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적 그리스도

 

  염동팔

 

 

 

들어가는 말

 

고대세계에서 우주적 그리스도론은 구원자 그리스도를 권세들과 영들 그리고 여러 우상과 대결시켰다. 인간 중심적 그리스도론은 '역사'라고 하는 현대의 패러다임(paradigm) 안으로 끼워 맞춰졌으며, 부지불식간에 그 자체로서 오늘날의 자연파괴의 요인이 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현대에 이르러 구원은 영혼의 축복이나 인간실존의 개별성으로 축소된 나머지, 자연은 인간에 의한 엄청난 착취 아래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다.1) 서방교회가 자연과 은총을 구분한 것으로부터 생겨난 자연 멸시가 현대에 와서는 자연을 은총에 종속시키고 파괴하는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자연이 파괴될 때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한 부분이 죽임을 당한 것이 되고, 은혜의 영역은 자연의 구조들과 과정들이 자율적 인간에 의하여 요구되는 그만큼 줄어들었다.2) 그리하여 생태학적 위기는 결국 현시대에 의해 초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자연계의 치명적인 생태학적 위기에 대한 의식이 증대하면서, 비로소 인간은 '역사'라고 하는 현대의 틀의 한계성을 인식하게 되었으며, 고대의 우주적 그리스도론과 그 물리적 구원론을 다시금 질문하게 되었다.

 

1. '우주적 그리스도'의 재발견

 

우주적 그리스도론은 그리스도를 통한 만물의 화해로부터 출발하며, 이 화해는 교란된 세계의 조화와 적대관계에 있는 세계의 세력들과 위협하는 카오스의 상태를 전제로 한다. 몰트만의 주장에 의하면, 만약 신앙이 오늘날의 세계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치유의 능력을 발견하고 이를 경험할 수 있게 하려면, 근대의 역사적 그리스도론을 "지양하고", 그 한계를 극복하여, 하나의 새로운 우주적 그리스도론으로 그 진리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3) 그때에 그리스도교 신앙은 그리스도의 치유능력을 오늘의 세계 상황 속에서 재발견하고 또 경험할 수 있게 할 것이다.4)

    인간은 마치 자연이 자신의 소유물이라도 되는 양, 상처받고 위협받는 자연을 활보하고, 하나님을 비웃기라도 하듯 우쭐댄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와 혼돈이 서로 마주치는 카이로스(kairos)에 살고 있다.5) 생태계의 위기를 민감하게 느끼게 된 서구와 미국의 사람들이 아시아의 '자연' 종교에 관심을 가지며, 이 종교에서 그들의 상처받은 영혼과 병든 세계의 치유를 발견하고자 하는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오늘날 우주적 그리스도는 인간에 의해 혼돈 속에 빠지고 독한 쓰레기로 오염되며 보편적인 죽음으로 저주받은 자연과 구원자 그리스도를 대결시켜서, 인간을 절망에서 구출하고 자연을 파괴로부터 보존하려고 해야 한다.6) 본래의 성서적 그리스도교는 결코 근대 서구 세계가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인격적 종교, 인간 중심적 종교, 역사적 종교에서 그치는 종교가 아니었다. 오히려 성서적 그리스도교는 언제나 "더 크신 그리스도"를 발견하기 위한 길이요, 발전이었다.7)

    몰트만은 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막대하고 치명적인 결과를 실례로 들어 그 폐해의 심각성을 지적한 후8), 옛날의 관심사가 '그리스도와 우주'였다면, 오늘날의 관심사는 '그리스도와 혼돈'이라고 규정한다. 우리는 단지 인간의 마음과 윤리만이 아니라 마땅히 온 자연계에까지도 구원의 능력이 미치게 하는 '자연의 그리스도론'을 가지고 자연 생태계의 위협에 대응해야 할 것이다. 역사와 꼭 마찬가지로 자연은 '은총의 무대와 구원의 영역'이다. 우주적 차원으로까지 확장되는 우주적 그리스도론은 위협받는 지구를 위한 열정을 불러일으킬 것이다.9)

 

 

2. 우주적 그리스도

 

⑴ 창조의 근거로서의 그리스도

 

