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이해: 인간의 구성

   

전 영 욱(Th.M)

 

 

Ⅰ. 들어가는 말

 

과학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인간 소외 현상은 개인이나 특정 집단에 국한되지 않고, 전체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명제 아래 이루어졌던 자연에 대한 과학 기술적인 지배는 인간의 해방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학 기술 자체가 인간을 지배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인간을 기계화하며, 억압하며, 소외시킨다.1)

사람의 주체를 정신화하고 사람의 몸을 도구화하는 일반적 경향은 서구의 거대한 문화  속에 너무도 깊이 뿌리박혀 있다. 이것은 기계를 사람의 몸 안에 끌어들이고 사람의 뇌를 컴퓨터와 연결함으로써 병을 극복하고 사람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프로그램으로 발전되었다. 또한 죽어야 할 몸을 극복하거나 제거한다는 생각과 함께 사람의 성적인 번식을 극복하거나 없애버리려는 희망과 프로그램들이 생겨났다.2)    

이것은 몸과 영혼을 구분하는 기계론적 사고방식과 이원론적 사고방식에서 비롯한다. 그러므로 현 시점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3)라고 묻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역사적으로는 많은 접근 방법을 통해 인간에 대한 논의가 이어져 왔다. 그 중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동시에 역사적으로 가장 많이 시도된 접근 방법은 "몸과 영혼"이란 도식이다. 여기서도 이 방법을 통하여 물음을 전개해 나가고자 한다.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은 "우리는 몸을 제거하려는 문화사의 경향을 모든 고통의 원천이라고 판단할 수 있고, 불완전한 창조를 새롭게 구성하기를 바라는 오래된 꿈의 성취라고 볼 수도 있다. 우리가 새로운 출발점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영혼과 몸 사이의 갈등은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줄 것이다."4)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본 소고는 전통적인 입장에서 바라본 인간 이해를 소개하고, 거기에 몰트만의 인간 이해를 비교함으로써 인간 이해를 새롭게 하고자 한다.

     

 

Ⅱ. 전통적인 인간에 대한 몰트만의 이해

 

1. 플라톤의 '영혼의 우위'

 

플라톤(Platon)은 2천 년 전에 일찌기 그의 철학에서 몸과 영혼을 엄격히 분리하였다. 이것은 몸과 영혼의 차이가 크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몸보다 숭고하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영혼은 늘 몸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몸에 거슬러 몸을 통제할 수 있다. 그리고 몸은 영혼의 도구나 매개물이 아니라, 영혼을 방해하고 심지어 오염하기까지 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인간은 몸으로부터 분리되어야 깨끗해진다. 감각적인 지각은 영혼을 제한하며, 영혼이 진리와 접촉하는 것을 막는다.5)

영혼은 욕망으로 생긴 몸이라는 감옥 속에 갇혀 있어, 창살을 통해 바깥을 내다본다. 유일한 자유의 길은 몸의 감각적인 작용에서 벗어나고 감각을 통해 진리를 추구하려는 모든 노력을 포기하는 데 있다. 그래서 플라톤은 죽음조차도 영혼이 몸으로부터 벗어나는 행복한 탈출의 과정으로 보았다. 영혼과 몸은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해 있기 때문에, 다른 세계를 바라보아야 한다. 영혼은 이 지상의 현실보다 먼저 존재해 있기 때문에 지상의 몰락과정에 편승하지 않는다. 몸은 사라질 수 있으나 영혼은 계속 존재한다. 영혼은 영원한 이데아의 세계, 정신적인 세계, 신적인 세계와 관련맺고 있다. 그래서 플라톤에게서는 영혼과 윤회와 재탄생의 사상도 발견된다.6)   

