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부활 - 세계를 위한 희망

                                                   

                        

윤경묵(Th. M.3차)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한 것도 헛것이요, 여러분의 믿음도 헛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고전 15:14). 이러한 강한 말로써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위해 갖는 근본적인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그리스도교 신앙은 서고 넘어진다. 왜냐하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한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만들었으며,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 신앙과 그리스도 신앙은 이 점에서 합치되며, 그 이후로부터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분리할 수 없게 되었다.(몰트만, 『오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누구신가?』, p. 93.)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때문에 예수를 믿으며, 예수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 신앙과 그리스도 신앙을 분리하는 자는 더 이상 그리스도교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스도교의 하나님 신앙은 부활신앙이다. 이것은 오직 비유와 상징 안에서만 그리스도교 초기의 신화적 세계상과 관련 맺고 있다. 우리의 경험에서 부활신앙은 모든 생명체가 겪게 되는 죽음의 숙명과 대결하고 있다. 부활신앙은 사랑하는 자와 죽어 가는 자, 고난받는 자와 슬퍼하는 자의 하나님 신앙이다. 그것은 위로하고 일으켜 세우는 위대한 희망이다.(pp. 93-94.)

그러므로 하나님은 믿지만 그리스도의 부활은 믿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는 사실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들에게서 예수는 시대의 진보와 함께 항상 까마득한 역사적 과거로 가라앉는 역사적 인물이 된다. 예수를 이와 같이 역사로 환원하는 자유주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슬람교와의 차이는 단지 한 발자국일 뿐이다. "하나님은 믿는다, 하지만 예수는 믿지 않는다"라는 태도는 그리스도교적으로 불가능하다.(p. 94.)

 

1. 부활신앙의 특징

 

예수는 공개적으로 십자가에 못박혔고 그래서 사망했다. 그러나 그의 "부활"을 체험한 자들은 오직 예루살렘의 그의 무덤을 찾아간 충성스러운 여인들과 갈릴리의 도주한 제자들 뿐이다. 그 후에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왔고,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하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킨 세상의 주님과 구주라고 공공연히 선포했다. 이것은 비교적으로 확실한 역사적 증거이다. 놀랍게도 이 증거는 충분하다. 물론 그 가운데서 역사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예수의 빈 무덤에서 천사로부터 그의 부활소식을 들었다고 하는 여인들과 갈릴리에서 그리스도의 현현을 보았다는 제자들의 확신뿐이다.(p. 95.)

예수의 죽음 후에 분명히 대단히 많은 그의 남녀 제자들은 그의 현현을 접했으며, 이 현현은 예수를 하나님 안에서 영원히 살아 있는 그리스도로 보게끔 했다. 바울은 55년이 아니면 56년에 기록된 고린도전서(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오래된 부활증언)에서 그리스도가 게바, 12 제자들 그리고 500명의 형제들에게 한번 출현했다는 자료를 들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기 자신을 추가하고 있다. 바울의 보도는 특별히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의 현현에 대한 자기 자신의 경험의 한 인격적인 보도이기 때문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바울은 주님을 "보았다"(고전 9:1). 그렇지만 이것은 분명히 하나의 내적인 경험이다. "하나님께서는 은총으로 나를 택하셔서 그의 아들을 나에게 나타내 주셨습니다"(고전 1:15 이하). 이 현현은 기대 밖에 그리고 완전히 그 자신의 뜻과는 상반되게 주어졌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의 랍비요, 회당에서 그리스도를 핍박하도록 위임받은 자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리스도에게 붙들렸다"(빌 3:12)고 그는 말한다. 그리스도 경험이 그를 완전히 회심시켰다.(pp. 95-96.)

만약 우리가 무덤 가의 여인들과 갈릴리의 제자들의 그리스도 경험과 같은 그러한 예외적인 환상들을 완전히 표상할 수가 있다면, 그다지 다르게 표상하지는 않을 것이다. 모두가 한 목소리로 사망한 그리스도를 "산 자"로 보았다고 보도한다. 그들은 모두 예수가 그들의 사망할 생명 안에서 "나타난" 그러한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 안에서 살아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초자연적인 빛의 환상들을 보았던 것이다.(p. 96.)

