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존재 증명

 

 전영욱(Th. M)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논증의 가능성을 묻는 질문처럼 언제나 새로운 형태로 토론된 문제는 다시 없었다. 하나님 논증 가능성은 한 쪽 분류의 사람에게는 매우 긍정적으로 주장되었고, 다른 쪽 분류의 사람들에게는 논증 불가능하다고 주장되었다.1)

그러나 이러한 신(神) 존재 증명에 관한 논의는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에 의하여 철저히 비판되면서부터, 하나님은 원칙적으로 논증할 수 없다는 비판과 부정이 제기 되었다. 위르겐 몰트만(Juergen Moltmann)도 역시 이러한 전통적인 하나님 존재증명을 비판하면서, 인간의 신 존재 증명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다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비춰진 인간의 실존적 역사 지평에서 하나님은 인식될 수 있고, 종말에 가서야 하나님의 존재 증명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2)

 

이스라엘의 종교는 '약속의 종교'이다. 좀더 엄밀히 말해서 이 '약속'은 하나님(인도)의 약속, 즉 계시의 말씀을 뜻하는 말이다. 약속은 인간을 미래적이게 하고, 역사적이게 한다. 또한 존재하지 않는 현실을 향한 기대를 가지게 하며, 그 미래의 성취를 기대하는 희망을 품게 한다. 이 약속은 세계사적 역사나 인간 실존 자체의 역사성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특별한 역사에 귀결된다. 마틴 부버(Martin Buber)는 이것을 '역사의 희망'이라고 표현한다. 약속되어진 역사는 아직 결정되지 않는 성취를 향해 일정한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 일정한 경향은 성취를 향한 발전, 전진, 진보에 의해서 어제와 내일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약속의 말씀이 실존의 사건 속에 들어가서 현실을 나누고, 미래에 대한 기대를 부여한다.3)

이 약속의 말씀은 현재적 사건에서 신앙을 형성하며,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과 성취를 통하여 새로운 현실을 발견하게 한다. 만일 약속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고, 도식적인 필연성에 의하여 약속되어졌으니 성취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큰 오산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성취의 주체가 "하나님께"라고 간주되어야 한다. 이러한 약속은 역사적으로 많은 희망을 나타내며, 역사적으로 경험되며, 하나님의 역사적 지평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스라엘은 이 약속의 지평 안에서 현실을 경험한다. 또한 거기에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과 행동으로 자신을 계시하시며, 그들을 역사(약속)의 지평 안으로 이끄신다. 그러므로 약속의 지평이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된 현실의 경험과 하나님에 의한 미래의 성취로부터 시작된 오시는 하나님의 주체적인 역사의 지평을 말하는 것이다.4)

 

1. 몰트만의 하나님 체험

 

몰트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지평 안에서 성서를 통한 실존적인 역사체험을 하였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포로였던 그는 나찌의 대학살로 인한 죽음의 문제와 전쟁의 참혹함을 통하여 인간 실존의 무의미를 자각했고, 곧이어 죽음 속에서 가까스로 살아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 실존적인 질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또한 몰트만은 스코틀랜드(Scottland)의 수용소에서 약속의 말씀을 경험한다.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몰트만은 성서를 통하여 하나님을 경험하였고,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께로 인도되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또한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며, 고난 중에 자신을 부활의 길로 인도하고 구원해 주시는 예수님을 경험한다.

 

 

몰트만의 하나님 체험은 역사 안에서, 성서를 통한, 하나님의 약속의 지평 안에서 이루어진 실존적인 역사체험임을 고백하고 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실존적으로 체험한 것과 흡사하다. 전쟁 중에 성서를 통한 하나님 경험은 희망과 고통의 힘으로서의 하나님 체험이었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찾아낸 곳은 전쟁의 치열함이 느껴지던 수용소의 성서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고백한다.       

