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론의 출발점과 예수의 수난

 

 백명훈(Th.M. 1차)

 

 

1. 예수는 누구인가?

 

1. 위로부터의 기독론

 

칼 바르트는 위로부터의 기독론을 매우 확고하게 옹호하는 학자이다. 초기 바르트(변증법적)의 신학은 인간이 하나님에게로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도달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즉 그리스도는 아래로부터 온 분이 아니라 위로부터 온 분이다. 교회 교의학을 쓴 후기의 바르트는 이러한 경향이 약화된다. 이제 바르트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하나님이다"가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한다"이다. 그래도 바르트는 여전히 위로부터 아래로, 예수의 신성으로부터 그의 인간성으로,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인간인 우리에게로 가는 기독론을 포기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사건은 하나님의 "값없는 은총의 행위"와 "주권적 행위"로서 당연히 위로부터 아래로 가는 것이지 그 반대 방향이 아니다.1) 푈만 교의학, 266.

불트만의 기독론도 역사적 예수가 아니라 들림받은 예수에게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에, 위로부터의 기독론이다. 그러나 바르트와 차이점이 있다. 바르트는 예수가 하나님이므로 그는 내게 의미가 있다고 한 반면에, 불트만은 예수는 내게 의미가 있으니까 그는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2) 교의학, 269.

몰트만에 의하면 위로부터의 기독론은 "예수는 참 하나님인가?"라는 질문의 대답으로 본다. 이러한 하나님에 관한 질문은 한 특정한 하나님 개념을 이미 전제하고 있으며, 이것은 하나님에 관한 질문이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경험과 불멸성에 대한 희망으로부터 출발하였음에 그 원인이 있다. 즉 신적인 본질은 무상하지 않고 죽을 수 없으며, 변화될 수 없고 고난을 받을 수 없으며, 변화될 수 없고 고난을 받을 수 없다는 개념을 전제하고 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규정들은 예수의 비밀과 십자가에서의 그의 최후에 대하여 적용할 경우, 위로부터의 기독론이 해결하고자 하였던 바로 다음의 문제들이 제기된다. 영원한 하나님이 어떻게 허무한 인간 속에 있을 수 있는가? 세계적인 하나님이 어떻게 한 개인 속에 존재할 수 있는가? 변화될 수 없는 하나님이 어떻게 육이 될 수 있는가? 죽을 수 없는 하나님이 어떻게 십자가에 고난을 받고 죽을 수 있는가? 3)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130.

그러므로 하나님에 관한 보편적인 질문과 또 이 질문 속에 이미 주어져 있는 구원에 대한 기대는 초대 교회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을 믿지 않게 되는 근거가 되었다. 하나님에 관한 질문으로부터 예수의 비밀에 이를 수 있는 이 길은 동시에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을 방해하는 거침돌이기도 하였다. 그리스도의 신성이 강조되면 강조될수록, 그리고 이를 위하여 위에서 말한 하나님의 개념을 견지하면 할수록, 하나님과 본질이 동일한 하나님의 아들이 본디오 빌라도에 의하여 십자가에 달린 나사렛 예수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하나님에 관한, 그리고 구원에 관한 질문이 지향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러한 '위'에 관한 질문으로부터 출발할 때, '아래'에 있는 나사렛 예수의 역사를 설명하는 것이 참으로 어려웠다. 이보다 더 어려운 일은 십자가에 달린 그 분이 당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상태를 이해하는 일이다. 4)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130-1.

 

2. 아래로부터의 기독론

 

전형적인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은 틸리히와 판넨베르크의 기독론이다. 틸리히의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은 인간의 상황과 접촉하는 그의 상관관계 신학의 귀결이다. 틸리히의 "비하적 기독론"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라고 하는 위로부터의 기독론의 역설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본질적으로 인간적인 모습이 실존의 제약 아래서 출현했다고 하는 역설"로부터 출발했다. 틸리히가 제시한 역설은 예수 그리스도 안의 인간 내재적 역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인간 속에 구현되어 있는 하나님의 모습을 대변했으나", 그와 동시에 그분은 타락한 인간의 "제약" 아래서도 살았다는 역설이고, 그분은 당위적 인간이면서 동시에 현실적 인간이기도 하였다는 역설이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위로부터의 기독론의 역설: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참 인간'이다 대신에 다른 역설: '그리스도는 본질적 인간-실존적 인간이다'가 등장했다.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지만 참 인간이기도 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은 참 인간이지만 현실적 인간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존재 자체"인 하나님처럼 "본질과 실존의 대립의 너머에" 있지 않았다. 그 대립은 그의 안에 내재되어 있다.5) 교의학, 270.

