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기원과 본질

 

김홍준( M.DivⅡ)

 

 

오늘날에도 여전히 되고 있는 질문, <교회란 무엇인가?>는 예수 시대 이후 계속 시대를 거듭하면서 교회에게 제기되는 질문이다. 몰트만도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를 통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시도하고 있다. 여기서는 위의 책을 중심으로 교회의 기원, 본질, 형태 및 표지를 다룸으로써, 몰트만이 이해한 교회를 파악하고자 한다.

 

1. 교회의 기원

 

1) 예수는 <기독교적 종교의 창설자>였는가?

 

이 정보를 제공한 것은 계몽주의 시대의 역사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이다. 다른 종교의 예를 보면, 창설자 사상에 의하면 창설자는 초석을 놓을 때, 어떻게 또 무엇을 그 위에 세울 것인가에 대한 어떤 구속력있는 규범을 남기는 일이 없다. 사람들은 그로 말미암아 놓여진 기초를 더 발전시킬 수 있고, 또 거기서 이탈할 수도 있다. 교회는 확실히 나사렛 예수를 교회의 창설자(Grunder)로 내세울 수는 있으나, 그를 기억하는 일에 의하여 교회의 역사적 발전에 방해받을 필요는 없다. 그의 사명, 그가 당한 운명, 또 그의 희망의 모든 이질성은 역사적으로 상대화 될 수 있다. 여기서는 역사의 결과가 그리스도론과 교회론의 연속성을 만들어준다.

 

2) 예수는 교회의 설립자인가?

 

만일 교회가 스스로를 예수가 설립한 것으로 이해하고 기독교를 '설립자의 종교'로 이해한다면, 교회는 법적 행위를 통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교회에게는 변경할 수 없는 유언과 같은 규정이 주어져 있다. 이 규정이 설립자의 뜻으로서 확립되어 있고, 이것이 이 설립물을 관리하는 형식을 지배하고 있다. 교회는 '거듭난 자들의 자발적인 모임'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고, 그것에 선행하고 그것을 설립하고 또 그 형태를 결정한 설립자의 뜻에 부합하여 산다. 역사적으로 볼 때, 예수가 종교의 설립자로서 활동하지도 않았으며, 또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도 교회를 '설립(Stifter)한'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오직 그의 설립의 의지만이 그의 죽음을 넘어 존속하게 될 것이다. 나사렛 예수가 교회를 설립한 것으로 이해된다면, 교회는 한 죽은 설립자의 최후 유언으로 살아가는 것일 뿐, 그의 현재에서 또 그의 미래를 위해서 사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론과 교회론의 연속성은 계속 작용하는 의지에 달려 있다. 두 모델은 다 예수에 대한 교회의 관계를 한 역사적 인격으로부터 시작한 활동에 관련해서만 보고 있다. 그것들은 교회에 대한 예수의 역사적 우위성을 표현하는 것이며, 결코 어떤 질적인 차이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3) 예수는 <신앙의 창시자>이며 선포의 원천이었는가?

 

교회의 특수성을 강조한다면, 예수와 교회의 관계도 이와 비슷하게 서술될 수 있다. 사람들은 그때 <케리그마>에서 연속성을 찾을 것이다. 그리스도론적 발언으로서 그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예수는 말씀이다. 그의 전체의 활동은 이 말씀으로 해소된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에 하면, 언제나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한다고 말한다. 그의 예수는 처음부터 '역사적 예수'가 되려고 하지 않고 '말씀', 곧 기독교 선포의 말씀이다."

 

교회론적 발언으로서 그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에 관해서는 그의 생애에서 출발하였고 교회의 설교에서 계속 사건화되는 것 밖에는 아무 것도 내용적으로 가르쳐질 필요가 없다."

 

기독교의 선교와 그것을 전달하는 역사가 일치하고 동일한 것일 때, 그리스도론과 교회론은 더 이상 질적으로 구별할 수 없고, 둘은 <케리그마론>에서 만나게 된다. 그렇다면 교회적 선포의 근원이나 시작이나 제정이 예수의 이름으로 서술될 것이다. 케리그마의 자리에 <신앙>을 놓는다고 해도, 사정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신앙은 기독교인의 신앙의 생산적 원형과 역사적 시작이 된다. 여기서는 반대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차이가 케리그마로 혹은 신앙으로 해체된다.

 

4) 교회는 <<또 하나의 그리스도인가?

 

    "벨라민이 예리하게 지적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몸'의 칭호는 그리스도가 그의 신비스런 몸이라고 일컬어져야 한다는 사실에서부터만 단순히 설명될 것이 아니고, 교회가 동시에 제2의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또 하나의 위격(altera Christi persona)이 된다는 의미에서 교회의 담당자요 그 안에 사는 자라는 사실로부터도 설명되어야 한다."

 

교회는 곧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하는 사상, 즉 그리스도는 오직 교회와 더불어서만 <전체적 그리스도 totus Christus>라 일컬어질 수 있는 사상은 히포의 어거스틴에서 유래하였다. 교회론을 그리스도론으로 해소시키는 프로테스탄트적 경향에 부합하여 가톨릭 편에서는 그 반대되는 경향을 갖는다. 그러나 만일 머리와 몸의 형상에서 생각한다면, 머리와 몸의 뒤집을 수 없는 서열에 주목해야 한다. 즉 머리가 몸을 규정하며, 몸이 머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형상 자체는 해소될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교회의 성장과 그리스도의 파루시아 사이의 차이가 확립되어야 한다. <만물의 획복>이란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파루시아로부터만 기대될 수 있다. 그러나 교회의 성장 과정의 결과로서나 우주적인 성숙 과정의 결과로서 실현될 수는 없다.  

