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론의 본질

 

 윤경묵(Th.M. 3차)

                         

 

Ⅰ. 서론

 

  최근 몰트만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이야기 했다. "교회 안에서의 연합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형임을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를 말함에 있어서 서구 신학에서는 주로 주체에 대한 강조를 많이 했는데 반해, 상대적으로 상호 관계는 등한시해왔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 생각됩니다. 주체와 관계는 어느 한쪽으로만 강조되어서는 안됩니다. 특히 현대 교회 안에서 만연되고 있는 개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연합이 강조되어야만 합니다."1)    또한 몰트만은 삼위일체의 필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삼위일체론은 지난 십 여년 동안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왜냐하면 삼위일체론을 통하여 그리스도교를 다른 종교와 구별하는 점이 표명되기 때문이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교의 특수성을 상대화하고, 보편적 다원주의를 옹호한다는 명분으로 이를 포기한다면, 이런 행위는 다른 종교들과 대화하는 데 도움을 주지 않는다. 누가 그리스도교다운 점을 더 이상 분명히 대변하려고 하지 않는 그리스도교 신학자들과 대화하는 일에 관심을 갖겠는가? 유대인들, 이슬람교인들과 신학적인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리스도인들은 삼위일체론을 새롭게 이해하고 새롭게 해석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새로운 관계를 맺는 중에 우리 자신 조차도 새롭게 이해하는 것을 배우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삼위일체론을 상대화하거나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진지하게 대화하다 보면, 각자가 갖는 특성이 부각되기 마련이다. 더 높다고 생각되는 진리를 옹호한다는 명분으로 자신의 독자적인 입장을 포기하는 자는 대화할 능력도 없거니와, 대화할 자격도 없다.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됨과 삼위일체론을 포기함으로써 "신은 항상 더 큰 분이다"(deus semper major)라고 하는, 보편적인 동의를 얻어낼 수 있는 일신론에 도달하려는 시도들은 유대교, 그리스도교 그리고 이슬람교의 독특성과 차별성에 부딪혀 좌초한다."2) 이러한 몰트만의 주장은 다원주의적 세계를 살아가는 현대의 신학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따라서 우리는 본고를 통하여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을 전통적 삼위일체론과 비교고찰하고,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의 출발점과 양식은 무엇인지 살펴볼 것이다. 결론적으로 삼위일체론이 다원주의적인 현상황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과연 삼위일체가 기독교의 정체성을 확보해줄 수 있는지 질문할 것이다.

  

 

Ⅱ. 전통적 삼위일체에 대한 몰트만의 이해

 

 1. 아리우스의 종속론과 사벨리우스의 양태론

  아리우스는 완성된 형태의 종속론을 주창한다. 아리우스의 출발점은 한 하나님이다. 그의 체계의 기본 전제는, 모든 실재의 기원 없는 근원이신 하나님의 절대적 유일성과 초월성을 긍정하는 것이다. 그는 그 지역의 감독이었던 알렉산더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한 분 하나님과 다양한 세계를 중재하는 중간 존재를 통하여 사귐이 이루어짐을 아리우스는 주장하며, 그 중간자를 기독교 전승에 따라 '아들'이라 부르고, 철학적 개념에 따라 '로고스'라 부른다. 그러면 이 아들 또는 말씀은 어떤 존재인가? 아리우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첫째, 말씀은 피조자라야 한다. 둘째, 말씀이 피조자이기 때문에 반드시 시작을 가져야 한다. 셋째, 아들은 아버지와 직접적 교제나 지식을 가질 수 없다. 넷째, 아들은 변하고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를 한 하나님 안에서 만족하기 위하여 '모든 창조의 처음 태어난 자', '하나님의 지혜와 이성'이라 불렀다4).

  몰트만은 이러한 아리안주의를 순수한 형태의 일신론적 기독교라고 말하고, 그리스도를 신비적 중간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고 평했다5). 몰트만에 의하면 기독교 신앙은 더 이상 '일신론적'이라고 말할 수 없고, 하나님의 주권은 모든 것을 그에게 굴복시키는 '세계 단일 군주 체제'로 이해되거나 기술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구원하는 자유의 역사로 이해되고 기술되어야 한다6).

