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기원(神正論)

 

추도욱(M. Div 1차)

 

 

 

  창조세계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일어난다면, 이 세계 속에 일어나는 수많은 악과 고난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이 세계 안에 있는 악과 고난에 대한 질문은 기독교인에게 가장 난감한 질문이지만, 선하고 의로운 하나님을 변호(이를 神正論=하나님을 변명함이라고 한다)하고, 고난의 문제를 풀기 위한 필수적인 질문이다.1)

  신정론 개념은 라이프니쯔(G .W. F. Leibniz)에게 소급된다. 그렇지만 이미 스토아 철학자들이 신정론에 대한 물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 적이 있다: (Si Deus justus, unde malum(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악은 어디서 오는가)? 그리고 그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만약 신이 악을 제어하기를 원하더라도 그럴 능력이 없다면, 그는 선하지만 전능하지는 않다. 아니면 만약 신이 악을 제어할 능력이 있더라도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는 전능하지만 선하지는 않다.2)

  몰트만은 그 자신이 2차 세계대전에 독일군으로 직접 참전하였으며 연합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는 포로 수용소에서 절망하던 가운데 하나님을 만났다.3) 그러므로 그의 신학이 인간의 고난의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는 것은 당연하다. 몰트만은 인간의 고난을 직접 느끼고 보면서 이렇게 고백한다. "이러한 대재앙은 무슨 신학적 의미가 있는가? 이러한 일을 허용하는 하나님은 선한 하나님인가? 아니 이 하나님은 도리어 잔인한 괴물인가? 이 세계는 그의 선하고 질서잡힌 창조물인가? 아니면 이 세계는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혼돈인가?"4)

 

  따라서 본고는 몰트만이 신정론에 대한 물음에 어떻게 대답하는가를 살펴보고, 그가 이해한 전통적 신정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Ⅰ. 전통적 신정론(몰트만 정리)

 

   1. 성서적 전통

 

  성서적 전통, 특히 시편과 욥기, 비탄시와 공관복음서의 수난사 안에서 신정론에 대한 물음은 하나님 신앙의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실존적으로 제기된다. 하나님이 의로운 분이라면, 왜 경건한 자들이 고난을 당해야 하며, 왜 불경한 자들이 잘 살아야 하는가? 하나님이 신실한 분이라면, 왜 그의 백성 이스라엘은 이방백성의 폭력에 내맡겨지는가? 하나님이 "아버지"라면, 왜 그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로마인의 십자가 형틀에서 죽도록 "버렸으며"(막 15:34), 그를 "내어 주었는가"(롬 1:32)  몰트만은 성경에서 이에 대한 다양한 차원의 답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전가한 악이 있다. 악한 행위와 결과의 상관관계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공의의 일부이다. 하나님은 악한 결과의 발생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만, 인간의 악한 행위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 둘째는 불의한 인간이 아닌 의로운 인간이 겪는 고난도 있다. 욥기가 말하듯이, 죄없이 고난을 당하는 의로운 자의 하나님 신앙은 단지 하나님에 대한 꾸준한 항의 안에서만 견지될 수 있다. 셋째는 인간만이 아니라 인간과 더불어 하나님 자신도 겪는 고난이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맺은 계약을 통하여 그의 이름과 그의 영을 그의 백성 안에 거한다. 하나님은 그의 "내주"(세키나)를 통하여 친히 그 고난에 참여하며, 고난의 동반자가 된다.5)

 

   2. 철학사와 종교사

 

  몰트만은 종교사와 철학사에서 신정론에 대한 세가지 해결책을 발견한다. 첫째는 세계 안에서 서로 투쟁하는 선의 원리와 악의 원리라는 이원론적 표상, 즉 모든 선은 신으로부터 나오고, 모든 악과 죄는 반신(反神)으로부터 나온다는 것과, 둘째는 일원론적 표상, 즉 오로지 선만 존재하고,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존재는 선하다. 악은 선의 결핍이거나 존재의 파괴이다)는 것과, 셋째는 변증법적 표상, 즉 악은 역사 안에서 이런 저런 방법으로 선에 봉사한다는 것이다.6)

 

  1)이레네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

  

  교부 이레네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을 선의 결핍으로 보았다. 하나님은 존재하는 것을 선하게 창조했기 때문에 악의 원인이 아니며, 도덕적인 악은 인간의 행위이고, 물리적인 악은 선을 위한 교육과 영혼의 정화 수단으로서 하나님에 의해 허용된다. 형이상학적 악(마귀)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계획에 봉사한다.7)

 

  2)종교개혁자들

 

  신정론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대답은 인의론(認義論)이다. 하나님은 죄인을 의롭게 함으로써 자신을 의로운 자로 입증한다. 불의한  죄인들을 은총으로 의롭게 함으로써, 하나님은 자신의 의(義)를 입증한다.

