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단상(14)

 

항상 기뻐하고, 항상 기도하고, 항상 감사하라고?
 
(2016년 2
월 29일)

 

어제 나는 내가 출석하는 교회의 설교에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라는 담임 목사의 권면을 들었다. 나는 그의 설교에 적잖은 은혜를 받았다. 예배를 마친 후에 종종 그러하듯이, 나는 어제도 설교자에게 “진심으로 은혜를 받았다.”고 고백했다. 나는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으려는 자세로 설교를 경청하지만, 때로는 설교자의 견해가 나의 견해와 매우 다르거나 그의 설교가 내게 큰 의미를 주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에는 종종 스마트 폰에 손이 가거나 가끔 졸기도 한다.

어제 그가 설교한 본문을 대할 때에도 나는 평소처럼 바울의 신학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었다. 바울이 예수를 얼마나 잘 알았을까? 바울이 정말 예수를 잘 알고 예수를 전했을까? 바울이 자기의 주관대로 예수를 이해하거나 해석하지 않았을까? 바울의 신앙이 예수의 신앙과 얼마나 정확히 일치할까? 보수적인 학자들은 바울을 예수의 신앙을 충실히 계승한 자라고 칭송하지만, 나는 솔직히 그렇게 보지 않는다.

바울은 구체적인 목회 현장을 위해 글을 썼기 때문에 굳이 예수의 말을 자주 인용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고 신약학자들은, 특히 바울을 전공한 신학자들은 주장한다. 그래도 예수의 사도로 자칭한 그가 예수의 말을 비교적 매우 적게 인용하거나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종종 당혹감을 느낀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예수의 말에 관한 정보가 그에게 매우 부족할 것이라고 추측해 본다. 바울은 분명히 예수의 제자가 아니었고 우리처럼 예수의 어록집(복음서)을 손에 쥐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더욱이 그가 예수의 제자들의 텃세에 밀려 소아시아 지역을 오래 동안 돌아다녔기 때문에 예수의 제자로부터도 예수의 말을 들을 기회가 매우 적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가 여기저기서, 그리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서 예수의 말을 자주 들을 수 있었을 법도 할 텐데, 그가 예수의 말을 기대보다 매우 적게 인용하고 있는 것은 조금 의아스럽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바울의 신학을 예수의 신학보다 더 신뢰하지 않으며, 종종 그의 신학을 깎아내리곤 한다. 특히 정치와 경제에 대해 비교적 무관심하거나 중립적이거나 심지어 친제국주의적인 것처럼 비치는 그의 발언, 여성차별적이고 가부장적인 것 같은 그의 입장은 종종 나의 의심과 비판의 과녁이 되곤 한다.

어제의 본문도 선뜻 내 마음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예수는 항상 기뻐했는가? 분명히 그렇지 않았다. 예수는 자주 슬퍼하고 분노하고 괴로워하지 않았는가? 바울도 그렇지 않았는가? 예수는 쉬지 않고 기도했는가? 예수가 전통적인 의미의 기도를 쉬지 않고 하지는 않았다. 설교자도 말했듯이, 바울도 전통적인 의미의 기도를 염두에 두고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예수는 범사에 감사했는가? 예수는 특히 불의한 기득권 세력을 향해서는 비판하고 분노하고 과격하게 행동하지 않았는가! 더욱이 바울도 항상 감사하지만은 않았다.

그런데 바울이 유독 여기서만은 예수를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끌어 들여,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고 말하는지 이해가 잘 안 된다. 예수가 언제 이런 말을 했는가? 예수의 어떤 말을 근거로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가? 여기서도 예수와 바울 간의 부조화, 불일치를 엿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말을 선의로 해석해 보기로 하자. 어제 설교한 목사의 말대로 누구도 바울의 말처럼 살 수 없고, 실제로 그렇게 살지 않는다. 그렇지만 바울의 권면은 신앙의 참 목표로 삼을 가치는 충분하다. 항상 기뻐하고 항상 기도하고 항상 감사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바로 그 날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날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이런 목표를 바라보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설교자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이 모든 환경 가운데서도 우리 가운데 계심을 믿고 항상 긍정적으로 살기를 권면했다. 세상의 현실에 따라서 이리저리 흔들리기보다는 하박국이나 신앙의 사람들처럼 하나님을 중심으로 긍정적으로 살기를 권면했다. 그럴 때에만 우리는 항상 기뻐하고 항상 기도하고 항상 감사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의 말도 분명히 일리가 있다. 지금의 현실을 넘어선 미래의 희망을 바라볼 때,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현실의 종교라기보다는 현실을 넘어서는 현실, 현실보다 더 크고 놀라운 미래를 바라보는 희망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모든 현실 가운데서도 우리가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이유는 다른 곳에도 있다. 모든 현실은 양면적이 아닌가! 동전과 손에도 양면이 있듯이, 만물은 양면적이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면을 먼저, 더 즐거이 보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태도는 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급적 밝고 선한 현실을 더 즐거이 보려고 노력해야 하고, 바로 그럴 때에만 우리는 어둡고 악한 현실을 극복하거나 더 좋은 현실을 만들어갈 수 있다. 아내가 종종 내게 던지는 말처럼 사람들은 이것을 “플라시보 효과”라고 부른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은 매사에 낙관주의자여야 한다. 부정적인 것을 애써 외면하거나 부인하자는 말이 아니다.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동시에 냉정하게 인정하되, 부정적인 것 속에도 긍정적인 면이 숨겨져 있음을 보려고 애쓰자는 말이고, 궁극적으로는 부정적인 현실을 긍정적인 자세로 지혜롭게 고쳐나가자는 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