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국가

 

최유미

 

 

Ⅰ. 루터파의 두 왕국설

 

 1. 교의적 기본 입장 : 묵시문학적 종말론

 

 루터가 활동 초기에 논한 '두 왕국설'은 어거스틴의 전통을 그대로 전승한 것으로 세계사를 묵시문학적 투쟁, 즉 세계사의 종국까지를 지배하게 될 civitas Dei(하나님의 도성), civitas diaboli(악마의 도성) 간의 투쟁으로 이해하였다. civitas(도성)와 regunum(통치)이라는 술어는 동일한 의미로 교체될 수 있는 것으로서 항상 예루살렘과 바벨론, 가인과 아벨, 선과 악, 하나님과 악마 간의 긴장을 의미한다. 그는 또한 세계사를 지배하는 이 갈등에서 유추하여, 그리스도인들의 개인적인 삶도 역시 영과 육, 의와 죄, 생과 사, 신앙과 불신의 간단없는 투쟁으로 규정한다. 세계사에서와 개인의 생애 속에서의 하나님과 악마의 투쟁은 원칙적으로 종말론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아직 도래하지도 않았고 또한 결정적인 미래일 수도 없으므로 단지 임박한 묵시문학적 종말론이라는 차원에서의 결전을 의미한다.1)

 루터에게서 세계사, 교회사 혹은 개인의 생애 등은 언제나 civitas Dei(하나님의 도성)와 civitas terrena(세상의 도성), regnum Christi(그리스도의 통치)와 regnum diaboli(악마의 통치), corpus Christi(그리스도의 몸) 와 corpus mali(마귀의 몸), 신앙과 죄, 영과 육 등의 대립 속에서 사고한 것들이다. 이는 동일한 창조세계와 동일 인간 속에서의 갈등과 모순과 대립을 문제삼은 것이다. 이렇듯 루터의 두 왕국설이 regnum Dei 와 Regnum Diaboli 간의 종말론적 투쟁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확실히 하나의 투쟁설(Kampflehre)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뿐 아니라 세계사도 역시 이 갈등을 통해 두 시대로 규정된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 대항하여 투쟁하고, 하나님 없는 죄인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의인들에 대항하여 투쟁한다. 그래서 전 역사는 도래하는 종말론적 결전(eschatologischer Endkampf)과 개인의 의로운 삶을 위한 투쟁의 장이 된다.

이 투쟁의 참된 이유는 이방인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선택과 무법한 인간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의인들의 선택에 근거해 있다. 이것을 그리스도교적으로 이해하면, 역사의 종국적인 갈등은 결국 그리스도의 현현, 즉 복음과 신앙의 도래에 유래한다.2) 구원하는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인하여 이 두 세계의 투쟁이 가중되는 까닭은 구원과 멸망,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가 언제나 선명하게 대비되기 때문이다.

 

 2. 이중의 두 왕국설

 

두 왕국설은 세계사 전반을 지배하는 regnum Dei 와 Regnum diaboli 간의 광대한 구분 안에서 구원하는 그리스도의 왕국과 삶을 보존하는 세상 왕국을 다시 구분한다. 하나님은 악마 세력의 제한과 와해를 위해 두 상이한 세력을 세우셨다.3) 그것은 곧 영적 통치세력과 세속적인 통치세력이다.

이 재구분 안에서 두 왕국, 즉 '세상 왕국' 과 '그리스도의 왕국'은 함께 '악마의 왕국'에  대항하여 상이하고도 구분되는 방법으로 맞선다.4) 하나님은 이 두 영역, 즉 신자들과 경건한 자들이 그리스도 아래서 성령을 통해 행하는 영적 영역과, 외적 평화만을 유지하고 안정만을 추구하기 위해 비그리스도인들과 악한 자들을 제재하는 세속적 영역을 규정하셨다. 루터에 의하면 이 두 영역은 피차 고유한 한계를 가지지만 또한 상조하는 관계이다. 세속적 영역에서는 법과 외적 질서와 현세적 평화를 위해 권력이 요구되며, 영적 영역에서는 신앙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이 요구된다.5)