또한 플라톤은 죽음을 통하여 "영이 몸으로부터 분리"된다고 말한다. 죽음이 사람에게 필연적인 것이라면, 사람은 죽음을 그의 신체적 감성들을 통하여 지각한다. 그러므로 사람에게서 죽음을 초월하는 것 곧 영혼은 신체적 감성들을 통하여 지각될 수 없고, 오직 직접적인 자기의식 속에서 지각될 수 있다. 이 자기의식은 삶 속에서 언제나 몸의 죽음에 대한 명상과 결부되어 있다. 영혼은 욕구와 고통들을 가진 몸을 떠나서 자기를 몸에 대하여 주권자처럼 대립시킬 때, 이 분리는 삶 속에서 진행된다. 죽음은 사멸하는 것과 불멸하는 것, 인간의 몸과 영혼을 분리한다. 인간의 본래적인 삶은 영혼 속에 있다. 그것은 신적인 불멸과 상응하기 때문에 인간은 불멸을 경험한다.7)

플라톤의 '죽음의 명상'은 영혼의 우위를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사상에 근거한 삶의 태도는 스토아의 삶의 철학 속에 나타난다. 행복과 고난, 건강과 질병, 삶과 죽음에서 흔들리지 않는 감정과 의연한 태도, 영혼의 무감성(apatheia) 속에 평안(atarxia)의 힘이 있다. 그러나 플라톤의 '죽음의 명상'은 신체의 저질성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몸의 삶으로부터 생동적인 관심을 빼앗으며, 몸을 영혼의 대수롭지 않은 껍질로 하락시킨다. 그것은 몸을 마치 땅의 찌꺼기로 탈혼화(脫魂化)하며, 이 찌꺼기를 가지고 있는 것을 부끄러운 것으로 생각하게 한다.8)

몰트만은 교회의 신학이 '영혼 불멸'의 관념을 일찍이 받아들였고, 부분적으로 오늘까지 지배하고 있지만, 몸의 차별과 멸시와 탈혼화(脫魂化) 때문에 이 관념은 성서의 창조신앙과 결합될 수 없다고 비판한다.9)

 

2.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인간관'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는 영혼을 더 높은 '실제'로 이해하지 않고 사물들의 세계 속에 있는 것과 같이 사람의 육체 속에 있는 참된 '주체'로 이해한다. 그는 몸-영혼의 이원론을 근대의 주체-객체의 이분법으로 바꾼다. 데카르트는 감성적 지각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유'를 통하여 사람의 주체가 자기 자신을 확인한다면, 감성적 지각과 함께 사람의 몸은 객관적 사물들의 영역으로 전락하며, 이 사물들의 특징은 사유하는 주체에 비하여 '물체적 연장'에 불과하다고 말한다.10)

데카르트는 매우 분명하게 몸과 영혼을 분리하였다. 그는 영혼과 몸을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으로 대치시켰다. 정신은 분할할 수 없으나 몸은 분할할 수 있다. 데카르트는 영혼과 몸을 '사유하는 본체'와 '연장적인 본체'로 구분하고, 인간의 몸을 복잡하고 생동력이 있는 기계로 묘사한다. 영혼은 의지와 오성, 의심과 상상력 등을 모두 포함하는 사유작용이다. 그래서 데카르트가 이해하는 인간은 마치 '기계 속에 들어 있는 유령'과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11) 사유하는 사물이 아니라 연장된 사물에 불과한 몸은 기계와 같다. 즉 당시에 가장 복잡하고 가장 놀라웠던 기계인 시계와 같다.12)

그렇지만 그는 사유하지만 확대되지 않는 영혼과 확대되지만 사유하지 않는 몸과의 결합을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모든 것의 결합"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배 안에 있는 선장'의 모델을 사용한다. 그러나 영혼과 몸의 결합은 선장과 배의 결합보다 훨씬 더 강하다. 선장은 배에 생긴 구멍을 자신의 바깥에서 관찰할 수가 없지만, 인간의 영혼은 자기 몸에 생긴 상처를 확인하고 관찰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고통과 불안을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데카르트는 영혼이 몸에 첨가된 것이라는 이전의 견해를 수정했다. 몸이라는 기계도 우리와 동일한 감정과 욕망을 알며 진정한 인간을 형성할 수 있게 한다. 이리하여 데카르트는 인간의 통일성도 강조하기에 이른다. 인간은 영혼과 몸의 통일으로서 자기 충족적인 전체, 하나의 본체이지만, 인간의 전체성에서 볼 때는 불완전한 본체이다. 그렇다면 이 두 본체가 어떻게 결합되어 하나의 완전한 본체를 이루는가? 데카르트는 영혼과 몸이 송과선이라는 기관을 통하여 상호작용한다고 보았다.13)     

