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

 

 이신건

 

 

 

문제 제기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중심으로 현대 신학 사상과 신학자들을 탁월하게 분석하고 비평한 책, "20세기 신학"의 공동 저자인 스탠리 그렌츠(Stanley J. Grenz)와 로저 올슨(Roger E. Olson)은 몰트만의 신학 사상을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요약하면서 비판한다.

  

 

 

같은 책에서 스탠리 그렌츠와 로저 올슨은 다음과 같이 몰트만의 신학을 평가한다:       

 

 

 

몰트만에 대한 스탠리 그렌츠와 로저 올슨의 비판은, 한편으로 몰트만의 신학이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미래의 초자연성)로부터 하나님의 내재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범내재신론)로 옮아갔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몰트만의 신학이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긴장을 여전히 적절히 해결하지 못하였다. 즉 그 둘을 긴장 관계로 내던져 버리고 있다는 것으로 압축될 수 있다.

스탠리 그렌츠와 로저 올슨의 몰트만 이해와 비판은 정당한가? 비록 그들이 몰트만의 모든 저서를 다 훑어보지도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책의 분량적인 한계 때문에 몰트만의 글을 직접 충분히 인용하고 있지 않고 있지만, 그들의 몰트만 비판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특히 분량적으로도 적지 않고 내용적으로도 이해하기 쉽지 않은 몰트만의 저서들과 논문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 평범한 사람들로서는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몰트만의 주요 저서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이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 그리고 이 둘의 관계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1. 몰트만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시간적 범주로만 표현하였는가?

  

스탠리 그렌츠와 로저 올슨은 몰트만을 분명히 염두에 두면서 "초월자로서의 하나님 탐구의 출발점으로서 공간성보다는 시간성이 주효할 수 있다"3)고 지적한 적이 있다. 두 사람의 이런 지적은 마치 몰트만이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초월성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어온 공간성의 범주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는 오해를 낳을 수 있다. 그러므로 몰트만이 하나님의 초월성을 지시하는 범주로서 과연 '공간성'을 완전히 포기하였는지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몰트만의 저서, 특히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4)을 보면, 그가 하나님의 초월성을 상징하는 범주로서 공간적인 용어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음을 우리는 볼 수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하늘 이해'에서 잘 드러난다.

몰트만은 '하늘'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보통 '하늘'을 공간적인 범주로서 사용하면서 이를 하나님의 초월적인 영역으로 이해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동시에 '하늘'을 우리가 사후에 되돌아 가야할 고향, 혹은 본향으로 생각하면서 이를 구원의 궁극적인 처소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하늘'은 예수가 말한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한 것인가? 우리는 미래에 '하나님 나라'가 오기를 기다리는가, 아니면 사후에 '하늘 나라'로 들려 올라가기를 기다리는가? 이 문제의 해결은 몰트만이 '하늘'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달려 있다. 몰트만의 '하늘 이해'는 그의 책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에 잘 나타나 있다.

몰트만에 의하면, 하늘이라는 개념은 직접적인 의미와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성서의 전통에서 하늘은 구름과 나는 짐승들, 하늘의 새들을 위한 '공기의 영역'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서 하늘은 하늘의 별들의 영역을 의미한다. 끝으로 하늘은 상징적인 의미도 갖고 있는데, 그것은 위에 있으며 인간이 지배할 수 없고 눈으로 볼 수 없는 '천사들의 세계와 하나님의 보좌와 '하나님 영광'을 위한 영역을 의미한다. 그리고 천사들의 영역과 하나님의 보좌의 영역을 뜻하는 하늘에 대해서 성서는 단수형으로 말하기도 하고, 복수형으로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바울은 '제3의 하늘'(고후 12:2)을 말하였으며, 유대교적 표상의 영향을 받는 교부들은 '일곱 하늘'을 말하였다.

