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학적 창조론

 

   정태영(Th.M)

 

 

 

성서에 기반을 두고 있는 그리스도교 창조신학은 이 자연세계를 비신격화하고 비악마화하였다. 이방 세계의 타부를 깨뜨림으로써 세계를 방치하지 않고 인간에게 맡기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 공헌을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창조신학은 하늘과 땅이 인간을 위해 창조되었고 인간이 "창조의 왕관"이라는 '인간 중심적 세계관'을 낳고 말았다.1) 그러한 사고 아래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전능을 등에 업고 자연에 대한 자신의 지배권만을 강조한 채 자연을 착취해 왔다. 그 결과 오늘날 무제한의 생육, 과잉인구, 자연의 억압을 통한  생태학적 위기와 자연 파괴가 초래되고 말았다. 이 위기는 인간에 대해서만 아니라 다른 생물들과 자연 세계에 대해서도 오래 전부터 치명적인 것이 되었다. 이 인간 사회의 근본적인 방향이 철저히 변화되지 않을 경우, 그리고 다른 생물들과 자연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삶의 실천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이 위기는 하나의 총체적인 '재난'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2)

이와 같은 문제 상황과 대결하기 위해 몰트만은 피조물 속에 계시는 신적인 창조의 영으로부터 출발하는 성령론적 창조론을 제시하며, 모든 피조세계를 하나님의 집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는 생태학적 창조론을 전개한다.  그는 이 창조론을 통해 자연과 인간의 평화로운 관계를 모색한다.3)

 

  

1. 창조의 인식

 

몰트만은 오늘의 생태학적 위기 속에서 그리스도교적 창조론의 신학적 근거를 고찰하면서, 세계를 하나님의 창조로 인식하는 근거를 묻는다. 어떤 객관적인 신학적 근거에서 자연이 창조세계로 생각될 수 있고 다루어질 수 있는가? 현재의 상태 속에 있는 세계가 어떤 주관적인 조건하에서 창조세계로 경험되는가? 자연 그 자체가 하나님의 '창조세계'로 인식되는가, 아니면 그것은 먼저 창조적인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빛 속에서 그렇게 경험되는가? 이와 같은 질문을 몰트만은 제기한다.4)

세계는 그 자체로부터 하나님의 창조세계로 인식되지 않으며, 세계의 창조자, 유지자, 구원자로서의 자기계시를 통해 비로소 하나님은 세계를 그의 창조세계로서 드러낸다. 그 다음에 세계를 창조세계로서 경험하며 이 경험에 상응하여 세계와 관계한다. 이스라엘은 출애굽이라는 계약과 가나안 점령이라는 구원의 사건의 빛 속에서 세계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창조세계로 이해하는 것을 배웠다. 구원의 사건과 창조의 경험은 상호간에 하나의 중복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즉 한편으로 창조에 대한 경험은 이스라엘의 계약의 하나님을 온 세계의 주와 창조자로 증명하며, 이리하여 단 한 분이신 하나님의 보편성을 계시한다. 다른 한편으로 온 우주와 모든 사람들과 민족들이 이스라엘이 경험하였고 이스라엘이 희망하는 구원의 역사에 포괄된다. 창조는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특별한 역사적 경험의 우주적 지평이다. 이 지평은 "태초의 창조"를 포괄하며, 다른 한편으로 "종말의 창조"를 포괄한다. 그것은 "태초에" 있었던 하늘과 땅의 창조와 종말에 있을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에 의하여 결정된다.5)

창조가 하나님의 모든 행위의 총괄개념이라면, 이에 상응하여 창조론은 태초의 창조, 역사적 창조, 종말의 창조를 포함할 수 밖에 없다. 창조는 태초에 있었던 하나님의 창조행위, 그의 역사적 창조행위, 완성된 창조를 뜻한다. 칼 바르트가 말한 바와 같이 역사적인 계약이 "창조의 내적인 근거"가 아니라 "영광의 나라"가 창조의 내적 근거이다. 왜냐하면 이 영원한 나라가 역사적인 계약의 내적인 근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창조는 태초의 창조와 역사적 창조와 종말론적 새 창조로 구분될 수 있다. 창조의 역사의 목적을 주시할 때, 우리는 창조된 세계 속에서 영광의 나라의 '현실적 약속들'을 인식한다. 창조는 역사를 지향하고 있으며, 단순히 인간과 함께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를 위한 무대가 되지 않는 것을 우리는 깨닫는다. 왜냐하면 이 역사의 마지막 의미는 새롭고 완성된 창조에 있기 때문이다.6)