연장하지 않고 사유하는 영과 사유하지 않고 연장하는 물체적 대상들의 관계는 데카르트에게 일방적인 지배의 관계와 소유의 관계로 묘사된다: '나는' 사유하는 주체 '이며', '나는' 나의 몸을 '소유하고 있다'. 나는 명령하고 이용하는 입장에서 나의 소유물인 나의 몸에 대하여 대칭하여 서 있다.14)

그러나 데카르트의 이러한 견해는 그 이후 많은 철학자들의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사유하는 주체와 연장하는 사물이 대립적으로 규정될 경우, 영혼과 몸의 결합을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연장하지 않는 영혼이 연장하는 몸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 또한 사유하지 않는 사물이 어떻게 사유하는 사물에게 작용할 수 있는지? 비공간적인 영혼이 어떻게 특수한 공간적 육체 속에 거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몸의 유일한 객관적 표지는 연장이라고 생각할 때, 모든 다른 감각적 지각들, 예를 들어 냄새, 색깔, 맛, 음성 등은 주관적인 인상들이 되어 버린다. 그렇다면 몸의 감각적 지각들은 어떻게 판단되어야 하는가? 사람의 주체성이 연장하지 않는 사유 속에 자리잡고 있다면, 사람의 몸은 기계와 자동기계들의 대상적 세계로 전락한다. 구체적이고 사유하는 나와 몸의 결합은 우연적인 것이며, 나에게 중요하지 않게 된다." 양자의 상관관계는 철학적으로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우연적인 것이다. 영혼과 몸의 결합은 의지일 뿐이다.15)

그러나 영혼과 몸의 결합은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고유한 본질적인 측면이 아닌가? 진정한 인간의 육체성은 이미 영혼을 함축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사람을 정신화하는 데카르트의 방식은 육체를 거짓된 비정신성 속으로 추방하는 대가를 치루고써야만 얻어질 수 있다.16)   

 

3. 칼 바르트의 '영혼과 몸 이해'

 

칼 바르트(Karl Barth)는 몸과 영혼에 대한 질문을 플라톤처럼 죽음과 관련하여 제기하지 않으며, 또한 데카르트처럼 사유하는 주체의 자기 확실성과 관련하여 제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인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견해와 하나님의 영에 대한 경험의 신학적 맥락에서 이 질문을 제기한다. 영혼과 몸에 대한 바르트의 견해는 "하나님의 영을 통하여 사람은 주체이며, 물질적 유기체의 형태요 삶이며, 자기의 몸의 영혼이다. 그는 완전히 그리고 동시에 두 가지인데, 이 두 가지는 지양될 수 없는 상이성과 분리될 수 없는 통일성과 파괴될 수 없는 질서 속에 있다."라고 말한다. 이 기본 명제는 사람을 "그의 몸의 영혼"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영혼과 몸이 질서잡힌 통일성을 형성하는 것이며, 이 통일성의 질서는 위 아래의 질서이다. 영혼은 '다스리고' 몸은 '섬긴다.' 영혼은 '앞서가고' 몸은 '그의 뒤를 따른다.' 영혼은 '위에' 있고 몸은 '아래' 있다. 영혼은 '첫 번째의 것'이고 몸은 '두 번째의 것'이다. 영혼은 '지배하는 자'이고 몸은 '피지배자'이다.17)