 

 

2.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 체험   

 

자연 신학(일반 계시)은 하나님을 지시하고 예감하게는 하지만 하나님을 증명하진 못한다. 반면에 계시 신학(특별 계시)은 성서의 증언에 따라,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신앙심을 일깨워 주므로 하나님의 약속의 지평 안으로 우리를 인도하며 체험케 한다.

옛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 논증을 알지 못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은 역사 가운데서 인식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약속이 역사적 현실 가운데 실현될 때 그곳에서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신실성이 인식되었다. 그것은 자연 신학적인 하나님 증명이 아니고, 증명할 수 없는 분의 계시적인 체험이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야웨(Jahweh)'로 나타난다. 이 단어는 '존재자'의 뜻을 갖고 있지만, 어원사적으론 오히려 '활동'을 뜻한다. 그래서 야웨의 뜻은 "나는 행동하는 자, 즉 역사 속에서 구원을 위해 활동하는 자로서 행동한다."의 뜻을 가진다.8)

이것은 '자기 계시', '자기 표현' 그리고 하나님의 '자기 전개'를 의미한다. 자기 자신의 이름에서 자기를 알 수 있게 하고 부를 수 있게 함으로써 그의 알려지지 않은 부분으로부터 자신을 노출하고 계시한다. 그러므로 '나는 야웨다'라는 의미는 예언자들이 표현하는 방식 속에서 -"야웨가 그의 백성에게..."- 미래적인 약속의 인식을 나타내며, 자신의 인격과 비밀을 드러내고, 미래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과도 같은, 약속의 이름임을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나는 야웨다'라는 표현은 종말의 모든 것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는 것이고,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끄는 능력 있는 자로 인식된다.9)

하나님이 자신을 '하나님'으로 계시하시는 방법은 시간과 장소를 넘어선 개념으로 일정한 출현 형태와 출현 장소를 고정시키지 않으며, 자유로이 활동하시는 분으로 계시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이 존재의 본질로서, 미래를 가진 약속의 하나님으로 이해되며, 미래로부터 항상 오고 있는 하나님으로 이해된다.10)

신약 성서에서도 하나님은 십자가와 부활의 그리스도 사건 가운데 인식된다. 자유로운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자신의 자유를 속박하는 행위는 자신이 사랑의 하나님이고, 인간을 동정하며, 함께 고난을 당하시는 분임을 나타내신다. 이것은 역사를 창조하고 인도하는 하나님이 친히 인간의 역사(Historie) 안에 들어와 역사(Geschichte)가 된 것이며, 역사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것이다. 그 이유는 앞을 향해서는 미래를 바라보게 하며, 아직 드러나지 않고 실현되지 않은 약속에 대해서는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11)

 

몰트만은 자연 신학적인 신 존재 증명을 비판하며,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만이 실존적 역사체험을 할 수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의해서만이 하나님을 경험하며, 오시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을 느끼고 체험하는 것이지, 존재의 유무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존재 증명은 인간의 실존에서 느껴지는 것도 아니고, 인간이 참되게 살려고(Menschwerdung) 노력하는 도중에 있는 것이며, 장차 어떻게 될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는 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하나님 인식은 모두 역사적이며, 단편적이다. 그리고 종말의 완성으로 몰아가는 잠정성(Vorläufigkeit)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개념은 미래를 향한 충분한 기대를, 희망을 제시 할 뿐이다.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의 하나님 존재 증명은 영속적인 과제이며, 하나님이 모든 일에서 입증되는 때에 비로소 가능하고 완성되어진다.12)

 

 

3. 자연신학의 부정성과 타당성

 

칸트의 실천 이성으로 자연 신학적인 신 증명이 부정되어졌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인격적 신앙이고, 아무 증명도 필요 없는 것으로 간주되어졌다. 만일 신앙으로 하나님을 증명한다면 그것은 순수한 신앙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신앙의 근거로부터는 하나님의 논증 불가능성을 먼저 확인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논증 가능성과 그 뜻을 질문했던 것이다.13)