그러나 이와 함께 이미 해석이 시작된다. 여하튼 이 경험의 실체를 주관적인 인간의 해석에서 벗겨내어 벌거벗은 사실로서 드러내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그렇게 하다 보면, 단지 비역사적인 추상화 작업만이 남게 될 것이다. 게다가 벌거벗은 사실은 말을 할 수가 없다. 모든 인지행위에서 주어진 경험은 사람이 이미 품고 있는 표상들과 함께 해석된다. 이런 표상들이 인지의 과정에서 스스로 변화를 겪는 것도 사실이다. 예상을 뒤엎는 경험에서 이 점은 특히 그러하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사울이 바울로 변화될 수는 결코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 경험은 분명히 실존을 변화시키는 경험이었다. 이 경험은 실망과 공포 때문에 살기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도주한 엉터리 제자들을 변화시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와 그리스도를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전하려고 거기서 목숨을 건 사도로 만들었다.(pp. 96-97.)  

환상의 현상은 분명히 탈혼적인(엑스타시스적인) 영 경험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이 현상은 갓 태어난 교회의 오순절 경험으로 이전되어 그 안에서 계속되었다. 즉 현현한 그리스도의 임재 인식이 영 안의 그리스도의 임재 경험으로 변화되고 계속되었다. 원시 그리스도교의 부활신앙은 단지 그리스도의 현현에만 근거를 둔 게 아니고, 적어도 하나님의 영 경험에 의해서도 강하게 감동받았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하나님의 영을 "살리는 영" 혹은 "부활의 영"이라고 부른다. 부활한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것은 부활의 영에 사로잡히는 것을 의미했다.(p. 97.)

바울은 자신이 경험한 그리스도 현현을 "계시"라는 표현으로 해석하며, 그래서 그 경험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하나님은 현 시대의 인식 가능성에는 아직 숨겨져 있는 것을 미리 드러낸다. "종말의 비밀"과 다가오는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의 비밀은 가려져 있으며, 지금 주어진 인식조건 아래서는 인식될 수 없다. 왜냐하면 죄 아래 있는 현 세계와 세상권세는 하나님의 의의 새로운 세계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는 이 세계를 새로이 창조할 것이다. 그리스도 현현은 피안세계로의 신비적인 도피로 이해된 게 아니라, 새로운 세계의 첫 창조일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다가오는 영광의 서광으로 이해되었다(고후 4:6). 더욱이 그것은 찬란히 밝은 날의 온갖 환상이지, 밤 중의 희미한 꿈이 아니다.(pp. 97-98.)

그리스도 현현과 그것을 목격한 자들의 부활절의 바라봄의 구조 안에서 우리는 해석적 인지행위의 세 가지 차원을 인식할 수 있다:

1. 전망적인(앞을 바라보는) 희망의 환상: 그들은 하나님의 다가오는 영광의 서광 안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살아 있는 그리스도로 보았다.

2. 회상적인(뒤를 바라보는) 기억의 환상: 그들은 십자가 흔적과 빵을 떼는 사귐을 보고서 다시금 그를 인식했다. 장차 올 자는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박혔던 자이다.

3. 반성적(자기를 되돌아보는) 소명의 환상: 그들은 이 바라봄에서  사도로 부름받은 자신의 소명을 깨달았다: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 20:21).(p. 98.)  

 

2. 역사의 전망에서 본 부활

 

그리스도의 부활을 역사의 전망 안에서 보는 것도 하나의 사실적 접근이다. 여기서 불가피하게 하나의 질문이 생겨난다: 부활은 하나의 역사적 사건인가 아니면 신앙의 해석인가? 그렇지만 역사를 그리스도의 부활의 전망 안에서 보는 것도 하나의 사실적 접근이다. 그렇다면 수난사의 종말과 이 세계의 새 창조에 대한 종말론적 질문이 생겨난다.(p. 98.)