루터의 두 왕국설은 이미 그 진리 자체에서 하나님과 황제 사이의 비판적, 논쟁적 분열을 초래한다. 그것은 정교합일주의도, 성직자의 신정국가도 허락하지 않는다. 또한 세상과 정치는 숭배되어서도 안되지만 종교적으로 탄압되어서도 안된다고 가르친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돌려야 한다. 자신을 스스로 신격화해가는 세상을 본연의 세상으로 만들어야 하며, 하나님을 본래의 하나님으로 존재케 해야 한다. 그리고 세상, 법과 권력은 이성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6)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며,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도 없을뿐더러 다만 악한 혼돈을 막는 선한 일시적 질서일 뿐이다.

 

 3. 그리스도인과 세속인

 

비록 두 왕국설에서는 크고 작은 구분이 명백할지라도, 신앙보훈의 해석과 그리스도인들의 정치적 삶을 고려해 보면, 그 구획은 곧 어려워지고 만다.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두 주인을 섬기고 있는가?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동시적으로 두 왕국의 시민인가? 세속적 영역의 법과 영적 영역의 복음 중 그는 과연 어디에 기초해야 하는가?

루터는 먼저 여기서 율법의 행위 없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믿음과 단지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행위 사이에 적절한 구분을 시도한다. 만약 사람이 오직 믿음으로만 의로워진다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행위는 제외된다. 하늘을 얻기에는 불가능한 이 과제로부터 자유케 되면, 그 행위란 순전히 이웃을 위한 봉사로 나타난다.7) 그러나 (복음은) 정치나 경제를 해체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하나님의 질서로서 보존하고 그 속에서 사랑을 구현하도록 특별히 요구한다.

세속 영역에서는 믿는 자의 선행을 통해서 악마의 권세에 대한 그리스도의 왕국이 계시된다. 이 견해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정치적, 경제적, 가정의 다양한 삶에서 오직 그리스도의 기준을 따라 나타난다.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정치, 경제, 가정에서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그리스도 왕국의 증인으로서 악마의 왕국에 대항하게 된다. 그들은 각 분야에서 상황에 따라 분별 있게 대처해가야 하고, 그들의 행함은 항상 신앙을 통한 사랑의 동기를 가지며, 오직 세상에서 거룩을 수행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8)

 

 4. 몰트만의 평가

 

  1) 요약

우리는 먼저 루터의 두 왕국설의 이중성을 도식으로 그려보고자 한다. 우선 이 도식은 우리로 하여금 두 상이한 전망을 가능하게 한다.

① 영적 영역에서 세속적 영역을 조망하게 되면, 영과 권세, 신앙과 행위, 복음과 율법으로 대립하는 구분이 생겨난다.

② 그러나 regnum Dei에서 regnum diaboli 를 조망하게 되면, 영적인 영역과 세속적 영역은 밀접하게 접근한다. 하나님은 이 양대 영역을 통해 악마의 권세에 대항하여 투쟁하는데, 한편으로는 말씀과 신앙을 통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질서와 평화를 통해서 한다.

 ③ 그리스도인이란 결국 한편으로는 산상보훈의 복음에 복종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법과 국가의 권력에 복종해야 하는 두 이질 세계의 시민으로서 역설적 존재가 되고 만다. 그러나 두 영역을 악마에 대적하는 하나님의 투쟁의 관점에서 주시하면,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기초하여 모든 세속적 영역 속에서 악마적 국가를 대항하여 사랑의 행위를 구현하는 자가 된다. 그러므로 모든 세속질서들은 '그리스도를 수용하는 한' 곧 창조의 현장이 된다.9)

 

2) 오용들

① 이것은 역사 속에서 계속적으로 혼합되는 양대 왕국의 비판적 구분을 통해 교회와 국가라는 두 왕국의 종교적 이론이 되었다. 따라서 법과 복음은 변증법적 관계에서 분리되어, 국가에서는 보복의 법과 억압이, 교회에서는 오직 은혜만이 지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법은 복음으로부터 분리되었는데, 그 점은 19세기의 이른바 국가의 자주법에서 쉽게 발견된다. 그리하여 국가의 권력독점과 전제정치가 확산되게 이르렀다. 국가가 법적으로 강화되고 폭력이 난무할수록 교회에서는 은혜의 복음이 더 순결하고 선명하게 빛을 발한다는 논리다.10)

