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단상(10)

남녘땅을 돌아오다
  (2016년 2월 2일)  

 

 

우리에겐 남녘은 북녘과는 조금, 아니 아주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북녘에 비해 남녘은 날씨가 따뜻하다.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남녘 사람들은 북녘 사람들보다 마음도 따뜻한 편이다. 차가운 북반구에서는 사람들이 자주, 그리고 거칠게 움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성격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크다. 따뜻한 남반구에서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비교적 느린 편이다.
북반구 사람들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자연을 개간해야 살아갈 수 있지만, 남반구 사람들은 느리게 움직이고 자연의 질서에 느긋하게 순응해야 살아갈 수 있다. 북반구 사람들이 남반구 사람들에 비해 경제적으로 더 풍요하게 살아가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반도에서도 경상도 사람들은 높은 산과 거친 파도, 왜구 등과 싸우며 생존해야 했기 때문에 성격도 비교적 거칠지만, 충청도와 전라도 사람들은 넓은 평지와 온화한 바다와 조화를 이루며 평안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성격도 비교적 온화한 편이다. 신라가 백제를 이긴 것, 경상도 사람들이 정치적 패권을 오랫동안 쥐고 온 것, 한국의 대형교회를 만든 사람들이 대개는 경상도 사람들이라는 사실도 바로 이 점을 증명하는 것일까?

오래간만에 몇몇 교수들과 함께 4일 동안 남쪽 땅을 돌아보고 되돌아왔다. 여수와 거제와 부산을 하루 씩 돌아다녔다.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하고, 맛있는 지방 음식도 많이 먹었다. 그러나 가장 뜻 깊은 일은 우리를 초대하고 식사를 제공한 목사님들과의 만남이었다. 어디든지 우리 교단에 속해 있는 목사님들은 우리를 반갑게 만나주지만, 남쪽의 목사님들이 우리를 더 반갑게 만나준다고 느낀 이유는 무엇일까? 남쪽에서 사는 분들이 마음이 더 따뜻했기 때문일까? 우리들이 가장 먼 곳에서 찾아와서 그랬을까?

그러나 이번의 만남에서는 지역적인 차이와 특성이 그다지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오랫동안 우리는 서로 대화하거나 사귐을 나누기보다는 살벌한 경쟁 구조 속에서 때로는 서로를 등지고, 때로는 서로를 억누르고 살아왔다. 현대인의 삶이 갈수록 삭막하고 팍팍해지는 것이 주된 원인이겠지만, 우리가 너무 자신에게만 몰두하며 살아온 탓도 적지 않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멀리 계신 목사님들을 방문하고 대화한 것은 단지 그들에게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큰 기쁨과 유익이었다. 교수들과 목사들이 형식과 제도에 구애되지 않고 인간적인 사귐을 나눈 것도 좋았지만, 각자가 처한 상황에서 상대방을 생각하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자신을 생각하며, 지혜와 비전을 함께 나누고 공유하는 것도 매우 유익했다.

왜 우리는 중요한 일은 제쳐놓고 오직 앞만을 바라보고 달려왔을까? 왜 오랫동안 자신의 목표에만 너무 집중하며 살아왔을까? 이웃과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사귐을 나누는 일에 왜 우리는 소홀했을까? 중요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이웃과 더 자주 대화하고, 더 자주 사귐을 나누어야 하지 않았을까?

혼자서, 그리고 빨리 달려가는 것만이 능사일까? 혼자서 승리의 깃발을 꽂는 것이 뭐 그리 기쁘고 행복한 일일까? 목표에 도달하는 시간이 조금 늦어지더라도, 우리가 거둘 열매가 조금 적어질지라도, 우리가 마치 어깨동무인 양 함께 걸어가고 함께 달려가는 것이 훨씬 더 아름답고 유익하지 않았을까?

이러저런 생각을 하며, 그리고 감사하며 되돌아왔다. 다시 평범하고 해묵은 일상으로 되돌아 왔다. 다시 우리의 습관대로 살아갈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만 우리는 과거의 우리와 똑같이 살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함께 성장해야 하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아파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 우리는 공멸의 길로 달려갈지도 모른다. 정치도 그렇고, 경제와 사회도 그렇고, 종교는 더욱 그렇다. 이런 작은 깨달음을 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