교회를 '연장된 그리스도'로 보는 이러한 사상은 나사렛 예수 안에서의 말씀의 육화로부터 사고하며, 또 교회를 화육의 계속으로서 이해한다. 이 경우에 말씀이 육이 된 것과 그리스도가 그의 교회 안에 성령을 통하여 거주하는 것 사이의 필연적 구별은 성취되기가 어렵다. 화육이 예수 안에서의 성령의 거주로 환원되든지, 혹은 성령의 거주는 로고스의 계속되는 화육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여기서는 영의 독자적인 업적은 그리스도의 업적에 종속된다.

 

5) 종말론적 인격으로서의 그리스도

 

옛 교의학의 교회론은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했으며, 그 안에서 신성과 인간성이 한 실체를 이룬 것과 그를 통하여 교회가 하나님과 사귐을 나누는 하나의 은사를 구별하였다. 근래에는 '높임을 받는 그리스도의 활동' 대신에 나사렛 사람의 계속적인, 지적할 만한 활동의 역사가 등장함으로써 교회론은 '아래로부터' 구조적으로 확장된 화육 사상에 접근하여 그리스도론과 유기적으로 결합되었다.

'역사적 예수'를 교회의 창설자로나 설립자로 말하든지, 또는 선포되어지고 믿어지는 예수를 선포(宣布)의 역사와 신앙의 역사의 시작이요, 출발로 말하든지, 또는 교회에서의 화육의 계속에 대해서 말하든지 하는 것은 이 관점에서는 아무 차이가 없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는, 만일 그의 시작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그의 종말로 출발한다면, 다른 빛 아래에 들어온다. 모든 그리스도론적 칭호는 그 핵심에서 부활절 사건 가운데 기초를 갖는다. 부활은 예수의 '종말론적 입장'을 구성한다. 그 안에 장차 오실 하나님은 그의 주권과 영광을 가지고 현재한다. 부활한 자는 장차 올 하나님을 이 사라져 버릴 세계의 시간 안에서 대리한다. 그는 그래서 또한 장차 올 자유와 피조물의 구원을 대리한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한 자는 역사적 개인이 아니고, 또한 단지 그의 몸인 교회의 '머리'가 되는 인격만도 아니다. 그래서 부활하고 높임을 받은 것의 빛에서 뒤돌아 볼 때, 예수의 죽음은 이 종말론적 인격의 죽음으로 해석된다.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빛에서 단순하게 그리스도의 '신적인 인격'에 관해서만 말할 수는 없고, 더 정확하게는 '종말론적 인격'을 말해야 한다.

예수는 '전적 타자'인 하나님이 대리자일 뿐 아니라 장차 올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대리자이다. 그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빛에서 단순하게 예수의 '역사적 인격'에 관해서만 말할 수 없고, 또 이로써 역사적으로 매우 영향력이 많은 '사사로운 인격'을 생각할 수는 없으며, 오히려 그의 나타남을 종말론의 공개 법정에서 이해한다. 곧 하나님이 하나님이 되시고 사람이 그의 영광에 도달하게 되는 그런 역사의 미래의 대리자로서 그를 이해해야 한다.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한 그리스도는 그의 인격과 그의 전 고난과 활동에서 역사의 이 미래를 대표한다.

만일 사람들이 교회의 현재로부터만 출발해서 그 설립자, 창설자, 그 시작, 원천 또는 머리에 대해서 묻는다면, 신약성서의 이런 발언들은 무의미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인격의 빛에서 보면, 교회는 그의 과거로부터 사는 것이 아니라 그의 역사의 회상과 그의 나라에 대한 희망 사이에서 현재적 해방의 요인으로서 존재한다.

교회가 자신을 그리스도에 대한 회상과 희망의 현재화로서 자신을 이해할 때에만, 교회는 그리스도에 대한 이질성과 그의 미래의 개방성을 이해할 수 있다. 교회가 그리스도를 회상함과 장차 오실 하나님에 대한 희망을 결합하는 한, 교회는 살아있다. 1)교회, p.84∼91

  

2.교회의 본질(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몰트만은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적 직무와 사명 속에서 메시야적 공동체로 이해한다. 즉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이며,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교회의 주체가 된다.

 

1) 출애굽의 공동체

 

몰트만의 이해에 따르면, 기독교는 새로운 출발을 하여야 한다고 한다. 이것은 종말론적 희망의 구체적 형태로서의 교회, 즉 유랑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기독교 현실이다. 현대사회는 교회에게 바랄 것이 무엇인가 알고 있다. 몰트만은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의 현재의 사회적 역할을 새로운 형태의 '바벨론 포로'라고 본다.

'주체성의 예배로서의 종교' 라든지 '이웃성의 예배로서의 종교' 또는 '제도로서의 종교'라는 기독교의 역할은 개개 인간의 의욕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고, 또 이념사적으로 본 일정한 신학 경향에 영향 받아 생겨난 것도 아니고, 사회의 '자기 이해에 속한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서 생겨났다. 이제 기독교가 사회적으로 적응할 힘이 없는 그룹으로 보이며, 현대의 모든 것을 통합하는 역할을 그에게서 기대하지 못하는 곳에서 기독교는 이 사회에 대하여 서로 갈등은 일으키지만, 많은 성과를 내는 동료자의 직책을 할 것이다. 2)희망의 신학 p. 411~441

공관복음서는 예수의 모든 사역을 그의 메시야적 사명의 빛에서 서술하고 있다. 또한 그의 메시야적 사명을 그의 선포의 관점아래 세운다. 그의 선포는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한다. 그러므로 그의 선포는 "복음 전함"이고 예수 자신은 종말시의 "복음 선포자"이다.