하지만 몰트만에 의하면, 하늘에 대한 표현들이 이같이 다양한 것은 창조의 영역이 인간을 통하여 규정되기 어려운 근본적인 불규정성 때문이다. 하늘과 하늘들은 인간이 도달할 수 없고 인식할 수 없는 현실의 영역이다. 나아가 하늘들은 모든 한계를 넘어서는 '눈으로 볼 수 없는 개방성'을 의미한다. 창조 신앙에서 하늘은 하나님도 아니고 신적인 본성에 속하는 것도 아닌, '피조된 세계의 한 부분'이다.5)

여기서 우리는 몰트만이 '하늘'을 세 가지 의미로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 하늘은 성서의 창조 신앙에서 새가 나르고 별들이 존재하는 실제적인 피조 공간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가 볼 수 있고 인식할 수 있는 영역이다. 그리고 하늘은 피조된 세계의 불가시성, 불규정성 혹은 개방성을 상징하는 용어가 된다. 그 밖에도 몰트만은 성서의 전승을 따라서 천사들과 하나님이 거하시는 초월적인 영역인 하늘을 말한다. 하나님 아버지가 창조한 '자연의 하늘'(coelum naturae)이 있는가 하면, 아들이 성육신하고 승천한 '은혜의 하늘'(coelum gratiae)이 있으며, 성령을 통해 만물이 변화(변용)될 '영광의 하늘'(coelum gloriae)도 있다.6)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몰트만이 하나님의 초월성을 일방적으로 시간적 초월성으로만 이해하였다"거나, "그가 하나님의 초월성을 시간적인 초월성 안으로 완전히 해소시켜 버렸다"고 비판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비록 몰트만이 하나님을 향해 열려진 창조의 면도 '하늘'이라고 부르지만, 이러한 피조 세계의 '상대적인 초월'까지 초월해 있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초월'도 분명히 인정한다. 그러므로 몰트만은 이 두 가지 하늘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하늘과 땅의 창조자인 하나님은 세계를 초월하면서 세계를 주관한다. 하나님은 세계에 대해 절대적으로 초월해 있는 존재이면서도, 창조와 그 완성을 위해 세계 안에 내재하는 존재이다.7)  

하지만 몰트만에 의하면, 하늘은 영혼의 구원 장소가 아니다. 하늘이 영혼의 구원의 장소로 이해된 것은 하나님 나라의 현실주의적인 종말론이 약화된 탓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 위에서도" 임하길 바라는 기도는 "하늘에 가기를" 바라는 동경으로 대체되었다. 하나님의 나라를 하늘과 혼동하는 사람은 희망을 체념으로 변질시킨다. 이리하여 하늘은 하나님으로 위축되고, 하나님 자신과 같이 피조되지 않는 영원한 실재로 변한다. 즉 하늘은 신성화된다. 그 결과로 우주는 동질적이고 폐쇄된 것으로 이해되고, 개방된 창조 이해는 불가능해진다. 이로 인하여 하늘 비판을 통한 하나님의 개념 비판은 불가피한 것이 되고 만다.8)  

 

 

2. 몰트만의 신학은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로부터 하나님의 내재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로 옮아갔는가?

 

 몰트만은 후기로 갈수록 하나님의 초월성을 무시해가면서까지 하나님의 내재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였는가? 후기의 몰트만에게서 세계 역사는 하나님의 내적 역사 안으로 흡수되어 버리고, 하나님의 신성은 세계 역사에 존재론적으로 의존하게 되어버렸는가?

하나님에 대한 초기 몰트만의 이해는 그의 가장 대표적인 저서 '희망의 신학'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종말론적 초월성에 대한 그의 이해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설명은 다음과 같다.

 

 

몰트만이 하나님의 초월성을 압도적으로 시간적인 초월성, 즉 미래적-종말론적인 초월성으로 이해하게 된 주요 동기는, 앞의 인용문에도 언급되다시피, 에른스트 블로흐(E. Bloch)의 자극 때문이다. 몰트만은 자신이 블로흐의 자극을 받아들인 동기를 다음과 같이 진솔하게 술회하고 있다.

 

 