이 "파괴될 수 없는 질서"는 하나님의 영을 통하여 설정되었다.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결정된 영혼의 몸에 대한 관계는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지배관계에 상응한다. 영혼은 그의 몸에 대한 지배를 통하여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지배에 참여한다. 바르트는 사람의 삶의 행위를 단지 사유와 의욕이라고 규정한다. 그는 사람의 존재를 자신의 몸의 통치 영역 안에 있는 지배자의 존재라고 규정한다. 자기 자신을 지배하고, 다스리고, 사용하고, 자신을 정돈하고, 자기 자신을 결단하는 것이 참으로 사람다운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의 몸에 대한 영혼의 지배는 하나님의 지배의 표현이요, 사람의 자기지배는 하나님의 지배의 유비이다.18)

바르트의 신학은 신학적 주권론이다. 지배하는 아버지와 순종하는 아들의 내재적 삼위일체의 질서와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지배의 외적 삼위일체의 질서는 서로 상응한다. 우주론에서 땅에 대한 하늘의 관계, 심리학에서 육체에 대한 영혼의 관계, 인간학에서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이 질서에 상응한다. 이 지배구조들을 기술할 때, 바르트는 언제나 '하늘과 땅', '영혼과 몸', '남자와 여자'를 동일한 도식에 따라 다루었던 고대의 형이상학자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를 추종한다. 이 형이상학자들은 우주에서 로고스의 조화된 상응들을 보존하기 위해 이렇게 하였다. 그러나 최근의 우주론, 심리학, 인간학의 발전은 이와 같은 고대의 상응 관계들을 이미 오래 전에 버렸다. 그러므로 이 상응 관계들을 다시 받아들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하늘-영혼-남자"라고 하는 상부 구조에 지체들을 결합하는 것은 비웃음을 산다. 그렇다면 "땅-신체-여자"라고 하는 하부 구조에 지체들을 결합하는 것은 얼마나 더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겠는가! 이와 같은 성적으로(sexistisch) '질서잡힌' 세계가 평화로운 세계라고 말할 수는 결코 없다.19)

 

 

Ⅲ. 몰트만의 인간 이해      

 

1. 먼저, 몰트만의 인간 이해는 구약성서의 인간 이해에 근거해 있다. 그러므로 구약성서의 인간 이해에 관한 몰트만의 설명을 옮기어 놓기로 하자. 영혼과 몸의 인간학적인 구분은 구약성서의 전통들에서 낯선 것이다. 왜냐하면 사멸하는 존재와 사멸하지 않는 존재 사이의 존재론적 구분이 낯선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구약성서의 전통에서 사람은 언제나 특수한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자기를 경험한다. 좁은 범위에서 그것은 소명과 해방과 계약과 약속의 역사이다. 보다 더 넓은 지평에서 그것은 세계의 창조와 구원의 역사이다. 이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사람은 언제나 '전체'로서 나타난다. 영혼과 몸은 사람의 구성요소로서 분석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구약성서의 인간학은 정의를 내리기보다 이야기를 한다. 이 이야기들 속에서 사람은 개념들을 통하여 확정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삶의 관계들 속에서 묘사된다.20)

즉 이른바 "영적인 자극들"이 상이한 "육체의 부분들" 속에 있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그의 육체를 가지고 생각한다. 뇌와 몸의 기관들은 서로를 가르친다. 사람의 '내면'(qereb)은 내면의 기관들을 통하여 나타난다. 흔히 콩팥은 양심의 장소이고(시16,7), 하나님은 사람의 "심장과 콩팥을" 시험한다(시7,10). 간이 깊은 슬픔의 기관으로 불리기도 한다(애가2,11). 사람은 그의 쓸개에서 '노한다.' 사람의 생명은 그의 호흡과 피에 있다. 심장은 의지와 욕구의 기관으로 불릴 수도 있다. 여기에서 감정과 생각들과 결단들은 그것들을 나타내는 수많은 몸의 기관들과 결합된다.21) 이것은 구약성서의 인간학에서 영혼과 몸, 내적 중심과 외적 중심은 상호간의 관련과 상호간의 작용 속에서 이해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의 삶의 행위를 사유와 의욕으로 제한하고 그것이 영혼과 뇌 속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구약성서에서 낯선 것이다. 영혼의 우위란 것은 없다. 오직 영혼과 몸, 사람의 안과 밖, 중심과 통일성은 계약과 사귐, 상호작용, 상호의 돌봄, 사려, 약속, 일치, 친구관계의 형식들 속에서 파악될 수 있다.22)