예수의 예언자적 직분을 수행하는 교회는 출애굽의 교회로 성격지을 수 있다. 따라서 애굽, 바벨론, 광야의 긴 방황, 예루살렘, 하나님의 도성 등의 상징들은 그리스도교 희망에 의해서 역사적으로 그리고 종말론적으로 해석된다. 출애굽의 교회는 사회로부터 그리고 교회가 탈피하여 게토화한다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포로생활과 게토로부터 자유로 해방한다는 것을의미한다. 3)교회 p.91-92 자유에로의 새로운 출애급은 그것의 축제적 성격을 통하여 옛날의 출애급을 능가한다. 장차 올 하나님과 그의 통치에 관한 소식은 여기서 미리부터 <자유로의 부름>이다. 반대로 자유로의 부름은 접근해 오며 복음 안에 이미 현재한 하나님의 지배를 통하여 근거지어지고 가능해진다.

몰트만은 "가난"을 종교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의존에 제한하지 않고, 또는 단순히 경제적 의미나 물질적 의미로 해석하지도 않는다. "가난"은 한 차원 이상의 여러 차원에서 "인간의 노예화"와 "비인간화"를 묘사하는 표현으로 이해한다. "가난한 자"의 반대개념은 가난한 자를 압제하고 희생시킴으로써 스스로를 살찌우는 "권력 행사자"이다. 부는 가난과 마찬가지로 다차원적이다. 그것은 경제적 착취, 사회적 우월, 모든 삶의 분야에서 자기를 추구하고, 다른 사람의 권리를 무시하고, 어떤 일이나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자족한 사람을 다 포함한다. 장차 올 하나님의 나라의 구체적 형태는 예수의 복음에서 보게된 장님들, 행방된 갇힌 자, 행복하게 된 가난한 자, 또 치료받은 병자들의 친교다. 그들과 함께 전체 백성의 출애굽이 시작된다.

복음이 예수의 역사 안에서 처해 있는 또 하나의 맥락은 "회개"이다. 회개는 영혼과 몸, 개인과 공동체, 그 자신의 삶과 방식과 그가 살고 있는 제도를 포함한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개인의 영역 또는 집단적, 종교적, 정치적 영역으로 제한될 수 없다. 그러나 또한 그 이유 때문에 "회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모이고 하나님의 나라의 임박함에서 그것의 자유를 붙잡는 하나님의 백성의 구체적 형태이다. 회개하고 돌아오는 제자들의 공동체는 메사야적 교회의 또 하나의 모습이다. "가난한 자들의 공동체"와 "회개한 자들의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원초적인 형식이다.

그리스도의 선포가 장차 올 나라와 인간의 현재적 해방에 관한 복음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빛에서 설교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합법적인 방도라면, 이 선포는 메시야적 세계선교의 지평에 속하게 된다. 하나님의 미래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까이 온 곳에서 사람들은 회개하고 그에게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회'는 또한 '그 나라의 백성'이다. 출애굽의 교회는 하나님의 지배에의 부합으로써, 또 인간과 피조물의 해방의 시작으로서 이해 될 수 있다. 이 공동체는 메시야적 해방의 현재적 형태다. 그것은 그 백성의 포로 상태와 빈곤과 비인간화로부터 하나님의 새로운 인간의 자유와 영광과 의로움에로의 출애굽이다. 교회가 예수의 역사를 해방자의 역사로서 선포하고, 그분과 함께 하는 그 자체의 역사를 보편적인 종말시적 출애굽의 역사로서 이야기함으로써, 복음을 세상에 전달하며, 인류에게 희망과 해방을 고취한다. 그래서 이 복음은 '교회의 말씀'이 될 수 없고, 도리어 이 교회가 '말씀의 교회'로서 자신을 이해한다. 교회가 복음을 가지는 것이 아니고 복음이 스스로 출애굽의 백성을 창조한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이다. 4)교회, p. 91∼96

 

2) 십자가의 공동체

 

몰트만은 교회의 기원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안에서 본다. 그리스도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그 자체를 십자가에서 생긴 교회로서 십자가 아래의 교회요, 십자가의 그늘 밑에서 사는 사람들과 연대관계에서 선 교회로서 이해한다.

첫째로 십자가 아래 있는 교회는 죄의 압박으로부터 해방된 교회이다. 예수는 가난한 자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메시야적 선포와 죄인들을 위한 은혜의 선포 때문에 신성 모독자로 선언되었고, 버림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부활과 부활절 신앙에서 보면 그의 십자가 죽음은 허무한 최후가 아니라 그의 사명과 그의 순종의 완성이다. 예수는 자기 헌신을 통하여 하나님을 '희생당한 자들'에게 가져다 주었다.

둘째로 십자가 아래 있는 교회는 권력의 우상으로부터 해방된 교회이다. 그 당시 십자가 형벌은 로마제국의 사회적, 정치적 질서를 보호하기 위한 형벌이었다. 5)몰트만, 십자가에 달리신 p. 144-45.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로마에 의한 십자가형으로서 철회할 수 없는 "정치적인 차원"을 가진다. 예수의 죽음의 정치적 차원에서 빌라도는 단순히 한 정책을 대표하는 것만 아니라, '정치적 종교'를 대표한다. 즉 예수의 재판에 숨겨진 것은 예수의 메시야적 소식 및 그의 자기 헌신과 종교적, 정치적 현실과의 충돌이다. 신앙과 정치적 우상 숭배 사이에는 십자가에 달린 분에 대한 회상이 있다. 이 회상은 믿는 자로 하여금 그의 백성의"가장 거룩한 재산"을 우상으로 인식하게 한다. 신앙은 정치적 죵교의 영역에서 십자가의 우상 파괴를 대표한다.