우주적 그리스도에 대한 바울의 진술들은 창조의 중재자직에 대한 고백형식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에게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한 분뿐이십니다. 그분은 만물을 창조하셨고, 우리도 그분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또 우리 주님도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십니다. 그분을 통해서 만물이 창조되었고, 우리도 그분을 위해서 존재하고 있습니다.(고전8:6)"10) 특히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는 그리스도를 보편적, 우주적 차원에서 선포한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이스라엘만의 메시아이기보다 인류의 "새 아담"이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조상들만의 하나님이기보다 "우리가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하는"(행17:27) 창조자로 선포된다. '모든 만물 창조의 중보자'가 되는 우주적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 근거는 부활하신 그분에 대한 부활절 경험에 있다.11)

    만일 부활하신 그분의 현현(顯現)의 빛이 이미 일찍부터 새 창조의 첫날의 빛과 동일하다면, 이 빛 속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의 "최초의 존재"로 "나타나신" 그분은, "모든 창조의 장자"이기도 하다(골1:15).12) 우주적 그리스도론의 존재근거는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그의 부활이 지닌 우주적 차원들의 빛 속에서 그의 십자가 죽음은 우주적 의미를 가진다. 그리스도는 그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의 "적대감을 소멸시켜" 하나님과도 화해하게 했고(엡2:16),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과 화해케 했다(골1:20).13) 우주적 화해와 우주적 평화에 대한 생각은 우주적 갈등들과 우주적 무질서와 카오스로 말미암은 우주의 보편적이고도 치명적인 위협을 전제한다.14) 십자가의 피를 통한 "만물"의 화해는 목적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머리" 아래 만물이 모이는 일의 시작이요, 따라서 죽음 자체를 폐기함으로써 만물이 새롭게 창조되는 일의 시작이다.15) "머리와 몸" 표상을 교회로부터 우주로 넘겨 적용하는 것은, 교회의 성장과 확장을 통하여 온 우주가 교회가 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없다. 오히려 화해된 교회는 평화에 이른 우주의 시작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이 된 대우주를 위한 역사적 소우주이다.16) 교회는 항상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이미 온 창조세계의 교회이다.17) 만약 창조 안에 있는 하나님이 경배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도 올바르게 인식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진정한 교회는 바로 병든 세상 한가운데서 그 병든 세상을 치유하는 건강한 창조의 시작이어야 한다.18)

     메시아적 지혜론과 우주적 그리스도론의 표상에 의하면 만물은 지혜의 메시아를 통하여 창조되었으며, 지혜의 메시아 안에서 계속 존속한다. ⒜ 만물은 하나님에 의하여 "메시아를 통해" 창조되었고, 그의 형식과 사귐은 메시아를 통해 발견된다. ⒝ 만물은 하나님에 의하여 "메시아 안에서" 고정되었으며,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현존을 통한 카오스 위협에 대항함으로써 그들의 현존과 삶이 유지된다. ⒞ 만물은 "메시아를 향하여", 메시아 때문에 창조되었고, 메시아를 기다린다.19)

   만물이 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면, 만물의 다양성과 그 역사성에는 하나의 초월적 통일성이 선행되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많은 신들이나 권세들의 많은 세계가 아니라 한 하나님의 하나의 창조이다. 만물이 한 하나님에 의해 그의 지혜/로고스를 통하여 창조되고 고정된다면, 공간과 시간 속에 있는 그들의 다양성의 밑바닥에는 내재적 통일성이 놓여 있고, 이 통일성 안에서 그들은 공동으로 실존하게 된다. 그들의 통일성은 그들의 밑바닥에 놓여 있는 통일성으로부터 온다. 이 통일성은 "지혜", "영" 혹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불린다.20)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창조론은 언제나 "자연의 통일성"에 관한 생각을 견지하였다.21)

