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단상(9)

박봉랑 박사님을 추모하며
  (2016년 1월 20일)  

 

금년 4월 25일은 박봉랑 박사님이 소천하신 지 15년이 되는 날이 된다.
추모집에 수록할 원고를 부탁받고, 기억을 더듬어 아래와 같이 써 보았다.

 

내가 박봉랑 박사님을 처음 알게 된 것은 그분이 쓰신 책을 통해서다. 아마도 1974년쯤인가 생각한다. 서울신학대학교가 서울 아현동 언덕에서 부천 소사 성지산 아래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워낙 책을 읽기를 좋아하던 나는 습관처럼 구내 서점에 들어갔다. 서가에 꼽힌 여러 책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갑자기 파란 색깔의 두꺼운 책 한권에 눈이 꽂혔다. 그 당시에 나온 책들은 대개가 두껍지 않았는데, 유독 두껍게 보이는 책 한권이 갑자기 눈에 들어왔다.

책 제목이 조금 이상야릇했다. “基督敎의 非宗敎化” 그 동안 기독교를 줄곧 종교로만 여겨왔던 나는 기독교를 종교가 아닌 것으로 바꾸겠다는 저자의 도전적인 모험에 조금 충격을 받았다. 한 개인이 기독교라는 종교를 자기 마음대로 종교가 아닌 것으로 바꿀 수 있겠는가, 그런 의심도 들었다. 뭐 이리 생뚱맞은 제목인가? 그래서 저자가 누군가 살펴보았더니, 이름도 매우 낯설었다. 朴鳳琅! 이런 이름은 지금도 흔한 이름이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우습게도 들렸다.

책 표지를 열어보니, 더 자세한 정보가 들어 있었다. “본회퍼 硏究”라는 부제를 보고, 비로소 이 책이 본회퍼에 관한 연구서임을 알아차렸다. 왜 본회퍼 연구서에 “基督敎의 非宗敎化”라는 제목을 붙였는지는 본회퍼의 후기 신학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본회퍼 신학 전체를 상징하는 제목으로는 너무 무리한 제목을 붙이셨다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한 장을 더 넘기니, 책과 저자에 관한 더 자세한 정보가 들어 있었다. “韓國神學大學 敎授 神學博士” 저자가 조금 진보적인 신학대학의 교수이고, 신학박사 학위까지 따신 분임을 알았다. 그 당시 내가 다니던 서울신학대학의 교수님 중에는 정식으로 박사 학위를 따신 분이 전무했기 때문에 기가 조금 죽었고, 한국신학대학이 갑자기 부러워졌던 것 같다. 한 장을 더 넘기니, 조금 색다른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이 책을 고난받은 우리 교회와 겨레 앞에 받칩니다.” 이 책이 단순히 학문적인 저술일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려는 매우 실천적인 책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읽고 싶은 생각이 더 간절해졌다. 그렇지만 매우 궁핍했던 나는 이 책을 바로 사서 읽어보지는 못했다.

아주 나중에야 이 책을 사서 비로소 읽어 보았고, 한국조직신학회에서 시리즈로 발간하는 조직신학 교과서의 하나인 “교회론”을 쓸 때에는 이 책을 자세히 살펴 보았다. 본회퍼를 침이 마르게 칭송하는 한국의 여러 신학자들도 아직까지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본회퍼를 소개하는 책을 쓰고 있지 못한 걸 감안하면, 박봉랑 박사님은 일찍부터 본회퍼 연구를 위한 길을 가장 먼저 개척하신 학자였음이 분명하다.

그분과의 인격적인 만남은 1977년에 연세연합신학대학원의 강의실에서 이루어졌다. 아마도 강의 제목은 “바르트 신학”이었을 것 같은데, 그분이 바로 강사로 오셨다. 책으로 처음 만났던 분을 목전에서 생생하게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설렘과 기쁨이 교차했다. 내가 처음 보았던 책의 두께나 내용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그분이 매우 날카로운 성격과 차가운 외모를 지녔을 것이라는 나의 상상은 한꺼번에 무너졌다. 마치 친근한 동네 아저씨와 같았고, 매우 서민적이고 권위를 스스로 내려놓은 아버지와 같았다. 가방도 매우 낡았고, 옷차림도 수수했다. 말씨는 더욱 포근했고, 강의는 한없이 자비로웠다. 불성실하거나 실력이 모자란 학생을 호되게 나무라신 적이 전혀 없었고, 도발적이거나 신선한 발언을 하신 적도 거의 없었다.