 

1) 역사: 현대의 패러다임

 

17 세기 이래로 유럽에서는 인간과 자연, 하나님과 세계를 해석하기 위하여 "역사"라고 하는 포괄적인 패러다임이 전개되었다. 과학기술 문명이라는 인간적인 기획 안에서 우주와 지구의 법칙들과 합일하려는 대신에 과거의 낡은 시대로부터 미래의 새 시대로 진보하려는 기획이 등장했다. 다른 민족들에 대한 유럽인들의 지배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가 더욱 더 진행될수록, 문화사의 다양성이 더욱 더 인류의 일치로 변화해 갔다. "역사"라는 거대한 단수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p. 99.)

"역사"라는 이 패러다임의 틀 안에서 현대의 역사학이 태동했다. 교회 내의 지배신화에 대한 역사적 비판이 대두했다. 과거를 역사화하고 현재를 전통의 속박과 편견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하여 전통 속에 내재하는 과거를 시간적인 거리 속에 두려는 역사의식이 발생했다. 다빗 프리드리히 슈트라우스(David Friedrich Strauß)는 "진정한 교리비판이야말로 교리의 역사이다"고 말했으며, 역사가를 종교적 교리와 정치적 신화의 이데올로기 비판가로 만들었다. 역사의식 안에서 과거의 사건들은 지나간 사건들로 변화된다.(p. 99.)

현대의 역사의식의 범주를 갖는 "역사"라는 현대의 패러다임으로부터 그리스도의 부활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이것을 제자들의 환상의 투사가 아니면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 간주할 수 있다. 이것이 논쟁의 대상이 되든 말든 상관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시대의 진보와 더불어 점점 더 까마득한 과거가 된 사건으로서 현재를 결정짓지도 못하고, 미래를 위해서도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역사의 범주는 사건을 이미 지나간 사건으로 만들었다. 왜냐하면 역사적인 것은 생기고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pp. 99-100.)

물론 에른스트 트뢸취(Ernst Troeltsch)는 오늘 날의 역사가들에게 더 이상 마지막 해답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논문 "신학에서의 역사적 및 교리적 방법론에 관하여"(1898년)는 20 세기에 권위적인 표준이 되었다. 트뢸취는 자연과학적 방법을 역사학에 적용했으며, 근거 있는 지식에 도달하기 위한 역사-비평적 방법의 세 가지 공리를 제시했다. 이 공리들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문제삼아 보기로 하자:

1) 역사적 탐구는 항상 오로지 개연적인 판단에 도달할 수 있을 뿐이지, 절대적 지식에는 도달할 수는 없다. 신학이 신앙의 확실성을 역사적 개연성의 판단 위에 세울 수 있는가? 아니다.

2) 역사적 생명의 모든 현상들 간에는 상호작용이 존재한다. 이것은 보편적으로 타당한 원인-결과의 상관관계를 위한 존재론적 토대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 중에서 하나의 예외이고, 생명의 법칙을 깨뜨린 것인가? 아니다.

3) 역사적 이해는 오로지 유비(類比)의 실마리 위에서만 가능하다. "유비의 전능"은 모든 역사적 사건의 동질성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같은 유비(유례)가 없는 사건은 역사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가? 아니다.

4) 개연성, 상관관계 그리고 유비의 법칙들은 객관적인 역사지식을 지배한다. 이 법칙들은 어두운 세력들, 신들 그리고 악마들이 역사를 만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들이 인간들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그래서 인간들에 의하여 인식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보편 역사 안의 초월적인 하나님의 행동과 하나님에 의한 그리스도의 부활이 특별히 현대의 역사적 의미 안에서 언급될 수 있는가? 아니다.

만약 의미의 역사(Geschichte)와 사실의 역사(Historie)에 이러한 원칙들이 적용된다면, 그리스도교 신학은 도대체 어떤 범주 안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해서 말할 수 있는지 근본질문에 봉착한다. 이미 트뢸취는 현대 세계 안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정신분열증을 비판한 적이 있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이 사건의 주체가 되는 하나의 "주일의 인과론"이 있는가 하면, 모든 사건들이 그 내재적인 원인을 갖는 하나의 "평일의 인과론"도 있다. 이러한 의식분열이 하나의 새롭고 공개적인 신학에 의해 극복될 수 있겠는가, 아니면 신학이 그 자신의 진리에 머물러 있기 위하여 현대 사회의 공적인 진리의식과 결별해야 할 것인가?(pp. 100-101.)