  몰트만에 의하면 교회에 위협이 되었던 두 번째의 일신론적 이단은 사벨리우스의 양태론이다. 흔히 양태론은 종속론과 완전히 다른 반대의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양태론은 종속론의 반대 국면에 불과하다. 여기에서도 한 하나님과 하나의 주체에 의해서 통치되는 단일 군주 체제의 기본 사상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는 그리스도가 한 분 하나님에게 종속하는 것이 아니라 한 하나님안으로 지양(止揚)되어 버린다.7)

  사벨리우스에 의하면 하나님은 한 분이지만, 자기의 계시와 구원의 역사에서 세 가지 형태를 취한다. 하나님은 아버지의 형태 속에서 창조자로, 아들의 형태 속에서 구원자로, 성령의 형태 속에서 생명을 주시는 자로 나타난다. 성부, 성자, 성령은 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세 가지 방식이자 양식이다. 그러나 몰트만에 의하면 이와 같은 내용을 가진 양태론은, 엄격한 의미에서 볼 때, 삼위일체론이기보다는 일신론을 의미한다. 본질적인 것은 한 분 하나님이요, 세 위격은 한 분 하나님의 활동양식으로 격하되어 버리기 때문이다.8)

 

 2. 터툴리안의 삼위일체론

  몰트만은 터툴리안을 종속론과 양태론에 의해서 제기된 신론의 문제점을 삼위일체론적으로 해결한 창시자로 본다. 터툴리안은 삼위의 하나님의 진정한 믿음을 표현했다. 그것은 이른바 '하나의 실체, 세 위격'이었다. 즉 그의 중심된 주제, 곧 삼위성은 본질적으로 단일성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9)

  터툴리안은 삼위일체가 통일성을 파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대단한 노력을 했다. 왜냐하면 삼위일체는 동일성으로부터 유래하기 때문이다. 터툴리안에 의하면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한 분이지만 혼자는 아니다. 그의 이성(logos, ratio), 혹은 지혜(sophia, sermo)도 영원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한 분 하나님은 수적인 혹은 일원론적 단일성이 아니라, 그 자체 안에서 이미 구분되어 있는 단일성이다. 로고스는 영원한 출생(generatio)의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며 이를 통하여 "아들"로 된다. 성령은 신적인 실체의 단일성을 통하여 아버지와 아들고 결합되어 있다.10)

  몰트만은 터툴리안의 논증이 삼위일체론의 신학적인 기초를 형성했다고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몰트만은 이런 삼위일체적인 세분화를 통해서는 일신론적인 단일 군주체제가 지양되지 않는다고 본다. 왜냐하면 아들과 성령이 아버지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즉 몰트만에 의하면 만일 아들과 성령이 구원의 사역을 완성한 후에, 주권을 아버지에게 넘겨줌으로써 자신들의 일을 끝낸다면, 한 분이신 아버지에게로 되돌아가는 일만 남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다면, 이것은 단지 창조와 구원의 사역에서만 삼위일체가 될 뿐이지, 실제로는 삼위일체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몰트만은 터툴리안의 사고방식에는 삼위일체의 개념보다는 단일성의 개념이 강하다고 비판한다.11)

 

3. 칼 바르트와 칼 라너의 삼위일체론

  바르트에게서는 계시의 문제가 삼위일체론의 문제를 일으킨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통해서 자기를 계시하기 때문이다. 즉 계시의 이 주체, 하나님, 곧 계시자는 계시 안에서 그의 행동과 동일하며 또한 이 행위의 작용과도 동일하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계시하시는 하나님, 계시의 사건, 계시된 자'는 하나이다. '파괴할 수 없는 단일성 가운데서 계시자, 계시, 계시의 능력'이신 하나님은 또 '그 자신 속에서 파괴될 수 없는 상이성을 가진 세 가지 존재방식'을 가지고 있다.12)  

