러 사람들에게 회람되었다. 삼위일체의 신앙과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사도신경의 원형인 세례 신앙고백문(세례 받을 때에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고백문)이 기틀을 잡은 것도 이 시기이다. 사도신경은 삼위일체의 신앙의 전형적인 예라고 한다. 또한 스테반의 순교와 바울의 회심을 겪으면서 유대교적 민족주의와 종파주의와 율법주의가 자신을 우주적 보편종교로서 이해하게 된 시기도 바로 이 때이다. 성령충만한 선교가 로마로 확장되었는데, 이 당시는 종말론적 의식이 지배하였고, 영지주의적인 적그리스도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영지주의란 영과 육을 분리하여 사고하며, 영만을 성스러운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그 당시의 시대적 사조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 영지주의는 아직도 우리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고 한다. 신앙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말씀선교, 성도의 교제, 봉사와 구제라는 3대 특징을 가지면서 정립되어 갔다.

원시(초대) 그리스도교 당시에 종말신앙이 지배적이었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종말신앙은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신실하심에 대한 신도들의 영웅적 저항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우주적 주권에 대한 신앙이 핵을 이룬다는 것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종말신앙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끊임없이 약동하고 변화하는 일의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성서에 나오는 종말의 날짜, 묵시적 숫자, 파멸에 대한 묘사, 재림광경 등은 비본질적인 것이며, 고대세계의 우주론을 반영할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타계주의적이며 탈역사적이며 현세도피적인 종말집단은 반기독교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며, 위에서 말한 영지주의의 아류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을 전혀 외면하면서, 이 땅의 불의와 모순 - 관권선거나 부조리, 사기 - 등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으면서, 종말과 내세만을 떠드는 것은 이단일 수밖에 없다.

3) 묵시문학 운동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아포칼립스"(묵시)로 알려진 문학형식이 급속도로 보급되었다. B.C. 2세기 이후로 팔레스타인에서는 많은 묵시문서들이 저작되었다. 그 문서들은 하나의 강력한 이원론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곧 선과 악, 하나님과 사단, 빛과 어두움은 서로 충돌하고 있어서 도무지 화합될 수 없다는 것이다. 현 세계질서는 악의 세력의 지배 하에 있으나 최후의 결전이 있게 될 것이며, 그 후에는 판도가 바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반대자들을 물리치시고, 모든 악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며, 새롭고 복된 백성이 모든 압제에서 풀려나 영광 중에 통치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메시지는 자주 특별한 환상들을 통해서 상징적인 숫자들과 세심한 날짜와 년한 및 시대의 계산과 함께 전달되고 있다. 그리고 대개는 신비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것은 거의 절망에 빠진 백성에게 소망을 갖게 하는 메시지요, 유일하신 참 하나님, 곧 이스라엘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호소하는 승리적인 메시지였다. 신약의 요한계시록은 여러 가지 면에서 하나의 전형적인 묵시문서이다(하지만 기독교의 입장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오류없이 기록된 에녹, 모세, 엘리야 혹은 에스라와 같은 구약의 유명한 인물들에게 돌리고 있는 데 반하여, 요한은 그 기록한 계시록에 자기의 이름을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그 밖의 중요한 차이점은 유대의 묵시문학가들은 과거의 역사를 마치 예언이 되는 것처럼 기록하고 있으나, 요한은 온전히 미래에 집중하고 있다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유대 민족에게서 자신의 나라와 이 세계를 야훼가 직접 다스리게 되리라는 기대는 결코 공허한 환상일 수 없었다. 하나님의 다스림에 대한 희망의 근거는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겪었던 구체적인 경험이었다. 출애굽 사건과 유랑의 긴 역정을 거치는 동안, 그들은 스스로를 계시하시며 그들의 역사에 간섭하여 섭리하시는 야훼의 활동을 감지하였다. 또 가나안에 정착하여 그 시대의 근동세계의 열국들과 부딪히면서, 역사의 주로서의 야훼신앙은 더욱 더 확고해졌다. 이 신앙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인가는 이 땅 위에 이루어져 그의 통치가 세계 위에 편만하게 되리라는 희망이 싹텄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은 오랜 기간에 걸친 고난과 억압의 과정(왕국 분열, 외세의 침공, 남북왕조의 멸망 등)을 밟게 되자 종말론적 방향으로 흐르게 되었다. 과거 이스라엘 역사상의 위대한 일들은 미래에 있을 종말의 시기(세상 끝날)에 재현되리라는 묵시문학적 희망으로 바꾸어지게 되었다.

묵시문학적, 종말론적 희망은 이 세계와 역사가 일단 끝나고, 새로운 세상이 오는 새 기원을 전제로 하고 기대한다. 야훼의 통치가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은 탈역사화하여 초월적 실제로서 나타난다는 기대로 바뀌어졌다. 이처럼 종말론적, 초월적 희망이 본격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구약성서 다니엘서라고 할 수 있다.