    사제문서의 창조 이야기를 돌이켜보면, 내재적인 창조의 통일성이 두 가지 양식으로 표현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창조의 형태--"하나님께서 빛이 생겨라 하자 빛이 생겨났다"(창1:3). ⑵ 말씀을 통한 창조의 전제가 되는(너무 주목받지 못한) 하나님의 임재하는 영의 진동--"물 위에 하나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창1:2).22) 말(言)은 부르고 구분하고 판단한다. 그러나 호흡은 어떤 말을 하더라도 똑 같으며, 말을 이어준다. 이처럼 창조자는 그의 창조적 말씀을 통하여 피조물들을 나누고, 그의 모든 말씀을 품고 있는 영을 통하여 피조물들을 결합시킨다. 생명을 붙드는 호흡 속에서, 그리고 형상을 만들어주는 말씀을 통하여 창조자는 그의 피조물을 소리와 리듬으로 노래하며, 그의 피조물을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그러므로 우주적인 예배공간음악과 같은 그런 것이 존재한다.23)

    하나님은 그의 영의 근원적 활동 속에서 정의하고 구분하는 그의 말씀을 통하여 만물을 창조한다. 하나님의 영을 생명을 창조하는 하나님의 숨결로 이해할 때,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영의 활동이나 음(音, ton) 안에서만 하나님으로부터 밖으로 나간다. 피조물들의 통일성과 관련하여 말씀과 영은 서로를 보충한다. 하나님은 영과 말씀을 통하여 그의 창조에게 자기를 나누어주고 그 속으로 들어간다.24) 창조는 "하나님의 손들"의 "사역"일뿐 아니라, 하나님은 끊임없이 말하며, 그의 창조적인 말씀을 통하여 진동하며, 생명을 창조하는 그의 영을 통하여 창조 안에 거한다. 하나님은 세계의 가장 깊은 내적 삶이다. 또한 하늘과 땅은 하나님이 거하시며 휴식하고자 하시는 그의 본향이다. 이것은 창조의 원인과 기초가 무엇인가를 말하는 동시에 창조가 지향해야 할 목적이 무엇인가를 말한다. 그 목적은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이다.25)

 

⑵ 진화의 그리스도(샤르댕과의 대화)

 

떼이야르 드 샤르댕에 의하면, 우주적 그리스도는 "진화의 그리스도"이다.26) 그는 구원자 그리스도의 일면성을 진화자 그리스도라고 하는 보편적 창조의 완성자로 보완하려 했다. 만약 그리스도교의 구원론이 오직 원죄와만 관련된다면, 이것은 만물이 그리스도라는 머리 아래서 통일되고 언젠가 '만물 안에서 만물'이 될 하나님의 그 충만함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창조가 완성되리라는 그러한 전망을 전혀 갖지 못하는 셈이 된다. 그러나 떼이야르는 '구원의 창조적 측면'을 발견했고, 이 발견 속에서 하나의 새로운 신학으로의 발전 가능성을 보았다. 만물이 하나님에 의하여 통일될 창조의 완성은 세상을 죄에서 구원하는 일보다 더 우월한 것이며, 전자는 후자의 목표이다.27)

    떼이야르에 따르면, 구원자 그리스도는 "그의 고난받는 모습을 약화하지 않으면서도", 진화자 그리스도의 역동적인 충만 안에서 완성된다. 이를 위하여 그는 그리스도교적으로 이해되는 구원의 역사를 우주의 생명의 역사로 옮겨놓았으며, 이 자연의 역사를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개체에서 공동체로, 무(無)생명에서 생명과 더 복잡화하는 생생한 의식의 형태로 나아가는 진화로 이해했다. 그에게서 구원 역사와 생명의 진화는 같은 것이었다. 그는 인간의 출현을 생명 전체의 진화의 틀 안에서 보았다. 인간은 '생명권' 안에서 첫 생명의 출현 이래로 수행되는, 그리고 이미 물질의 조직화 자체에서 드러나는 '수렴(收斂)'의 유기적 연속체이다. 인간과 함께 생명의 새로운 단계가 개시되었다. 인간은 반성하고 의식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진보하는 의식의 파도에 떠밀려간다." 진화론적으로 말하면, '정신권'이 생겨난다.28)