판넨베르크는 그의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을 틸리히와 다르게 구상했다. 위로부터의 기독론은 이미 예수의 신성을 전제한다. 그러나 기독론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바로 예수의 신성에 대한 고백의 근거를 해명하는 데 있다. 위로부터의 기독론의 잘못된 점은 그것이 하나님의 입각점에 서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판넨베르크의 구상인 "역사로서의 계시"에서 볼 때, 하나님과 예수의 신성은 오직 역사 속에서만 계시된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아래로부터, 곧 역사적 인간 예수로부터 그의 신성의 인식으로 상승하는 기독론"만이 가능할 뿐이다. 예수의 신성 혹은 "예수와 하나님의 일치"는 "죽은 자들로부터 그를 일으킨  하나님의 사건"에 의해 입증된다. 그러므로 예수의 모든 지상생애는 그의 "행동"과 "운명"에서 철두철미하게 그의 하나님됨과 하나님의 계시였다.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의 계시로서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개방성을 그 본질로 가지는 인간 존재의 계시이기도 하다. 예수가 자신의 행동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친교를 중재하고 그의 운명을 통하여 이러한 하나님과의 친교를 모범적으로 미리 실천함으로써 그 계시는 예수에 의해 능동적으로 성취되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향해 열려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계시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위한 인간의 개명(開明)에 있다.6) 교의학 272-3

몰트만에 의하면 아래로부터의 기독론, 즉 인간의 자기 실존에 관한 질문에서부터 출발하여 예수에 관하여 질문하는 것은 위로부터의 기독론, 즉 하나님에 관한 질문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 속에서 답변을 방해하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 왜 하필이면 나사렛 예수가 윤리적 모범이요, 혹은 참된 인간 존재의 구원하는 원상이어야 하는가? 인간성, 세계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양심의 평화에 관한 갈망은 왜 모세, 소크라테스, 석가모니 그리고 많은 다른 사람의 애기를 듣지 아니하고 하필이면 예수의 애기를 들어야 하는가? 인간성에 관한 보편적 질문은 예수에게 답변을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에 관하여 단지 상대적으로, 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으로 애기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참된 인간 존재의 여러 가지 구상들이 인간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관심에서 오는 것은 계몽주의 시대에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기독교의 '절대성의 요구'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흔히 우리는 다음과 같은 답변을 들을 수 있다. 즉 우리는 정신의 역사 전체에서 더 나은 절대성의 요구를 발견하지 못하였든지 혹은 우리는 우연히 그리고 숙명적으로 기독교적 전통의 역사에 속하여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에게서 유일한 하나님의 궁극적 계시를 발견하였고, 이리하여 세계를 기독교화하여 오늘날에도 존속케 한 초기 기독교적 신앙의 확실성을 담보로 잡고 주연을 베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에 대한 결정적 불신앙을 야기하거나 예수를 일련의 영웅이나 인간성의 조력자 중의 한 사람으로 격하할 수도 있다. 위에서 언급한 근거에서 예수의 삶으로부터 출발하는 최근의 모든 기독론은 예수의 이중의 사람의 결말(즉 십자가와 부활)에서 문제의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는데, 이 문제는 위로부터의 기독론과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이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와 비슷하다. 오히려 자기의 방법에 따라 역사와 이 사회와 그리고 살아 있는 자들의 인간성에 관한 질문을 초월하여 있는 십자가에 달린 그 분의 입장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7)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143-5.