② 19세기에 이르러 영적, 세속적 영역의 구분을 사적, 공적 혹은 내적, 외적 구분으로 대체하기 시작한 것은 두 왕국설의 또 하나의 왜곡이었다. 그것은 결국 신앙을 타계적으로 만들고, 세상을 불신앙적으로 만들어서, 하나님을 비실제적 존재로 전락시키고 현실성을 불신앙적인 영역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③ 드디어 사람들은 두 왕국 속에서 히틀러의 국가의 악용과 국가 사회주의의 정치적 종교를 반대할 종교적, 정치적 근거들을 발견할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이런 식의 왜곡은 두 왕국의 분열로 인해 그리스도 왕국의 복음을 무력하게 했으며, 또한 그 정당성은 당시 권세자들의 임의에 맡겨지고 말았다.

 

3) 두 가지 근본 문제

① 두 왕국설은 regnum Dei 와 regnum diaboli 사이의 투쟁이라는 관점에 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묵시문학적 종말론으로 이해한다. 과연 이것은 옳은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미 악마의 권세를 이기신 하나님의 승리로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묵시문학적 종말론은 역사와 그 종국을 그리스도로부터가 아니라 악마를 대적하는 하나님의 세계사적 투쟁의 관점에서 이해한다. 바로 여기에 루터파의 두 왕국설의 모호한 교의적 기본 입장이 놓여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죄와 죽음과 악마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로부터가 아니라 불신앙과 신앙, 악마와 하나님과의 투쟁에서 시작한다. 두 왕국설에서 승리는 선지자적, 사도적 완결에 있지 않고, 묵시문학적 미래에 있다.11) 따라서 이 세속적 질서들은 정의와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위한 미래적 개방의 수단이 아니라 악을 대항하는 진압 세력으로 나타난다.

② 두 왕국설은 세속적 영역을 법 아래에 둔다. 그러나 그 법이 객관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처음에는 대개 각 시대에 따른 법으로 이해되었는데, 후에 와서는 하나님의 법, 즉 '하나님의 질서로' 바뀌었다.

③ 이상의 설명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결국 두 왕국설에는 그리스도교적 윤리를 위한 표준이 없는 셈이다. 그것은 단지 세속윤리의 승인 혹은 세속질서들의 윤리를 위한 표준들만을 전해줄 따름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실제적으로 역사신학이지 그리스도교 윤리의 기반이 될 수는 없다. 이것은 하나의 분류설이다. 이것의 최대 강점은 양심을 예민케 하는 데 기여한다는 것이지만, 그것마저도 주어진 사실만을 고려하는 사실주의를 그리스도교 윤리 속에 들여옴으로써 세상을 변혁하는 희망으로 인도하지는 못한다는 최대의 약점을 갖고 있다.12)

 

Ⅱ. 개혁파의 그리스도 통치설

 

 1. 칼빈과 쯔빙글리

 

 개혁교회는 도시국가들인 취리히, 제네바, 슈트라스부르크 등지에서 발아되었다. 당시의 이들은 이미 일종의 민주적 형태인 시의회 제도를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동시에 그가 소속된 한 책임있는 시민이었다.

Civitas Christiana(그리스도인들의 도시)의 근본 사상은 신앙과 정치를 통합하였다. 쯔빙글리는 1523년의 취리히 논란서에서 이미 시정(市政)을 그리스도의 표준 아래 두었다. 권세자들의 "능력과 권위는 그리스도의 교훈과 행적에서 비롯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적하기를 명하기 전에는 " 권세자들에게 순종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만약 권세자가 불충성하고 그리스도의 기준(산상보훈을 뜻함)에서 일탈할 경우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게 되길 바란다." 또한 칼빈도 역시 모세의 율법과 그리스도를 통한 율법 해설에서 드러난 것처럼 정치를 하나님의 통치권에 준하여 판단하였다.