발터 카스퍼(W. Kasper)는 야훼통치에 대한 성서적 이해를 종말론과 관련시켜 이렇게 말한다. "종말론적 희망이 표현되어 있는 성경의 기사는 장차 일어날 사건들의 사전 보도가 아니다. 일차적으로는 오히려 어떤 괴로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의 위로와 희망의 말씀이다. 종말론적 및 묵시문학적 언명들은 현재 및 과거에 겪었던 구원 체험과 구원 희망을 완성이라는 양식을 빌어 다시 옮겨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결국 세상의 절대적 지배자로 당신을 실증하시라라는 신앙의 확신을 표출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3. 묵시문학의 기본구조와 형성

수많은 흥망성쇠, 전쟁, 재난들로 점철되어 있는 역사의 과정 속에서 유대교도들은 언제 하나님이 그의 약속들을 실현하실 것인가 하는 질문을 점점 더 긴박하게 제기하였다. 기원전 2세기 초에서 기원후 2세기초까지에 생겨난 묵시문학에는 이러한 대망이 중심적인 주제가 되어 있다. 묵시문학은 역사의 흐름이 좋게 변화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가 무서운 경악 속에서 종말이 오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왜 이 세상이 멸망으로 타락했는가 하는 문제가 묵시문학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렸다. 고난으로 가득한 역사의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이 형벌하시는 행위를 우리는 알고 있다. 개별적인 문헌 안에 있는 표상들과 진술들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도처에서 알게 되는 묵시문학의 기본 구조는 이원론을 통해서 결정된다. 즉 이 세상이 지나가고 저 세상이 온다는 것이다. 묵시문학은 구약성서 전통을 충분히 담고 있으며 종말을 향한 희망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특히 유배 이후에 생긴 예언 문헌에는 심판과 구원, 새 하늘과 새 땅이 자주 등장한다. 묵시 문학가들은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의 유산으로서 이해되는 이러한 사상과 관계를 맺는다.

묵시문학에서는 형상과 비유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해 주고 있다. 묵시 문학서들의 서술에 의하면 그러한 환각의 가치가 인정되는 구약성서의 경건한 사람들은 그들의 문헌들을 덮어 봉인을 했다. 가장 오래된 묵시적 문학은 다니엘의 이름으로 전해졌다. 에녹의 이름으로 누군가의 이름이 전해지는데, 한 권은 이디오피아 말로, 다른 한 권은 슬라브 말로 전해진다. 이 책은 창조로부터 멀지 않은 심판의 위험까지 상세히 기록하고 있으며, 성실과 끌까지 버티는 인내를 호소함으로 끝난다.

에스라의 이름으로도 묵시 문학적 문헌이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왜 예루살렘 이 포기되었고 멸망되었느냐 하는 고통스러운 물음에 대답을 하고 싶어한다.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2세기 초까지 시대에 생긴 많은 유대교 문헌들 안에는 묵시적 문학자료들이 사용된 짧고 긴 단편들이 발견된다. 12족장의 유언장에는 교훈적이고 권면하는 부분들이 묵시 문학적 내용으로 된 단편들과 함께 결합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쿰란 공동체의 신앙과 사유가 지나칠 정도로 묵시 문학적인 표상 속에서 형성되었다. 이들은 올바른 율법의 이해를 묻고 이것을 행동으로 옮기려고 노력하면서, 기원전 2세기와 1세기에 유대교 안에서 형성되었다.

4. 묵시문학의 신학적 특징과 모형

1) 예언자적 종말론

예언자들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인간 역사를 장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계획을 기대하고 있다. 하나님은 역사라는 배경 속에서, 정치적-사회적인 사건들 안에서, 여러 세계지도자들을 통해서 활동하신다. 이때 예언자들의 선포는 어느 날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세계의 중심부가 되게 하고, 거기에 다윗의 후손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앉히시리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예언자적 종말론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담겨져 있다.

① 이 세상에서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고대하고 있다.

② 역사 속에 하나님께서 활동하시기 때문에 역사는 수정 가능한 것이며, 역사에 대한 낙관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③ 하나님 나라의 수평적인 도래를 희망한다.

④ 예언의 대상과 범위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과 심지어 이방 민족까지 포함하고 있다.

⑤ 역사의 완성이 처음 에덴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⑥ 역사의 완성과 새로운 세상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고 보고 있다.

⑦ 역사가 수정 가능하다는 측면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강력한 회개를 촉구하고 있다.

2) 묵시적 종말론

① 역사의 완성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질 구원보다는 저 세상에서 이루어질 구원과 보상으로 보고 있다.

② 이 세상은 교정이 불가능한 악이 지배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역사에 대한 미련이 거의 없으며, 이러한 면에서 비관주의적인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

③ 역사 속에 하나님의 부재가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즉 하나님이 역사의 무대에서 활동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하늘로 철수해 버렸다는 것이다.

④ 따라서 역사에 대한 정상적인 방법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수직적인 도래를 통한 역사의 파국을 희망한다.

⑤ 묵시의 대상이 현자들이나 혹은 소외된 자들과 같은 소수의 엘리트 계층이라고 할 수 있다.