 

3. 메시아적 기독론-앞으로부터의 기독론

 

몰트만에 의하면 위로부터와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은 그 출발점에서 하나님 나라의 미래 역사를 중요한 관심사로 삼는 횡적인 방향을 취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원을 중요한 관심사로 삼는 종적인 방향을 취하고 있다.8) 예수 그리스도의 길, 109. 그래서 몰트만은 하나님 역사의 종말론적 기독론을 주장한다. "종말론적"이란 말은 장차 올 세계구원, 곧 모든 민족들의 메시아적 평화의 나라가 실현되고 창조가 영광의 나라로 완성됨으로써 오게 되는 세계 구원을 가리킨다. "종말론적 역사"란 말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선택, 약속과 계약을 통하여 이 미래를 지향하며 이 미래의 지평 속에서 경험되고 작용하는 역사를 가리킨다. 그것은 삶의 약속 아래에 있는 역사이다. 9) 예수 그리스도의 길, 110.

여기서 제기되고 있는 질문은 "영원한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인간인가?" 혹은 "인간 예수가 신적이라고 명명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아니라 오히려 "당신이 오실 그 분입니까, 아니면 우리는 다른 자를 기다려야 할까요?"라는 질문이다. 이것은 세례요한의 질문이었으며, 마태복음에 의하면 예수는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가서 너희가 듣고 본 적을 요한에게 알리라. 맹인이 보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 대하여 분개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마 11:4ff). 이 답변은 하나의 간접적인 답변이다. 예수의 부근에서, 그리고 그의 말씀 가운데서 발생하는 사건들은 예수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한다. 왜냐하면 이 사건들은 메시아적인 시간의 표지들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 혹은 참된 인간성의 모범이 아니라, 그 안에서 그리고 그에게서 시작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가 그의 가치를 형성한다. 여기서 이야기되고 있는 질문의 지평은 구약성서의 약속들을 통하여 열려진 역사의 미래이며, 하나님 나라에 대한 메시아적 기다림이다. 이 문제의 지평은 예수를 그의 말씀과 표지들과 함께 '오실 그분'으로 표현하고 있다. 신적인 천상계가 그 안에서 이 땅 위로 온다든지 혹은 자기 자신을 찾는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10)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146-7.

지금까지 우리는 예수의 인격과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전제로서 그리스도에 관한 상이한 형태의 질문을 고찰하여 보았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확증할 수 있었다. 즉 보편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할 때, 예수의 구체적인 인격과 역사를 드러내어 줄 수도 있으나 또한 폐기할 수도 있으며, 이리하여 우주적인 질문의 국면에서는 신앙과 불신앙이 가능해 진다는 사실이다. 성육화된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 혹은 모범적인 인간에 관한 우주적인 그리스도론적 구상은 예수의 유일회적인 인격과 역사를 가리킬 때만이 기독교적일 수 있다. 11)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153.

즉 공관복음서에서 그리스도에 관한 질문이 단지 외부로부터 제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 자신의 입으로부터 우리에게 제기된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예수는 인간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가 누구냐?"고 제자들 자신에게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 질문은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를 과거 구속사의 위대한 인물들의 모습에 따라 다시 살아난 예언자로 생각했던 사실을 보여준다. 베드로의 고백에 대한 예수의 답변이 말하듯이, 예수가 제자들에게 제기한 자기 자신에 관한 질문은 하등의 시험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개방된 질문이다. 이와 같이 공관복음서의 예수는 간접적으로 자기 자신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공관복음에 의하면 지상의 예수는 독특한 개방성 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았고, 그분의 미래를 향하여 말하였다는 사실이다. 공관복음의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불리는 미래를 향하여 살고, 말하고 또 행동한다. 12)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153-5.

따라서 기독론은 본질적으로 종결되지 않았으며 언제나 수정을 필요로 한다. 바로 예수와 그의 역사에 집중함으로써 기독론은 완전히 미래를 내다보며, 또 미래를 향하여 파송한다. 왜냐하면 기독론은 십자가에 달린 그분이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창조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것이 새롭다"는 사실에 대한 근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신앙고백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라는 미래의 희망과 결부되어 있으며, 이로써 참 시작을 그의 종말에 가지게 된다. 13)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158,

 

 

2. 예수의 수난

 

  1.예수와 율법:<하나님 모독자>

 