자연 신학과 계시 신학은 각각 지식(인식)과 신앙(믿음)으로 설명할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고, 예수의 역사와 십자가와 그의 부활에서 밝히 계시된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다. 신앙은 곧 그가 믿는 대상의 인식과 관련되어 있다. '참된 신앙'이라고 말할 때에는 언제나 '확실한 인식'이 전제되고 있는 것이다. 안셀름은 기독교 신앙을 앎과 이해의 차원으로 말한다. 신앙은 이성의 의문점을 질문하는 것이 아니며, 이성에게 도리어 질문을 제기한다. 그래서 신앙은 질문과 희망을 가지고 사람의 이해 가운데, 불안과 자극과 미래를 향한 추진력과 계속적 '질문'이 된다. 믿기 위해서 지식이 필요한 것처럼 믿기 위해서 묻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 신학적인 하나님 논증은 인식의 바탕 위에서 하나님을 증명하려고 노력한 점과 신앙의 이해(신앙의 지성) 가운데에서 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직접 또 자발적으로 소유하는 인식 가운데서는, 하나님의 존재 증명을 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 자연 신학의 부당성을 지적할 수 있다.14)

자연 신학적인 하나님 논증은 '신앙의 이해'(신앙의 지성) 가운데 그 의미를 가지며, 그것이 역사상에는 매우 부분적이고, 단편적으로 가능하지만, 저 미래에는 완전히 나타남이며 "모두가 하나님을 면대해서 보는 때", "하나님이 모든 것 가운데 모든 것이 되는 때"에는 그 논증이 완전하다는 것이다. 자연 신학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계시되고 논증된다고 하는 것으로서 신앙의 전제가 될 수 없고, 오직 미래의 목표가 될 뿐이다. 자연 신학의 부정성이란, 인간의 인식 가운데서는 하나님 논증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며 그 타당성이란, 미래의 목표로서 신앙의 이해를 구하는 인식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사람은 그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유무를 말할 수 없고, 오직 오시는 하나님으로부터(aus)만 그를 인식할 수 있다.15)

              

 

4. 전통적인 신(神) 존재 증명과 비판

 

1) 실존으로부터 하나님을 증명하려는 시도(실존적 신증명)

성 아우구스티누스(S. Augustinus)가 그의 고백론에서 "하나님, 나는 당신 안에서 안식을 찾기까지 마음에 진정한 평화를 얻을 수 없었나이다."라고 말한 것이 실존적 신 증명의 고전적인 형태이다. 인간은 자신의 현실과 연관되어지는 문제성으로부터 질문된 대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이해하고 있다. 이것은 일반적인 이론이나 객관적인 진리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실존 자체의 표현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 하나님은 오직 인간이 자기의 실존을 파악할 때만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적이며, 인간 존재의 가능성은 자신 스스로 그 가능성을 선택할 때에만 하나님을 파악할 수 있다.16)

실존적 증명은 특별 계시에서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성서의 역사와 역사적 증언을 과학적으로 다루는 원칙 하에 나타난다. 실존주의는 텍스트에서 그 실존 이해를 묻고 성서 본문을 통하여 제기되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질문과 자신의 현실에 대한 진리성의 주도적 질문 아래서 현재의 실존 가능성을 해석해 나간다. 또한 각 사람이 자신에게서 경험되는 현실의 의문과 요청으로부터 필연적인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이다. 이것은 실천 이성의 요청에서만 가능하며, 내면적이고 주체적인 체험에서 가능한 것이다. 오직 개인적 신앙과 결단을 통해서만이 증명될 수 있는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는 신 존재 증명이다.17)   

