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근대적-계몽주의적 모형

 


Ⅰ. 배경

계몽주의에 대해서 칸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계몽주의는 스스로에게 부과된 감독으로부터 인간이 해방되는 것을 의미한다. '감독'의 의미는, 다른 어떤 것의 지도 없이는 인간이 자신의 이해 능력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Sapere aude(알려고 해라)! 당신의 이성을 사용하려고 하는 용기를 가져라! 이것이 바로 계몽주의의 모토이다."

유럽 역사에서 볼 때, 계몽주의라는 용어는 30년 전쟁이 끝나는 시점(1648)부터 프랑스 혁명(1789)까지를 가리킨다. 사상사적으로 보면, 프랜시스 베이컨의 Novum Organum(1620)으로부터 칸트의『순수이성비판(1781)』까지의 기간을 포함한다. 이 시대는 르네상스의 인본주의적 정신과 함께 17세기의 과학적 발전을 통합하면서 소위 근대적 세계를 낳았다. 이러한 약 150년에 걸친 기간 동안 인간의 세계관은 가장 광범위하게, 또 가장 깊이 있는 변화를 겪게 된다.

일반적으로 많은 역사학자들이 공감하고 있는 것처럼, 근대 기독교 사상사는 16세기의 종교개혁으로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라 18세기의 계몽주의로부터 시작했다. 커다란 하나의 흐름인 역사를 시대로 나누어서 구분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 분명하지만, 계몽주의 시대는 너무나 분명한 흔적과 획으로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이 기간 동안 인간은 자기 자신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갖게 되었으며, 그것을 통하여 중세 문명으로부터 완전히 결별해서 근대적 시대를 불러오게 된다. 맥기퍼트는 이러한 변화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사고체계와 문화가 완전히 바뀌었다. 초자연적 힘에의 의존, 외재적 권위에 대한 복종, 영원에 대한 시간의 종속, 상징에 대한 사실의 종속, 인간의 죄와 세계 악에 대한 음울한 생각, 현실에 대한 고정적인 해석 등의 중세를 특징짓는 모든 것들이 상당히 극복되었다. 인간은 이제 자신에 대한 새로운 확신, 인간의 능력과 성취에 대한 새로운 인식, 현재적 가치에 대한 새로운 평가 등을 통하여 자신의 삶을 맞게 되었다.

종교개혁과 프랑스 혁명 사이에 일어났던 두 가지의 매우 파급효과가 큰 혁명적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뉴턴으로 대표되는 과학의 혁명이었다. 이들의 과학적 결실을 통하여 사람들은 그때까지 세계 속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전통적인 위치를 포기해야 했다. 이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당시까지 가지고 있던 우주관을 포기하게 할 뿐만 아니라, 광활한 우주 속에 있는 인간의 위대함과 함께 인간의 초라함을 동시에 느끼게 했다. 두 번째 혁명적인 사건은 데까르뜨의 등장이었다. 데까르뜨가 철학의 영역으로 가지고 들어온 방법론은 다름 아닌 의심이었다. 그는 의심하는 것을 철학과 다른 모든 학문의 첫 번째 원리로 생각했다. 이러한 두 가지 혁명적 사건은 인간 자신에 대한 이해와 함께 인간이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한 이해를 급속히 변화시켰다.

17, 18세기에 발생한 이러한 변화는 고대와 중세의 문화와는 상당히 다른 세계관을 갖는, 매우 광범위한 것이었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새로운 시대는 신학적 영역으로부터 해방된 문화라고 할 수 있다. 계몽주의 시대에서 국가와 사회는 더 이상 교회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되었으며, 소위 '세속적'이라고 할 수 있는 문화가 나타나게 되었다. 근대의 사회적 정치적 삶의 이론적 규준은 성서의 계시나 교회의 권위가 아니라 자연 이성과 사회적 경험으로 대치되었다. 18세기 이후 계몽주의와 근대적 문화의 본질적 특징은, 서구 문명이 교회의 권위와 신학의 교리로부터 점차 분리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계몽주의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정신은 인간의 능력에 대한 신뢰, 이 땅에서 사는(피안의 세상이 아닌) 인간의 삶에 대한 관심과 희망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제 계시가 아니라 이성이 평가의 잣대로 등장하게 되었다. 여기에 따라 신학은 양자택일이라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근대적 과학과 철학에 자신을 맞추어 가든지, 아니면 세속적 사유에 대한 반동주의자로 남아있어야 했다. 근대의 기독교 사상사는 그 투쟁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Ⅱ. 특징

