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과 생명신학

 (1995년 여의도 순복음교회, 서울신학대학교, 1996년 킹스 칼리지 강연)

 

 

성령의 은사와 임재(臨在)는 우리가, 인간의 공동체가, 모든 살아 있는 존재와 이 땅이 경험할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위대하고 놀라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 안에서 임재하는 자는 여러 선한 영들과 악한 영들 중의 어떤 한 영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 창조적이고 살리고 구원하며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있는 곳에 하나님은 특별한 방법으로 임재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안으로부터 약동하는 우리의 생명을 통하여 하나님을 체험합니다. 우리는 모든 감각을 통해 완전하고 충만하고 치유받고 구원받은 생명을 체험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생명을, 그리고 우리의 생명 안에서 하나님을 느끼고, 맛보고, 만지며, 봅니다. 성령 하나님을 일컫는 이름들은 많습니다. 그것들 중에서 보혜사(Paraklet)와 생명의 샘(fons vitae)이라는 이름이 나로서는 가장 아름답습니다.

         

1.하나님의 영의 임재에 대한 성서적 전망

성령에 대한 기다림과 성령의 도래

성령을 향해 비는 기도는 모두 성령의 도래를 비는 기도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독특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은 이것을 성령의 현현(顯現: Epiklese)이라고 부릅니다. 대개의 오순절 찬송은 단지 "창조주 성령이여, 오소서"(Hrabanus Maurus: Veni, Creator Spiritus)라고 말합니다. 성령을 향해 비는 기도는 그의 편만한 임재를 갈구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여러 은사들 중의 하나의 은사가 아니라 그 이상(以上)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무한한 임재입니다. 이 임재 안에서 우리의 생명은 깨어나고, 온전히 약동하며, 생명의 능력을 부여받습니다. 성령의 도래를 비는 기도는 마라나타(Maranatha) 기도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마라나타 기도는 그리스도를 향해 비는 기도이며, 종말론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신약성서의 마지막 바로 앞 구절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라고  말합니다. 이것도 단지 예수의 인격을 향한 기도만은 아닙니다. 이것은 그분이 세계를 새롭게 창조하기 위해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오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성령의 파루시아(內臨)는 그리스도의 파루시아의 시작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영광의 보증"이라고 불립니다(엡 1:14, 고후 1:22). 지금 성령 안에서 개시(開始)되는 바로 그것은 장차 영광의 나라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영광의 나라는 기대 밖에, 그리고 느닷없이 오는 것이 아니라, 영의 나라 안에서 벌써 예고되고, 그 안에서 임재하는 힘을 지닙니다. 이것은 마치 봄과 여름, 파종과 추수, 일출과 정오와 같습니다.

성령의 도래를 위해 기도하는 자는 기다림을 향해 마음을 열어 놓으며, 영의 에너지로 하여금 자신의 생활 속으로 흐르게 합니다. 비록 사람들이 구원받기 위해 탄식할 도리 밖에 없고 탄식 가운데서 침묵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은 이미 그들 가운데서 탄식하고, 그들을 위해 친히 간구합니다(롬 8:26). 억눌린 이 생명과 파괴된 이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오심을 비는 기도와 탄식은 그 자체로서 성령의 역사(役事)요, 그의 생명의 첫 표징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늘 두 가지의 모습으로 체험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대면(對面)인데, 우리는 이 대면을 위해 간구합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임재(臨在)인데, 우리는 이 임재 안에서 간구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空間)입니다. 이것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어린 시절에 우리는 우리의 어머니를 두 가지의 모습으로 체험하였습니다. 하나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임재의 모습이었고, 다른 하나는 우리를 부르는 대면의 모습이었습니다.  