  바르트에 대한 몰트만의 비판은 다음과 같다. 몰트만은 그의 삼위일체론을 군주신론이라 부른다. 곧 바르트가 말하는 주권 개념은 하나님의 본질 개념과 동일하며, 이 개념은 다시 하나님의 신성의 개념과 동일하다. 하나님은 아버지의 양식, 아들의 양식, 성령의 양식 안에 계시는 단 하나의 인격적인 하나님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세 존재 양식 안에 계시는 한 분이 되는 셈이다.13)

  칼 라너는 깜짝 놀랄 만큼 칼 바르트와 비슷하고 거의 동일한 전제를 가지고 그의 삼위일체론을 전개한다. 라너의 주장에 따르면 단 하나의 유일한 하나님, 주체가 아버지이다. 아들은 하나님의 자기 전달의 수단이요,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은 그 장소이다. 몰트만은 이러한 라너의 진술에서 그가 고전적 삼위일체론을 절대주체의 반영의 삼위일체론으로 발전시키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몰트만은 이러한 라너의 절대자의 자기전달은 세분화된 구조를 가지기 때문에 삼위일체의 의미가 없어진다고 비판한다. 또한 구원의 역사가 아버지의 자기 전달로 환원될 경우, 아들의 역사는 더 이상 인식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14)

 

 

Ⅲ. 삼위일체론의 인식의 출발점

 

 1. 삼위일체되신 하나님에로의 접근

 

  1) 최고 실체로서의 하나님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우주론적 증명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최고 실체로 이해한다. 세계의 유한성으로부터 출발하여 최고의 무한한 존재에 도달하는 방법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제기된 다섯 가지의 우주론적 증명이다. 즉 최초의 운동자, 최초의 원인, 필연적 존재, 가장 큰 존재의 개념, 최고의 이성의 개념에 도달하는 방법이다. 이 결과 하나님을 최고의 존재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점에 대해 몰트만은 본래 토마스가 증명한 것은 하나님의 존재가 아니라 신적인 것의 본질이었다. 따라서 그의 답변도 신적인 것은 무엇인가의 문제였지 하나님은 누구인가의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가 이 최고의 실체를 하나님이라고 반드시 불러야 할 필요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증명의 힘을 통하여 최고의 존재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몰트만은 "모든 사람들이 이 실체를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의견일치로부터 유래하며, 이것은 토마스 자신에 의하면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상대적으로 보편성을 가진 언어 사용이 제공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15)

    

2) 절대 주체로서의 하나님

  위에서 언급한 우주론적 하나님 증명의 방법은 근대에 와서 진부한 것이 되었다. 우주론적 하나님 증명의 방법은 질서 잡혀 있는 코스모스를 전제하는데, 인간 중심의 현실은 더 이상 세계를 하나님의 코스모스로 생각하지 않고 인간 인식의 한 소재로 이해한다.16) 이성과 침략과 노동을 통하여 인간은 자신을 세계의 주체로 만들었다. 근대에 와서 인간의 관심은 최고 실체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주체에 있게 되었다.

  세계를 궁극적으로 비신격화시키고 수학화시킨 데카르트의 견해에 의하면 "인간은 감각적으로 중재된 모든 경험을 의심할 수 있다. 그러나 의심하는 것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의심할 수는 없다. 사고하면서 그는 자기 자신을 직접 의식하게 된다. 이러한 자기 확실성이 흔들릴 수 없는 확실한 기초이다. 그러나 그는 유한한 존재로서의 자기를 의식한다. 따라서 그의 자기 의식과 함께 무한한 존재의 관념이 이미 함께 정립되어 있다. '내가 존재하며 한 완전한 존재의 관념이… 내 안에 있다는 사실로부터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주 명확하게 증명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루돌프 불트만은 실존철학의 기본명제로써 자기 자신에 관하여 자기 자신으로부터 말할 때에만이 하나님에 관하여 말할 수 있다고 하였다.17)

  몰트만은 근대의 이러한 하나님 개념의 출발점과 목표는 인간을 주체로 이해하는 것과 인간의 모든 인식과 관계에서 인간 주체성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18) 즉 근대 철학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주체의식을 확인시켜주는 절대 주체의 하나님과 다름 아니다고 주장한다.