             

2) 기대의 지평과 경험의 영역

 

역사학은 역사를 대상으로 삼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서 역사 안에 포함되어 있고 역사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역사적 방법론과 범주를 자신이 세우는 저 초역사(Metahistorie: 超歷史)적 개념들과 범주들 안에 정렬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역사란 인간들, 인간의 집단들, 계급들과 사회들 간의, 인간과 자연 간의, 그리고 그에 못지 않게 인간과 인간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간의 상호작용과 과정이다.(p. 101.)

시간이 존재하는 한, 역사는 존재한다. 과거와 미래의 차이가 존재하는 한에서만, 시간은 인식된다. 과거와 미래의 차이는 두 가지, 즉 회상 속의 과거의 현존과 희망 속의 미래의 현존에 의해 규정된다. "경험의 영역"과 "기대의 지평"의 차이는 역사적 시기의 인식을 결정한다. 만약 회상된 경험이 더 이상 없다면, 기대도 역시 사라진다. 회상과 희망은 역사 경험의 조건이다. 그러므로 양자는 역사에 대한 관심의 조건이기도 하다. 현실을 역사로서 경험하는 일은 그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전제한다. 미래에 대한 희망은 회상 안에 근거한다.(pp. 101-102.)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를 그리스도의 부활의 전망 안에서 전개하기 위하여 기대와 경험의 근본적인 차이를 받아들인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오직 그 자체에 의해 열려진 해방(죽음의 세력으로부터의 인간과 자연의 해방)의 역사의 틀 안에서만 하나의 의미심장한 진술이다. 다른 방법으로 규정된 역사의 틀 안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결코 의미심장한 진술이 아니다.(p. 102.)

 

 

3. 부활의 전망에서 본 역사

 

"그리스도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했음"을 말하는 자는 하나의 완료된 사실이 아닌 하나의 과정을 말한다. 그는 단숨에 하나님이 인간을 해방시키고 자연을 구속하는 근거, 미래 그리고 실천을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적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하여 무엇을 알 수 있는 가?'라는 물음은,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엄하게 가르쳤듯이, ' 우리가 거기로부터 무엇을 희망해도 좋으며, 우리가 그 이름으로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라는 물음과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지식, 희망 그리고 행위가 생동성있게 일치될 때에만, 비로소 그리스도의 부활은 진정 역사적으로 이해된다.(pp. 102-103.)

역사를 부활의 전망 안에서 보는 것은  성령 안에서 부활의 과정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부활을 믿는 것은 하나의 교리에 동의하고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아는 것으로 족한 게 아니고, 하나님의 이러한 창조적 행위에 참여하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단지 하나의 "역사적 사실"일 뿐이라면, 우리는 "아하"하고 말하고, 이를 지식으로 삼고서는 지금까지 살아 온 방식대로 살아 갈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적 행위이고, 우리가 그것을 참으로 인식하고 이해한다면, 우리는 하나의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날 것이다. 그러한 신앙은 자유의 시작이다.(p. 103.)

하나님이 무력하게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의 부활 가운데서 자신을 계시한다면, 하나님은 로마의 황제와 같은 그러한 권세의 총화가 아니며, 그리스의 우주가 반영하는 것과 같은 그러한 법칙의 총화도 아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을 부유하게 하고 비천한 자들을 들어 높이며 죽은 자들을 일으켜 세우는 살리는 능력이다. 부활신앙은 그 자체로서 이미 인간을 일으켜 세우고, 생명의 미래를 바라보면서 인간을 권세와 소유의 치명적인 환상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능력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선포는 그 자체에 의해 열려진 해방(멸망과 죽음의 세력으로부터의 인간과 탄식하는 피조물의 해방)의 역사의 지평 안에서 하나의 의미심장한 진술이다.(p. 103.)