성령을 향해 비는 기도에게 주어지는 응답은 그의 도래, 그의 충만, 그의 내주(內住)입니다. 우리에게, 우리 심령 안으로, 우리의 공동체 안으로, 우리의 땅으로 성령이 오기를 기도하는 자는 하늘로 도피하거나 피안의 세계로 은둔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심령, 그의 공동체, 이 땅을 위한 희망을 갖습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를 당신의 나라로 데려 가소서"라고 기도하지 않고, "당신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임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상처받기 쉬운 이 땅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오기를 비는 기도는 위대하고 꺾일 수 없는 생명 사랑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향해 비는 기도의  또 다른 응답은 그가 "만인(모든 육체)에게 강림하는 것"(욜 2:28, 행 2:17 이하)입니다. 이 놀라운 은유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만인"(모든 육체)은 분명히 무엇보다도 인간의 생명입니다. 하지만 창세기 9장 10절 이하에 기록되었듯이, 이것은 모든 생명체, 풀과 나무와 동물도 포함합니다. 시편 36편 9절에서는 하나님 자신이 "생명의 샘"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 14절에서 예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에서 "물"을 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메마르고 목마른 만물에게 생기를 주는 "생명의 샘물"과 물의 비유가 사용된 것은 성령의 활동을 이해시키기 위함입니다. "생명의 물"인 그는 죽어가고 메마르는 것을 살리고, 결실을 맺게 합니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성령이 단지 하나의 신적인 위격(Person)만이 아니라 신적인 원소(Element)로 여겨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보냄을 받으며", 그는 폭풍과 같이 "옵니다". 그는 마치 홍수와 같이 모든 생명체를 온통 덮어버리며, 모든 것 속으로 침투합니다. 만일 성령이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라면, "하나님의 영의 강림" 안에서 모든 육체는 신성(神性)해집니다. 죽어야 할 모든 육체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거룩한 것이요, 하나님 자신처럼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의 강림" 안에서 신성(神性)이 열리며, 여성 신비주의자 멕트힐트 폰 막데부르크(Mechthild von Magdeburg)가 읊었던 것처럼, "충만하고 흘러 넘치는 신성"이 됩니다. 샘, 강과 바다 안에서 물은 동일한 본질을 이루지만, 물의 운동은 단계를 이룹니다. 영 자체로부터 서로 다른 영의 능력으로 넘어가는 과정, 은혜(Charis)로부터 많은 은사들(Charismata)로 넘어가는 과정은 하나의 유출(流出)처럼 유동적입니다. 신성이 편만하게 임재하면, 그 안에서 인간 생명체, 아니 실로 모든 생명체들이 알차게 개화(開花)하고, 영원히 살 수 있게 됩니다.

성령의 기원과 전달

성령의 기원에 대한 질문은 결코 사색적인 질문이 아니라 하나의 불가피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기원 가운데는 이미 목표가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자신의 출처가 되는 자를 데려오고 전달합니다. 그렇다면 성령은 어디로부터 나옵니까?