1. 자율(Autonomy)

무엇보다 중요한 계몽주의의 특징은 권위주의에 대한 반발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가능케 했던 것은 진리와 행동의 첫 번째 원리의 자리에 개인의 이성과 양심을 놓았던 것이다. 어느 시대에든 권위에 도전한 개인이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계몽주의 시대에는 자율적 이성에 근거한 그런 도전 정신이 사회 저변에 만연해 있었다는 데 그 중요성이 있다. 특별히 이 정신을 대표했던 사람들은 당시 사회적 입지를 굳히기 시작한 중간 계층 사람들(시민계급)이었다. 이 그룹은 무엇보다 자율적 이성을 신뢰했다.

autonomy(자율)이라는 말은 autos(자신)와 nomos(법)의 합성어로 "스스로 다스려지는"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자율은 스스로에게 부과된 감독으로부터 인간이 해방됨을 의미한다고 할 수도 있다. 존 로크는 이러한 자율의 이상을 "진리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므로 계몽주의의 이상은 이성적인 증거에 근거하지 않은 그 어떤 신앙의 요구에도 순응하지 않는다. 즉 성서나 교회의 권위보다는 자율적 이성에 동의를 구해야 한다. 여기에서 자율의 의미는 모든 판단의 입법자가 개인의 이성과 의지가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율은 자유롭다. 외부의 힘에 자신을 굴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자유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특수하고, 일시적인 것에 의지를 복종시키는 것일 뿐으로 자유라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자율의 참 자유는 개인의 이성과 의지를 보편적인 이성의 법에 맞추는 것이다. 이러한 자율에 대한 계몽주의의 강조는 인간의 내재적 능력에 대한 신뢰와 긍정이었다. 이제 참다운 권위는 외재적 무엇이 아니라, 이성적 확신을 가져오는 인간의 내재적 능력이 되었다.

2. 이성

18세기는 이성의 시대라고 불린다. 그러나 이 시대의 이성은 그 이전까지에 비해서 좀 특별한 의미에서의 이성이었다. 그것은 고전적 이성주의의 이성이 아니었다. 계몽주의의 이성 모델은 베이컨이나 로크의 경험적 이성을 말한다. 이제 이성은 단순히 추론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분석하고 비평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성은 주어진 유산이나 정신적 보물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정형의 무엇이 아니다. 오히려 계몽주의의 이성은 역동적이고 발전적인 힘으로 간주되었다. 이성은 분석을 통해서 끊임없이 시험하고 관찰한다. 이념도 신앙도 이성의 분석을 피해갈 수 없다. 계몽주의 시대에서 이성은 이전에는 신앙이 소유하고 있었던 불변의, 보편적 판단 기능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실로 놀라운 발견이었으며, 그 시대의 흥분과 낙관론을 가능케 한 원인이었다. 교권에 의해서 억눌려 있던 사람들은 새로운 이성의 발견을 통해서 계몽과 행복의 빛을 발견했다.

3. 자연

계몽주의 시대의 사람들에게 "이성적인 것"은 모든 사물의 본질에 어느 정도 근거해 있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이성적인 것과 자연스러운 것을 동일시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뉴턴의 새로운 학문에 그 뿌리를 둔다고 할 수 있다. 뉴턴에 의하면 자연의 법칙들은 질서정연하며 어디서든, 어느 때이든 동일하다. 이러한 논의에 근거해서 자연에 위배되는 신앙이나 관습들이 배척되기에 이른다. 계몽주의 시대 사람들에 의하면 그 이전까지의 사람들이 반자연적인 사고를 통해서 인간의 자유를 통제했을 뿐만 아니라, 자연의 통합마저도 깨버렸다고 한다. 이제 사람들은 인위적이고 조작된 것을 배척하고 "자연의 상태"를 존중하게 된다.