 

2. 또한 몰트만의 인간 이해는 그의 삼위일체론과 긴밀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삼위일체론의 관점에서 인간을 설명하는 몰트만의 생각을 들어 보기로 하자.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통일성은 그의 지배의 주체성이나 주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독특하고 완전하며 순환적인 사귐 속에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 위와 아래, 앞과 뒤, 앞의 질서와 뒤의 질서가 있음을" 인정할 수 없다. 따라서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피조물과 맺는 관계는 일방적인 지배의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영원한 사랑의 풍요함 속에서 서로 순환하는 '사귐의 관계'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사귐의 관계는 상호간의 필요와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사람의 참된 사귐은 '삼위일체의 형상'으로 규정된다. 그러므로 영혼과 몸, 의식과 무의식, 의지적인 것과 무의지적인 것 등 사람들이 인간학적인 기본 차이라고 규정하는 것을 상호간의 침투와 구별을 가진 통일성의 순환적 관계로 보아야 할 것이며, 일방적인 지배의 구조들을 이 통일성 속에 집어넣어서는 안 될 것이다.23)

 

3. 몰트만은 삶의 형태를 유기체적이고 전체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영 안에 계신 하나님의 현존은 의식에만 있지 않으며, 영혼이나 이성과 의지의 주체성 속에만 있지 않다. 그것은 사람의 모든 유기체 속에, 다시 말하면, 몸과 영혼을 가진 사람이 그의 환경 속에서 전개하는 역사적 '형태' 속에 있다. 사람의 형태는 사람-환경의 장(Feld) 안에서 생겨난다. 그것은 사람의 출생학적 구조 안에도 있지만 그가 태어난 지역 안에도 있는 자연의 차원이다. 또한 그것은 사람이 자라나는 '사회'와 '문화'이다. 그것은 사람의 유래를 형성하고 그의 미래를 제안하는 '역사'이다.24)

이러한 사람의 형태는 자기와 동일화될 수 있고 또 동일화할 수 있는 환경들과의 관계의 형식이다. 직업의 형식들, 나이, 삶의 역사들은 환경들과의 지속적인 접촉을 보여주며, 사람의 구체적인 형태의 개방된 한계들을 보여준다. 사람의 형태는 이러한 외적인 구조들 속에서만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 구조와 교통하며 몸과 영혼,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 중심과 주변이라고 묘사될 수 있는 '내적인 구조'들 속에서도 발전한다. 이것들은 서로 순환적이며, 유기체적이고, 서로 침투한다. 가령, 몸이 '그의' 영혼에게 정보를 주는 동시에 영혼이 '그의' 몸에게 정보를 준다. 무의식적인 것은 언제나 의식적인 것에게 영향을 주고, 무의지적인 것이 모든 의지적 행위 속에 현존하는 것처럼, 몸은 언제나 영혼에게 말한다. 영혼은 인지와 행위들을 통하여 몸에 대하여 작용하며, 몸은 몸의 언어를 통하여 영혼의 의식에게 말한다. 이 둘은 상관관계를 형성한다.25)