하나님의 빛나는 얼굴

구약성서의 답변은 놀랍습니다. 우리는 시편 51편 11절을 읊으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편 139절 7절 참조). 그리고 시편 104편 29-30절("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영)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를 읊을 때, 모든 생명체들도 그런 기도를 드린다는 점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하나님의 보살핌, 그분의 자상한 관심과 그분의 특별한 임재를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얼굴은 언제나 내면적인 마음의 운동을 특별히 드러내는 장소입니다. 짜증과 기쁨, 웃음과 울음은 우리의 얼굴에 나타납니다. 실로 하나님의 얼굴에서도 이와 비숫한 것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숨은 얼굴"은 유대교 사상에서 하나님의 심판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하나님의 "돌이키는 얼굴"은 하나님의 저주와 영원한 죽음의 상징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빛나는 얼굴"은 성령 강림의 샘이요,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과 축복의 샘입니다. 우리는 아론(Aaron)과 같이 "당신의 얼굴을 우리에게 비추시고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축복의 기도를 드립니다. 이것은 성령의 오심을 간구하는 기도요, 하나님이 특별히 임재하사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를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얼굴은 언제 "빛납니까?" 사랑을 느낄 때, 사람의 얼굴은 빛나기 시작합니다. 어머니가 그녀의 아기를 품에 안고 사랑할 때, 우리는 그녀의 눈이 빛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멋진 선물을 하고 싶을 때, 그 사람의 눈은 격앙된 긴장의 빛을 발합니다. "빛나는 눈"은 기쁨을 가져다 줍니다. 물리학(物理學)적으로 눈은 단지 빛만을 받아들이지만, 관상학(觀相象學)적으로 영혼은 "빛을 발합니다." 하나님의 "빛나는 얼굴"을 생각하면서 이로부터 성령의 빛을 사모할 때, 우리는 이 모든 것과 또 이보다 더 한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빛나는 기쁨의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실 때, 생명의 확신과 새로운 생명의 능력이 우리 안에서 솟아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의하면 인간이 회개할 때, 하나님은 잃은 자를 찾은 기쁨을 누리십니다. 기쁨으로 빛나는 하나님의 얼굴은 성령의 빛의 원천(源泉)입니다. 그분의 빛은 우리를 홍수처럼 뒤덮으며, 우리의 얼굴은 이 빛을 반사하고 확산하는 거울이 됩니다.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나며, "우리 마음에 밝은 빛"(고후 4:6)을 던집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수건을 벗은 얼굴"로 주의 영광을 반사하게 됩니다(고후 3:18). 만약 우리의 "얼굴이 숨어 있으면," 우리는 우리 자신조차 깨닫지 못하며, 우리 자신으로부터 "숨어 있는" 존재가 됩니다. 자신을 만나고 자신을 체험하고 싶은 우리의 갈망은 이런 숨김 때문에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 갈망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하나님을 "보는"(고후 13:12) 신비한 만남(Apokalypse)에서 비로소 충족됩니다. 성령을 체험하면, "우리의 마음은 밝게 빛나며", 이와 더불어 우리 자신도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이전의 세대들은 성자(聖者)들의 발광력 혹은 광채를 종종 "성광"(聖光)이라고 불렀으며, 성상(聖像)에 금빛 바탕색을 그려 넣었습니다. 모든 인간의 생명과 모든 인간의 얼굴은 발광체를 지닙니다. 신뢰와 불신, 평안과 증오, 기쁨과 불안은 우리로부터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됩니다. 모든 후광(後光: Aura)은 우리가 모든 일에서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대상으로부터 나옵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자아(自我)일 수도 있지만, 하나님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발광력은 무의식 중에 우리에게 남아 있으며, 또 늘 남아 있게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바라보는 자는 빛나지 않는다"는 노자(老子)의 말이 옳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벗어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의 희생과 부활의 목표       

신약성서에서 성령은 그리스도의 역사(歷史)의 구원사적 사건들(성탄절 - 고난절 - 부활절 - 승천일 - 오순절)로부터 나오는데, 우리는 이를 교회력에 맞추어 기념하기도 합니다. 오순절은 이 순서에서 마지막 축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순절은 다른 축제들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역사(歷史)와 성령의 역사(歷史)가 서로를 제약하면서 뗄 수 없도록 연결되어 있음을 우리는 한 눈에 알 수 있습니다. 공관복음서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성령으로부터 나오며,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기적을 행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영원한 영을 통하여 십자가 위에서 구원의 죽음에 자신을 내어주며, 살리는 영을 통하여 하나님에 의해 일으켜지며, 영 안에서 지금 우리와 함께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의 역사는 그의 세례와 함께 시작하며, 그의 부활에서 끝납니다. 그 다음에는 관계가 뒤바뀝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공공체에 성령을 보내며, 성령 안에서 임재합니다. 이것은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역사(歷史)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그리스도의 영이 됩니다. 성령 안에서 파송된 그리스도는 성령을 파송하는 그리스도가 됩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의 삶의 신비에 직면하게 되고, 생명의 영이 그리스도의 이 신비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물론 누가는 이 비밀이 상징적인 시간대를 갖는 구원사적인 사건들의 순서인 것처럼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3일" 후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부활하였고, "40일" 후에 하늘로 올라갔으며, "50일" 후에 교회에 성령을 부어 줍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중요한 것은 하나의 유일한 신비, 즉 세계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오시는 사건입니다. 예수의 남녀 제자들의 부활 신앙을 더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이 점을 더 확실히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는 공개적으로 십자가에 못박혔고, 예루살렘의 여인들과 갈릴리의 제자들만이 그의 부활을 체험하였습니다. 바로 이들에게 그는 친히 부활한 그리스도로 나타났습니다. 이 경험은 그들을 완전히 변화시켰습니다. 그리스도처럼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능히 이기는 신앙을 발견하였으며, 이제는 그 어떤 일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부활한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직접 "나타남"으로써 그를 "보았던" 자들은, 요한복음 20장 22절이 강조하듯이, 부활의 영도 받았습니다. 부활한 그는 "성령을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부활한 자의 현현(顯現)과 성령 강림, 부활 신앙과 오순절 경험은 서로가 하나이며, 시간적으로 구분될 수 없습니다. 부활한 그리스도를 인식하는 것과 부활의 영 가운데서 자신의 중생(重生)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은 같은 사건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죽은 신앙일 것이고, 그리스도가 없는 영적인 중생만이 존재할 것입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확신할 수 있습니다. 즉 40일 동안 부활한 그리스도의 가시적인 임재 안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결코 거룩한 환상의 종교를 설립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부활한 그리스도가 더 이상 현현하지 않았을 때도, 그들은 여전히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복되도다"(요 20:29)는 신앙으로 살았습니다. 현현한 그리스도의 임재는 그리스도의 영적인 임재로 변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영은 그리스도의 현현 가운데 이미 임재하였기 때문입니다. 참된 부활 신앙은 성령의 역사(役事)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것은 하나의 역사적인 사실을 확인하고서 "아, 그렇구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영에 사로잡히는 것을 뜻하고, 자신의 삶과 죽음에서 "내세의 능력"(히 6:5)을 경험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부활절이 없다면, 오순절도 없습니다. 이것은 확실합니다. 그렇지만 오순절이 없다면, 부활절도 있을 수 없습니다. 성령 신학이 없는 부활 신학이 없듯이, 부활 신학이 없는 성령 신학도 없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와 아버지의 성령 파송