얼핏 보기에 신약성서는 창조 세계에 대한 이해를 위하여 새로운 것을 전혀 기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인상은 잘못된 것이다. 이러한 인상은 우리가 "창조"를 근원의 신화로 잘못 이해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창조에 대한 신약성서의 증언은 '부활의 케리그마'와 '성령의 경험', 새로운 창조의 능력에 대한 경험 속에 있다. 종말론적 그리스도론과 성령론에서 하나님의 창조는 사실 철저히 다르게 해석된다. 여기에서는 메시야적 시대의 증언들로부터 달리 기대할 수 없는 '세계의 종말론적 창조'가 기술되고 있으며, 원초적 창조가 기술되지 않는다.7)

종말론적 창조는 부활과 삶의 창조의 과정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신약성서에서 창조자-하나님은 새로운 메시야적인 이름을 얻는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죽은 자들을 일으키시는 하나님', '희망의 하나님'(로마서 15,13)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부활의 신앙은 창조신앙의 그리스도교적 형태이다. 그것은 죽음에 예속되어 있는 삶의 조건 하에 있는 창조신앙이다. 그러나 부활 신앙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신앙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서 창조적인 자유이며 영 가운데서의 일어남이다.8)

태초의 신앙은 자연과 함께 시작하여 인간으로 끝났으나, 종말론적인 창조는 거꾸로 인간의 해방과 함께 시작하여 자연의 구원으로 끝난다. 이 창조의 역사는 태초의 창조순서를 반영한다. 피조물의 노예상태와 신체의 고통과 신앙인들의 동경 속에서 하나님의 영은 함께 참여하며, 함께 고난당하며, 그 자신의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은 탄식"을 통하여 그들의 기다림과 희망을 생동하게 한다. 즉 그의 영을 통해 창조 안에 들어오신 창조자 하나님은 피조물의 삶을 유지하며, 그들의 고난을 함께 당한다.

메시야의 시대는 인간에게 성령의 은사를 '부어줄' 뿐만 아니라 노예 상태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 안에서 성령을 일깨운다. 그러므로 '세계에 대한 메시야적 세계 인식'은 부활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분명한 희망으로부터 출발하며, 포로가 되어 있는 피조물의 슬픔과 자유에 대한 동경 속에서 그와 동일한 희망을 본다.9)

 

2. 창조의 과정

 

1) 무로부터의 창조

고전적인 창조신학에 따르면 하나님은 세계를 무로부터(ex nihilo) 창조한다. 여기에서 '무'란 세계 창조의 재료가 되는 어떤 원시적인 물질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무로부터의 창조'는 오직 하나님만이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세계의 창조는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에서 비롯하는 행위이다. 10)

창조의 행위가 하나님의 의지의 결단에 근거한다면,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세계의 창조주가 될 것을 결정하신 것이다.11) 따라서 무로부터의 창조는 전제 없는 하나님의 전적인 자유로부터의 창조이며, 이는 하나님은 모든 존재를 규정하지만 그 자신은 그것들에 의해 제한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유로부터 세상을 창조하기로 결정하셨으나, 이 자유는 모든 것이 가능한 전능이 아니라 자유인 동시에 사랑이다. 하나님이 자유로부터 세상을 창조할 때, 그는 사랑으로부터 창조한다. 창조는 그의 무한한 능력의 표현이 아니라 전제 없는 사랑의 전달이다.12) 또한 하나님은 무한한 자기 전달의 사랑을 피조물에게 나누어주기 위하여 자기를 제한한다. 신적인 존재의 자기 제한 속에서 무가 드러난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기 제한은 창조 이전에 시작된다.13)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관련하여 "무로부터의 창조"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한 죄의 용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하나님 없는 자들의 칭의, 죽은 자들의 부활, 어린양의 주권에서 오는 영원한 삶을 뜻한다. 창조와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만유의 참된 확실성을 의미한다. 창조자는 처음부터 그의 피조물을 위하여 고난을 받기로 각오하였기 때문에 그의 창조는 영원히 존속한다. 그리하여 몰트만에 의하면 '십자가'는 창조와 그의 미래의 비밀이다.14)