 

  3) 삼위일체되신 하나님

  교회의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은 기독교전승과 신조에서 유래한다. 신약성서의 증언은 필연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아들로서의 예수의 역사는 오직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역사로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몰트만은 기독교 삼위일체론은 앞에서 살펴본 가장 높은 절대 실체로서의 하나님 개념과 절대 주체로서의 하나님 개념에 비하여 그 특징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즉 삼위일체론은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관하여 새로운 사고의 원형을 초래하는가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

  이 점에 관해 몰트만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터툴리안 이후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은 어딘가 하나님의 단일성이 강조되어 왔다는 점을 먼저 지적한다. 즉 터툴리안에 의해 표상된 한 실체-세 인격(Una substantia-tres persona)이란 순서에서도 그렇고,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 서방 신학의 정설처럼 된 '한 분 되신 하나님에 관하여(De Deo uno)', 그리고 '삼위일체되신 하나님에 관하여(De Deo trino)라는 순서 자체가 그렇다는 것이다. 즉 신학은 언제나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점을 먼저 증명하며, 그 다음에 그분의 삼위일체를 증명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절대 실체인 한 분 하나님은 부동하여 고난을 받을 수 없는 분으로 이해하게 만들었는데 이것은 희랍철학의 구도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본다. 전통적인 신론이 십자가에서 당하신 아들의 고난과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말한다 할지라도 감히 역사 속에서 고난당하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말해질 수 없다는 것이다.19)

  다음으로 몰트만은, 헤겔 이후부터 기독교의 삼위일체는 절대 주체라는 보편적 개념으로 표현된다고 보았다. 이 경우의 삼위일체는 '한 주체-세 존재 양식'으로 표현되며, 이것은 결국 양태론적인 성격을 띄게 된다. 이 개념에 의하면 단 하나의 신적 주체는 세 가지 존재 양식 안에서 각기 다른 방법으로 자신을 전달한다. 즉 하나님은 아버지를 '나'로, 아들을 '자아'로, 성령을 아버지의 나 자아의 동일성으로 이해한다.20)

  몰트만은 "오늘날 삼위일체론의 새로운 연구는 철학적이며 신학적인 전통과 비판적으로 대결할 때만이 가능하다. 과거의 실체의 삼위일체론으로 복귀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과걱의 존재의 사유의 우주론으로 복귀한다는 것은 근대로 전환한 이후의 이 시절에 있어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근대의 주체의 삼위일체론을 계속하는 것도 별로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근대의 주체의 사고는 점차 힘과 의미를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 중심적 사고는 최근의 상대주의적 셰계론으로 위축되고 있으며, 인간 중심적 행동은 사회적으로 폐기되어 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2. 삼위일체론적 사고의 장소

 

  우리는 앞서 몰트만이 삼위일체의 하나님에로 어떻게 접근하는지 살펴보았다. 이 장에서는 삼위일체론적 사고가 필연적으로 성립되는 구체적인 장소에 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삼위일체론의 장소는 '사고의 사고'가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이다. "직관없는 개념은 빈 것이다. (Kant) 삼위일체론적 하나님 개념의 직관은 예수의 십자가이다. "개념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Kant) 십자가에 달린 그 분의 직관의 신학적 개념은 삼위일체론이다. 삼위일체론의 내용적 원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십자가의 인식의 형식적 원리는 삼위일체론이다.21)

  이처럼 몰트만의 삼위일체의 출발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안에서 삼위일체론적 사고가 시작된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아버지의 내어줌이다.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며, 그리하여 내어주시는 아버지가 되신다. 아들은 이 죽음에로 버림을 당하며, 그리하여 죽은 자들과 산 자들의 주가 되신다.22) 아버지를 통하여 버림받은 가운데서 아들이 당한 고통과 죽음은 아들의 죽음에 대한 아버지의 고통과는 다른 고통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죽음은 간단히 성부수난론적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의 죽음'이라 이해될 수 없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와 그의 하나님과 아버지 사이에 일어난 것을 파악하기 위하여 우리는 삼위일체론적으로 생각하여야 한다. 아들은 죽음을 고통당하며,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을 고통당하신다. 여기서 아버지가 당하는 아픔은 아들의 죽음만큼 큰 것이다. 아들이 당하는 아버지의 상실은 아버지께서 당하시는 아들의 상실과 상응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되신다면, 아들의 죽음에서 그는 그의 아버지되심의 죽음을 고통당하시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삼위일체론은 하나의 유일신론적 배경을 극복할 수 없다.23)