그러나 쯔빙글리도 칼빈도 '하나님의 왕국을 이 땅 위에' 건설하기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인간적 의와 합치되는 하나님의 의를 물었다.13) 이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개인적인 소명을 정치로의 부름으로도 이해한다. 개혁파의 이해에 따르면 신자란 두 상이한 세계에 동시적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상이한 양대 관계 속에서 광대한 그리스도의 통치 하에 산다.

 

 2. 바르트

 

1) 바르멘 신학 선언

오늘날의 '그리스도 왕권'설의 동기는 칼 바르트의 신학과 히틀러 시대의 고백교회의 투쟁에 있다. 그것은 1934년의 '바르멘 신학적 선언'의 제1명제와 제2명제에서 발견된다.

 

 종교개혁의 모든 고백들은 대체로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정치적 권력, 경제적, 사회적 이해가 교회를 그들의 노예로 예속하려는 곳에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주권, 즉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 유일 통치가 고백되어야 하고, 저항을 통해 공개적으로 증거되어야만 한다.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의 통치 안에서만 자유하며, 또한 인간들에게 해방의 영향을 미칠 수가 있다.14)

 고백교회는 바르멘 선언의 이 명제로써 먼저 교회의 참 모습을 국가적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종교'로의 강요로부터 해방시켰다. "교회는 반드시 교회로 머물러야 한다. 15)

 

2) 교의적 기본입장: 그리스도론적 종말론

 

 바르멘 신학 선언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스스로, 완전하게, 그리고 종국적으로 계시되셨으므로 교회를 위한 다른 계시 자료란 있을 수 없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한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셨다.

 바르멘 신학 선언의 제 2명제는 지금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우주와 권세의 주인이시므로 또한 모든 인간적 삶의 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추론한다.16) 이러한 교의적 기본입장은 바르트의 신학에서 유래한다. 그의 저서 『복음과 율법』,『의인과 법』,『그리스도인 공동체와 시민 공동체』는 그리스도로부터 교회를, 교회로부터 정치를, 신앙으부터 삶을 바라본다.

 

 여기에서 바르트는 세 가지의 결론을 내린다.

 

 a. 전 세계는 이미 객관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의 통치하에 있다. 그 투쟁은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결정되었고, 그 승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공개되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그리스도의 이 승리의 확신 속에서 산다. 이 세상은 이미 하나님에 의해 구원으로 결정되었다. 이것은 하나님 편에서 객관적으로 볼 때, 모든 인간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되었다는 뜻이다. 인간 편에서 볼 때는, 그 사실을 인식하는 신자와 미처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불신자로 구분된다. 따라서 종말론적 미래는 단지 그리스도의 승리를 공개적이고 보편적으로 드러낼 뿐이다.17)

    

 b. 그리스도가 주이시라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이미 그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는 그의 상대적인 자율적 주체, 가치, 기능과 목적 속에서 죄인의 의인 사건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봉사해야 하는 본래적 권력으로서 결국은 그에게 속한다.

    

 c. 바르트는 무엇보다도 신약성서가 새로운 피조계의 질서들을 종교적이 아닌 정치적 개념으로서 묘사하고 있음을 간파하였다. 예컨대 하나님의 나라, 천국, 천국 시민 등

 이런 사실 속에서 바르트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추론해낸다. "현실적, 세상적 교회는  바로 이 실재하는 천국적 국가에서 그들의 미래와 희망을 본다. 하나님에 의해 세움을 받아 이 지상으로 도래하는 천국이 그들의 약속이요, 희망이다."

 현세적이고 미완성적인 국가와 인간적이고도 불완전한 사회는 도래하는 하나님의 통치에 의해 비로소 완성된다. 이 정치적 종말론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정치적 자의식을 가지고 존재할 때만 계시된다.18)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더 이상 악마적 권세 아래 예속된 세계로 보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자유와 평화를 발견한다고 고백한다. 이런 신앙으로부터 국가와 법과 경제 등 모든 삶의 영역에 대한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불가분적 연대책임이 따른다.

 

이상과 같은 바르트의 교의적 기본입장은 아래와 같다.