셋째로 십자가 아래 있는 교회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상태로부터 해방된 교회이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 가운데 고통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아픔과 더불어 그 십자가에 달린 자에게 온 비참함은 진실로 모든 버림받은 인간들의 비참함을 대표한다.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께 버림받음을 통하여 하나님을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자들에게로 이끌었다. 또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버림받은 자에게 아버지가 되고, 하나님 없는 자에게 하나님이 되고, 희망이 없는 자에게 도피처가 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수난사에서 한편으로 "하나님께 버림을 받음"으로 인식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의 완성"으로서 이해된다.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죽음에 그리스도가 자신을 내어줌에서 십자가의 신비와 하나님 자신의 신비가 계시된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공개된 비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교회는 예수가 하나님께 버림을 받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사귐을 획득하게 된 하나님 없는 자들의 공동체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직분에 참여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증거한다. 교회 전체는 그리스도의 자기 헌신으로부터, 또 세계의 화해를 위한 이 자기 헌신 속에 살아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각각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곳 어디든지 그리스도의 교제는 경험되고, 동시에 십자가 아래 있는 교회가 된다. 6)교회 p.102∼113

 

3) 형제애적 공동체

 

몰트만은 예수의 주권 아래서 해방된 그리스도의 교회를 해석한다. 그는 이것을 '형제애의 공동체'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주권에 있어서 자유는 형제됨 위에 세워진 창조된 존재의 교제 속에 있는 자유, 그의 "지배"의 완성으로서 도달된 자유이다. 지배에서 자유한 형제됨이 예수의 역사의 마지막 목표라면, 그의 우주적 지배는 주권과 노예상태로부터 해방을 의미한다. 즉 메시야적 삶을 위한 해방을 의미한다.

몰트만에 의하면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지배에 복종하고 그리스도의 희생으로부터 해방을 받게 되는 그곳에 교회는 존재한다. 새로운 삶의 방식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해방하는 지배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주권을 통한 이 해방을 경험하고 믿는다는 것을 전제한다.

교회는 주를 따라가고 한 성령에 의해 붙잡힌 자들의 교제이며 원칙적으로 동등한 권리와 존엄을 가진 평등의 공동체요, 해방 공동체이다. 몰트만은 교회를 하나님 앞에서의 수직적 차원과 세상 안에서의 수평적 차원으로 분리하는 것은 잘못이며 그리스도의 공동체에서 가난한자, 작은 자, 여자들, 그리고 인종차별을 받는 자들을 해방하여 그들의 인권을 세워주는 것으로 시작하여, 그들로 하여금 이 지배에서 해방된 영역 안에서 동료자 정신으로 맺어진 인격 공동체라는 행복된 경험을 체험하도록 하는 일이 교회의 가장 현실적인 것이라고 말한다.7)교회 p. 113∼124

 

4) 축제적 공동체

 

서방교회에서는 그리스도가 주라는 것만을 편파적으로 강조하였기 때문에 신앙이 자유를 새로운 복종 안에서 윤리화하게 되었다. 몰트만에 의하면, 이러한 윤리화는 종종 새로운 율법주의를 낳게 하였으며, 이에 따라서 그리스도는 새로운 입법자로 이해되었고, 그의 요구가 신앙을 공적으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미적인 면도 인식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미적 의미는 그의 '변모'에서 찾아진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변모된 사람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아름다움으로 변화된 십자가에서 달리신 자이다. 그는 장차 올 하나님의 나라의 주로 높임을 받은 자일뿐 만 아니라 또한 그러한 자로서 '영과의 주'로 변모된 자이다. 부활의 미적 범주는 믿음 안의 새로운 생에 속한다. 이 범주 없이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과 새로운 순종은 기쁨 없는 율법적 노력이 되고 만다. 부활절은 한 축제로부터 시작한다. 왜냐하면 부활절은 하나의 축제이고, 이 축제에 의한 생을 계속적인 축제적인 생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3. 교회의 친교 형태

 

교회의 존재와 기능을 예수의 메시야적 직무의 참여와 수행의 빛으로 해명하는 몰트만의 교회 이해에서 특이한 것은 전통적인 예수의 칭호인 예언자, 제사장, 왕이라는 세 가지의 메시야적 직무 외에 또 하나의 칭호인 "친구(우정)"의 칭호를 요구한 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몰트만은 메시야적 공동체 이해에서 교회를 "하나님 나라의 형제의 관계"로 이해한다. 이것은 '성도의 교제', '형제들의 공동체'로서 철저하게 제자직에 몸을 맡긴 공동체를 말한다. 또한 그는 성도의 교제를 성도의 '회중'으로 표현했다. 이것은 메시야적 이해를 실천하기 위해서 교회의 갱신을 요구하는 것이다. 교회가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성례전 집행의 개혁을 통해서나, 목회의 개혁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다만 실제적인 친교의 갱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회중 사이에서 친교가 사라진다면, 말씀과 성례전의 친교, 신앙고백의 친교, 제도와 교권의 친교는 그 생명을 잃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8)교회 p. 337∼340

성도의 교제는 두 가지 의미에서 해석되었다. 내용적으로는 성스러운 것, 즉 성례전 안에서의 친교를 의미한다. 또한 그것은 개인적 용어로서 부르심을 받고 또 의롭게 된 사람들, 성화된 사람들의 친교를 의미할 수도 있다.