     그렇다면 인간의식의 발전은 어디로 나아가는가? 떼이야르는 '초인'과 '초의식'의 발전이라는 니체의 표현을 사용하여 말했다. 진화의 다른 단계상의 조직 형태와 비슷하게 다자(多者)의 응집으로부터 하나의 새로운 질(質)로의 전화의 도약이 생겨난다. 인류를 '초인류'의 권(圈)으로 끌어올릴 하나의 새로운 조직형태가 생겨난다. "새로운 휴머니즘이 진화해서 예견하는... 인간 너머에 놓여 있는 완성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육(成肉)'의 개념 아래 기대하는 클라이맥스와 정확히 일치한다."29)

     떼이야르는 성육(成肉, Inkarnation)을 나사렛 예수의 일시적, 역사적 인격 안에서 소진되지 않고 온 우주의 '그리스도화'를 지향하는 한 과정으로 이해한다. 그는 세계의 현실을 진화로 파악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 점진적 성육을 '앞으로부터 다가오는' 것으로 보았다. 타락한 지구를 구원하는 이는 하늘의 하나님이 아니다. 오히려 우주에 완성의 길을 터놓는 자는 '앞으로 전진하는 하나님'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성육은 인류의 새로운 단계의 시작으로, 또 그래서 생명 진화 전체의 한 새로운 단계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인류의 신성화가 시작되며, 이를 통하여 우주의 신성화가 시작된다. 왜냐하면 이 우주적 그리스도 안에서 우주의 인간화와 지구에서 사는 인류의 인간화 과정을 생각한다면, 인간 발생의 중심에서 의식의 마지막 목표와 중심, 즉 '오메가 포인트'를 인식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경배하는 그리스도가 빛을 발산하는 이상적인 지점이 아닌가?"라고 묻고,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진화는...(그리스도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그를 구원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리스도는 (진화를 구체화하고 열망할 가치가 있게 함으로써) 진화를 구원한다."30)

 

⑶ 만물의 화해자로서의 그리스도

 

하나의 확고한 진보 신앙을 지닌 떼이야르는 진화 자체의 이중성을 미처 보지 못하고 간과한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진화의 희생자들을 위해 고민하지 않는 것같이 보인다. 진화는 항상 도태를 의미한다. '적자'(the fittest), 가장 쓸모 있는 것들과 가장 잘 적응하는 것들만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많은 생명체들이 희생된다. 진화는 단지 자연의 건설 사업만이 아니라, 잔인한 사업이기도 하다. 진화는 약자들, 병자들 및 쓸모 없는 자들에 대하여 내려지는 일종의 세계 심판의 수행이다.31)

     만물의 화해는 진화사상과 모순된다. 떼이야르는 어떤 형태로든지 '만물의 화해'를 배우지 못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첫 원자탄이 투하되자, 그는 이 사건이야말로 팀을 이룬 자연과학 천재들이 인류에게 가져온 자연과학적-기술적 진보라고 열광적으로 환호했다. 그렇지만 수십만의 히로시마의 사상자들과 오늘날에도 여전히 방사능 때문에 죽어 가는 자들을 그는 고려하지 않았다. 그는 핵무기로 인한 파국적 종말의 가능성을 인식할 수 없었으니, 이는 세계에 대한 그의 신뢰가 그로 하여금 인류 전체가 죽을 수도 있다고 여기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32)

    시간적으로 창조 과정 안으로 펼쳐지는 전 창조의 완성은 오직 종말론적으로만 생각될 수 있다. 그것은 곧 만물의 새 창조이다. 종말론적인 것은 만물을 그 과거에서 불러내어 영광의 나라로 다시 모으는 것이다. 종말론적이라는 것은 육체와 모든 자연의 부활이다. 종말론적인 것은 시간의 마지막에 모든 시간적인 것들이 체험하게 되는 저 창조의 영원성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그 어떤 것도 잊지 않는다. 그에게 상실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는 만물을 회복시킨다.33)