그리스도의 부활을 미래를 개시하고 역사를 여는 사건으로 이해할 때, 그것은 이 죽음의 역사 한가운데서 영원한 생명의 근거이고 약속이다. 바울은 이런 맥락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신 성령을 시켜 여러분의 죽을 몸까지도 살려 주실 것입니다"(롬 8:11).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완료를 성령의 내주의 현재와 결합시키며, 성령의 현재를 죽은 자들의 부활의 미래와 결합시킨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자나간 한 사건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성령 가운데서 현재를 결정지으면서 활동하는 과거의 한 사건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원한 생명의 미래를 열기 때문이다. 성령의 현재하고 해방시키는 경험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완료에 근거한다. 바울이 이 본문에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림이라고 일컫는 그러한 "죽을 몸의 살려 줌"의 미래는 실제로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한 것이고, "다시 살리는 성령"의 경험을 통하여 깨달아진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한다면, 부활의 과정을 말해야 한다. 이 과정은 그리스도 안에 그 근거를 가지고, 성령 안에 그 역동성을 가지며, 만물의 진정한 새 창조 안에 그 미래를 가진다. "부활"은 하나의 완료된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길을 의미한다. 이것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가는 길이다. 그렇다면 어떤 생명을 여기서 의미하는가?(pp. 103-104.)

"죽을 몸을 살린다"는 문장은 부활의 희망이 하나의 다른 생명과 관련 맺는다는 사실을 말하는 게 아니라, 부활의 희망이 이 죽을 생명이 달라진다는 사실과 관련맺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부활은 결코 달콤한 말로써 위로해 주는 "피안의 아편"이 아니라, 이 생명을 거듭나게 하는 능력이다. 희망은 하나의 다른 세계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이 세계의 구원을 바라본다. 성령 안에서 부활은 단지 기대될 뿐만 아니라 벌써 경험되기도 한다. 부활은 매일 일어난다. 사랑 가운데서 우리는 많은 죽음과 많은 부활을 경험한다. 우리는 살아 있는 희망으로 거듭나므로써 부활을 경험한다. 우리는 이미 여기서 생명을 일깨우는 사랑을 통하여 부활을 경험한다. 그리고 우리는 해방을 통하여 부활을 경험한다: "주님의 성령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고후 3:17).(pp. 104-105.)

그리스도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한 것은 죽음의 멸절과 그리고 영원한 생명의 출현의 시작으로서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사실"이고, 그러기에 그 자체상 하나님의 계시이다. 칼 바르트(Karl Barth)가 말했듯이,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자"로서 새로운 세계의 창조자이다. 부활신앙은 그 자체로서 이미 생명의 능력 가운데서 인간을 살린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세계사를 종말사(終末史)로 규정지으며, 역사 경험의 영역을 새로운 창조의 기대지평 안으로 옮겨 놓는다.(p. 105.)

 

 

4. 자연의 전망에서 본 부활

 

현대가 시작된 이래로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은 신학의 중심 문제가 되었다. 왜냐하면 "역사"는 현대 세계의 큰 패러다임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역사"를 자연과 구분하여 인간의 역사라는 의미로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신과학과 자연과학, humanities와 science를 구분한다. "자연"은 필연성의 영역이고 "역사"는 자유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분법과 함께 정신은 자연이 없고, 자연은 정신이 없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단지 의학만이 정신과학과 자연과학 사이를 오간다. 19 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의학은 유럽에서 자연과학으로 편입되었다. 인간은 단순히 자연에 불과한가? 그는 정신이기도 하지 않는가?(pp. 105-106.)

모든 여자와 남자는 하나의 몸-정신의 일체를 나타내고, 그의 존재나 그녀의 존재에서 정신과 자연은 불가분리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역사와 자연을 구분하는 현대 세계의 근본적인 입장은 완전히 입증될 수는 없다. "역사"라는 패러다임은 전체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그 전체성을 쪼개어 버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현대의 패러다임을 넘어가서, 자연과 정신, 역사와 자연을 전체로서 파악하고 분리된 것을 통합시키는 하나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발전시켜야 한다.(p. 106.)

여기로부터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현대의 "역사적 그리스도론"을 하나의 새로운 생태학적 그리스도론으로 넘겨주어야 한다. 이로써 우리는 자연을 통합시키기 위하여 고대 교회의 그리스도론의 "두 본성의 이론"으로 되돌아간다. 왜냐하면 사멸할 온 자연의 구원이 없이는 인간의 구원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리스도의 부활을 단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역사행위"로만 이해하는 것으로는 족하지 않다. 그것은 또한 세계의 새 창조의 첫 행위로도 파악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지 하나의 역사적 사건만이 아니고, 동방교회의 부활절 예배와 우리의 옛 부활절 노래가 항상 가르쳐 주었듯이, 하나의 우주적 사건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이러한 우주적 차원은 새로이 이해되어야 마땅하다.(p.106.)

