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단상(3)

가라츠의 종교사회주의

  (2015년 10월 29일)

 

지금은 아침이 아니지만, 아침에 떠오른 생각을 이어서, 내 생각을 정리해 본다. 이번 학기 신학과 강의 중에 박삼경 교수가 담당하는 “정치윤리”라는 강의가 있는데, 오늘 여기서 스위스에서 목사와 교사, 교수와 노동 교육가로서 활동한 “라가츠의 종교사회주의”에 관해 특강을 했다. 모든 학생들이 그의 이름을 처음 들었다고 한다. “성결신학연구소 홈피”에 올라가 있던 글 “레온하르트 라가츠의 종교사회주의”(http://sgti.kehc.org/myhome/system-theology/5.html)를 강의록으로 삼아, 몇 가지 보충 설명을 했다.

가라츠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서 기독교적 사회주의를 열렬히 설파한 사람이다. 그는 독일의 목사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그의 영향을 받아 종교사회주의를 주창한 자로서는 그 외에도 칼 바르트, 파울 틸리히 등이 있다.
오늘 아침에 나는 우리 사회의 상층부 10%
...의 사람이 부의 66%을 소유하고 있고, 하위 50%의 사람이 부의 5%도 소유하지 못하고 있다는 뉴스를 접하고 충격에서 쉽사리 헤어 나오지 못했다. 우리나라의 빈부격차가 상당할 줄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크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참으로 기막힌 현실이다.

며칠 전에 서경석 목사가 자신이 걸어온 길을 소개한 글을 읽어 보았다. 그 중에 눈에 선명하게 들어오는 내용은 오늘의 좌파들이 우파들의 독재 아래서 급속히 생겨나고 퍼져갔다는 사실이다. 그들 중에는 분명히 북한 정권의 조종을 받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지만, 내 짐작과 확신으로는 자생적 공산주의, 자발적 좌파들이 상당히 많이 양산되었을 것이다.

오늘 나는 이와 비슷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날로 심각해지는 경제적 불평등은 점점 더 많은 자생적, 자발적 좌파를 양산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좌파는 우파를 낳고, 우파는 좌파를 낳는다. 이 둘은 적대적 공존이나 상호 협력 관계를 이룬다. 상대방이 없다면, 나도 없다. 이런 양극화를 해소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인이 떠맡은 큰 숙제의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여당은 여전히 종북 타령, 메카시즘을 전가의 보도처럼 써먹고 있고, 야당은 친일독재의 구호만을 최고의 무기인 양 휘두른다. 종북이냐, 친일이냐? 북한식 독재냐, 남한식 독재냐? 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둘 다 나쁜 것이니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체제와 정책이 백성을 고루 잘 살게 만들고, 두루 행복하게 만드느냐다. 이런 점에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는 우리의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없다. 공산주의도 실패했지만, 자본주의도 한계에 봉착했다. 그리고 이제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성장이 아니라 삶의 질, 행복의 지수를 높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시급한 과제는 최대한 빨리 빨갱이 신드롬, 공산주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서, 그리고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인 과거 미화와 과거 비판에서도 벗어나서, 우리 모두가 행복하게 될 미래의 길을 새롭게 모색하는 것이다. 공산주의의 충격과 자본주의의 모순 속에서 진정한 기독교적인 사회를 모색하려고 나섰던 라가츠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제시한 “종교사회주의”가 새로운 길을 찾는 자들에게 큰 도움을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우리 모두 서로 싸우지만 말고, 손을 맞잡고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을 찾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