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단상(17)

 

 원수를 사랑하라!
 (2016년 3월 24일)

 

유승민 의원이 박근혜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렸다고, 아니 그녀를 배반했다고 하여 국회의원 선거를 위한 공천 과정에서 단칼에 짤려 나갔지만, 이로 인해 유승민은 도리어 더 많은 관심과 동정과 심지어는 존경을 받고 있다. 전혀 의도치 않게 박 대통령은 그를 더 큰 인물로 키우고 있는 셈이다. 헤겔의 말대로 역사의 간계(奸計)를 보게 된다.

만약 배신과 보복의 악순환을 계속 이어간다면, 모두가 상처와 불행을 입고 모두가 패배자가 되고 만다. 그러므로 누가, 어떤 방법으로든, 보복의 고리를 단호히 끊어야 한다. 정치사에서 보복의 얼룩진 모습을 더 자주 볼 수 있지만, 포용과 용서를 통해 보복의 악순환을 끊어 버리고 더 나은 도약을 이룬 모습도 적지 않다. 만델라가 그랬고, 김대중도 그랬다. 그러나 박정희와 박근혜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 결과로 박정희는 불행하게 인생을 마감했고, 박근혜의 미래는 아직 안개 속이다.

오늘은 예수님의 고난을 회상하는 성 금요일이다. 예수님이 왜, 어떤 목적으로 십자가를 지셨고, 십자가로부터 어떤 구원이 일어났는지는 매우 전문적이고 까다로운 질문이므로 여기서 재삼 거론하고 싶지 않다. 다만 예수의 죽음이 매우 다층적이고 심층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는 반드시 주목해야 한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그러하듯이, 그의 죽음을 단지 속죄의 제물로만 이해하는 것은 매우 피상적이고 협소하다. 이런 이해는 그의 죽음이 지니는 정치적 의미를 완전히 퇴색시켜 버리고, 예수님이 가져오신 구원의 능력을 현저히 축소하거나 억압해 버림으로써 예수님을 현저히 욕보이는 결과에 이른다.

분명히 예수님의 죽음에는 정치적 의미가 강하게 깔려 있다. 죽음의 과정에도 그러하지만, 그 결과에서도 분명히 그러하다. 한 가지를 지적하자면, 예수님의 죽음에는 정치적 희생과 보복을 끊고 원수를 포용함으로써 적대감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들어 있다. 예수님은 자신을 죽인 사람을 십자가에서 너그러이 용서하셨고, 원수마저 자신의 형제로 기꺼이 받아들이셨다. 그로 인해 그는 원수 사이에 가로놓인 장벽을 제거하고 화해의 길을 터놓으셨다.

고난절이 될 때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려고 여러 가지 모습을 보인다. 금식하고 자선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심지어는 자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자신의 권리와 향락과 이익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을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방법으로 활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모든 것도 나름대로 유익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진정한 방식일 수 없다. 만약 예수님처럼 정치적 불의를 비판하고 그에 저항하고 그 결과로 고난을 받지 않는다면, 만약 불의한 정치 현실에 대해서는 조용히 눈을 감아버린다면, 이런 행위는 예수님의 고난과 매우 동떨어진 감상적이고 탈역사적이고 심지어는 신비주의적인 자기 위로 혹은 자기 의(義)로 떨어지기 쉽다.

예수님의 고난에 진정으로 참여하려면, 의를 위해 행동한 자신에게 손해와 고통을 주는 원수를 적극적으로 끌어안고 용서해야 하며, 이를 통해 양자 모두에게 새로운 미래를 열어야 한다. 원수사랑은 단지 원수만을 위한 자선 행위가 아니다. 원수도 악행과 보복에서 벗어나야 하지만, 자신도 증오와 상처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서 원수 사랑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중요한 계명의 하나였다.

그렇지만 원수 사랑이 불의를 용납하거나 비호하거나 방치하는 행위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악순환을 끊고 새롭게 출발하기 위해 치르는 지혜롭고 용감하고 위대한 결단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누가 원수인가? 남한을 수시로 괴롭히는 협박하는 북한일 수도 있고, 나를 고발하고 모함한 이웃일 수도 있고, 나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사용자일 수도 있고, 사랑과 우정을 배반하는 친구와 배우자일 수도 있으며, 부모의 은혜를 망각하고 빗나가는 자식일 수도 있다. 그 외에도 얼마나 많은 원수들이 우리 주위에 있는가?

예수님은 원수들의 한복판에서 태어나셨고, 그들 한가운데서 복음을 선포하셨다. 예수님은 원수들이 전혀 없는 한적한 광야와 사막으로 도피하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끝내 원수들에 의해, 그리고 원수들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리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원수들을 포용하고 용서하셨으며, 부활을 통해 자신의 정당성과 의로움을 입증하셨다. 그리고 억울하게 죽어간 수많은 희생자들에게, 그리고 심지어는 자신을 죽인 원수들에게도 부활의 문을 활짝 열어놓으셨다. 친구들에게는 위로와 영광의 길을, 그리고 원수들에게는 회심과 갱생의 길을 터놓기 위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