또한 사람의 형태는 사람과 환경, 몸과 영혼의 장에서 인격의 중심화(Zentrierung)로 나타난다. 이것은 "섬기는 몸의 다스리는 영혼" 개념이 아니다. 이것은 사람의 인격이 그의 생동적 형태 속에서 변화되는 중심화를 말한다. 이 중심화는 특수한 관심들의 근거 위에서 생겨난다. 사람의 삶은 관심되어진 삶이요 참여된 삶이며, 용납된 삶이요 사랑을 받은 삶이다. 그러므로 중심화 없는 삶은 있을 수 없다. 이 중심화는 추상적인 인격이 아니며, 삶의 역사 속에 나타난 구체적 인격이다. 구체적 인격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기를 신뢰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 약속을 지키는 것은 곧 자기의 성실함 속에서 일어난다. 이러한 성실함을 통하여 사람은 시간 속에서 그의 정체성을 얻는다. 이와 같은 인간의 생활사적 정체성은 그의 '이름'을 통하여 표시된다. 사회적인 공동의 삶은 약속과 약속의 이행, 협정과 신실성의 두터운 그물 속에서 이루어지며, 신뢰의 이 구조 없이는 존속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의 형태화"는 내적, 외적으로 신뢰성과 성실함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삶의 역사는 신뢰성과 성실함으로 규정된다.26)

 

4. 마지막으로 몰트만은 성령의 활동 안에서 인간의 삶을 고찰한다. 현대인은 "자연 속에 있는 영"에 대한 통찰을 상실하였고, 사람을 그 주변의 자연과 구분하였다. 또한 "몸 안에 있는 영"에 대한 통찰을 포기하였으며, 영 안에서 단지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대립하고 자기를 자기의 몸으로부터 구분하는 성찰의 능력만을 보았다. 그 결과로 사람 안에 있는 영을 왜소하고 일면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므로 사람 안에 있는 영을 다시 자연의 장(Feld)과 그의 신체성 안으로 통합하기 위하여 몰트만은 우주적 영에 대한 포괄적 이해를 시도한다.27)

사람의 의식은 성찰된 영, 다시 말하면, 그의 몸과 영혼의 조직의 의식화(Bewusstwerden)이며, 사회와 자연 속에 있는 사람의 유기체의 교통의 의식화이다. 사람의 신체성은 '창조적인 영'에 의하여 침투되고 생동하게 되며 형성된 신체성28)이다. 사람은 '영-형태'이다. 몸과 영, 그들의 형태 안에 활동하는 영은 '창조적인 영'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우주적 영'이다. 그러나 이 영은 성서의 언어 사용에 의하면 '성령'이 아니다. '성령'은 구원과 성화의 영, 새롭게 창조하는 하나님의 현존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영이요,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귐 속에서 '형태'가 되게 하는(빌2,6) 하나님의 영이다. 성령은 창조의 영을 배제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것을 변형시킨다. 그러므로 성령은 사람 전체를 사로잡으며, 그의 감정과 몸은 물론 그의 영혼과 이성도 사로잡는다. 성령은 신자들을 그리스도와 "같은 형태를" 가지게 함으로써(롬8,29), 사람의 모든 형태를 새롭게 형성한다.29)      

성령은 '교통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삶의 교환이며, 사귐의 삶이다. 개인의 삶은 자연적이며, 사회적이다. 영은 삶을 장려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하나님, 곧 영은 공통의 삶을 생기있게 하는 '사귐의 신성'이다. '사람 안에 있는 영'은 공동의 영인 동시에 각 사람의 인격에게 고유한 형태와 권리를 부여한다.30)

그리고 성령은 인간의 삶을 긍정적이게 한다. 인간적인 삶은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사람은 삶을 정열적으로 사랑할 때 더욱 더 강열하게 삶의 고통도 경험한다. 그는 사랑으로 인하여 행복의 능력을 가지는 동시에 고난의 능력을 가지게 된다. 이것은 삶과 죽음에도 해당된다. 삶이 생동적으로 경험되면 될수록 죽음은 더욱 더 치명적으로 경험된다. 사랑하는 삶만이 실망과 대립과 병과 죽음으로 인한 상처에 자기를 내어 놓는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욱 더 강열하게 삶과 죽음, 두 가지를 경험한다. 이것이 행복과 고통, 삶과 죽음을 구분하는 '사랑으로서의 영'이다. 반면에 사람이 사랑을 자기 안에 묻어두거나 파괴할 때, 그는 행복과 고통에 대하여 무감각해진다. 삶과 죽음은 그에게 무관심한 것이 된다. 그는 죽을 수 없게 되지만 정말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삶을 긍정하는 모든 행위 속에 사람은 생동하게 되고 동시에 죽을 수 있게 된다.31)