 

 

Ⅳ. 삼위일체론의 양식

 

 1. 삼위일체의 관계

 

  1) 위격과 관계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은 성서적으로 실로 의지와 이성을 가진 주체들로서 더불어 함께 말하고, 사랑 안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더불어 "하나"를 이룬다. 바울과 공관복음서 저자들이 "하나님"을 말할 때, 이는 "아버지"를 의미하는 것이고, "아들"을 아버지에게 분명히 종속시키는 반면에, 요한복음에서 우리는 하나의 발전된 삼위일체론적 언어를 발견한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라고 요한복음의 예수는 말한다. 그는 "나"와 "너"를 구분하며, 인식과 의지의 일치만이 아니라 상호 내주의 일치도 지시한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의 유일한 신적 주체의 두 존재 방식으로 이해될 수 없다. 그들은 "한 분"이 아니라 "하나"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하나를 이룬다. 이 사실은 복수인 "우리가"와 "우리를"에 의해 표현된다24).

  따라서 하나님의 개념은 위격들의 주체적인 구별을 폐기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이 개념은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의 위격들 사이에서 세상의 구원을 위해 이루어지는 역사를 폐기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 안의 한 본성, 한 인식, 한 의식"이라는 신스콜라주의의 명제를 칼 라너와 칼 바르트의 의미로 받아들여서, "한 하나님은 분명한 세 실재방식 안에 실재한다"거나 "세 존재방식 안에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삼위일체적 구원사는 그 구체적 매개체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겟세마네에서 더불어 행동하는 자는 한 유일한 주체의 분명한 실재방식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골고다의 십자가에서도 한 "위격적인 하나님"의 한 "존재방식"이 다른 존재방식을 향하여 소리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25)

  위격과 관계는 상호보충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위격성과 관계성은 동시에 생겨나기 때문이다. 위격과 관계는 동일한 기원을 갖는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아바는 이 아들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아들을 바라보는 그의 아버지 신분은 그의 위격을 구성한다. 아버지로서의 그의 위격은 아들과의 일회적인 이 관계를 통하여 규정된다.26)

 

  2) 순환적 - 사회적 일체성

  지금까지는 삼위일체의 위격들과 이들의 관계에 관해서 이해하였다. 이제 삼위일체의 단일성에 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몰트만은 요하네스 다마스케네스(Johanes Damascenus)의 영원한 순환이론을 적극 수용하여 영원한 신적인 삶의 순환을 통하여 단일성을 말하고자 한다. 다마스케누스에 의하면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삶의 과정이 능력들의 상호 교환을 통하여 일어난다.27) 아버지는 아들 안에서 존재하고, 아들은 아버지 안에,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 안에 존재한다. 그리고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 안에 존재한다. 이들은 너무도 깊어 서로 상대방 안에서 살며 영원한 사랑의 힘으로 거하기 때문에 하나이다. 그들을 서로 구분하는 개체적 특성, 바로 그것을 통하여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상대방 안에서 살며 영원한 삶을 나눈다.

  위격들이 이처럼 서로 안에서 친밀하게 내주(內住)하는 것과 완전히 침투하는 것은 삼위일체적 순환 이론에 의해 표현된다. 이것은 위격이론과 관계이론을 넘어서는 삼위일체적 일치성을 표현한다. 삼위일체적 일치는 신적 위격들의 이차적인 '사귐'이 아니고, 이 위격들은 한 하나님의 "존재방식"이나 "반복"이 아니다. 순환적 일치가 분명한 관계들을 폐기하지도 않고, 관계가 일치를 침해하지도 않는다. 삼위일체의 내재적 관계와 삼위일체적 순환은 서로 상호보충적 관계를 이룬다.28)