"그리스도의 일으킴(Auferweckung)"이라는 표현은 충분한 표현인가? 그것은 유대인의 묵시문학에서 유래한 것이고, 하나의 종말론적인 상징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능동적인 자이고, 죽은 예수는 수동적인 자이다. "그리스도의 일어남(Auferstehung)"이라는 다른 표현은 더 나은 표현인가? 인간의 "일어남"이라는 인간학적인 상징은 논리적으로 하나님의 "일으킴"이라는 신학적인 상징의 일부이다. 일으킴 받는 자는 또한 일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일으킴은 허사이다. 일으킴의 상징에서 역동성은 위로부터 나오고, 일어남의 상징에서 역동성은 아래로부터 나온다. 그리스도는 단지 하나님에 의하여 일으켜졌을 뿐만 아니라, 그 스스로 일어나기도 했다.(pp. 106-107.)

이 두 상징들은 다함께 예수의 비밀을 파악하기에 충분한가?  양자는, 하나님의 행위든 예수의 행위든, 행동을 나타내는 은유들이다. 또한 십자가에 달렸다가 죽은 예수에게서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묘사하는 은유로서 자연으로부터 나온 것들도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영원한 영으로부터의 "그리스도의 재출생"의 비유이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성령을 통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바친다(히 9:14). 그는 성령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났다"(고전 15:45).(p. 107.)

바울은 또한 자연적인 밀알의 비유를 사용한다: "썩을 몸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을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고전 15:42).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만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요한은 말하고(요 12:24), 이로써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말하고 있다. 골로새서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처음으로 다시 살아난 자"(1:18)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으킴과 그리스도의 일어남의 묵시문학적 상징들을 하나님의 영원한 영으로부터의 그리스도의 "재출생"의 상징으로써 보충할 수 있다. 동방교회의 화상들은 바로 이 점을 나타낸다: 그리스도는 땅 속에서 마리아를 통하여 탄생했다. 그는 이 땅의 무덤으로부터 성령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스도의 재출생과 함께 인간만이 아니라 온 우주의 재출생이 시작되었다(마 19:28). 그의 죽음과 그의 "다시 살아남"은 하나의 "이행과정", 하나의 변화, 하나의 변모를 나타내지, 전적인 단절과 하나의 급진적인 새 시작을 나타내진 않는다.(pp. 107-108.)

우리는 어떤 비유들로써 하나님의 영으로부터의 "그리스도의 재출생"의 우주적 의미를 설명해야 할까? 자연의 생활에서 나온 비유들로써 그리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재출생이 하나의 "자연스러운 현상", 예컨대 세포의 생명과정이 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상징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사멸의 생명이 아닌 불멸의 생명으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도 하나의 생명이고, 재출생도 하나의 출생이다. 그리하여 죽어야 하는 자연적인 생명은 그 자체로서 유비의 능력을 가지며, 또 유비를 필요로 한다.(p. 108.)

예로부터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봄축제와 함께 경축해 왔다. 그 이래로 우리는 유럽에서 "부활절"을 말해 오고 있다. 교회는 성령의 경험을 여름의 시작과 함께 경축해 왔다. 그 이래로 우리는 "오순절"을 말해 오고 있다. 우리는 한 날의 아침, 한 해의 봄 그리고 생명의 출생에서 자연적인 유비들을 발견했다. 그 결과로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자연의 재탄생에 대한 기쁨과 이에 대한 피조물들의 즐거움이 경축되었다. 아침, 봄 그리고 탄생은 자연의 생성과 소멸의 자연스러운 리듬에서 벗어나서 매우 높이 평가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만물이 영원한 생명으로 새로이 창조됨으로써, 사멸할 온 자연이 구원될 것을 희망할 수 있게 되었다.(p. 108.)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리스도가 부활한 것"은 인간 역사의 전망 안에서 모든 죽은 자들의 보편적 부활이 시작되었음을 뜻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희망의 인간적 측면일 뿐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자연의 전망 안에서 죽음의 파괴적, 반신적 세력이 창조로부터 추방되었음을 뜻한다: 죽음은 "굴복당했다"(고전 15:26). 그리고 새 창조 안에서 죽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희망의 우주적 측면이다.(pp. 108-109.)