 

① 그리스도론적 종말론 : "예수는 승리자이시다." 그리스도교적 신앙은 어디서나 그리스도의 이 승리의 확신 속에서 산다.

② 보편적 그리스도론 : 그리스도는 우주통치자이시다. "그것은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 곧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왕권과 주권과 권세와 세력의 여러 천사들과 같은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모두 그 분을 통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만물은 그 분을 통해서 그리고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골 1:16)"

이런 전망이 서게 되면, 이 세계사적 투쟁이란 이미 패배한 후군과의 교전일 뿐이다.

③ 모든 삶의 영역에서 순종하는 제자의 그리스도 정치적 윤리, 즉 화목케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피조물적 삶이 관계윤리.19)

 

 2.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시민 공동체

 

바르트는 두 상이한 공동체를 말하면서, 그 근원과 목적의 단일성을 강조함과 더불어 또한 교회와 국가 사이를 확연히 구분한다.

 교회는 자각으로 인한 예수 그리스도에의 고백을 통해 많은 사람들 가운데 특별히 '그리스도인'으로 부름받은 공동체이다. 따라서 교회는 구체적인 '신자들의 모임'(ekkiesia)인 것이다. 그들의 삶은 내적으로는 동일 신앙을 통한 동일한 사랑과 동일한 희망으로, 외적으로는 공동고백과 만인들을 향한 공동선포를 통해 규정된다.

   시민공동체는 공공의 법적 질서를 매개로 결합된 공동체이다. 그들의 공동의 의미는 외적인 안전, 개인의 상대적 자유와 공동의 외적, 상대적 평화, 그리고 삶의 잠정적인 인간성 보존에 있다.20)

바르트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시민 공동체의 관계를 두 동심원의 도식으로써 표현하였다. 이를테면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그리스도 왕국의 내적 동심원으로서 자유케 하는 그리스도의 통치와 도래하는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희망을 선포한다. 그러나 시민 공동체는 그 최상의 경우라도 이런 기능을 감당할 수가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고유한 그들의 사명을 성실히 수행해 갈 때만이 비로소 시민 공동체의 사명에 간접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선포하는 것은, 곧 그가 교회의 머리되심과 같이 세상의 주도 되신다는 사실을 믿고 선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하는 것은 정치적 현실성을 위해 매우 중요시된다.21) 또한 그리스도 공동체는 정치적 행위 속에 잠재된 체념을 극복하고, 하나님 왕국에서의 정치의 종말론적 완성에 대한 희망을 널리 전파해야 한다.

국가는 하나님의 왕국도 아니고, 하나님의 왕국이 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도 역시 도래하는 하나님의 왕국의 약속 아래 있다. 이 양대 국면 사이에 비유(유사함)가 주어진다.22)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보면, 국가는 교회가 신앙해 왔으며 선포하여 온 하나님의 왕국의 비유, 상응, 유사를 의미한다."

바르트는 시민 공동체를 그리스도 왕국의 외적 동심원이라 부른다. 왜냐하면 내적 동심원으로서의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외적 동심원으로서의 시민 공동체가 그들의 공동 구심점을 주되신 그리스도께 두고 있고, 그들의 공동 목적을 하나님의 왕국에 두고 있으므로,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그의 정치적 결단을 통해 하나님 정의의 비유인 정치적 정의를 그에게 알리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사실에 근거해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국가와 법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인간이 국가와 법을 위한 존재는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이상, 인간이 모든 정치적인 것의 척도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해 오신 인자의 증인이다. 그러므로 정치적으로 위협받는 자, 잃어버린 자, 약한 자와 가난한 자들을 옹호한다. 또한 여러 다양한 사회적 가능성 가운데서도 사회적 정의를 최상으로 기대할 수 있는 길로 선택한다.23)(8쪽 계속)

   

 3. 몰트만의 평가

 

1) 도식: 생략

 

2) 오용들

바르트가 말한 국가와 사회에 대한 교회의 우위 질서는, 그것이 신학적으로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교권적 후견으로 쉽게 빠질 수 있다.24)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시민 공동체에 대해 하나의 모본이 되어야 한다는 그의 요구는 오직 그가 '참 교회'라고 표현한 그 교회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과연 어디에 그런 참 교회가 존재할 수 있을까?