그러나 몰트만은 실존적 신 증명의 부당성을 실존의 상호관련성(Korrelation)으로 비판한다. 인간 현실의 삶은 세계사적 정황과 이해 없이는 일어날 수 없기 때문에 언제나 개인의 실존은 세계사적 역사와 상호 관련성을 가지고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존적 신 증명의 부당성은 성서의 해석과 의미를 세계사적 역사와 관련하여 이해하지 않으며, 하나님에 대한 객관적인 논증 없이 현실에서의 경험과 윤리적 결단으로 귀결되는 인간 실존에서만이 하나님을 증명하려고 하기에, 또한 무신론의 비판을 받기도 한다.18)

하나님 이해란 오직 자기 이해와 세계이해, 역사 이해와 역사성 이해가 서로 연관됨으로써만 얻어질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신성이란 보편적이 되지 못할 것이다. 자연 신학의 신 존재 증명은 모든 사물에게 또 모든 인간에게 보편 타당하게 인식되기를 원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실존적 증명은 부당하다. 다만 인간 실존의 독특성과 진리성은 오시는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밝혀지며, 이것은 아직 실현되지 않고, 믿음이 있는 기독교적 사명에서만이 실현된다.                     

 

2) 세계로부터 하나님을 증명하려는 시도(우주론적, 목적론적 신증명)

세계로부터 하나님을 증명하려는 시도는 대표적으로 토마스 아퀴나스(Tomas Aquinas)의 '다섯 가지의 방법'이 있다. 그것은 이성의 자연적 능력으로 하나님을 인식하고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1) 우주 최초의 '처음 원인'(Primum movens)이고, 그분이 안 계시다면 도대체 아무 것도 작용하지 못할 것이요,

(2) 제 1원인이므로 그 분이 아니었더라면, 세계 과정에 단 하나의 원인도 작용하지 못할 것이며,

(3) '필연적인 존재자'이시니, 곧 존재하지 '않을 수 없는'존재자요, 그분이 아니라면 다른 어떤 존재자도 존재하지 못할 것이며,

(4) 만물 중에 가장 선하신 분이어서, 만일 그 분이 안 계시다면 '선하다'든가 '덜 선하다'고 하는 말이 도대체 아무 뜻도 없게 될 것이며,

(5) 그분은 만물의 지성적 통치자로서, 그 분이 안 계시다면 우주의 순환과 경영이 의미 있다고 생각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19)

 

이 다섯 가지의 방법은 경험으로부터 출발한다. 그 경험이란 세계 내에서 즉 하나님의 창조의 영역에서 얻는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인간이 세계 안에서 갖는 경험을 지적하며 인간에게 이해를 구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최근까지도 로마 카톨릭교회의 공식적 견해로서 천명된 적이 있었다. 그 후에, 이 세계로부터의 하나님 논증은 새로운 모양으로 신 존재 증명을 시도한다. 즉 세계의 현실을 보편 역사(Universalgeschichte)로 이해하며 '하나님'은 세계로부터 체험된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여기서 모든 현실의 근원이며, 통일성과 전체성을 묻는 질문의 대상이 된다. 하나님을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든 현실의 통일성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연관되는데, 만일 현실이 계속성과 우연성의 총체 안에서 역사로 이해된다면 성서의 하나님 사상은 증명될 수 있는 것이다.20)

성서의 하나님을 이해하는 사상은 현실을 전체로서 역사라고 이해하는 것을 필연적이라고 한다. 그것은 첫째로 '세계사'는 기독교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되는 포괄적 지평이 되고, 둘째는 현실의 사건이 과거와 미래를 연관지어주는 통체적 역사라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의 이해로 미래를 내다보며 열려있는 미래의 종말에 대한 잠정적인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보편 역사의 상호관련 안에서 생기는 것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과거의 가능성이 현재의 가능성이고, 현재의 가능성은 미래의 가능성으로 미래의 지평을 과거와 연관시킨다.21)