정말 예수가 자기를 메시아라고 불렀기 때문에 심판을 받고 처형을 받았는지 의문시된다. 몰론 그의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이유는 성전 정화와 성전 파괴의 예언이다. 그러나 그의 선포 전체와 관련하여 볼 때, 예수가 하나님의 모독자로 심판을 받은 것은 당연하다. 그는 구원을 상실한 인간을 향하여 종말론적으로 오실 때, 그는 하나님을 율법의 명령으로부터  자유하며 선행하는 사랑 가운데서 이 인간을 은혜스럽게 긍휼히 여기시는 분으로 선포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선포와 또 예수 자신을 모세와 토라의 권위 이상의 존재로 생각할 수 있게 된다.14)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183. 그는 율법과 전통에서 이해되고, 율법 보호자들에 의하여 인지되는 것과는 다른 하나님을 계시하였다. 율법으로부터의 그의 자유는 바로 죄를 용서하여 주는 행위들에서 그 정점에 이른다. 왜냐하면 은혜를 베풀 수 있는 권한은 오직 심판자들에게 있기 때문이다.15)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184.

율법과 율법의 전통에서뿐만 아니라 예언자와 묵시 문학적인 희망의 양상들의 맥락에서 볼 때, 예수의 출현과 행동은 하나의 새로움이었다. 이 새로움은 반대를 초래할 수 밖에 없었다. 유대교의 기대에 의하면 사람의 아들은 마지막 심판 때에 단지 죄인의 심판자요 의로운 자의 구원자로 출현한다. 이에 반하여 예수는 죄인들과 타락한 사람들에게로 향하였다. 이러한 모습들은 불의에 고난당하고 있는 의로운 자들을 율법에 따라 높이고 율법 없는 자들과 하나님 없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는 하나님의 의의 승리를 대변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이질성과 모순성은 분명히 처음부터 예수의 선포와 삶의 길에 속하였다.16)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185.  

율법 없는 자들과 율법 위반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권리를 이렇게 요구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전통과는 모순되었다. 하나님의 은혜의 법에 대한 전적인 요구는 직접적인 것이었으며, 오직 예수 자신만을 통하여 중재되어 예수가 '나의 아버지'라고 부른 그 하나님에게 달려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는 하나의 이름 없는 자에 불과하였다. 나사렛 출신의 한 목수의 아들에 불과하였던 그 분은 경건한 자들과 지배하는 자들 그리고 그들의 율법과 불가피하게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17)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187.

이러한 면에서 볼 때, 예수의 말씀은 예수와 그 사회의 지배적인 율법 이해 사이에 일어난 신학적 충돌을 의미하였다. 이 충돌로부터 그가 외친 복음과 율법 사이에 하나님의 의에 관한 소송 절차가 일어났던 것이다. 그는 우연히 혹은 불운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없는 자들로 간주되는 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 율법으로 인하여 죽었다. 율법과의 충돌은 그가 버림을 받고 '하나님 모독자'로서 저주받도록 할 수 밖에 없었던 내적인 필연성을 보여 주고 있다.18)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190-1

 

  2. 예수와 권력:<선동자>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위에서 언급한 율법과의 충돌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다. 예수는 스데반과 같이 하나님 모독자에 대한 형벌, 곧 투석 사형을 당한 것은 아니었다. 예수는 로마의 점령군에 의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었던 것이다. 십자가의 형벌은 로마제국에 대한 선동자에 대한 형벌이었다. 십자가의 형벌은 국가 모반에 대한 형벌이었고, 로마 제국의 사회적, 정치적 질서를 교란하는 선동에 대한 형벌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19)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194-5

예수는 단지 예루살렘 내의 평안과 질서라고 하는 전략적이고 시국적인 이유에서 로마인들에 의하여 십자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로마의 평화를 보장하여 주는 로마의 국가신들의 이름으로 십자가에 달렸다. 예수는 빌라도에 의하여 정치적 모반자로 심판받았다. 십자가에 있는 제명은 예수를 가리켜 '나사렛 예수-유대인들의 왕'이라고 칭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다. 첫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다: 예수는 한 열혈당원(Zelot)이었던가? 이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종합적으로 말할 수 있다.20)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196-7.