4. 세계 개선론적 낙관주의

계몽주의 시대에는 낙관론이 우세했다. 낙관론을 주장한 사람 중에서도 교황 알렉산더가 유명하다. 알렉산더 교황에 의하면 세계는 어두움과 그늘이 밝음과 함께 공존하는 렘브란트의 그림과 같다. 만약 우리가 그 그림을 볼 때 어두운 부분에 집중하지 않고 전체를 본다면, 우리는 어두운 부분이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없어서는 안 될 요소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세계에 존재하는 악이나 어두움도 전체 세계를 구성하는 데 필요한 요소로서 선의 한 종류가 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알렉산더에 의하면 비록 이 세계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세계는 아닐지라도, "가능한 모든 세계 중에서 가장 최선의 세계(라이프니츠)"이다.

"모든 것이 좋다"는 라이프니츠의 말이 폭넓게 받아들였지만, 18세기의 모든 사람들이 라이프니츠의 낙관주의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지는 않았다. 볼떼르도 처음에는 라이프니츠의 신정론에 끌리다가 1755년 리스본에서 발생한 참혹한 지진을 목도하면서 독일의 관념론에서 등을 돌리게 된다. 이때부터 볼떼르는 알렉산더와 라이프니츠를 비판한다. 알렉산더와 라이프니츠는 인간이 처해있는 상황을 바꾸려하지 않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반대해서 볼떼르는 현재의 희망이 아닌 미래의 희망을 이야기한다. 그는 이렇게 시로 노래한다.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이러한 희망을 우리는 가질 수 있다. 모든 것이 지금 좋다; 이것은 공허한 망상이다." 이런 볼테르의 낙관론은 세계 개선론적인 낙관론으로 인류의 더 나은 미래를 희망하면서,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희망에 근거해서 진보의 이념이 등장하게 된다.

5. 진보

세계 개선론적인 낙관주의에 근거해서 사람들은 진보를 꿈꾸게 된다. 자연과 이성의 조화로운 상태에서 후손들이 진보를 거듭할 것이라는 것이 계몽주의 시대 사람들의 믿음이었다. 사람들은 미신과 이성의 아주 오래된 싸움에서 이성이 승리했다고 확신했고, 그 승리의 징표를 과학의 발전,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대한 과학적 방법의 적용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확신은 머지 않아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이라는 신념을 낳으면서 점차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갔다. 그러므로 계몽주의 시대 사람들은 후세의 사람들에게 올 미래를 장미빛으로 그릴 수 있었다. 이 희망은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의 전통적인 종말론적 희망을 대치하는 역할을 했다. 디데로(Diderot)의 말처럼 철학자들에게서 후손은 종교의 저세상과 같은 것이었다. 진보에 대한 확신 속에서 사람들은 종교적 희망을 철저하게 내세화했다.

6. 관용

여기서 말하는 관용은 종교적 관용을 말한다. 계몽주의 시대 이전에 있었던 긴 종교전쟁은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적 교리의 주장에 대해서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게 하였다. 이 시기의 사람들에게 교리와 교리의 주장에 근거한 율법적 획일성은 가장 큰 적 중의 하나였다. 이러한 정신을 잘 보여준 사람은 베일(Bayle)이었다. 베일에 의하면 진리란 점차적으로 발견되는 것이며, 항상 바뀌는 것이다. 따라서 언제 어디서나 절대적으로 온전한 진리는 있을 수 없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주어진 교리를 가지고 모든 주장을 판단하고 비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주장과 견해(종교적 주장과 견해를 포함해서)는 관용 정신에 근거해서 인정되어야 한다. 설사 판단되고 비판된다고 해도, 그것은 철저히 이성과 경험에 근거해야지 교리에 근거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Ⅲ. 대표적인 학자

1. 헤겔

헤겔(G. W. F. Hegel, 1770-1831)은 상반되는 것을 더 높은 단계에서 통일시키려 노력한 학자였다. 그는 이를 위해 변증법적 사고를 하였으며 피히테가 쓴 정립-반정립-종합의 용어를 차용하였다. 정립은 반정립을 만날 때까지 자신의 운동 방향을 고수한다. 그리고 정립이 반정립을 필연적으로 만나게 될 때, 이 둘은 종합에서 화해하게 된다.