 

2) 삼위일체적인 창조

성서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적 세계관이 잘 나타나 있다. 성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의 세 신적 위격은 자신의 주체성과 고유성을 가진다. 아버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때, 아들과 성령도 이에 참여하여 창조의 사역을 함께 이룬다. 아들 하나님이 그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 세상을 구원하실 때, 아버지와 성령도 이에 참여하여 구원의 사역을 함께 이룬다. 또한 성령이 새 창조를 이루어 나갈 때, 아버지와 아들도 이에 참여하여 새 창조의 사역을 함께 이룬다. 그들은 서로 구분되지만 나누어지지 않고 언제나 함께 있는 것이다.15)

몰트만은 이러한 삼위일체적인 창조론이야말로 진정 그리스도교적인 창조론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삼위일체 창조의 개념은 "하나님의 세계 초월"을 "하나님의 세계 내재"와 결합한다. 삼위일체적 창조는 피조계 내에 거주하시는 창조자 영(the Creator Spirit)을 인정한다. 즉 삼위일체적 창조론은 하나님의 세계초월과 세계 내재를 결합함으로써, 이신론(理神論)이 가진 진리의 요소들과 범신론(汎神論)이 가진 진리의 요소들을 통합한다. 따라서 하나님과 자연에 대한 통합적인 안목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게 된다.16)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계는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상응하여 사귐과 협동과 나눔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인간이 인간을, 인간이 자연을 억압하고 착취하며 파괴하는 것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존재와 모순된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는 모든 피조물들이 한 몸을 이룬 가운데서 모든 기쁨과 어려움과 고난을 함께 나누는 세계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와 평화가 지배하며 하나님의 영광이 모든 피조물 안에서 나타나는 세계이다. 17)

그리스도가 모든 창조를 위한, 죄된 인간과 "노예화된 피조물"을 위한 구원의 근거라면, 그는 모든 창조와 인간과 자연의 실존을 위한 근거이기도 하다. 그리스도를 통한 창조의 구원에 대한 종말론적 인식으로부터 그리스도를 통한 창조의 원초적 확립이 추론되었다.18)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와 그의 영원한 창조자의 말씀은 "마지막에" 그리고 궁극적으로 십자가에 달리고 죽음에서 부활한 주 '예수' 안에서 제시된다. 이 말과 연결하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영원한 '아들을 통하여' 세계를 창조하였고 유지한다고 말한다.19)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창조한다. 제사장 문헌의 표현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그는 명령의 말씀 한 마디로 세계를 카오스로부터, 또는 무로부터 창조하지 않는다. 그는 그 자신의 영의 힘과 능력으로부터 창조한다. 아무 관계도 없어 보이는 창조와 피조물, 행위자와 행위, 전문가와 사역의 차이가 성령의 힘과 능력을 통하여 극복된다. 이를 통하여 창조된 세계 자체가 신적인 것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의 능력의 영역 안으로 포괄되며, 삼위일체 자신의 내적인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

삼위일체적인 창조론은 창조를 하나님의 "사역"으로 생각하는 표상과 창조를 하나님의 "넘침"(유출)으로 보는 표상이 가진 진리의 요소들을 받아들일 수 있다. 성령은 "부어진다". 성령 안에 있는 창조는 행위와 행위자, 사역과 전문가보다 더 긴밀한 관계 속에 있다. 그러나 세계는 아버지와 같은 본질을 가진 아들과 같이 하나님에 의하여 출생되지 않았다. 창조와 출생 사이에 개재하는 이 중간의 상황은 창조의 영의 능력들의 "부음"을 통하여 표현된다. 이 영은 모든 것을 자기의 삶으로 채우는 신적인 생명의 호흡이다.20)

 

3) 계속적 창조

세계 속에 내재하는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계속적 창조 개념과 직결되어 있다. 성령은 창조 세계를 보전하고 유지하지만, 동시에 창조 세계를 새롭게 하고 계속적으로 창조하는 영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성령은 하나님의 새 창조의 능력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태초의 창조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세계를 새롭게 하고 재창조한다. 성령은 세계를 새롭게 하고 재창조해서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를 만들어가는 마지막 시대의 영이다.