  신적 위격들의 이 순환론적 일치성 안에는 단지 일치만이 아니라 독자성도 존재한다. 신적 위격들은 영원한 영광의 발현을 위한 그들의 내주를 통하여 영원한 순환 안에서 서로를 인도한다. 성령은 아들을 영화롭게 하고, 아들과 함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한다. 아버지는 아들과 영 안에서 자신을 영화롭게 하고, 아들은 영을 통하여 아버지를 영화롭게 한다. 그들은 영원한 빛 안에서 더불어 서로를 표현하고 묘사한다.29)

  몰트만은 삼위일체적 하나님의 순환론적 일치에 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삼위일체적 하나님의 순환론적 일치는 초대하고 결합하는 일치이고, 또 그래서 인간개방적이고 세계개방적인 일이다. 신적 위격의 상호관계는 너무나 넓기 때문에, 온 세상이 그 안에서 거할 자리를 갖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삼위일체론적 일치의 개념을 배타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고, 포괄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삼위일체는 흘러넘치는 은혜로운 사랑의 힘 때문에 '열려'있다. 이것은 사랑받고 발견되며 용납된 피조물들을 위해 '열려'있다."30) 이러한 몰트만의 주장은 우리에게 삼위일체의 삼신론적 이해의 위험성을 해소하고 삼위일체의 단일성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다.

 

 2. 성령의 사귐

  우리는 앞에서 관계와 위격, 순환적인 일치성에 관해 살펴보았다. 우리는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성령을 주목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 동안 성령은 삼위 중에서 가장 대접받지 못했던 위격이었다. 이것은 온전한 삼위일체적 사고를 막는 요소였다. 따라서 이 장에서는 이러한 단일적 삼위일체의 한계에서 삼위일체적 성령으로의 성령이해를 하고자 한다.

  군주론적 삼위일체에서는 아버지-아들-영의 질서로 틀을 잡고, 더욱이 서방교회에서 필리오케(filioque-그리고 아들로부터)를 삽입한 후 성령은 아들보다도 서열이 더 낮아지게 되었다. 이 질서를 통하여 아들과 영의 관계가 일방적으로 형성된다. 몰트만은 "필리오케가 성령을 그리스도에게 종속시킨다는 사실, 그것은 성령을 '비인격화하는' 경향으로 기운다는 사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성령을 교회에 종속시키는 일도 촉진할 수 있어서, 이로 인해 교회가 권위주의적인 제도주의로 경직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러기에 서방에서 중세기에는 '직무교회'와 '영적교회' 간에, 종교개혁 시대에는 성서에 매여있는 신학과 자유로운 성령의 신학 간에, 근세에는 말씀신앙과 열광주의 간에 논쟁이 생겼던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이미 삼위일체의 원래적인 관계에서 '아들과 성령의 상호작용을 인정한다면' 이런 잘못된 양자택일을 피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31)

  몰트만은 군주론적 삼위일체의 일방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성령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신성의 원천'인 아버지로부터 성령이 영원한 말씀과 함께 나온다면, 성령은 창조된 것이 아니라, 그의 본질상 필연적으로 아버지로부터 오며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과 동일한 본질을 가진다. 성령을 경험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 자신을 경험한다. 즉 우리를 아들과 결합시키는 아버지의 영을, 아버지가 주시는 아들의 영을, 우리를 통하여 아버지와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영을 경험한다."32) 그리하여 성령은 창조된 것이 아니라 그의 본질상 아버지로부터 오며 따라서 아버지와 아들과 동일한 본질을 지닌 제3인격이 된다.33)

 

 