겨자씨의 비유에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한다. 누가는 "누구든지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리 것이다"(17,33)라고 말한다. 그러나 겨자씨가 땅에 떨어져 희생되어 죽지 않으면 그것은 '혼자' 남아 있다. 그것은 열매를 맺지 못한 채 남아있다. 이것은 '삶 이전의 죽음'이 있음을 뜻한다. 혼자 머물러 있음은 의미 없고, 의미 없기 때문에 희망이 없는 죽음이다. 반면에 생동하는 삶은 상처를 입을 수 있고,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죽음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죽음이고 의미있는 죽음이다. '삶의 영'을 행복과 고통, 삶과 죽음의 '긍정' 속에서 경험한다면, 이미 삶 속에 하나의 죽지 않는 영원한 삶이 있다. 구약성서에서 영은 창조적인 "삶의 영"으로 이해되고, 신약성서에서 성령은 "부활의 힘"으로 이해된다.32)

신적인 부활의 영이 우리 안에서 생동하고 우리가 그것을 깨달을 때에는 지나감이 없는 영속이 이미 시작되며 영원이 순간 속에서 경험된다. 이리하여 인간적인 삶은 너무도 강열하게 생동하게 되어 죽음이 사라진다. "부활의 영" 속에서 이루어지는 영원한 삶에 대한 이 경험은 삶의 기쁨과 죽음의 고통으로 인도하는 "긍정의 영" 안에 있는 인간적인 삶의 경험  속에 반영된다.33)   

     

 

 

 [주]

 

1) H. 마르쿠제, 차인석 역, 일차원적 인간/부정, 삼성출판사, 1997, 52쪽 이하.

2) 몰트만, 김균진 역,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 한국신학연구소, 1996, 291.

3) 몰트만, 전경연, 김고광 역, 인간, 대한기독교서회, 1995, 11쪽 이하.

4)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 292.

5) C.A. 반 퍼슨, 손봉호, 강영안 역, 몸 영혼 정신(철학적 인간학 입문), 서광사, 1985,

   40쪽 이하.

6) 앞의 책, 44쪽 이하.  

7)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 292쪽 이하.

8) 앞의 책, 294.

9) 같은 쪽.

10) 앞의 책, 295.

11) 몸 영혼 정신, 26쪽 이하.

12)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 295.

13) 이신건, 인간론 강의안

14)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 296.

15) 같은쪽.

16) 앞의 책, 297.

17) 앞의 책, 297쪽 이하.

18) 같은 쪽.

19) 앞의 책. 300쪽 이하.

20) 앞의 책, 302쪽 이하.

21) 볼프는 인간의 몸에 있는 각 기관들의 순환적 작용에 관하여 말한다. H.W. 볼프, 문희석 역, 구약성서의 인간학, 분도출판사, 1996, 124쪽 이하.

22)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 303.

23) 앞의 책, 304.

24) 앞의 책, 305.

25) 앞의 책, 306쪽 이하.

26) 앞의 책, 307쪽 이하.

27) 앞의 책, 309.

28) 성서의 전통에 의하면 '신체성'은 하나님의 화해의 종점이며, 세계의 구원의 종점이다.  이러한 신체성은 하나님과 세계의 역사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앞의 책, 290쪽 이하.

29) 앞의 책, 309쪽 이하.

30) 앞의 책, 313쪽 이하.

31) 앞의 책, 315.

32) 앞의 책, 316.

33) 앞의 책, 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