우리가 지금까지 설명했던 것은 말하자면 구원의 역사적인 외면(外面)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에게 속한 내면(內面)도 있습니다. 그것은 요한복음 14장에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 장은 예수의 "고별 설교"에 속합니다. 이 설교에서 그가 "떠난다는 것"은 세계의 구원을 위하여 그가 죽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세계의 구원은 "보혜사"의 오심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서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라"(요 16:7). 여기서 성령 안에서 일어나는 생명의 새로운 시작은 구원의 비밀과 직접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자신을 내어준 힘으로써 생명의 영을 보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분의 고통 안에서 드러났음을 말하는데, 하나님의 이러한 고통 때문에 죄인과 죽어가는 자들은 새로운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1986년에 공포된 교황의 교서(敎書) "Dominum et Vivificantem"은 성 금요일과 성령 강림의 이 긴밀한 상관성을 아주 잘 설명하였습니다. 참된 십자가의 신학은 성령 강림의 신학이고, 그리스도교의 성령 강림의 신학은 십자가의 신학입니다!

요한복음 14장을 살펴보면, 이 관계는 좀 더 복잡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삼위일체적인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에 의하면 예수는 "아버지에게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 달라고 기원하기 위해" 제자들을 떠납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이 보혜사를 아버지로부터 보냅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영"입니다. 이 생각의 의하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와 함께 있으며, 그리스도는 아버지에게 성령의 파송을 간청하고 성령을 아버지로부터 보내기 위해 "떠납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죽습니다. 실로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나오며, 아들에 의해 보냄을 받습니다. 영을 받는 자인 그리스도와 영을 보내는 자인 그리스도 사이에는 성령의 영원한 기원이신 아버지 하나님이 계십니다. 서방 교회의 니케아 신조가 말하듯이,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나오고, 아들 위에 머물며, 아들로부터 세상 안으로 빛을 발합니다.

"영들을 구분하는" 기준에 대한 질문이 종종 제기되곤 합니다.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의하면 이 기준은 예수의 이름과 십자가의 표지(標識)에서 드러납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십자가의 표지를 보이자, 악령들은 추방되었으며 하나님의 선한 영이 왔습니다. 그래서 무속 신앙(Exorcism)에서 부정적(否定的)으로 여겨지는 바로 그것이 성령의 인식을 위해서는 긍정적으로 여겨집니다. 십자가에 달린 자 앞에서 견고히 설 수 있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폭력과 소유와 교만의 영은 견고히 설 수 없습니다. 사랑과 나눔과 겸손의 영은 견고히 설 수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영들을 구분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언제나 십자가의 표지 때문입니다. 예수의 이름과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의 길도 함께 간구됩니다. 예수의 제자직(弟子職)에 기여하고 이 일에 쓸모가 있는 것은 성령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걷게 하며, 그의 뒤를 따르도록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똑같은 것의 두 측면(側面)이기 때문입니다. 공관복음이 예수의 제자직(弟子職)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을 사도 바울은 "성령 안의 생활"이라고 칭합니다. 실로 개인적-공적으로, 정치적-경제적으로 예수를 뒤따르는 생활은 "영들을 구분하는" 실천적인 기준이 됩니다.