전통적 창조신학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행위에 대한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으며, 태초의 창조 이후의 하나님의 행위를 유지, 보전 및 원상의 회복이라는 차원에만 제한했다. 그러나 몰트만은 "창조와 유지"라는 제한된 표상은 성서적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성서는 "새 창조"와 "새롭게 하심"의 종말론적인 역사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다.

계속적 창조는 새 창조, 즉 종말론적인 창조의 선취가 된다. 하나님의 계속적 창조는 영광의 세계와 구원의 성취를 목적으로 하는 종말론적인 방향을 지닌다는 것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계속적 창조"에 대한 이론을 자세히 고찰하면, 하나님의 역사적 활동은 피조된 세계의 "보전"과 이 세계의 완성을 위한 "준비"라는 전망에서 관찰할 수 있다. 하나님의 역사적 활동은 태초의 창조와 새 창조 사이에 있다. 전통적인 창조신학은 세계의 보존을 강조하였으나, 계속적 창조는 태초의 창조와 새 창조의 사이에 있기 때문에, 몰트만에 의하면 하나님의 계속적 창조의 활동은 "보존하며 혁신하는 행위"로 인식할 수 있다. 보존하는 행위 속에서는 희망이 나타나고, 새롭게 혁신하는 행위 속에서는 성실함이 증명된다.

 

  

3. 창조의 완성(목표)

 

그리스도교적 창조론은 세계를 메시야 예수의 빛 아래서, 그리고 그를 통해 시작되고 규정된 '메시야적 시대'의 관점에 따라 파악하는데, 그것은 인간의 '해방'과 자연의 해방, 그리고 부정적인 것과 죽음의 세력들로부터 인간과 자연의 공동체를 '구원'하는 일을 지향한다.21)

태초의 창조는 하나의 개방된 창조이며, 그것의 완성은 그것이 하나님의 '고향'과 '거처'로  되는 데에 있다. 여기 이 역사 속에서 인간은 비록 부분적이고 잠정적이긴 하지만 영 속에 계신 하나님의 거처를 경험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이 영광의 나라 안에서 전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그의 창조세계 안에 거하실 것을 희망하고, 그의 모든 피조물들로 그의 영원한 삶의 충만함 속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희망한다.22)

창조적인 하나님 자신이 그의 창조세계 안에 '거하신다면', 그는 이 창조세계를 하늘에서는 물론 땅 위에서도 그의 고향으로 만드실 것이다. 그리하면 모든 피조물들은 그와 가까이 있으면서 그들의 생명의 무진장한 원천을 발견할 것이며, 하나님 안에서 그들 자신의 고향과 안식을 얻을 것이다. 그러면 피조물들 상호 간에는 참된 사귐이 등장할 것이다.

이 사귐은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메시야적 전통이 "모든 사물들의 공명"이라고 불렀던  사귐이다. 사랑과 참여와 전달과 다양한 상호 관계들의 결합은 우주적 영 속에서 결합되어 있는 창조세계의 삶을 결정한다. 다양한 '창조의 사귐'이 생성될 것이다.23)

성서의 전통에 의하면 구원을 향한 창조의 방향은 태초에서부터 주어져 있었다. 왜냐하면 세계의 창조는 안식일, 곧 "창조의 잔치"를 지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식일은 장차 올 세계의 육분의 일이다." 안식일에 창조는 완성된다. 안식일은 장차 올 세계의 모습을 미리 보여 준다. 만일 우리가 창조를 그것의 미래, "하나님의 영광", "현존의 고향성" (Heimatlichkeit), 그리고 보편적인 "모든 사물들의 공명"(Sampathie)의 빛 속에서 기술한다면, 우리는 '안식일의 창조론'을 발전시키게 된다. 이것은 사실상 그리고 실제적으로 오직 안식일에만 지각되는 창조의 모습과 전망을 의미한다. '안식일의 평화'를 통한 창조의 완성은 '창조로서의 세계'에 대한 견해를 '자연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견해와 구분한다. 왜냐하면 항상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자연은 시간과 리듬은 알지만 안식일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24)