 

1. 열혈당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는 현재적 상태 및 그의 지배자들과 관계를 끊었다. 그러므로 그는 로마인들에 의하여 '열혈당원들의 지도자'로 십자가에 달렸다. 그러나 그가 관계를 끊은 것은 열혈당원들의 불화한 것과는 전혀 다른 현상이었다. 예수는 하나님의 은혜의 법에 대한 기쁨에서 자유의 나라를 선포하고 뚜렷이 선취하기 위하여 율법성 자체와 관계를 끊었다.

2. 그는 다가오는 하나님의 의를 은혜의 법으로 널리 전파하였으며, 그리하여 열혈당원들과 세리들을 그들의 율법적인 친구와 적의 관계로부터 해방하고자 하였다.21)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205.

3. 그는 열혈당원들과 로마인들에게 심판자와 복수자가 될 권리를 거부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말씀은 율법에 따라 복수하고자 하는 추구하는 그 율법성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였다.

4. 바리새인들과 열혈당원들은 예수의 선포 및 친구와 적들과의 교제에서 그들이 가진 신앙의 종교적-정치적 토대가 공격당한다고 느꼈다. 그들에 대하여 예수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일을 배반하는 '배반자'였다. 예수의 활동과 그들의 반응은 분명한 결과로서 예수를 로마인들에게 넘겨주고 그리하여 십자가에 달리게 하였다.22)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205-6.

5. 예수의 자유와 하나님의 은혜의 법에 관한 그의 선포는 바리새인들과 열혈당원들에게만 해당된 것이 아니라, 로마 평화의 종교적-제의적 그리고 종교적-정치적 기초와 고대 모든 인간의 의에 관한 표상에도 해당된 것이었다. 예수의 복음과 그의 공적 태도는 극히 정치적이었다. 그는 종교적-정치적으로 이해될 수 밖에 없었으며, 비록 그가 이를 통하여 신앙의 의미에서 이해되지 않았을지라도, 종교적-정치적으로 이해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반로마적인 열혈당원들은 물론 반유대적인 로마인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리고 예수는 이러한 종교적-정치적 '놀이의 파괴자'로 활동하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배척당할 수 밖에 없었다.23)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206-7.

 

3. 예수와 하나님:<하나님께 버림받은 자>

 

예수의 죽음은 <아름다운 죽음>이 아니었다. 마가복음 15장 37절에 의하면 그는 발음이 불명료한 소리를 크게 지르며 죽었다. 마가복음 15장 34절은 죽어가고 있는 예수의 외침을 시편 22편 2절의 표현을 빌어서 재연하고 있다,:"나의 하나님 왜 당신은 나를 버리셨습니까?" 이것은 예수의 죽음이라는 역사적 현실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 같다. 우리는 이 본문을 근거로 하여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음을 나타내고 표현하면서 죽었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하고자 한다.24)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210-1

예수는 가끔 하나님을 전적으로 '나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이것은 직접적인 하나님과의 사귐을 표현하고 있다. 이 사귐은 하나님의 은혜의 법으로서 이미 여기에서 죄를 용서해 줄 것을 말하는 예수의 전례없는 요구에 속한다. 예수는 '나의 아버지'라고 감히 불렀던 그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아무런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고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한 채 당한 고난과 죽음을 그가 행한 선포와 삶의 컨텍스트 가운데에서 살펴볼 때, 그의 '하늘에 호소하는 고통'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즉 그것은 하나님이 멀리 계시지 않고 가까이 계시며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라 은혜로운 분임을 아는 가운데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경험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운 가까움을 충분히 의식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고 저주받은 자의 죽음으로 내던져졌다는 이것이야말로 지옥의 고통인 것이다.25)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212-13.

시편 22편에서 죽어가고 있는 예수를 통하여 하소연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시편 22편은 법적인 고소이다. 그가 요구하는 것은 그의 인격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그의 손의 일을 포기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의의 계시를 요구하고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기, 곧 의인의 상태와 함께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신성 그 자체이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부르짖음에서도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자기 연민이나 개인적인 고통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 부름, 곧 법적인 소송이다. 예수가 소송을 제기하고 있는 것은 그 자신, 곧 아버지를 위하여 중재하는 아들에 대한 그의 아버지에 대한 성실에 대하여 특별한 방법으로 고발하고 있다.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말과 함께 문제가 되는 것은 예수의 개인적인 실존뿐만 아니라, 바로 그의 신학적 실존, 하나님에 관한 그의 모든 선포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버림받은 상태와 함께 최종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그가 믿는 하나님의 신성과 또 예수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자 한 그의 아버지의 부성인 것이다. 이와 같은 사태를 고려할 때, 십자가의 고뇌 속에 처한 것은 예수 자신만이 아니라 그를 위하여 예수가 대변하였던 자, 즉 그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시편 22편의 말씀을 빌린 예수의 부르짖음은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 왜 당신을 버리셨나이까?"라는 것을 동시에 의미하고 있다.27)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216-7.