이 논증은 보편사 내에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모습을 통하여 종말의 선취적 승리와 하나님의 세계사적 살아 계심을 증명하고 있다. 몰트만은 현실을 전체성으로 파악할 수 없다고 말한다. 아직 완결되지 않은 역사를 전체성으로 파악하기는 불가능하며, 포괄적 지평을 각기 다른 사건의 동일한 연관이 아닌, 사명의 역사적, 약속의 역사적 상호 관련이라고 말한다. 또한 미래의 지평은 이제까지의 세계사 가운데 이해될 수 없고, 그것은 오직 새로운 현실을 향한 약속과 파견의 지평으로써만 이해될 수 있다고 말한다. 현실을 전체성과 통일성으로 볼 수 있는 때는 세계 과정이 끝나는 때이다. 그리고 몰트만은 하나님을 증명할 만한 때는, 역사의 종국에 다다랐다고 생각하는 때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이 되는" 때에 가능하다고 말한다.22)

 

3)하나님의 개념으로부터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시도(존재론적 증명)

신학적으로나 철학적으로 가장 깊이 사고해서 된 하나님 논증은 하나님의 개념으로부터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소위 존재론적 하나님 논증이다. 이것은 결과에서 원인으로 귀결하지 않고, 또 윤리적 행위로부터 그 전체를 이끌어내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에 귀결한다.23)

안셀름은 그의 저서 '프로스로기온'(Proslogion)에서 하나님 존재를 논증한다. 그는 세계 안에 있는 '경험'에서 출발하지 않고, '하나님' 개념으로부터 출발한다.

 

"누구든지 한 번 올바른 하나님 개념을 가지게 되면, 즉 '하나님'이란 누구며, 무엇을 뜻하는지를 파악하게 되면, 스스로 확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러한 하나님은 정말 계실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올바르고 이치에 맞는 '하나님' 개념은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큰 어떤 것24)'이라고 한다. 만일 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것이 실제로는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것이 못될 것이다. 즉 더 큰 것을 더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제로도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 실제로도 있는 '것이야말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것이 될 것이고, 하나님은 '실제로'도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25)        

 

칸트는 안셀름의 논증을 비판하면서 '생각된 존재는 생각뿐이지 결코 현실적 존재가 못된다'고 말했다. 그는 사고와 존재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개념으로부터 존재를 추리하는 것은 허위 추론이라고 말한다. 또한 이 증명이 필연적 사고와 존재의 혼동을 내포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필연적 사고는 아무리 그것이 최고의 존재 혹은 가장 현실적인 존재자에 관한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판단하고 있는 대상의 필연적인 실재를 보증하는 것이 아니다.26)

몰트만은 "이러한 존재론적 하나님 논증도 참으로 앞당겨 경험된 종말의 한 조각이다"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하나님에 의하여 증명되는"것과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은 주저할 것 없이 "하나님은 만물 가운데 모든 것이며" 그의 신성은 존재한 것이나 존재하지 않는 모든 것에서 입증하신다는 것을 추론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신성 앞에 타당한 것은 역사 안에서는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것의 광체일 뿐이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란 것은 기독교 선교의 영원한 근원과 배경이 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약속되었으나 아직 도달되지는 못한 미래에 있는 목표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 개념으로부터 하나님 존재가 결론되지 않지만, 잠정적(Vorlaeufigkeit)으로 일어나고 있고 하나님의 미래는 충분히 기대될만하다.27)        

 

 

5. 자연 신학과 계시 신학의 상관 관계

     

'약속'과 '계시'라는 주제는 약속의 언어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종말론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몰트만은 이 약속의 계시라는 표현을 자주 언급하는데, 그 이유는 이 단어가 "오시는 하나님"의 뜻으로 적절히 표현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을 증명하는 데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하지만 자연 신학자들은 이러한 개념보다는 그리스의 형이상학을 수용하여 신 존재 증명을 하기 때문에, '계시 신학'(Offenbarungstheologie)은 오늘날 분명히 이른바 '자연 신학'(Natuerliche Theologie)과 대립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이 계시의 개념은 언제나 하나님의 증명 가능성과 증명 불가능성에 대한 질문에 사로잡혀 있다. 이러한 점에서 계시 신학은 부정적인 자연 신학을 동료로 삼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증명 불가능성의 교리에서 이익을 취할 수 있다. 그러나 계시의 개념을 하나님의 인식 문제로 좁혀가는 것은 수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계시 신학의 형식주의를 초래한다.28)