성도의 집회는 서로를 위하여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서로 자기 희생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는 '모임',  '집회'이며 '기독교인들의 무리'이다. 그러므로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Confessio Augustana)의 7장은 '성도의 집회'를 모든 성도들의 모임으로 번역한다.

 

  "거룩한 회중의 교회는 복음이 바르게 선포되고 성례전이 올바로 집행되는 데 있다."

 

신자들의 모임 그리고 말씀과 성례전의 사건은 서로를 상호적으로 구성하고 해석한다.

말씀과 성례전은 친교를 형성한다. 그러나 이 친교 자체는 상호 관심과 자기 헌신에 강조점을 두어야 한다. <성도의 교제>라는 용어와 <신자들의 모임>이라는 용어는 사랑의 정신 안에 함께 있는 기독교인의 친교를 표현하는 데 충분하지 못하다. 이 때문에 <바르멘 신학 선언(Barmer Theologische Erklarung)>의 제3장은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 7장의 내용을 되풀이하는 한편 '성도의 집회'대신에

    

   "그리스도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과  성례전 속에서 성령을 통하여

     주님으로서 현존하면서 행동하시는 형제들의 공동체이다."라고 말한다.

'형제들의 공동체'는 성령 안에서 살고, 형제적 공동생활을 통하여 '많은 형제들 중에 맏아들'인 하나님의 아들과의 친교를 보여준다.  

몰트만에 의하면 친구로서의 교회 공동체는 예수의 사귐으로 살며, 그 자신을 사귐의 정신으로 새로운 형태를 만든다. '형제로서의 교회 공동체'는 '친교'의 새로운 형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1) 예수의 우정 안에서

 

몰트만에 의하면 우정은 허세를 부리지 않는 관계이다. 왜냐하면 '친구'는 어떤 직위나 명칭이나 존칭도 아니고 또 기능도 아니며 인격적인 관계의 칭호이기 때문이다. "너를 좋아하는 자가 너의 친구"이다.

우정은 사랑과 존중을 한데 결합한다. 우정 가운데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경험하며, 다른 사람들을 인격적 존재로 용납한다. 우정은 지나가 버리는 좋아함의 감정이 아니다. 우정은 사랑과 진실함을 결합한다. 친구 사이에는 오직 서로와 함께 동행하고, 서로를 위해 존재하겠다는 약속과, 행위와 소유가 아니라 인격과 관련된 진실함만이 지배한다. 우정이란 자유로부터 발생하고 상호간의 자유 안에 존립하는 그리고 이 자유를 보존하는 가장 깊은 인간관계이다. 친구에게 보상의 개념이 없으며, 친구를 신뢰하고 우리 자신을 맡긴다.

예수가 '죄인과 세리들의 친구'라는 이 고발적이고 경멸적인 이름은 오히려 예수의 깊은 진실을 표현한다. 그는 친구로서 즐겁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리고 즐겁지 않기 때문에 불유쾌한 취급을 받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하신다. 요한 복음 15장 13∼14절에 의하면 예수는 자신을 제자들의 친구라고 선포한다. 그가 그들을 자기에게로 부를 때 그는 새로운 우정의 삶에로 부른다. 여기에는 친구를 위해 바치는 자신의 생명의 희생이 가장 고귀한 사랑의 형태로 나타난다. 제자들은 예수의 우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유로운 친구가 된다. 몰트만에 의하면 예수와의 친교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이제는 주가 아니라, 또한 단지 아버지로서가 아니라, 그의 가장 내적인 본질에서 친구로서 경험한다. 하나님의 친구로서 경험된다면, 그때 인간은 하나님의 친구가 된다. 8)교회 p. 131∼134

 

2) 성령의 사귐 안에서

 

성령은 그의 사귐 안에서 하나의 중립적인 생명력 그 이상이다. 그는 신자들과의 사귐 안으로 들어오며, 신자들을 자신의 사귐 안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사귐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사귐을 원한다. 이것은 아주 특이한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우리가 기대하는 바, 성령의 "주권"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사귐"은 강요하지 않고, 자유케 한다. 사귐은 상호간의 참여 속에서, 그리고 상대방을 인정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진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은 친히 인간과의 "사귐"안으로 들어온다.

"성령의 사귐"안에 있는 교회를 말할 때, 이로써 우리는 성령에 의해 생겨나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사귐이 교회를 넘어선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성령은 교회를 자신과 결합하며, 교회를 임의로 부린다. 성령의 관심은 교회에 있지 않고, 생명과 중생과 만물의 새창조에 있다.