⑥ 처음 에덴으로 돌아간다는 모티브는 같으나, 다윗 왕정이나 시온이나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미련이 없고, 오히려 이스라엘을 넘어서 매우 보편적이다.

⑦ 회개에 대한 촉구가 없고 오히려 세상에는 멸망이요 메시야의 도래로 심판을 소망한다.


5
. 묵시문학의 신학적 분석

1) 종말론적 특징 -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묵시문학은 원시 기독교 사회의 종교적 사회에 근거하여 비관적 역사관을 가진 메시아 왕국의 도래를 고대하는 예언자적 내용을 담고 있다. 이것은 종말론에 깊이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묵시문학은 종말론적이다. 예언자들의 역사에 대한 긍적적인 기대가 무너지게 되고, 점점 악이 성하며 정치신학적 체계가 요청되면서 임박한 종말론적 기대가 팽배해진 것이다. 이 사상은 요한에게 가장 크게 나타나고 있다. 요한계시록을 통하여 볼 때, 확실히 그러하다. 요한의 묵시적 사상은 예언자적 종말론의 내용과 묵시적 종말사상이 함께 공존한다. 물론 그 외에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함께 생각할 것은 사도 바울의 종말사상이 묵시문학의 영향을 받았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바울도 역시 예언자적 종말사상과 묵시적 종말론을 함께 공유하고 있다. 세분한다면, 요한의 종말론은 묵시적 종말사상에 가깝고, 바울의 종말사상은 예언자적 종말사상에 훨씬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이 종말론적 메시지가 궁극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또한 간과해서는 안된다. 물론 예수 이전부터 묵시문학은 존재했지만, 그 묵시적 내용을 명쾌하게 예언적 형태로 규명한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종말론은 여러 가지 형태와 내용들로 구분될 수 있다. 점차 세상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려는 예수의 의도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반면에 당시의 유대 지도자들에게는 묵시적 종말론의 내용들이 선포되고 있다. 그러나 예수의 종말사상에는 당장의 세상의 멸망보다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서 구원을 받는 것이 강조되고 있다. 분명히 예수의 기대와 소망은 만인의 구원이었지만, 악인들에 대하여는 여전히 묵시적 종말론의 내용을 고수하고 있었다. 성경에는 거의 모든 부분에서 예언자적 종말론과 묵시적 종말론의 내용들이 함께 공존해 있다. 이것은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해 주는 병열구조를 갖는다.

2) 기독론적 특징 - 원시 그리스도교의 삶의 자리는 임박한 종말사상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 기독론의 틀이 형성되는 과정을 간과하여서는 안된다. 당시의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고 그를 신성모독죄로 죽였다. 예수의 부활 이후에도 여전히 유대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시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는 구주였고, 궁극적 해방자요, 생명이었으며, 모든 것이었다. 따라서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믿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강력한 기독론적 변증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원시 그리스도교는 기독론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 기독론도 역시 역사의 현장에서 삶의 정황으로부터 자연히 도출된 종말론적 기대 속에서 이루어진 신학적 패러다임인 것이다.

3) 구원론적 특징 - 원시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있어서 기독론과 함께 동시에 받아들인 신학적 확신은 구원론이다. 예수 시대의 대부분의 많은 무리들은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계층이었다. 그들은 정치적 혹은 사회적, 경제적, 해방적 메시야를 기대하고 있었다. 이들 유대인들에게 중요한 구원론의 신학적 기초를 준 것은 구약시대의 언약들과 시오니즘(Zionism)이다. 물론 헬라인들에게는 철학이 그것을 대신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가난한 자였거나 피지배계층이었고, 소외계층이었다. 이들에게는 자연히 이 세상의 번영보다는 차라리 묵시적 소망이 기대되었으리라. 그러나 이들에게 실존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죄의 문제이다. 인류의 타락이 죄의 문제로부터 시작되었다. 어느 시대든지, 아담 이후의 모든 사람들은 다 죄 아래에 눌려있다. 예수는 바로 이 죄를 해결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린 것이다. 원시 기독교는 구원을 갈망하고 있었다. 그들의 구원은 현실뿐만 아니라 궁극적인 구원도 포함한다. 한 가지 더 깊이 숙고해야 할 사실이 있다면,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이다. 그것도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종교이다. 어쩌면 모든 사람에게 형이상학적 추구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기대하는 것은 구원의 문제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부분적으로 가지고 있고, 또 그것을 추구한다. 예수의 궁극적 사역의 내용은 구원이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빈틈이 없고 실수가 없는 하나님은 예수를 통하여 완벽한 궁극 구원의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그러기에 종말론의 기대는 구원론을 전제하는 것이 되었고, 구원론의 핵심 인물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따라서 초대교회의 중심축은 구원이었고, 그 구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원시 그리스도교회는 해방주의적 모형과 초월론적 체계 안에서 형성된 종말사상과 기독론적 변증을 지나서 구원론에 그 중심축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구원론도 종말적 기대 속에서 이루어진 신학적 산물이다. 따라서 원시 그리스도교의 신학적 모형은 묵시문학적 요소를 가지고 있고, 그것은 종말론적이다.


참 고 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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