부활의 희망에서 어떤 생명의 경험이 생겨나는가? 희망의 표상은 항상 생명의 길과 경험을 열어 주고 제한한다. 죽은 자들의 부활과 새 창조를 희망하는 자는 부활의 영에 사로잡힐 것이며, 이미 여기서 "미래 세계의 힘들"을 경험한다. 예로부터 전해 오듯이, 그는 살아 있는 희망으로 "거듭날" 것이다.(p. 109.)

부활은 몸과 정신을 지닌 전인을 뜻하기 때문에, 이 "살아 있는 희망"은 여기서 이미 하나의 정신적이고도 육체적인 희망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는 그와 함께 모든 살아 있는 것에 저항하는 죽음의 반항에 직면해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부활의 희망이 없이는 생명과 죽음을 조화시키는 게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죽음을 생명체의 자연적인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을 포기해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생명을 원하지, 죽음을 원하진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육체가 죽어야 한다고 해서, 여기서 벌써 육체를 포기해야만 하는가?  그렇다면 아예 처음부터 살아 있지 않는 게 더 나을 것이다. 왜냐하면 살아 있지 않는 것만이 죽지도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p. 109.)

그러나 생명을 사랑하기에 생명을 긍정하는 자는 자신을 죽음의 고통에 내맡긴다. 그는 실망당하고 상처입고 슬픔을 당할 수 있다. 이 땅에서 생명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상처입고 죽으며 슬픔을 당할 수 있는 각오를 벌써 갖게 하는 것은 죽음의 굴복과 영생으로의 부활에 대한 희망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미 사랑 안에서  부활의 능력을 체험한다: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을 벗어나서 생명의 나라에 들어 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라고 요한일서 3장 14절은 말한다. 우리는 "자매들"을 덧붙인다. 부활의 영 안에서 사랑은 죽음처럼 강해질 수 있다. 왜냐하면 이미 사랑 안에서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승리가 경험되기 때문이다.(pp. 109-110.)

죽음은 분리의 세력으로서 이 세상의 삶 안으로 파고들어 온다. 부활은 통합의 능력으로서 이 세상의 삶 안으로 파고들어 와 죽음의 활동을 중지시킨다. 이것을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자신의 몸과의 관계에서도 경험한다. 자신의 몸의 죽음을 직면할 때, 우리의 영혼은 몸 위로 상승하여 몸의 욕구와 쇠약성으로부터 분리된다고 플라톤은 말한다. 자신의 죽음에 대한 인식은 이미 여기서 인간을 영혼과 몸으로 분리시키고, 영혼으로 하여금 몸을 지배하고 억누르도록 유도한다. 왜냐하면 몸은 결국에 매장되는 시체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p. 110.)

그에 반해 "육체의 부활"은 전혀 다른 몸 경험으로 인도한다. 영혼만이 아니라 영혼과 몸을 지닌 전인이 신적인 것으로 변화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고 창조보도는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혼만이 아니라, 바울이 언제나 강조하듯이, 육체도 "성령의 전"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성령"은 생명의 영이다. 이 영이 현재적으로 경험되는 곳에, 몸과 영혼은 다시 하나가 된다. 생명에 거슬리는 분리와 죽음을 추구하는 갈망은 극복된다. 죽음의 공포와 더불어 생명의 불안도 사라진다.(p. 110.)

"육체의 부활"이라는 비유 안에서 생명과 죽음은 이처럼 조화될 수 있기 때문에, 죽음은 수용될 필요도 없거니와 억압될 필요도 없다. 나는 이 부활의 영 안에서 여기서 완전히 살고, 완전히 사랑하고, 완전히 죽을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완전히 부활할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희망 안에서 모든 피조물들을 사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 중에 그 어느 것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p. 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