 

2. 오늘날의 성령의 선교

지난 5년 동안 교회일치 운동에 새로운 희망을 던져주는 "생명 신학"이 세계 도처에 생겨났습니다. 결국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Evangelium vitae"(생명의 복음)이라는 교서(敎書)를 발표하기에 이르렀습니다(1995년 3월 30일). 여기서 그는 현대의 "죽음의 문화"에 대항하는 "생명의 문화"를 주창하였습니다. 세계교회협의회의 제3분과(일치 분과)는 1993년 라나카(Larnaca)에서 "생명 신학"을 위한 연구 프로그램을 채택하였습니다. 1991년 캔버라(Canberra)에서 개최된 세계교회협의회 총회에서 한국의 여성 신학자 정현경은 "생명의 문화" 위에 세워진 "연대성의 문화"를 연출하였습니다. 1989년에는 구스타보 구띠에레츠(Gustavo Guti rrez)의 책 『생명의 하나님』(El Dios de la Vida)이 출간되었으며, 1991년에는 나의 책 『생명의 영』(Der Geist des Lebens)도 출간되었습니다. 1992년에는 미하엘 벨커(Michael Welker)의 『하나님의 영』(Gottes Geist)이 출간되었고, 1993년에는 가이코 뮐러-파렌홀츠(Geiko M ller-Fahrenholz)의 『세상을 깨우라』(Erwecke die Welt)가 출간되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가 태어나지 않은 생명에 대해 관심을 기울인 반면, 구띠에레츠는 굶주리고 병든 생명에 눈을 돌렸습니다. 세계교회협의회가 창조신학적, 평화신학적, 해방신학적 관점을 결합하는 반면, 나의 관심은 제1세계 사람들의 무감정하고 무감각한 삶에 있습니다. 성령 강림의 체험에 착안하는 나의 신학은 통전적인 생명 신학을 가능케 할 것입니다.

생명의 선교

선교는 원래부터, 그리고 영원토록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선교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선교, 신앙의 확신을 갖는 선교가 될 수 있으려면, 하나님의 보내심에 순종하고 부응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과 그분의 형상인 다른 인간들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또 그들을 종교적으로 지배하려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인간인 우리가 다른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 명령에 순종하고 부응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선교란 다름이 아니라 이 세상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도록 아버지가 아들을 통해 성령을 이 세계 안으로 보내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 안으로 보내시는 것이 무엇인고 하면, 요한복음 식으로 간단히 말하자면, 그것은 바로 생명입니다.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요 14:19). 왜냐하면 성령은 "생명의 샘"이기 때문이고, 이 세상 안으로 생명, 온전한 생명, 충만한 생명, 상처받지 않고 파괴되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창조적이고 살리는 하나님의 영은 우리가 죽은 다음에야 비로소 영원한 이 생명을 가져오는 게 아니라, 이미 이 땅에서 죽기 전부터 이를 가져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이 이 세계 안으로 그리스도를 보내기 때문이고, 그리스도가 인격(人格)으로 온 "부활과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파괴될 수 없는 생명"이 밝히 드러났으며, 그리스도를 이 세계로 보낸 생명의 영은 부활의 능력이 되어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가져옵니다. 성령의 보내심은 꺾일 수 없는 하나님의 생명 사랑과 그분의 놀라운 생명 희열의 드러남입니다. 예수가 있는 곳에 생명이 있고, 병자들이 치유되며, 애통하는 자들이 위로받고, 버림받은 자들이 용납되며, 죽음의 마귀들이 추방된다고 공관복음서은 말합니다. 성령이 임재하는 곳에 생명이 있다고 사도행전과 사도들의 편지들은 말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기쁨과 영원한 생명의 능력이 체험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이렇게 헤아려 볼 때, 선교란 바로 위로와 생명의 용기를 퍼뜨리고 죽어가는 자를 일으키는 생명 운동과 구원 운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가 이 세계로 가져온 것은 새로운 종교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선교 이해에 어떤 의미를 줍니까?