안식일은 창조의 완성이요 왕관이다. 안식일의 쉼을 통하여 창조적인 하나님은 비로소 그의 목적에 도달한다. 다시 말하여 자기 자신에게, 그의 영광에 도달한다. 하나님은 안식일에 "그의 만드신 만물"로부터 휴식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는 그것들을 바라보며 휴식한다. 이것은 다음의 사실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은 창조세계를 창조하고 만드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의 얼굴 앞에서 실존하게 하며 그와 함께 공존하게 하신다. 다시 말하여 유한하고 시간적인 세계가 무한하고 영원한 하나님과 공존한다. 세계는 하나님에 '의하여' 단순히 창조되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실존하며, '하나님과 함께' 산다. 하나님은 휴식에 도달함으로써, 창조세계를 있는 바 그대로 있게 한다. 그의 현존하는 휴식 안에서 모든 피조물들은 그들 자신에게로 오며, 그들 자신의 모습을 전개한다.25)

안식일의 비밀은 창조의 사역의 비밀보다 더 깊다. 창조는 하나님의 사역의 계시로 생각될 수 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이다. 그러므로 창조의 사역들은 창조의 안식일을 향하여 진행된다. 그러므로 창조의 안식일과 함께 이미 영광의 나라, 곧 모든 피조물들의 희망과 미래가 시작된다. 창조의 안식일은 하나님의 안식일이요 그의 휴식 가운데서 그의 영원한 영광이 현재가 되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안식일은 "완성의 꿈"이 된다. 그리고 사람의 휴식은 신적인 영광의 영원한 축제의 전조가 된다.26)

 

 

4. 창조와 진화

 

진화의 개념을 창조의 개념과 결합하는 것이 가능하며, 또 그것은 의미 있는 일인가? 아니면 양자는 원칙적으로 서로를 배격하는가? 이 문제는 근대의 과학적 진화론이 발표되면서부터 끊임없이 제기되어 온 내용이었다. 27)

근대의 과학적 진화론은 그것이 발표되면서부터 교회의 반대에 부딪혔다. 피오(Pius) 10세는 1907년 교회백서 "Pascendi dominici gregis"를 통해 "물질로부터 생명이 진화되었다는 이론은 유물론과 범신론(汎神論)과 무신론으로 유도하는 것이다"라고 비판하면서 진화론을 현대주의의 한 오류라고 심판하였다. 피오 12세는 1950년 교회백서 "Humani Generis"에서 진화론이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일치될 수 없음을 선언하였다.28)

개신교 측에서도 진화론은 창조신앙과 모순되는 것으로 보았다. 미국 테네시의 근본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유명한 "원숭이 재판"을 통해 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였다. 과학적인 "진화론자들"과 근본주의적인 "창조론자들" 사이의 논쟁은 오늘도 미국에서 계속되고 있는데, 오늘날 특이하게 달라진 사실은 "창조론자들"도 자기들을 신앙적인 과학자로 이해하며, 자신들이 세운 연구기관에서 독자적으로 연구하고 있다는 것이다.29)

진화에 대한 본격적인 새로운 신학적인 이해는 프랑스의 고생물학자요 카톨릭 신학자인 떼이야르 드 샤르뎅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진화론을 신학 속에 수용하여 "진화신학"이라는 새로운 신학을 제시했다. 샤르뎅은 진화의 사실은 과학적으로 부인할 수 없는 것이지만, 생물 진화의 역사를 과학적으로 엄밀히 연구해 보면, 이 진화의 역사가 결코 우연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도저히 말할 수 없다고 하였다.30)

독일의 개신교 신학에서는 칼 바르트, 아돌프 티누스, 칼 하임이 진화론과 창조론의 생산적인 종합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자유주의의 윤리적인 신학은 물론 새로운 변증법적 신학도 신학과 자연과학 상호 간의 "불간섭"이라는 무관심주의적 해결을 택함으로써, 양자 모두에게 흥미로운 이 시도는 중단되었다. 그러나 이 제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문제를 배제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31)