헤겔은 이와 같은 정-반-합 구조를 통해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을 설명한다. 성부 하나님은 정립이며, 하나님이 자신의 신성을 제한하여 성자로 나타나는 것은 반정립이며, 성령을 통해 성부와 성자는 통일을 이룬다. 이와 같이 그의 삼위일체론은 서방 교회의 전통인 삼위일체론의 통일된 성격에 집중된다. 또한 헤겔의 기독론에서 하나님의 신성은 정립이며, 사람의 인성은 반정립이며, 이 두 속성은 성자를 통해 화해된다. 신성과 인성 사이의 첨예한 대립은 그에게서 사라지고, 이러한 태도는 자유주의 신학의 일관된 모습이다.

2. 성서 신학 분야의 헤겔 추종자 ; 바우어와 쉬트라우스

바우어(F. C. Baur, 1792-1860)는 헤겔 체계를 사용하여 초기 교회 역사를 재구성하였다. 그는 베드로와 바울은 서로 갈등 관계에 있음을 발견하였고, 이러한 갈등 관계가 제대로 나타나지 않는 목회 서신이 바울 자신이 쓴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고,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て후서는 바울의 사상과 베드로의 사상이 조화되고 통일되어 표현된 글이므로 후대의 작품이라고 주장하였다.

쉬트라우스(D. F. Strauß, 1808-1874)는 그의『예수전』(1835)으로 유명하다. 그의『예수전』에서 쉬트라우스는 복음서에 신화적인 내용이 예수와 결합하고 있는 것에 대해 단순히 논픽션이라고 말하지 않고, 신화를 형성하는 대중들의 종교적인 상상력이 예수와 결합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메시야를 기대하였던 사람들로 인해 예수의 초월적인 능력이 복음서에 등장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쉬트라우스는 신성과 인성의 날카로운 구분을 희석화시킨 헤겔 사상에 영향을 받아 영원한 말씀이 한 개인을 통해 구현되었다는 성서의 고백 내용과 기독교 교리를 거부하고, 오히려 온 인류가 그리스도처럼 육신을 입은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에게서 성서의 내용은 예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전인류에 대한 기록이 된다.

3. 쉴라이어마허

쉴라이어마허(F. D. E. Schleiermacher, 1768-1834)는 교리나 성서가 아닌 인간의 종교 또는 그리스도인의 자아 의식에서 신학적인 기반을 찾으려 하였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은 세 가지 기능을 지니고 있다. 사유, 의지, 감정이 그것인데, 그는 자아 의식인 감정이야말로 신학의 초월적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 초월적 근거로서의 감정을 보편적 혹은 절대적 의존 감정이라고 말한다.

절대 의존의 감정 혹은 의식이란 인간이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음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의식의 매순간마다 우리들은 자유와 속박을 경험한다. 우리는 때로 환경에 지배당하기도 하고, 환경을 지배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들이 완전히 의존하는, 순종하는 감정 이외의 어느 것도 느낄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하는데, 이곳이 바로 종교의 영역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유한한 대상을 접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대상인 하나님을 만난다. 그 하나님은 절대자이며 나뉠 수 없는 통일이므로 인간이 그에게 대항하여 행동하기란 불가능하다.

여기서 하나님은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대상일 뿐이다. 쉴라이어마허에 따르면, 우리들은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을 갖기란 불가능하며, 단지 인간이 경험하는 하나님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쉴라어어마허는 자신의 교의학적 방법을 "경험적인 방법"이라 칭하였으며, 이와 같은 연구 결과로써 과거의 교리를 평가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쉴라이어마허는 기독론 중심의 신학을 추구했다. 그는 예수를 인간의 원형으로 파악하였는데, 예수의 원형성은 인간의 하나님 의식을 절대적으로 표시한다. 그리스도는 절대적인 하나님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곧 역사적인 예수 안에서 하나님 의식의 완전한 원형이 구현된다. 예수가 다른 인간들과 차이가 나는 점은 예수 안에 있었던 신의식이 바로 하나님의 존재였다는 점이다. 예수는 하나님을 더할 수 없이 정확하게 의식하고 있었던 그리스도였다.