지금까지 우리는 선교를 그리스도교적 제국(帝國), 그리스도교적 문명 혹은 서구의 종교적 가치를 확산하는 것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선교를 영원한 구원을 보장하는 교회의 확장과 증식(plantatio ecclesiae)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선교를 우리 자신의 신앙 결단과 회심 경험의 전달로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적 제국, 그리스도교적 문명 혹은 서구적 가치 공동체의 시민이 되었다고 해서, 그가 곧 하나님의 영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교회의 회원이 되었다고 해서, 그가 곧 성령 안에서 구원을 얻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회심을 경험하고 신앙을 결단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하나님의 영원한 영으로부터 다시 태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교 선교의 이런 전통적 형태 안에서 우리는 영의 보내심과 새로운 생명을 분명히 너무 좁게 생각해 왔습니다. 물론 그리스도교적 생활양식, 교회의 교제와 개인적 신앙 결단과 경험도 선교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선교는 새로운 생명의 선교입니다. 아니 그보다 더 큰 것입니다. 100년 전에 뷔르템베르크(B temberg)의 각성 운동의 설교자였던 크리스토퍼 불름하르트(Christoph Blumhardt)는 우리가 "종교로부터 하나님의 나라로, 교회로부터 세계로, 자기 자신에 대한 염려로부터 전체를 위한 희망으로" 나아가는 길을 발견해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그리스도교적 문명이나 서구적 가치의 확산 대신에 "생명의 문화"를 세우고 "죽음의 야만성"에 대항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가 그의 마지막 교서(敎書)에서 천명한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서구 국가들, 유럽 국가들과 아메리카 국가들에서 생명 존중은 중요한 안건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오래 전에 지난 시절의 세계 정복자들의 오만(傲慢)을 상실하였습니다. 우울감(tristesse)은 우리의 생활 정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흡사 차가운 무감정(Apathie)에 마비된 것과 같습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이방인들에 대한 우리의 사회적 냉대는 우리가 그들의 생명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텔레비전을 통해 보스니아와 르완다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그 일로 동요하지 않습니다. 아는 것은 이제 힘이 아니라 무능(無能)입니다. "우리는 정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입을 다문 채 조용히 지내고 있습니다. 인류는 사회 재앙이나 군사 재앙 때문에 망하기 전에 이러한 영적인 무관심 때문에 망하고 말 것입니다. 생명을 다시 끔찍히 존중하고 사랑함으로써, 우리는 죽음과 또 죽음을 퍼뜨리는 모든 세력들에게 대항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생명의 선교보다 더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종교가 아니라 생명, 즉 온전하고 충만하며 쪼갤 수 없는 생명입니다. 하나님, 영원하며 무한하신 하나님이 당신에게 너무나 가까이 계셔서 당신을 사랑하시며, 그분의 사랑 안에서 당신을 지금의 모습 그대로 용납하신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복음의 본질이 아닙니까? 이 사랑의 불꽃을 조금이라도 느끼는 사람은 자신의 존엄성을 깨닫게 될 것이며, 일어나서 "머리를 높이 들고", 그리고 "똑바른 길을 걸으며"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바로 그 때부터 우리의 생명의 영은 깨어나며, 이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능력을 받게 됩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사랑의 "빛나는 눈"으로, 우리의 생명에 대한 사랑으로 우리를 바라보신다면, 이러한 경험은 얼마나 더 크겠습니까! 그러므로 애통하는 자를 위로하는 일, 병든 자를 고치는 일, 나그네들을 영접하는 일과 죄인들을 용서하는 일, 즉 위협받고 상처받는 생명을 파괴의 세력으로부터 건져내는 일은 이러한 생명의 복음에 속합니다.