몰트만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태초의 창조와 계속적 창조의 두 가지 관점에서 이해했고, 진화는 계속적 창조의 일부라고 보았다. 몰트만에 의하면 전통적 그리스도교의 창조신학은 태초의 창조(creatio originalis)에만 국한되었고, 계속적 창조(creatio continua)와 새 창조(creatio nova)에 대한 이론은 간과해 왔다. 그러므로 태초의 창조는 역사의 가능성을 갖지 못하며 진화될 필요가 없는 "완성되었고 완전한 창조"로 설명되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도 한 때 창조되었고 그래서 더 이상 진화하지 않는 완성된 존재로 생각되었다.  결국 이러한 생각은 인간을 창조의 왕관으로 여기는 인간 중심적 세계관이 형성될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그런데 진화론은 인간이 창조의 왕관이나 완전한 존재가 아닌, 진화 과정 속에서 계속 발전하는 진화의 고리 속에 있는 한 지체라고 보았으며, 이러한 이유 때문에 진화론이 기독교에 의해 배격당하게 되었다고 몰트만은 주장한다.32)

몰트만은 창조의 개념과 진화의 개념이 상황에 따라 필요한 자들에 의해 이데올로기로 사용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진화의 개념과 창조의 개념이 탈이데올로기화하고 그들이 본래 의미하는 진술의 영역에서만 엄격히 수용될 때, 비로소 이 두 개념들을 결합하는 일이 가능하고 의미있다고 지적한다.33)

몰트만에 의하면 창조와 진화는 서로 대립, 모순되는 개념이 아니며, 이 둘은 동일한 현실의 상이한 국면에 대한 설명이다. 태초의 창조를 통해 창조는 시작되었으나, 아직은 완성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창조 행위는 태초에 있었던 한 번의 창조로 끝난 것이 아니다. 태초에 무로부터 세계를 창조한 하나님은 계속적으로 창조하시며, 세계를 변혁하고 새롭게 하신다. 이것은 계속적 창조이며, 진화론은 신학이 말하는 계속적 창조와 관련된다. 진화란 물질과 생명의 체계들의 계속적 형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 행위는 무에서부터 창조하는 행위이지만, 이미 있었던 것을 가지고 변화시키고 새롭게 만드는 창조 행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진화는 계속적 창조 행위의 일부라고 볼 수 있다. 과거의 인간중심적 세계관을 새로운 하나님 중심적인 자연 이해와 인간 이해, 세계 이해를 통하여, 그리고 종말론적인 이해를 통하여 극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진화론에 대한 만족할 만한 신학적인 전망을 얻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 몰트만의 지적이다.34)

 

 [주]

 

 

1) 몰트만,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서울:한국신학연구소, 1991), pp.46-47

2) Ibid., pp.36

3) Ibid., pp.10-11

4) Ibid., pp.72

5) Ibid., pp.238

6) Ibid., pp.75-76

7) Ibid., pp.87

8) Ibid., pp.88-89

9) Ibid., pp.91

10) 다니엘 L. 밀리오리, 「기독교 조직신학 개론」장경철 역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4),   

    p.133

11) 몰트만,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서울:한국신학연구소, 1991), pp.99

12) Ibid., pp.100

13) Ibid., pp.113

14) Ibid., pp.118

15) 김균진, 『생태학의 위기와 신학』(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91), pp.202

16) 몰트만,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서울:한국신학연구소, 1991), pp.132

17) 김균진, 『생태학의 위기와 신학』(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91), pp.78

18) 몰트만,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서울:한국신학연구소, 1991), pp.121

19) Ibid., pp.122

20) 몰트만,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 1982), pp.141-142

21) 몰트만,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서울:한국신학연구소, 1991), pp.17-18

22) Ibid., pp.18

23) Ibid., pp.18

24) Ibid, pp.19

25) Ibid, pp.327-328

26) Ibid, pp.329-330

27) Ibid, pp.230

28) Ibid, pp.231

29) Ibid, pp.232

30) 김명용, "창조의 보전과 새로운 창조신학", pp.308-309

31) 몰트만,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서울:한국신학연구소, 1991), pp.233

32) Ibid, pp.234

33) Ibid, pp.237

34) Ibid, pp.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