만약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우위와 그리스도 왕국의 우위가 정치적 삶에서 구현되어야 한다면, 바르트의 우위론은 그 실천의 장에서 실패하고 말 것이다.

 

3) 교의적 기본문제에 관한 두 가지 비판적 현안

①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시민 공동체에 대한 그리스도 통치설은 그리스도론적 종말론에 기초해 있다. 그리스도는 지금 이미 하늘과 땅을 통치하시는 Pantokrator(우주의 통치자) 이시다. 이런 형태의 그리스도론은 무엇보다도 먼저 원시 그리스도교적 찬송에서 힘차게 선포되었고, 그 후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 반영되었다. 이 찬양들은 이미 개시된 그리스도 세상통치와 이미 실현된 우주적, 정치적 권세들의 굴복을 선포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송영적 환호에서 이미 그리스도의 우주통치에 참여하는 것이다.25)

그리스도인들은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보다는 십자가를 더 직접적으로 공유하고 있다. 신앙의 승리에 대한 확신이란 다름아닌 곧 십자가 아래서의 확신이다. 그러나 실상 바르트는 그리스도 왕권에 관해서는 극히 희소하게 언급하며, 단지 '그리스도 통치'에 대한 설명으로 만족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의 통치란 한 왕의 통치와 같은 것이 아니라 강함으로보다는 약함으로 인해 승리하고, 십자가 위에서 대리적 고난을 받음으로 통치하는 십자가에 못 박힌 자의 지배라는 것이 강조되어야만 한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에 대한 생생한 회상이 없는 한, 그리스도 왕권설은 한낱 승리주의적이어서 곧 자기의인화에 빠지고 만다.

십자가에 못박힌 자에 대한 회상은 부활하여 지금 통치하는 그리스도에게 바울이 우주 지배자 칭호를 붙이지 않은 것과, 모든 나라와 세상의 권세들이 그리스도에게 굴복되었다는 그 찬양의 현재완료에서 희망을 미래에 둔다는 진술과 연관된다. 고린도전서 15장 28절에 따르면, 결국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모든 것을 굴복케 할 것이고, 아들은 나라를 아버지께 양도하게 될 것이다.26) 바울에게 그리스도가 주이신 것은 그가 "자기의 모든 원수들을 그의 발아래 둘 때까지 지배한다"는 뜻이다. 그런 후 십자가에 못박힌 자의 통치는 하나님의 통치가 될 것이며 권력들은 죽음과 함께 멸망되어질 것이다.

② 그리스도의 통치가 모든 열방과 권세자들, 그리고 권력 위에 이미 현존한다는 바르트의 이 설명에는 다음과 같은 모호함이 따른다.

이를테면 모든 권세들과 국가들도 역시, 그들이 알든 모르든, 지금 이미 우주의 통치자(Pantakrotor)이신 그리스도에게 봉사하든가, 아니면 우주의 통치자가 그리스도를 지배하여 그들을 통해 비로소 이 세상의 전 국가 영역의 통치자가 된다. 만약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통치는 신자들이 순종하는 만큼 미치게 된다.27)  

그리스도인의 정치윤리는 오직 뒤따름의 윤리로서만 가능하다. 그것은 단지 그리스도인을 위한 윤리일뿐, 국가를 위한 그리스도교적 윤리는 아니다. 또한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정치적 윤리이지, 시민 공동체의 그리스도교적 정치는 아니다.28)

 

 [주]

 

1) p. 173.

2) p. 174.

3) p. 177.

4) p. 178.

5) p. 179.

6) p. 180.

7) p. 181.

8) p. 183.

9) p. 184.

10) p. 185.

11) p. 186.

12) p. 187.

13) p. 191.

14) p. 193.

15) p. 194.

16) p. 195.

17) p. 196.

18) p. 197.

19) p. 198.

20) p. 199.

21) p. 200.

22) p. 201.

23) p. 202.

24) p. 205

25) p. 206.

26) p. 207.

27) p. 208.

28) p. 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