그분은 학생들에게 칼 바르트의 두꺼운 “교회교의학”을 조금씩 번역하여 발표하게 하셨는데, 그다지 많은 말씀을 하지 않았고, 그래서인지 기억에 오래 남는 말씀도 별로 없다. 다만 매우 엉뚱하게, 전혀 예상하지 못하게, 어느 날 갑자기 그분이 자신의 은밀한 부부생활에 대한 뒤늦은 후회를 제자들 앞에서 토로하시며, 우리에게는 그렇게 하지 말 것을 간곡히 권면하셨다. 그분이 비인간적이시라고 느낀 적은 전혀 없었지만, 그날만큼 그분이 참으로 인간적인 분이시라는 사실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박봉랑 박사님이 내게 평생 잊을 수 없는 고마운 은사로 기억될 수밖에 없는 까닭은 바로 그분이 나를 위대한 신학자 바르트로 친절하게 안내하셨고, 바르트에 관한 석사 논문을 자상히 지도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때 배우고 익힌 바르트 신학 때문에 나는 낯선 독일에서 바르트에 관한 논문으로 비교적 빨리 학위를 마칠 수 있었다. 지금 그분에게 바르트를 배운 제자들이 곳곳에서 교수와 학자와 목회자로서 활동하고 있음을 본다. 한 분의 영향력이 이렇게 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도 그런 선생이 되려고 노력한다.

그분과의 마지막 만남은 돌아가시기 몇 년 전에 이루어졌다. 1988년 봄에 독일에서 귀국하여 오랫동안 교수직을 얻지 못한 나는 강남순복음교회에서 운영하는 강남신학원에서 잠깐 교무 행정을 맡으며 강의한 적이 있었다. 그때 박봉랑, 전경연, 김철손, 김득중 박사님을 비롯한 많은 원로 교수님들이 강의하러 오셨다. 거기서 가끔 뵙곤 했지만, 많은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다.

내가 그곳을 떠난 후 어느 날, 그곳에서 알게 된 중년 여성 전도사님 두 분으로부터 병중에 계신 박봉랑 박사님을 찾아뵙자는 제의가 들어 왔다. 당연히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얼마 후에 수유리 어느 길가에 자리한 초라한 기와집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그분의 집도 그분만큼 소박하고도 겸손했다. 사모님의 진심어린 반가운 환영과 뜨겁게 맞이하시는 박봉랑 박사님의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매우 중병인 듯했지만, 얼마나 오래 사실 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런데 박봉랑 박사님은 마치 곧 돌아가실 듯이, 우리에게 찬송가를 불러달라고 부탁하셨다. 무슨 곡을 불렀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찬송을 부르는 내내 그분은 두 눈을 지그시 감으시고 행복해 하셨다. 치유와 평안을 위해 간절히 기도를 드렸더니, 마치 우리를 하늘 천사를 대하듯 매우 감사히 여기셨고,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을 예감하신 듯 매우 애잔한 슬픔을 보이셨다.

그분은 평생 그 어떤 신학자보다 바르트를 더 뜨겁게 사랑하셨고, 바르트 소개를 위해 일생을 송두리째 바치셨다. 그분의 저서는 온통 바르트 소개로 점철되어 있고,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번역과 출간을 위해 마지막 남은 생명을 불태우셨다. 나도 번역진에 가담하여 그분을 여러 차례 만났는데, 그렇게 기뻐하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바르트는 죽어서 모차르트를 가장 먼저 보기를 사모했다면, 아마도 그분은 돌아가셔서 바르트를 먼저 보기를 사모하셨을 것이다. 만약 바르트를 만나셨다면, 서로 어떤 대화를 나누셨을까? 바르트는 아마도 이렇게 말했을 듯하다. “내 신학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보잘 것 없는 내 신학을 연구하시느라 소중한 생명을 매우 단축시키셨구려! 내가 고마워해야 할지, 나무라야 할지를 모르겠소!” 박봉랑 박사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을까? 아마도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을까? “후회는 없습니다. 이생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내가 그곳에서 오래 살기만을 바라겠습니까? 당신을 위해, 아니 복음을 위해 바친 내 인생에 자랑할 것도 별로 없지만, 후회할 것은 전혀 없습니다. 당신 때문에 나는 행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