성령에 대한 교회의 첫 번째 관계는 에피클레시스(epiklesis)이다. 이것은 성령이 오기를 기도하면서 그를 지속적으로 부르는 것이요, 또 이와 결합된 바, 공동생활과 개인 생활에서 그의 에너지가 올 수 있도록 마음을 여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를 고백하는 교회는 전적으로 성령의 감화와 그의 광채를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우리가 "교회"라고 말하는 것은 예배와 상호 신뢰 가운데 소집된 공동체를 뜻하며,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가족, 직업, 일과 사귐 가운데 흩어진 교회를 뜻한다. 성령의 사귐 안에는 오직 영적인 사람들만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오랜 성직화는 "교회의 백성"을 비성숙하게 만들었으며, 현대가 도래하면서부터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들이 직무적인 교회로부터 이탈하는 결과를 낳았다. 교역자와 평신도의 구분 대신에, 그리고 교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을 게토화하는 대신에 그리스도인들의 두 가지 생명운동, 즉 공동체로의 소집과 사회적 소명으로의 파송이 일어나야 한다. 예배를 위한 소집은 세상 안으로 파송하는 일을 돕고, 예배를 통한 파송은 온전한 영적인 생활로 인도한다. 공동체 앞으로 나가서 공동체를 위해 행동하기 이전에 그들은 우선 그리스도 공동체의 구성원이다. 연대성이 없다면 대표도 없다. 바로 이점을 간과한 것은 "타자를 위한 교회"라는 종전의 구상의 한 오류이다.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은사와 소명의 카리스마적인 다양성을 지니면서 성령의 일치 안에서 서로와 함께, 서로를 위해 살고,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함께 봉사하는,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들의 사귐이다. 9) 몰트만, 생명의 샘. p. 120∼129

 

4. 교회의 標識(속성)

 

사도신경은 '하나이며 거룩한 보편적 교회'를 고백한다.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인 그리고 사도적인 교회'에 대해서 말한다. 진정한 교회는 이렇게 세 가지 혹은 네 가지 속성을 그 특징으로 갖고 있다. 그것들은 이 세상 안에서의 교회의 가시적인 형태를 위해서 휠씬 더 중요하다. 우리가 그것들을 교회의 표징으로서 혹은 특징으로서 본다면, 그것들이 이 세상 안에서 어떠한 형태로 인지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묻게 되며 또한 증거로서의 그것들의 성격에 대하여 질문하게 된다.

 

1) 자유 속에서의 일치

 

교회의 일치는 우선 '함께 모인 회중 안에서' 경험된다. 회중은 선포와 소명을 통하여 모여진다. 그것은 하나의 세례를 위하여 모인다. 그리고 공동의 성만찬을 위해서 모인다. 그것은 상호적인 수용의 정신 아래서 산다. 그리고 <평화의 결속>을 통하여 성령의 일치를 유지한다. 함께 모여든 회중의 일치는 다른 사람들의 친교 안에서 경험되고 보여지게 된다. 그것은 그 자체가 희망의 표징이다.

회중의 일치는 '자유 속에서의 일치'이다. 누구도 교회 안에서 세력있는 여건들과 일치를 이루기 위해 강압되거나 통제되어서는 안된다. 이 회중의 일치는 복음적인 일치이며 율법적인 일치는 아니다. 회중을 모으는 이는 그리스도이고, 회중에게 생명을 주는 것은 새 창조의 성령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와 인간의 자유에 봉사하는 어떠한 것도 회중 안에서 억압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다양성과 자유 속의 일치이다. 또한 회중의 일치는 일치 속에서의 자유와 다양성이다. 회중 안의 다양성은 자유의 근저에서 그 한계를 갖는다. 자유는 열광적인 획일화에 의하여 파괴되듯이, 또한 앞뒤를 가리지 않는 다원주의에 의해서도 파괴 될 수 있다. 이 양면의 위험 속에서 모이는 교회는 다양성 안의 일치의 근원으로 또한 일치 안의 자유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한 장소에서 모이는 회중은 모두 어떤 다른 장소에서나 어떤 다른 시간에 모이는 다른 모든 회중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다. 하나의 공동체가 그 자신의 제한을 넘어선 연대성을 가져야 하며, 이것은 박해의 시기에도 증명되어져야 한다. 세상에서의 한 사람의 기독교인 혹은 하나의 공동체의 모든 억압은 모든 기독교와 전체 교회에게 영향을 준다. 교회는 오직 이 살아있는 연대성을 통해서 그리고 압박 받는 동료 기독교인들과의 완전한 동일성을 통하여 '분리시킨 다음 통치하는' 압제자의 술책에 대항할 수 있을 것이다.  

공동체는 그들의 상호친교를 위하여 특수한 임무들을 부여할 수 있다. 사도들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들 속에서 이 기능을 행했다. 후에 이 임무는 감독들에게, 국가 교회시대에는 국가 당국에 위탁되기도 하였다.

회중들의 일치는 회중들이 행하는 것에 의존한다. 공동체들의 친교는 친교로서 살아야만 한다. 함께 모인 회중 속에서 경험되고 생활화되는 예수의 개방된 우정 그리고 '평화의 유대 속에서의 성령의 일치'는 능가될 수 없다. 자유 속에서의 일치와 일치 속에서의 자유가 경험되어질 수 있는 것은 회중들 상호간의 일치 그 자체가 회중으로서 실현될 때에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모든 회중 상호간의 친교들과 조직들에 있어서 말씀과 성례전 안에 있는 친교가 근본이 되기 때문에 관리되어져야 하는 일들과 명령되어져야 하는 업무들은 성령의 친교 안에서 통제되어야 한다.

자유 안에서의 일치는 그리스도 교회의 '표지'만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분리되고 약속되어진 세상 속에서의 "세상으로 하여금 믿도록 하기 위한" 교회의 신앙 고백적인 표지이다. 말씀과 성례전은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를 통해서 인류 안에서도 친교를 세우고 자유를 부여하는 권능을 가진다. 일치시키는 힘으로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메시야적 백성이다. 왜냐하면 일치는 교회의 속성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또한 이 세상에 있는 교회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교회 그 자체도 그것이 존재하는 사회 안에서의 지배의 요구로부터 자유를 경험하고 실천할 때 그것은 실제적인 일치를 획득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유롭게 된 교회만이 그러한 일치를 나타낼 수 있다. 또한 이것은 경험에서 본 것같이 이러한 종류의 요구에 대한 저항 때문에 고통 당하는 교회는 특별한 정도로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를 확신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확실하고 일관성 있는 '그리스도의 친교'에 관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친교만이 우리의 그리스도의 형제들의 친교와 가장 가치 없는 사람들과의 친교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또한 교회의 친교와 정치적 친교의 척도가 될 것이다. 일치와 분리, 갈등와 화해, 대결과 협동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시험되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십자가는 하나의 왕국의 처음이자 마지막 표징이기 때문이다.