 

3. 예수의 고난의 의미와 실천적 결론

 

1. 하나님의 고난(연대): 그리스도는 우리의 형제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첫째는 우리가 고통당할 때 우리 곁에 있기 위하여, 그리고 우리가 괴로워할 때 우리와 함께 있기 위하여, 이것은 우리가 함께 하는 하나님의 연대이다. 그리스도가 가는 곳에는 하나님이 함께 가고, 하나님 자신의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면, 그리스도는 그와 같이 비하되고 소외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사귐을 가져다 준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배타적으로 그의 고난이 아니라, 포괄적으로 우리의 고난이며 우리 시대의 고난이다. 그의 십자가는 우리의 십자가들 사이에서 형제와 같이 서 있으면서,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고난에 참여하며 우리의 고통을 친히 담당한다는 사실의 표징이 된다. 그리스도는 비하되고 소외되는 자들의 형제가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그들에게 가져오기 위하여, 이러한 비하와 소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므로 그 어떤 고난이라 할지라도 우리를, 함께 고난받는 하나님과의 이러한 사귐으로부터 갈라놓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희생자들과 고난받는 자들과 연대하는 하나님이다.28)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54-6.

 

2. 우리를 위한 고난(대속): 그리스도는 구원자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가 갖는 두번째의 의미는 우리가 죄를 지을 때 우리를 위해 존재하기 위함, 우리에게 죄짐을 벗기기 위함에 있다. 이것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대리이다. 일찍부터 교회는 그리스도의 수난 속에서 세상의 죄를 대신하는 하나님의 속죄를 보았다.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하나님의 종'의 모형에 따라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대리적 고난을 통하여 화해하게 하는 하나님의 아들을 보았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속죄는 절대로 필요한가?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29)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56.

시몬 비젠탈은 그의 책 『해바라기』에서 그가 포로 수용소에 갇혔을 때 죽어가는 한 나치스 친위 대원의 침대에 불려간 일을 보고하고 있다. 그 친위대원은 유대인인 그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하여, 유대인의 대량 총살에 끼었노라고 참회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비젠탈은 살인자의 참회를 경청하긴 했지만, 그를 용서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죽은 희생자의 이름으로 살인자를 용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야기로부터 분명해 지는 점은 그러한 죄의 짐을 지고서 살 수 있기 위해서는 속죄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죄의 용서가 없다면, 죄를 지은 자는 살아갈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자존심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속죄없는 죄의 용서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속죄는 결코 인간의 가능성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일어난 불의는 그 어떤 인간적인 것으로도 '보상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죄에 대한 속죄는 하나님의 가능성인가?30)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57

구약성서에는 속죄제사도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제정한 이른바 '속죄양'이었다.  이 제도는 안수를 통해 백성의 죄를 속죄양에게 전가시켜, 속죄양으로 하여금 죄를 광야로 가지고 가게 함으로써, 백성에게서 죄를 멀리 떼어 놓으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속죄양은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키려고 그 분에게 제공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백성을 속죄하기 위하여 속죄양을 제정한다. 성서에서 백성의 죄를 '지고' 또 그래서 속죄를 이루는 자는 언제나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위해', 그리고 '많은 사람을 위해' 대신 고난당하는 자이다.31)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57.

어떻게 그러한 일이 일어나는가?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지고' 감으로써, 인간의 죄를 그의 고난으로 변형시키는 방법으로 일어난다. 신약성서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단지 희생당하는 자들의 형제일 뿐만 아니라 가해자를 위해 속죄하는 자가 되기도 한다. 이 세상이 존재하는 한, 하나님은 단지 세상의 고난의 역사만이 아니라 인간의 불의한 역사도 지고 간다.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자신은 희생자들 중의 희생자이다. 그러므로 가해자들의 속죄는 희생자들을 통해 증거된다.32)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58.