  몰트만에 의하면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하나님 변호(신정론)를 인간의 법정 앞에서 후퇴시켰다.8)

 

  3)고대 프로테스탄트 정통주의와 계몽주의

 

  몰트만은 고대 프로테스탄트 정통주의와 계몽주의의 시대에 와서 비로소 악과 고난에 대한 물음이 일반적 세계통치의 틀 안에서, 다시 말하면, "자연신학" 안에서 제기되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한 섭리에 대한 경건한 신뢰와 낙관주의적 세계관을 가지고 신정론에 대해 대답한다. 하나님은 악을 허용하지만, 이를 용납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악을 조종하여, 분명히 악이 신앙하는 자들에게 선을 위해 이바지하도록 한다. 하나님은 악에게 그 한계선을 설정하고, 악은 세계의 마지막 때에 그의 영광의 나라에서 완전히 극복될 것이다. 9)

 

 

  Ⅲ. 신정론에 대한 몰트만의 이해

 

   1. 하나님의 창조와 함께 주어진 악(고난)

 

  대개의 신학자들은 악의 기원에 관한 창조기사의 주석에서 아담의 타락과 유혹자의 세력만을 보는 반면, 칼 바르트는 그것 이전의 다른 더 근본적인 악의 실재, 즉 '혼돈'을 보았다(창 1,2). 바르트는 이를 무성적인 것(das Nichtige)이라고 부른다. 그에 의하면 이것은 "하나님도 아니고 하나님의 피조물도 아니다. 그것은 "제3의 방식으로" 다시 말하여 "무(無)로서",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서"(nicht-seiend) 존재한다. 인간의 범죄나 악마의 활동도 바로 이 혼돈(무성)에서 비롯한다. 이 혼돈은 하나님이 창조하지 않은 것으로서 형태도 없고 본래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지만 존재한다. 이 혼돈은 창조와 독립적으로 미리 존재하거나 하나님과 구별된 실재도 아니며 우주가 조화되기 이전의 재료의 상태도 아니고 혼돈과 공허, 무성, 소망없는 지구의 상태를 가르킨다.10)

  이러한 바르트의 견해와 달리 몰트만은 악의 기원을 하나님에게 소급한다. "하나님이 그 본질 자체에서 영원한 사랑이시며, 고난당하는 사랑과 자기희생이라면, 악은 하나님과 함께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지, 창조나 죄의 타락과 함께 비로소 주어진 것일 수 없다"11) 그러므로 몰트만에 따르면 "고난의 경험의 뿌리는 창조된 세계 자체의 한계성에 있다. 태초의 창조가 선과 그리고 악의 역사에 대하여 개방되어 있다면, 태초의 창조는 고난을 당할 수 있으며, 고난을 불러일으키는 창조이기도 하다."12)

 

   2. 고난 속에 계신 하나님(하나님의 세키나)

 

  몰트만은 하나님의 자기 낮추심(Schechinah)에 관한 초기 랍비 학파의 이론과 카발리아 학파의 세키나 개념을 통하여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고통 당하시며,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 자기 구분이 이루어지는 것을 강조한다. 즉 하나님은 자기 낮추심을 통하여 이스라엘 안에 현존하시고 이스라엘과 함께 박해를 받으며, 하나님은 그의 "내주"(세키나)를 통하여 친히 그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이다.13)

  함께 고난받는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랍비적, 카발라주의적 표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사 안에서 하나님의 수난이 계시된다는 그리스도교적 표상 안에 그 병행요소를 갖는다. 하나님의 사랑의 고통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고난받고 버림받은 모든 사람에게 계시된다. 이를 삼위일체론적으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은 버림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그의 영원한 사귐을 전달하기 위하여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뒤따라서 십자가로 향한다. 아버지가 아들을 "내어 준 것"(롬 8: 32)은 그리스도가 자비롭고 함께 고난받으며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죽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뜻한다. 그의 고난은 신적인 고난, 다시 말하면, 연대하고 구원하는 고난이다.14)

 

   3. 고난없는 희망(종말론적 희망)

 

  몰트만은 악에 대한 하나님의 지배, 더 이상 악이 지배하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소망한다. 고난당하는 피조물의 고난을 함께 괴로워하며 하나님께서 정말 의로운 하나님으로 나타날 역사의 미래를 기다리는 기다림과 희망을 말한다. 몰트만은 예수의 십자가에서 그 희망을 찾고 있다.

  고통중에서 하나님을 향해 외치는 자는 알든 모른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절규와 함께 외친다 :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을 깨닫는 자가 즉시 느끼는 점은 하나님이 저 하늘에서 신비하게 마주 바라보는 자가 아니라 매우 인간적인 의미에서 그와 함께 소리치는 인간적인 하나님이요, 그 자신이 무어라고 말할 수 없을 때에 자신 안에서 부르짖고 자신을 대신하여 탄식할, 같은 감정을 지닌 영이라는 사실이다. 우리의 고난의 심연과 죄악의 지옥 안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영원한 사귐을 가져옴으로써, 우리가 고통 중에서도 침몰하지 않고 여기서든 저기서든 고난을 생명으로 바꾸어 놓게 하는 것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의 위로이다.15)

 

 

[주]

 

1) 이신건, 『조직신학입문』, (한국신학연구소, 1993), p.70.

2) 위르겐 몰트만,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역사』(이신건 역,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98), p.72.

3) 위르겐 몰트만, 『하나님의 체험』(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82), p.12∼15.

4) 위르켄 몰트만,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역사』(이신건 역,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98), p. 77.

5) Ibid., p. 75.

6) Ibid., p. 73.

7) Ibid., p. 75.

8) Ibid., p. 75.

9) Ibid., p. 76.

10) K. Barth, KD, Ⅲ/3, 402이하.(이신건 『조직신학입문』안에서 재인용)

11) 위르켄 몰트만,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 1982), p 49.

12) Ibid., p 49.

13) Ibid., p. 42.

14) 위르겐 몰트만,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역사』(이신건 역, 대한기독교서회 1998), p. 75.

15) Ibid., p. 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