 

2) 당파성 속의 보편성

 

교회의 보편성은 보편적(katholisch)이고 모든 것을 융합하는 그리스도의 현존에 의해서 결정된다. 이 경우에서 의미하는 것은 기독교 안에 존재하는 전체적이고 완전한 교회이다. 그것은 그의 공간적인 보편성, 곧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oikomene)의 모든 영역 안에 있는 교회의 현존과 그것의 시간적 보편성, 곧 역사의 모든 시간 속에 있는 교회의 현존을 포함한다.

교회의 보편성은 교회의 일치와 상관되는 용어이다. 교회의 일치가 교회의 수렴적인(intentiv)보편성을 의미한다면 교회의 보편성은 교회의 확장적인(entensiv)것을 의미한다. 교회가 완전히 그리스도에 연결된다면, 교회는 전체 세상에 연결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세상의 화해를 위하여 하나님에 의해서 보내졌고, 세상을 해방하고 일치시키기 위하여 하늘과 땅에서 모든 권능이 그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 자체에 의해서 보편적이고 일반적이고 전체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그러하다. 역사 안에 있는 교회는 아무리 포괄적인 형태를 갖고 있을지라도 여전히 특수하며, 아직도 '전체'는 아니다. 교회는 도래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바로 그 까닭에 아직 새로운 인간성 그 자체는 아니다.

교회는 선교에 있어서 보편적이다. 왜냐하면 교회의 선포 안에서 교회가 그것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호소하기 때문이며, 그리스도께서 처음부터 그 자신의 영역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던 영역이 있다는 것을 교회는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편적이라는 말은 교회의 상태를 묘사하는 말이 아니라 교회의 운동, 선교, 그리고 희망을 묘사하는 말이다. 교회는 선교적인 방법으로 인류 전체에게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교회가 갖고 잇는 부활의 소망과 성만찬 기도는 모든 사람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보편적'이라는 말은 그러므로 단연코 교회의 종말론적 규정이다.

교회가 특별한 의미에서 세상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라면, 교회는 종말론적으로 완성될 때, '전체'가 될 것이며 또한 보편성을 실현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 완성된 교회는 '진정으로 보편적인 교회'가 될 것이며, 반대로 그것의 특이성 안에서 지금 완전치 못한 교회는 미래의 보편적인 사회 바로 그것을 기술해야 한다.

역사 속에서의 교회는 그의 결함이 많은 확장 때문에만 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근본적으로 교회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동시에 살 수 없기 때문에만 제한된 채로 잇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이 교회에 병행해서 존재하는 한 교회는 비세계적 그리고 비보편적으로 제한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먼저 일방적으로 일반인들에게 선교하기로 결단하고, 그런 다음에 이방읜의 구원을 통하여 마지막으로 이스라엘도 구원되도록 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에 관한 한 그리스도의 교회는 극단적으로 변증법적인 방법으로 '보편적'이다.

그리스도의 지배가 하나님의 지배 가운데서 완성됨으로써 하나님이 "만유 가운데 만유"가 될 것이라면 영광의 왕국은 이런 점에서 충분한 의미에서 보편적이라고 불리워 질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 속에서의 교회는 이스라엘과 국가들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과 여건들을 교회 안으로 병합한다는 의미에서 '보편적'이 될 수는 없다.

교회가 도래하는 왕국과 관련된 자신의 역사적인 보편성을 교회의 사도직에서 발견한다면, 교회는 기독교적인 세계국가를 통해서 혹은 이스라엘을 대신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보편성을 실현하는 그러한 열광적인 꿈으로부터 벗어나게 될 것이다.

 

3) 가난함 속의 거룩함

 

신앙고백 안에서는 '거룩한'이라는 용어가 두 번 사용되어 있다. 즉 거룩한 교회를 위해서 사용되었고, 또 '성도의 교제'라고 부르는 다시 말해서 거룩한 자들의 친교를 위해서 사용되었다. '거룩한 자들의 친교'는 교회의 포괄적인 규정으로서 볼 수 있으며, 거룩한 사람과 그들의 업적과의 친교뿐 아니라 '거룩한 것'에 의한 친교를 의미할 수 도 있다. 그런데 종교개혁자들은 거룩한 회중을 생각했으며, '하나이며 거룩한 보편적인 교회'를 성도들의 공동체로 이해했다. 이와같이 첫 번째의 '거룩한'이란 표현은 일치된 교회 전체가 거룩하다는 의미이며, 두 번째 표현은 모든 성도들의 거룩함과 교회 구성원들 개개인의 거룩함을 말한다. 교회는 그것의 일치 속에서 그리고 그 모든 교회 구성원들 속에서 스스로 거룩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거룩하다>.

거룩함이란 사람들이 그 앞에서 떨고 뒷걸음치는 신적 권능의 높은 영역을 의미하지 않는다. 거룩함은 하나님이 주체로서 활동하는 그러한 성화 가운데 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무신론자를 부르심으로써, 죄인을 의롭게 하심으로써, 버려진 자를 받아들이심으로써 그의 교회를 거룩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공동체'는 동시에 '죄인들의 공동체'이며, '거룩하게 된 교회'는 동시에 '죄에 빠져 있는 교회'이다.    