또 이것은 우리가 정교회, 로마 카톨릭 교회 혹은 개신교회를 확산시키기보다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열정을 쏟아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선교란 "사람들을 강제적으로 데려 오는 것"(cogite intrare)이 아니라, 하나님의 미래와 만물의 새 창조에 대한 희망으로 초대하는 것을 뜻합니다: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당신은 하나님의 이 미래의 세계로 초대받았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영 안에서 오늘 바로 즉시 하나님이 그분의 날에 완성하실 이러한 갱신을 미리 취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교회를 확장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미래를 위해 열정을 쏟는다면, 유럽 교회의 흉칙한 분열을 더 이상 수출하지는 않을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 대신에 종교적 교파주의를 확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중국에서 종교를 반대하는 문화 혁명이 사그라진 후, 그리스도인들이 수용소와 지하로부터 나와 대중들에게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 감리교 신자들, 감독교회 신자들, 장로교회 신자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으며, 오직 하나의 그리스도 교회의 지체들만이 존재했을 따름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빨리 퍼져 나갔던지, 매일 새로운 교회가 문을 열었으며, 오늘 날엔 4천만에서 6천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교회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분열된 교회들이 교회일치적인 사귐을 나눌 수 있으려면, 그리고 그들 자신의 관심보다 모든 이들이 함께 누릴 하나님의 나라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려면, 언제나 함께 박해를 받고 순교자가 되는 경험이 필요할 것입니다. 교회를 향한 선교는 세상을 향한 교회의 선교보다 앞섭니다. 지금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듣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의 영의 살아있는 공동체는 저절로 당신에게 주어질 것이다.

이러한 생명의 선교는 아무런 조건도 없이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생명이 있는 곳, 폭력과 죽음이 생명을 위협하는 곳, 삶의 용기가 상실되어 삶이 위축된 곳이라면, 그 어디서나 생명의 선교는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영의 영원한 생명은 이생의 삶과 다른 삶이 아니라 이생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것이다"라고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53절에서 강조합니다. 성령의 구원경륜(救援經綸)은 모든 생명과 모든 생명체를 포괄하며, 종교와 영성(靈性)에만 국한될 수 없습니다.

만물의 새 창조의 지평 안에 있는 성령 체험

이제 우리는 세 가지의 파도(波濤)를 타면서 성령의 선교를 추적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무엇이 일어나며, 어떻게 우리가 이 일에 참여할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갱신: 성령 강림을 체험한 초대 교회(행 2:17 이하)는 자신에게 일어났던 사건을 예언자 요엘의 예언(3:1-5)의 성취로 이해하였습니다. 엄청난 재앙이 임하는 종말에 하나님의 영이 "모든 육체에 부어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다음의 문장이 말하듯이, 물론 모든 육체란 일차적으로 모든 인간의 생명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이스라엘의 경건한 육체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모든" 육체, 모든 인류를 가리킵니다. 요엘이 "육체"라고 표현하면서 염두에 두고 있는 자들은 특히 "약자들, 힘이 없는 자들과 희망이 없는 자들"입니다(H. W. Wolff). "너희 자녀들이 장래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꿀 것이다". 아직은 생명을 충만히 누리지 못하는 젊은이들과 이제는 충만한 생명에 참여하지 못하는 늙은이들은 누구보다 먼저 이 생명의 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아직은 너무 젊거나 이미 늙어 버린 자들도 성령을 받습니다. 이리하여 세대들 간에 새로운 평등이 이루어집니다. 그 누구도 너무 젊지 않으며, 그 누구도 너무 늙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모두 평등하게 새 생명의 영을 받습니다. 젊었다고 유리(有利)한 것이 아니며, 늙었다고 불리(不利)한 것도 아닙니다. "아들들과 딸들"은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남종들과 여종들"은 성령을 받을 것입니다. 남자들과 여자들은 평등해집니다. 여자들도 남자들만큼 하나님의 영에 가까이 있습니다. 이제는 남성적인 우월감(優越感)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성령 안에서 여자들과 남자들의 새로운 메시야적 공동체가 동등한 은사와 평등한 권리를 갖고 "장래 일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는 처음부터 논쟁의 여지가 없이 남자들과 여자들에게 똑같이 세례를 베풀었으며, 그래서 그들을 영의 은사를 소유한 자들로 인정하였습니다. 오직 남자만을 성직에 임명하고 여자를 설교와 예언에서 배제하는 교회는 성령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성령을 "소멸시키고" 성령의 자유로운 활동을 억압하고 있습니까? 성령 체험 안에서 남자 주인들과 남자 노예들, 여자 주인들과 여자 노예들은 새로운 사귐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은 사회적 차별을 존중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철폐합니다. 그리스도교 안에서 일어난 영적 각성운동들은 모두 이러한 성령 체험의 사회혁명적 요소들을 깨닫고 확산시켰습니다. 이들은 가부장제도, 남성 중심의 교회와 노예 주인들에게 위험스러운 인물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어린이들과 노인들의 이런 성령 체험은 그들의 생명을 억압하는 자들에게 위협적인 것이 됩니다. 연약하고 사멸할 생명에게 생명의 영이 임한다면, 이것은 곧 거대한 우주적 재앙 -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할 것이다" - 에 의해 위협받는 모든 생명체에게 그가 임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생명을 탈취하는 지배자들, 지금의 부자들과 아름다운 자들도 궁극적으로는 여기에 동참할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늙은이들과 젊은이들, 남자들과 여자들, 주인들과 종들의 공동체는 "위험 속에서 구원"을, 허무한 세상에서 영원한 것을, 그리고 사라지는 시간 안에서 영원한 미래를 몸소 선포하고 증언합니다.