     죽은 자들을 일으켜 세우는 것, 희생자들을 불러모으는 것, 그리고 잃어진 것들을 다시 되찾는 것은 진화가 결코 달성할 수 없는 세계 구원을 가져다준다. 진화자 그리스도는 생성 중에 있는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구원자 그리스도는 오고 있는 그리스도이다. 그는 모든 역사적 사건과 메시아 자신의 관계를 구원하고 창조한다는 의미에서 그것을 완성한다. 땅과 하늘에 있는 모든 만물의 회복(골1:20)과 과거의 속박으로부터의 만물의 구원만이 비로소 메시아 안에서 만물이 통일되게 하고, 창조의 완성을 이루게 한다. 자연 역사와 인간 역사 안의 진화 과정은 계속적 창조의 결과다. 창조된 만물의 구원과 새 창조는 오로지 영광 중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부터만 기대될 수 있다. 만약 자연의 구원과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다면, 인간이 달성한 신적 생명으로의 자기 초월도 하나의 부스러기에 지나지 않으며, 구원받지 못한 세계로서는 기껏해야 하나의 깜빡거리는 작은 희망의 불꽃일 뿐이다.34)

    창조는 한 때 창조되었고 이로써 끝난 일이 아니라 시간적으로 진행되는, 미래를 향하여 열려 있는 과정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창조하며 그가 창조한 것을 발전시킨다. 끝없는 창조적인 만물의 근거로부터 언제나 새로운 생명의 형식들이 생성된다. 이 창조적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창조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특별한 방법으로 그의 피조물들에게 전달한다.35)

    "역사의 하나님"은 깊이 "숨어 계신 하나님"이요, 그의 계획들과 길들은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분명히 이해될 것이다. 신학적 우주론은 창조의 목적을 언제나 창조의 근원과 함께 생각하였다. 만물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며, 모든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존재한다. 세계의 근원과 목적은 만물을 시간적으로 묶는 두 개의 반원과 같다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한다. 라너의 우주론적 그리스도론에서는 세계에 대한 그리고 세계 안으로 향한 창조자 하나님의 자기 전달은 하나님을 향한 그리고 하나님 안으로 향한 세계의 자기초월을 일으킨다. 떼이야르도 언제나 더욱 더 풍부하게 되는 생명 진화의 목적은 하나님 자신의 충만함에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전통적 신학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과 그 속에 있는 세계 구원과 함께 보았다. 성서의 전승들도 이러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태초의 창조 질서는 이미 유대교 묵시사상에서 세계사에 적용되었다. 세계사의 목적과 완성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안식일에서 발견된다. 하나님은 휴식에 이르고자 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의 목적이다. 만물의 창조자 되신 하나님은 그들의 역사 속에서 쉬지 않고 계시며, 모든 것을 그의 영의 입김 속에서 유지한다. 하나님의 영원으로부터 나온 창조는 다시 그 하나님의 영원 속으로 사라지기 위하여 하나님께로 되돌아가지는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이 세계 안으로 들어오시고 세계를 그의 거처로 삼으신다. 이때 만물은 아무 방해 없이 그의 무한히 창조적인 삶에 내재(內在)하는 영광에 동참하게 된다.36)

    진화의 마지막에 기대 가능한 것은 완전해진 하나의 존재이지 완전해진 모든 피조물일 수 없다. 시간적으로 창조의 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창조의 완성은 오직 종말론적으로만 생각될 수 있다. 창조의 목적론은 창조의 종말론이 아니다. 과거에 있었고 지금 있으며 미래에 있을 만물의 새 창조가 종말론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과거로부터 모든 사물들을 영광의 나라 안으로 다시 불러모으는 것이 종말론적이다. 육체와 모든 자연의 부활이 종말론적이다.

    진화에 역행하는 구원의 활동을 우리는 종말론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적으로 표현한다면, 진화에 역행하는 구원의 활동은 미래로부터 과거로 흐르는 활동이지 과거로부터 미래로 흐르는 활동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미래로부터 역사의 죽은 자들의 현장 위에 불어와 피조물들을 마지막에 깨우고 모으는 새 창조의 "하나님의 태풍"과 같다. 죽은 자들의 부활, 희생물들을 다시 찾아 모음, 잃어버린 자들을 다시 되찾음은 진화가 도달할 수 없는 세계의 구원을 가져온다.37)

    자연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 안에 있는 진화의 과정들은 계속되는 창조의 결과들이다. 창조된 만물의 구원과 새 창조는 영광 가운데서 일어나는 그리스도의 오심으로부터만 기대될 수 있다. 세계의 완성은 죽은 자들의 부활을 전제한다.38)

 

 