교회는 자신을 하나님이 교회 위에서 활동하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의 은총 안에서 거룩하다고 입증했기 때문에 <거룩하다>. 그의 거룩함의 계시는 구속을 의미한다.

교회는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창조의 여명 안에서 거룩하다. 우리는 거듭하여 영원한 생과 영광으로 결실을 성화의 목표라고 말한다. 따라서 의롭게 된 죄인들의 공동체는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봉사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지닌 믿는 자들의 공동체이다. 성화된 자로서 그들은 세상을 성화한다. 그들이 구하려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규정하고 식별한다.

전체로서 교회에 대하여 의미하는 바는 죄의 고백에서 인식하는 <죄인들의 교제>가 교회의 과거이며, 죄의 용서에서 믿는 <성도들의 교통>이 교회의 미래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거룩한 교회는 <전향하는 교회>이다. 그것은 <개혁된 그리고 항상 개혁되어야 할 교회>이다. 교회의 신앙은 그것의 <항구적인 개혁>안에서 믿을 만한 것이 된다.

"오점이나 주름이 없이 훌륭한 교회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의해서 우리가 거기에로 인도되는 바 그 궁극적 목표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가난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부요하게 하기 위해서 가난하게 되었다. 제자들은 부에 관한 복음을 가난한 자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가난해졌으며, 사도는 세상을 복음으로써 충만하게 하기 위해서 가난하게 되었다. 이와같이 또한 교회도,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 데 바치며, 그의 메시야적 세계 선교에 투자할 때, 이러한 의미에서만 비로소 가난하게 될 것이다. <가난한 자들의 교회>가 된다면, 그리고 현실적으로 가난한 자들이 그들 자신과 그들의 소망을 교회 안에서 발견한다면, 교회는 영적인 그리고 실제적인 의미에서 <가난>하게 될 것이다. <가난한 교회>는 <가난한 자들의 교회>로서-다시 말해서 가난한 자들이 거기서 자유를 얻고 그 나라의 담지자가 되는, 그런 공동체로서-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가난>은 가난한 자들의 친교, 가난한 사람들과의 친교를 의미하며 또한 메시야적 선교 및 그 나라에 대한 소망의 공동체로서 그렇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랑의 표현으로서의 기독교 가난은 가난한 자들과의 유대이며 <가난에 대한> 항거이다.

세상 속에 있는 가난의 문제는 <가난한 자를 위하여 교회>를 동원하거나, <교회를 위하여 가난한 자>를 확보하려는 프로그램에 의해서 해결되지 않고, 오직 <가난한 자의 교회>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가난하고 고난 당하는 그리스도와의 친교는 <거룩한 교회>와 <성도들의 교제>의 신비이기 때문이다. 그의 친교 안에서 교회는 도래하는 그 나라의 가난한 백성이 되고, 그래서 거룩하게 되며 축복받게 된다.

 

4) 고난 속에 있는 사도직

 

그리스도 속에서 하나이며,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는 사도적인 증언을 통한 역사 속에서 인간과 만난다. 사도성은 그 나라를 위한 정의이다. 그것은 종말론적인 개념이 아니라 종말에 연관된 개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종말 그 자체의 특징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영광스럽게 되는 교회가 그것의 사도직의 성취를 통하여 하나이며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인>반면, 역사적인 교회는 그리스도에 관한 사도적 증언을 수행해 나감으로써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인 교회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역사적인 교회는 이중적인 의미에서 <사도직>이라고 불리워 질 수 있다. 교회의 복음과 가르침은 부활한 그리스도의 목격자, 첫 사도들의 증언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것은 선교적인 사명, 사도적 선포를 수행해 나가는 데에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사도적>이라는 표현은 교회의 <근거>와 교회의 <임무>를 나타낸다.

사도직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종말론적 사건에 근거하기 때문에 그것은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미래를 앞당겨 붙잡는다. 도래하는 영광의 주님은 사도의 복음에서 스스로를 나타내고 그의 백성을 모은다. 그러므로 역사적인 교회가 사도들을 부르면서 그것의 기원을 되돌아볼 때, 그것은 또한 자신의 종말론적 소망을 현재화하며 그 자신의 메시야적 사명을 확신하게 한다.

하나님이 세상에 관여하시는 역사 속에서 교회는 특수한 사명을 가진다. 그것은 말과 행동과 친교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자유케 하시는 통치를 땅끝까지, 시간의 종말까지 증언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사도직의 본질이며, 그 이유로 사도직은 또한 교회의 역사적인 본질이다. 그것은 '사도직의 교회'이다. 사도직은 그것은 주체이다. 사도적 교회는 선교적인 교회이다. 선교를 통해 새롭고 개체적이고, 독자적인 어떤 것이 항상 솟아나고 있다. 그러므로 선교적인 교회는 그 자신의 형태를 보급하여 도처에 <지교회>를 창설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도직이 <부활한 그리스도>의 부활절 사건에 의해서 종말론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것 같이, 그것은 십자가에 못박힌 자를 뒤따름에서 고난과 희생을 통해 규정되어 있다. 완전한 그리스도를 증언하려고 한다면, 하나가 다른 하나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사도직을 근본적으로 <능적적인 고난>과 <고난받는 행동>으로서 이해해야만 한다. 교회는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질 때 사도적이 된다. 교회의 사도적 계승은 그리스도의 수난의 계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