'희망의 신학'에서 몰트만은 그리스도인의 신학과 생활에서 종말론이 갖는 비중을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요약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적, 미래적 혹은 종말론적 초월성이 몰트만 신학을 관통하면서 이를 이끌어 가는 주요 동기와 핵심적인 관점이 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리하여 몰트만은 '우리 위에 있는 하나님'(칼 바르트),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루돌프 불트만), '존재의 깊이로서의 하나님'(파울 틸리히), '중심에 있는 하나님'(디트리히 본회퍼)과는 달리 '우리 앞에 있는 하나님', '오고 있는 하나님'12)을 크게 부각한 신학자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몰트만은 자신의 신학이 항상 '종말론적인 방향을 갖는 신학'이기를 원한다고 고백한 적이 있으며,13) 최근에 발간된 그의 저서 '생명의 샘, 성령과 생명 신학'14)에서도 그는 이 세계를 위해 오고 있는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을 여전히 강하게 표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몰트만의 신학이 하나님의 초월성을 무시하면서 하나님의 내재성을 강조하려는 현대 신학의 항존적 유혹에 대하여 무방비 상태로 남아 있고, 세계 역사가 하나님의 내적 역사 안으로 그렇게 흡수되어 하나님의 신성이 세계 역사에 존재론적으로 의존하게 되어 버렸다."고 비판을 받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아마도 무엇보다도 몰트만의 저서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에서 비롯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여기서 몰트만은 우리에게 또 한번 "하나님에 대해 새롭게 사고하기"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몰트만은 여기서 하나님의 내재성을 깊이 숙고하기에 이른다.

몰트만이 하나님의 내재성을 새로이 숙고하는 이유는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생태적 위기 때문이다. 창조 신앙에 근거하여 하나님과 세계의 차이를 지나치게 강조한 전통 신학은 자연을 탈신성화하였고, 정치를 세속화하였으며, 세계를 수동적인 물질로 만들었다. 하나님과 세계의 이러한 엄격한 구분은 자연의 무자비한 정복과 착취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하였다. 그러므로 몰트만은 오늘날 생태학적 창조론은 이 구분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세계 내재'를 인지하고 가르쳐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성서의 전통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근원적 진리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다.15) 몰트만이 말하는 생태학적 창조론의 핵심은 다음과 같은 글 안에 분명하게 요약되어 있다:   

 

           

비록 몰트만이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저서를 분기점으로 삼아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내재성에 큰 역점을 두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종말론적 초월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내재성만을 과도하게 강조하지도 않는다. 몰트만에 의하면, 자신의 영을 통하여 창조 안에 있는 하나님은 아직도 창조 안에서 온전한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여전히 종말론적인 희망으로 남아 있다:  

 

 

몰트만에 의하면, 만물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 아직도 애타게 기다리며 탄식한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몰트만 신학의 강조점이 하나님의 초월성에서 내재성으로 서서히 옮아갔다고 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세계 역사가 하나님의 내적 역사 안으로 흡수되어 하나님의 신성이 세계 역사에 존재론적으로 의존하게 될 만큼 하나님의 초월성을 무시하였다."고 몰트만의 신학을 비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것은 몰트만의 사상 전체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내린 성급한 비판이라는 비판을 모면하기 어렵다고 생각된다.  

 

 

[주]

 

1) Stanley J. Grenz, Roger E. Olson, 신재구 옮김, 20세기 신학,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IVF), 1997, 295쪽 이하.

2) 앞의 책, 298쪽 이하.

3) Stanley J. Grenz, Roger E. Olson, 앞의 책 274.

4) 몰트만, 김균진 역,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 한국신학연구소, 1987. 여기서 역자 김균진은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친숙한 '하나님'이라는 용어 대신에 '하느님'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무엇이 더 올바른 용법인가라는 문제와는 상관이 없이, 여기서 본인은 편의상 '하나님'이라는 용어로 통일하여 쓰기로 한다.

5) 앞의 책 195쪽 이하.

6) 앞의 책, 202.

7) 앞의 책, 222.

8) 같은 쪽.  

9) 몰트만, 전경연, 박봉랑 역, 희망의 신학, 현대사상사, 1973, 15.

10) 몰트만, 이신건 옮김,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역사, 대한기독교서회, 1998, 334쪽 이하.

11) 희망의 신학, 14.

12) '희망의 신학'에 나타난 초기 몰트만의 하나님 이해는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최근에 발간된 그의 새로운 저서, "오시는 하나님"(김균진 역, 대한기독교서회, 1997)이 바로 그 구체적인 예다. 여기서도 하나님은 '현재 안에 내재한 하나님'으로 파악되지 않고, 여전히 '미래로부터 현재 안으로 오시는 하나님'으로 파악되고 있다.

13)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역사, 356.

14) 몰트만, 이신건 옮김, 생명의 샘, 성령과 생명신학, 대한기독교서회, 2000.

15)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 28.

16) 앞의 책 28쪽 이하.

17) 몰트만, 이신건 역, 과학과 지혜(2000년 5월 19일 서울신학대원 방문 기념 강좌). 

18) 생명의 샘, 144쪽 이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