3. 창조세계를 위한 그리스도인의 책임

 

창조 공동체는 정의의 공동체다. 이 생각은 특별히 구약성서의 안식일 계명에 잘 나타난다. 매 안식일은 인간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의탁해 사는 동물들을 위한 안식일이기도 하다(출20:10). 하나님의 땅에 사는 이스라엘은 매 7년째 되는 해를 안식년으로 지켜야 하며, 땅을 쉬게 해야 한다(레25:1-7). 땅을 계속해서 경작하면, 생산력을 잃어 추수의 양이 줄고 흉년이 도래한다. "땅의 안식"을 멸시하는 자는 땅의 황폐화를 당하고, 땅을 떠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땅이 그의 안식을 충분히 누리기까지" 인간의 착취에서 자신을 회복하도록 바빌론에서 포로생활을 해야 했다. 안식년의 지혜는 하나님의 법과 함께 "생태학적 지혜"라 일컬어졌다. 자연을 "하나님의 창조"라 부르는 사람은 땅에 대한 하나님의 권리를 존경한다. 또 자연을 "임자 없는 재화"로 보고 먼저 차지하는 자가 임자라는 망상에서 출발하는 자는 자연 파괴의 주역이 된다. 동물과 식물을 "그 종류대로"(창1:11,21,24)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의 모든 피조물이 서로 평화롭게 "그 종류대로" 살기를 원하신다. 모든 식물과 동물을 없애는 것은 성물 절취(절取)로 간주, 처벌돼야 한다. 하나님의 창조에서 인간의 소유는 연대성 속에서 사용될 때에만 정의로운 것으로 인정될 수 있다.39)

    "만물"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존재하며 "우리도 그를 통하여" 존재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서나 그리스도의 자유 안에서 살며, 이 세상의 세력들과 인간의 우상들은 더 이상 존중할 필요가 없다. 바울은 자연의 힘들이 신격화되고 마귀들이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된 종교의 세계에 그리스도의 자유를 선포하였다. 오늘의 우주적 그리스도론은 그리스도를 현대의 카오스와 함께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는 진화의 꼭대기에 있는 존재들 가운데 현존하지 않고, 발전된 인간 사회 속에서 가장 먼저 희생물이 된 자연의 가장 힘없는 피조물들 가운데 현존한다. 상처받은 자연의 성화 없이 우리는 인간의 진화를 구할 수 없을 것이다.40)

    자연을 무자비하게 착취하는 인간이 사려 깊게 자연과 화해할 수 있는 회개를 위한 영적 기초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의하면 우주적 그리스도론 자체에 있다. 우주적 그리스도론은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 신앙을 폐기하지 않으며, 이 신앙을 종교적 세계관으로 대체하지도 않는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인격적 신앙을 통하여 자신의 마음 깊은 데서 인지된다. 하나님과 영혼의 내적 평화는 중요하다. 영혼의 이 평화는 그리스도의 평화이다. 따라서 이 평화는 모든 영혼이 그 자신을 넘어서서 우주의 모든 피조물들의 사귐을 보게 된다. 하나님과의 화해는 인간에 의하여 신앙을 통해서 인격적으로 경험되는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공동체적으로 경험된다. 인간이 하나님 자신과 인간 상호간에서 경험하는 화해는 그들 자신과 그들의 세계를 넘어서서 우주를 보게 한다. 만약 모든 창조세계가 화해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일 수 없고, 모든 것의 근거일 수 없다.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을 세계의 화해 안으로 끌어안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다.41)

    현대인들의 공격적 윤리에 반해 화해의 윤리는 필연적으로 방어적이며 생명을 보존하는 성격을 지니게 된다. 방어적 삶의 유지와 생산적 삶의 장려는 서로를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공존한다. 공조를 기초로 한 협동은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들이 가진 특별한, 그리고 공통된 가치를 인정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피조물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그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이 거하심을 근거로 그들의 가치를 인정할 때, 포괄적인 창조의 정의로운 사귐 속에서 각 피조물의 권리를 인정하게 될 것이다.42)