Ⅴ. 결론

   많은 사람들은 신학적 삼위일체론이 신학 전문가들을 위한 하나의 사변이요, 현실의 삶과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 몰트만은 기독교 독자적 특성을 삼위일체로 이해하고 있다. 사실 삼위일체의 역사를 살펴보면, 수많은 이단들의 위협 속에서 많은 논쟁들을 통하여 얻어진 소중한 기독교의 신앙고백이며 신앙고백은 인간의 삶의 자리를 떠날 수 없다. 그래서 삼위일체론을 논의하고 고찰하는 것은 정당하며, 그것은 언제나 시대(時代)와 만나고 그것과 대화한다. 몰트만은 현시대를 다음과 같이 판단한다. "동일한 권리 때문이든, 심지어는 더 큰 약속 때문이든 간에, 다른 형태들도 나란히 함께 존재하고 있다. 교회가 다른 많은 세계종교들 중의 한 종교가 되어가면 갈수록, 그리고 교회가 아시아의 오래된 문화권에 발을 들여놓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자신만이 유일한 종교를 대변한다고 내세우던 교회의 주장은 사라져 간다. 물론 교회는 모든 민족들 안에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대개가 주변적인 소수로 존재할 따름이다. 서양에서조차도 교회는 '작은 무리'로 줄어드는 것같이 보인다.34)"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의 독자적 특성인 삼위일체를 고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삼위일체의 역사를 살펴보면 삼위일체의 본질에 대해 정확하게 표현한 개념들이 없었다. 일신론적으로 성부 하나님만을 강조하거나, 양태론적인 주장으로 삼신론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에 대해 몰트만은 구원의 역사로부터 출발하여, 신적인 위격의 구분과 관계를 존중하는 하나님 이해를 전개하는 가운데 삼위일체론을 제시하고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최고의 본질이거나 절대적인 주체로 이해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오히려 순환적 통일성 속에 거하는 독특한 공동체로서 이해된다. 하나님의 하나됨은 동질적인 본질이나 하나의 동일한 주체 속에 있기보다는 하나님의 위격들 사이의 순환적 교제 안에 있다.

  우리는 몰트만의 삼위일체론 이해로 말미암아 삼위일체의 삼위일체론적 이해를 얻게된다. 현대의 신학은 보편적 다원주의와의 대화를 하나의 미덕으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몰트만의 지적대로 기독교의 특수성을 상대화하면서 대화한다면 어느 누구도 기독교를 옹호하거나 지켜주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적 사고는 우리에게 기독교의 특수성을 올바로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이는 다원주의적 보편성 안에서 우리의 신학과 신앙이 방향을 잃지 않고 종말을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하는 등대이다.

 

 

 [주]

 

1) 2000년 5월 방문 중 최성수 박사와의 인터뷰 내용

2) 위르겐 몰트만,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역사』,(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98), pp.9-10.

3) J.N.D. Kelly, 『고대기독교교리사』, 김광식 역, (서울: 맥밀란, 1987), p.261.

4) Ibid., p.262.

5) 몰트만,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p.162

6) Ibid., p.165.

7) Ibid., p.150.

8) 몰트만, op. cit., p.168. 슐라이에르마허의 신론에서 이와 같은 경향이 나타난다. 한 분 하나님은 세 가지 현상 배면에서 그리고 그 안에서 규정되지 않은 채 존속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며, 한 분 하나님의 개념 속에 숨어있는 사고방식이 관철되고 있다.

9) 김영선, 『예수와 삼위일체 하나님』, 대한기독교문서선교회, 1989 , p.165.

10) 몰트만, op. cit., p.169.

11) Ibid., p.170.

12) 이종성, 『삼위일체론』,(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1), p.615.

13) 몰트만, 『삼위일체와 하나님 나라』, op. cit., p.174.

14) Ibid., p.182.

15) Ibid., p.22. 여기서 '최고 실체로서의 하나님'은 고대 희랍으로부터 중세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지배적인 정의에 의한 것이며, '절대 주체로서의 하나님'은 중세의 유명론을 거쳐 19세기 관념론에 이르러 제기된 정의이다.

16) Ibid., pp.25-26.

17) Ibid., pp.27-28.

18) Ibid., p.29.

19) Ibid., p.30.

20) Ibid., p.31.

21) 몰트만,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82), p.253.

22) Ibid., p.255.

23) Ibid., p.256.

24) 몰트만,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역사』,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98), p.176.

25) Ibid., p.176.

26) Ibid., p.177.

27) 몰트만,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op. cit., pp.209-210.

28) 몰트만,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역사』, op. cit., pp.177-178.

29) Ibid., p178.

30) Ibid., p.180.

31) 몰트만,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역사』, op. cit., p.131.

32) 몰트만,『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op. cit., p.206.

33) 몰트만, 『삼위일체와 하나님 나라의 역사』, op. cit., p.148.

34) Ibid., p.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