모든 생명체의 갱신: 구약성서에 의하면 영(ruah)은 하나님의 생명의 숨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을 통하여 만물을 창조하십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생명의 숨을 도로 취하시면, 모든 것은 먼지로 흩어집니다(시 104:29 이하). "모든 만물"은 이러한 우주적인 연관성 안에서 "모든 육체들"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그 신과 기운을 거두실진대 모든 흙이 있는 자가 육체로 망하고 사람도 진토로 돌아가리라"(욥 34:14). "땅을 가득 채우고 모든 것을 모으는"(지혜서 1:7, 사 34:16) 것은 하나님의 이 생명의 숨입니다. 만물은 하나님의 생명의 숨에 의해 생겨났고, 이를 통해 생명을 조성하는 창조의 공동체 안에서 "결합됩니다". 사람도 모든 피조물의 이러한 생명 공동체에 속해 있습니다. 만약 인간이 이 공동체로부터 벗어나면, 생령(生靈)을 잃게 됩니다. 만약 인간이 이 공동체를 파괴하면, 자기 자신을 파괴합니다. 생명의 영, 이것은 무엇보다 피조물들의 생명 연관성입니다. 만물은 서로 의존해 있고, 서로 함께 지내고, 서로를 위하며, 종종 서로 안에서 공생(共生)하기를 좋아합니다. 생명은 사귐이고, 사귐은 생명을 전달합니다. 창조의 영과 마찬가지로 새 창조의 영도, 인간들 사이에서도 그러하듯이, 인간과 모든 다른 생명체 사이에서 생명의 사귐을 회복합니다. 새 창조는 육체를 폐기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육체를 새롭게 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생명의 영을 사람의 마음 속에 주신다면(겔 11:19, 36:27), 사람들은 "돌처럼 굳어진 마음"을 버리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 11장이 예언 한대로, 샬롬(평화)이 사람들과 동물들을 하나의 새로운 생명 공동체 안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필경은 위에서부터 성신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삼림으로 여기게 되리라. 그 때에 공평이 광야에 거하며 의가 아름다운 밭에 있으리라"(사 32:15-16). 구원 경륜(救援 經綸)만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영의 구원 생태학(救援 生態學)도 역시 존재합니다.

주님은 땅의 얼굴을 새롭게 하십니다: 사람은 함께 사는 모든 생명체들과 마찬가지로 땅으로부터 지음받은 피조물입니다(창 2장). 이 땅은 우리의 공동 환경이며, 실제적으로는 "우리의 어머니"입니다(시락 40:1). 우리가 땅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그 위에 서 있는 대지만이 아니라 우리가 그 안에서 살아가는, 대기권과 생명권을 포함하는 지구 시스템(system)을 말합니다. 성서적 전승에 의하면 땅은 풀, 나무와 동물을 "산출한 존재"이며, 인간도 역시 땅으로부터 취해졌습니다. 이 땅의 생명 공간은 모든 생명체의 창조 공동체의 한 부분입니다. 땅을 단지 원료로만 생각하고 땅을 더 이상 거룩하게 여기지 않게 된 것은 현대의 산업 사회가 도래하면서부터입니다. 하나님의 땅의 거룩함을 재발견해야 할 때가 무르익었습니다. 재앙이 우리를 덮치기 전에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지혜서(智慧書)가 말하듯이, 하나님의 영은 "온 땅"에 충만합니다. 여기서 오늘 성령에 의해 개시(開始)되고 확증(確證)된 하나님의 나라는 "새 하늘과 새 땅"(계 21장)을 가져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없다면, 영생도 없습니다. 그리고 새 땅이 없다면, 하나님의 나라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