    그리스도로 인한 화해는 하나님의 백성 안에서는 물론 우주 안에서도 하나의 정의의 공동체를 세운다. 인간의 가치가 인간의 모든 권리의 원천이듯, 창조의 가치는 동물과 식물과 땅의 모든 권리의 원천이다. 인간의 가치는 피조물들의 보편적 가치의 인간적 형식일 뿐이다. 자연에 대한 현대의 공격적 윤리는 서구의 르네상스와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에 대한 서구의 정복의 산물이다. 그 이전에 땅과 물과 삼림과 공기는 모든 인간이 사용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소유였다. 오늘날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마셔야 하는 공기에만 겨우 해당된다. 그러나 많은 도시에서 점증하고 있는 대기오염은 근세의 공격적, 반사회적 윤리의 결과다. 창조의 공동체가 정의의 공동체라면, 무엇보다 먼저 땅과 모든 종류의 동물들과 식물들의 권리가 인간에 의해 인정되어야 하며, "인간 권리에 대한 보편적 선언"에 상응하여 "땅"과 동물과 식물의 "권리"에 대한 선언이 인정되어야 한다. 동물과 식물과 땅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고서 인간 권리를 실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43)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온 우주의 화해(골1:20)는 권리를 상실하고 상처받은 모든 피조물들의 의롭게 됨이요, 오직 그것만이 생명과 창조의 평화를 지킬 수 있는 하나님의 정의의 관철이다. 그러므로 인간과 하나님의 화해, 인간 상호간의 화해, 인간 자신과의 화해는 직접적으로 자연과의 화해를 전제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속될 능력이 있는 자연과 함께 정의의 공동체를 형성해야 할 것이다.44)

 

 

 

[주]

 

 

1) Jürgen Moltmann, 이신건 역,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신가?』(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7), pp.113-114; Jürgen Moltmann, 김균진·김명용 공역, 『예수 그리스도의 길』(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0), pp. 383-384.

2) 『예수 그리스도의 길』, p.387.

3) Ibid., p.389.

4) Ibid., p.384.

5) Ibid., p.387.(『오늘 우리에게...』, p.115.)

6) Ibid., pp.384-385.

7) Ibid., p.385.

8) 『오늘 우리에게...』, p.114. 몰트만은 체르노빌 원전 사고 결과를 8천-1만 명 사망, 5만 명 치명적 감염, 체르노빌 어린이들의 장애아 출생과, 출생 후 곧 사망, 백러시아 3/1과 우크라이나 여러 지역 주민의 疏開, 플루토늄 半減期가 무려 2만4천년인 것 등등을 보고한다.

9) 『오늘 우리에게...』, p.116.

10) Ibid.(『오늘 우리에게...』, p.116.)

11) Ibid., p.393.(『오늘 우리에게...』, pp.116-117)

12) Ibid.

13) Ibid., p.395.

14) Ibid., p.396.

15) Ibid., pp.397-398.

16) Ibid., p.398.(『오늘 우리에게...』, p.118.)

17) 『오늘 우리에게...』, p.118.

18)『오늘 우리에게...』, p.119.

19) op. cit., p.401.

20) Ibid., p.402.(『오늘 우리에게...』, pp.120-121.)

21) Ibid., p.403.

22) Ibid.(『오늘 우리에게...』, p.121.)

23) Ibid., p.403-404.(『오늘 우리에게...』, p.122.)

24) Ibid., p.404.

25) Ibid., p.405.

26) Ibid., p.407.

27) Ibid., p.408.(『오늘 우리에게...』, p.125.)

28) Ibid., p.409.(『오늘 우리에게...』, p.126.)

29)『오늘 우리에게...』, p.126.

30) op. cit., p.410.(『오늘 우리에게...』, p.127.)

31) Ibid., p.411.(『오늘 우리에게...』, pp.127-128.)

32) 『오늘 우리에게...』, p.129.

33) Ibid., p.130.

34) Ibid., pp.130-132.

35) op. cit., p.420.

36) Ibid., pp.420-422.

37) Ibid., pp.422-423.

38) Ibid., p.424.

39) Ibid., p.430-433.

40) Ibid., p.425-426.

41) Ibid., p.426-427.

42) Ibid., p.428.

43) Ibid., p.428-429.

44) Ibid., p.4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