계시 신학은 함축적으로 종말론에 관한 주도적인 이해를 포함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증명이나 불가능성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고, 인간의 실존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함도 아니며, 종말론적으로 진리의, 미래의, 약속의 지평과 기대의 지평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계시 신학은 하나님의 약속의 지평 안에서 그의 주체적인 역사에 동참하며, 미래적인 희망의 신앙을 가지고,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체험한 것이다.29)

 

 

 

[주]

 

 

1) 이신건, 조직신학입문, 한국신학연구소, 1993, 123.

2) 몰트만, 전경연, 박봉랑 역, 희망의 신학, 대한기독교서회, 1997, 361쪽 이하.

3) 앞의 책, 138쪽 이하.

4) 역사적 지평이란 '고정된 한계'가 아니라, 우리가 그 곳을 향해서 움직이고 있는 것, 그리고 우리와 같이 움직이는 어떤 것으로 이해된다. 앞의 책, 141.

5) 몰트만, 이신건 옮김, 생명의 샘, 성령과 생명신학, 대한기독교서회, 2000, 13쪽 이하.

6) 앞의 책, 16.

7) 같은 쪽.

8) 이신건, 36.

9) 희망의 신학, 151.

10) 앞의 책, 35. 하나님은 추상적이고 정적인 원리가 아니라 인간 실존과 역사속에서 항상 새로운 형식으로, 즉 새로운 사건과 질문으로 만나 주시는 자유로운 하나님이시다. 이신건, 36.

11) 몰트만, 전경연 역, 정치신학, 대한기독교서회, 1995, 159쪽 이하.

12) 앞의 책, 160쪽 이하.

13) 정치신학, 124쪽 이하.

14) 앞의 책, 126.

15) 앞의 책, 127쪽 이하.

16) 희망의 신학, 363쪽 이하. 불트만도 "하나님에 관하여 우리는 객관적인 것이라곤 아무 것도 모른다. 우리가 세상에 있는 사물에 대하여 답을 알 수 있듯이 하나님에 관하여 말하려면 인간의 실존에 관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한다. 이신건, 33.   

17) 정치 신학, 144쪽 이하.

18) 앞의 책, 149.

19) 하인리히 오트, 김광식 역, 살아계신 하나님, 대한기독교서회, 1973, 42쪽 이하.

20) 보편 역사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결부시키는 상호관련성 안에서 이해된다. 판넨베르그(W. Pannenberg)는 세계의 현실을 보편역사로 이해하면서 하나님을 모든 현실의 근원, 통일성, 전체성에 대한 질문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새로운 방법으로 하나님을 논증하려고 하였다. 이신건, 32.  

21) 희망의 신학, 366쪽 이하. 판넨베르그(W. Pannenberg)는 이것을 포괄적 지평이라고 표현하는데, 이 보편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도구로 '이성'을 말하고 있다. 또한 역사의 개념도 위로부터의 역사가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주장한다.    

22) 앞의 책, 369. 몰트만은 또한 조화와 합목적성으로 이루어진 우주론적, 물리학적, 목적론적 신 존재 증명에 관하여는 세계가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실을 통하여 비판하고 있다. 특히 조화롭지 못한 세계사의 부조리를, 1755년 리스본의 지진과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형제들'의 소설을 통하여 반대 논증을 했다. 정치신학, 142쪽 이하.    

23) 정치신학, 151.

24) 안셀름, 전경연 옮김, 프로스로기온, 한들, 1997, 20.

25) 살아계신 하나님, 43.

26) 정치신학, 155.

27) 희망의 신학, 372쪽 이하.

28) 앞의 책, 50이하.

29) 앞의 책, 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