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단상(16)

 

생각과 본능의 중요성
 (2016년 3월 17일)

 

지난달 17일에 연세대에서 이과대학의 한 교수가 신입생을 대상으로 한 실험실 안전교육 강의에서 “세월호 사고 때 개념이 있는 학생들이라면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을 따르지 않고 탈출했을 것”이라고 말해 논란이 일었는데, 이번 달 10일에도 포항공대 컴퓨터공학과의 한 교수가 이와 비슷한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세월호 사건에서 단원고 학생들이 생각하는 습관이 없어 선박 관리자의 지시를 아무 생각 없이 믿었기 때문에 사고를 당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두 가지 발언이 어떤 파장을 일으켰고, 앞으로도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미리 예측하기 어려우므로 관심을 두지 않겠다. 다만 나도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똑같은 처지에서 동료 교수를 위해 한 마디 거들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나도 강의 중에 한 발언 때문에 수많은 오해와 공격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말에 대한 오해는 단지 말하는 자 때문에만 생기는 것은 아니다. 말하는 자도 말을 잘 해야 하지만, 듣는 자도 말을 잘 들어야 한다. 그렇지만 발언의 파장은 단지 말의 내용 때문에만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는 온갖 심리적, 사회적, 정치적 요인이 끼어든다. 그러므로 한 사건이 큰 파장을 일으킬 때에는 매우 복잡한 요인들이 상호작용하면서 서로를 증폭시킨다. 그러므로 화자의 의도와 청자의 반응을 분석할 때에는 이 모든 것을 꼼꼼히 따져 보아야 한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두 발언의 내용과 의도만을 고려해 보자. 내가 볼 때, 두 교수의 발언에는 그다지, 아니 전혀 문제가 없다. 앞뒤 문맥과 화자의 의도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몇 가지 단어만을 취사선택하거나, 심리적이나 정치적인 해석을 과도하게 투영하면, 오해와 날조가 반드시 발생한다.

함석헌 선생은 일찍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뜻으로 본 한국 역사”라는 명저를 남긴 그는 일제의 고난과 독재의 부조리 앞에서 생각하는 백성을 만들기 위해 외치고 뛰어 다녔던 분이었다. “생각 없이 살아오다가 일본에게 당하고 독재자들에게 당하고 있으니, 깨어 생각하고 저항하자!”는 그분의 발언에 누가 태클을 걸겠는가? 얼마 전에는 도올 김용옥이 “세월호에 탑승한 학생들이 스마트 폰 때문에 탈출하지 못했다!”는 발언을 했다. 스마트 폰 때문에 사고 현장이 생생히 알려지는 장점도 있었지만, 학생들이 스마트 폰을 보느라 생각과 탈출의 기회를 찾지 못했다는 그의 지적에도 분명히 일리가 있다고 본다.

어떤 이유로든, 생각이 없이 살아가는 것은 분명히 위험하다. 두 교수는 분명히 불행의 모든 책임이나 주요한 책임이 오직 거기에만 있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도 분명히 희생자들의 아픔에 공감했을 것이다. 단지 불행의 요인 가운데는 “생각 없음”도 들어 있음을 냉정히 깨우치려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강의를 듣는 학생들도 똑같은 불행을 당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그런 발언을 했을 것이다.

왜 교수의 진심어린 충고를 왜곡해서, 마치 사고의 모든 원인이 오직 학생들에게만 있는 듯이 발언을 왜곡하고 증폭하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만약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에게 감정적 상처와 정치적 계산이 전혀 없었다면, 교수의 진정 어린 발언에 도리어 감사하고, 앞으로는 참으로 깊이 생각하며 살겠다고 결심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생각하기 싫어하고 독서하기 싫어하는 학생의 잘못된 습관의 주요 책임을 학생에게만 돌릴 수 없다. 부모와 선생과 사회 전체가 더 큰 책임을 져야 한다. 부모는 과연 자녀들을 생각하는 자녀로 키워왔는가? 오늘의 교육 현장을 보라. 서울대학교에서조차도 오직 암기와 필기를 잘 하는 자들에 최고 성적을 준다고 하지 않는가? 우리 사회는 기술문명을 과도하게 숭상함으로써 생각하고 고민하고 토론하지 않는 멍청한 인간을 점점 더 양산하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 이 문제점을 지적한 교수들에게 화풀이를 할 것이 아니라, 세월호 사고를 우리 자신과 사회의 시스템을 냉철히 되돌아보는 기회로 삼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과연 우리는 그런 길로 가고 있는가? 세월호 사건은 벌써부터 망각되어가고 있고, 정략적으로 억압되어가고 있다.

여러분들이 "생각 없음"의 문제점을 말해 왔다면, 나는 여기서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것은 "본능의 억제"라는 문제점이다. 동물은 위기를 본능적으로 잘 알아차리고 본능적으로 생존의 탈출구를 찾는다. 세월호 사고의 요인들 중의 하나로서 나는 생각의 부족 못지않게 본능의 억제도 엄연히 똬리를 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본능은 무조건 억제할 수 없는, 오랜 세월 속에서 기획되고 진화되어 온 생명체의 가장 강력한 생존 기제가 아닌가? 그리고 중요한 생존 본능의 하나는 위기를 민감하게 느끼고 이에 재빨리 반응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학생들은 배가 위태롭게 기울어가는 이해 못할 상황에서도 그렇게 가만히 앉아 있었는가? 타율적인 권위에 잘 길들여졌기 때문인가? 그렇게 지적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우리가 그 동안 자연스러운 본능을 지나치게 억제해 오지 않았는지를 의심해 본다. 본능은 자연의 지혜로운 선물이거나,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혜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생각 없이 오직 본능으로만 살아가서도 안 되지만, 본능을 과도하게 억제하며 살아가서도 안 된다. 그렇지만 문명과 과학, 양심과 도덕, 심지어 종교의 이름으로 우리는 그 동안 본능의 순기능을 너무 폄하해 오지 않았는가? 몸과 운동, 노동과 땀의 가치를 너무 억제하지 않았는가? 더욱이 과학 문명에 지나치게 의존해 온 결과로 우리는 생각의 능력마저 점점 더 퇴화시키지 않았는가?

이번에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을 두고 많은 사람들은 컴퓨터의 위력을 새삼 통감하고,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컴퓨터와 인간의 대결은 사고 능력의 대결이었다. 비록 컴퓨터가 인간보다 더 탁월하게 생각해도, 비록 미래에는 인간의 두뇌마저 대체하고 인간의 노동을 완전히 잠식해도, 컴퓨터는 인간의 본능과 감정만은 결코 대체하거나 능가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컴퓨터가 인간의 본능과 감정을 인간보다 더 탁월하게 모방하고 연기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앵무새와 아코디언과 친구들과는 즐겁게 놀지언정, 피와 땀과 눈물과 예술을 모르는 컴퓨터 로봇과는 결코 즐겁게 놀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