4. 리츨

리츨(A. Ritschl, 1822-1889)도 쉴라이어마허처럼 의식에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그는 쉴라이어마허와는 달리 개인적인 면에 집중하지 않고, 공동체적인 면을 추구한다. 진정한 의식은 개인적인 사변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철학자들이 발견한 신의 개념은 "사랑의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다. 이러한 실제적인 계시로서의 의식은 그리스도를 통해 초대 교회 공동체에게 주어졌다. 그러므로 궁극적인 대상에 대한 의식은 사도들의 의식이 기록된 신약 성서와 사도들의 사상적, 종교적 배경이 되었던 구약 성서를 통해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 절대적인 영감론은 배격되고, 역사적인 연구만이 환영받는다.

5. 하르낙

하르낙(A. v. Harnack, 1851-1930)은『교리사』라는 고전적인 작품을 통해 기독교 신조의 내용과 신약 성서의 언어가 희랍화되었음을 밝혔다. 기독교 신조는 희랍 문화 외에도 영지주의의 영향 하에 있었으나 이 영지주의는 거부되었고, 희랍 문화는 받아들여졌다. 영지주의가 거부된 것은 구약 성서와 마찰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희랍 문화는 신약 성서에 있어 구약 성서보다 더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음은 사실이다.

하르낙은 평생토록 문화와 기독교의 종합을 이루고자 힘썼다. 왜냐하면 하르낙이 연구한 결과 기독교 공동체는 문화에 대해 개방적이었으며 문화는 성서와 기독교 교리에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6. 트뢸취

트뢸취(E. Troeltsch, 1865-1923)는 종교에 선험적인 성격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종교가 모든 인간에게 있어 보편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특수 종교가 절대적이고, 보편 타당한 절대 진리일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따르면, 특수 종교의 신앙은 영원한 진리에 대해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 표현된 것이다. 그러면서도 트뢸치는 타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우월성을 이야기하는데, 그는 기독교는 모든 종교의 최고 정점이라고 보았다.

 

Ⅳ. 공헌과 한계

자유주의 신학은 현실을 변혁하고 이용하려는 사회 분위기를 종교적으로 지지하였다. 이 신학 모형은 사회를 계산 가능한 대상으로 파악함으로써 이전에 비해 보다 복잡하고 심층적인 사회를 도래하게끔 만들었다. 또한 이와 동시에 자유주의 신학은 관용적인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인간 사회의 보다 다양한 측면을 드러나게 하였다. 우리들은 자유주의 신학을 통해 인간의 모습을 좀 더 잘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같은 공헌을 지닌 자유주의 신학은 또한 한계점도 내포하고 있다. 자유주의 신학은 국가가 어느 한 종교에 지지를 보낼 수 없게 되어 "세속적인" 단체가 된 시기에 발생하였기 때문에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분리하여 이해하였다. 이와 같은 자유주의 신학은 종교 개혁 시대보다 훨씬 정교 분리를 강화시켜 사회악을 증가시키는 데 일조를 하였으며, 자유주의 신학 사조에 영향을 받은 교회는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단지 문화와 종교의 관계에만 집중된 개신교는 정치 영역에서 어떠한 힘도 발휘하지 못하였다. 이후 이와 같은 자유주의 신학의 역기능으로 인해 해방을 외치는 신학이 등장하게 된다.

또한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내재성만을 강조하여 초월적인 하나님을 보지 못하였다. 이같이 하나님의 내재성만이 주장되게 될 때, 신학은 인간학이 되고 말 것이며 인간은 결국 인간 이하의 존재로 전락하게 되고 말 것이다. 신학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으며 이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면을 고찰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자유주의 신학은 신학이 간직해야 초월성을 소홀히 다룬 한계를 지니고 있다.




〓 도표 〓


종교개혁적-정통주의 모형

계몽주의적-자유주의 모형

신관

절대적으로 초월적인 하나님

내재적인 하나님

세계관

창조 세계는 선하다

창조 세계는 신성이 결여된 물질 세계

인간관

피조물인 인간은 의존적 존재

자유로운 인간

죄관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

진정한 인간성에의 미달

성서관

하나님의 말씀

인간에 의해 말씀된 하나님의 말씀

신학 방법

계시

종교의 역사성


〓 참고 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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