 

3. 하나님은 고난받을 수 있는가?

 

그러면 하나님이 고난받을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리스 철학의 본질에 따르면 신적인 본질은 고난받을 수 없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신적이지 않다. 이에 반해 기독교는 그 핵심에서 그리스도의 수난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이 그리스도의 수난 이야기 안에 연루되어 있음을 본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아무런 구원의 효력이 발생할 수 없을 것이다.33)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59.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은 스스로 그리스도의 수난 이야기에 연루되었는가? 하나님은 우리 때문에 그리스도로 하여금 고난받도록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 자신이 우리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고난받는가? 지금까지 무감정의 명제가 그리스도의 수난 이야기보다 더 강하게 신론의 기본개념을 규정해 왔다. 신론에서 무감정의 명제가 강하게 존중되면 될수록, 하나님을 그리스도의 수난과 동일시할 수 있는 능력도 그만큼 더 약해진다. 만약 하나님이 고난받을 수 없다면, 그리스도의 수난은 철저하게 단지 인간적인 비극으로만 여겨질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본질적으로 하나님 자신을 그리스도의 수난에서 인식하고, 그리스도의 수난을 하나님 자신에게서 발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격정적인 하나님의 고난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무감정의 명제 대신에 격정적인 하나님의 명제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더 철저한 것 같이 여겨진다. 무감정은 실로 신적인 본질이고, 신적인 사귐 안에 있는 인간 구원의 총괄개념이다. 이러한 주장의 논리적 한계는 이것이 오직 양자 택일, 즉 본질적인 고난 불가능성이 아니면 고난에의 숙명적인 종속을 선택할 줄밖에 모른다는 점에 있다. 34)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60-1.

그러나 세번째 형태의 고난도 있다. 그것은 능동적인 고난, 다른 사람들의 영향에 대한 자발적인 개방, 다시 말하면 격정적인 사랑의 고난이다. 이 표현은 하나님이 다른 관점에서 정말 고난받을 수 있으며 또 고난받기도 한다는 점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만약 하나님이 모든 관점에서 고난받을 수 없다면, 그는 또한 사랑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가 다른 자를 사랑할 수 있다면, 그는 자신으로 하여금 다른 자를 사랑할 수 있게 하는 그 고난에 대해 스스로 개방하며, 이로 인해 생겨나는 고통을 자신의 사랑의 힘으로 극복한다. 그는 그의 존재의 충만함인 그의 사랑 때문에 고난받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감정적이다.35)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61-2.

 

4. 예수의 뒤를 따르는 실천

 

십자가에 못박힌 자의 메시지를 듣는 자는 뒤따름의 부름도 듣는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뒤따르기 시작하는 자는 그의 십자가를 져야 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단지 한 인격일 뿐만 아니라, 한 길이기도 하다. 그를 믿는 자는 그의 길에 들어선다. 그리스도 실천이 없는 그리스도론이란 결코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단지 머리와 가슴으로만이 아니라 총체적인 생활의 실천으로도 알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바로 뒤따름을 의미한다. 뒤따름은 총체적인 그리스도 인식이며, 참여하는 자에게 비단 윤리적인 적합성뿐만 아니라 인식적인 적합성도 갖고 있다.36)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64.

'그리스도의 길'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복음서들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메시아적인 열정에 참여하는 데 있다. 그리스도의 길을 가기 시작하는 자는 죽음에 맞서는 생명의 투쟁을 개시한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뒤따른다는 것은 자신의 자리와 자신의 시간에서, 죽음과 또 죽음을 퍼뜨리는 자들에 맞서는 생명의 투쟁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메시아 격정은 우리를 항상 폭력자들의 희생자 편으로 이끌고 간다. 그러기에 그리스도를 뒤따름은 신앙, 생명, 그리고 정의의 순교자들의 기나긴 행렬에 의해서도 특징지워진다.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는 곳에서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 순교자들의 고난도 기억한다.37)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