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을 통해서 보는

한국교회의 희망

 

이신건

 

독일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 박사가 올해 6월에 다시금 한국 땅을 밟았다.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희망의 신학'이라는 책은 제2차 세계대전 후의 폐허 속에서 우렁찬 희망의 메시지를 전함으로써, 신학의 방향을 순식간에 바꾸어놓았다. 뉴욕 타임즈(New York Times)는 "희망의 신학 때문에 '하나님의 죽음의 신학'은 기반을 잃어버렸다."고 하였고, 슈피겔(Der Speigel)은 "희망의 신학이 그리스도인의 창백한 피 속에 철분을 공급하였다"고 하였다. 이 책은 희망을 애타게 갈구하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열렬한 갈채를 받았다.

마침 올해는 희망의 신학'이 출간된 지 어언 40년이 된 해이기 때문에 더욱 뜻이 깊었다. 우리는 그가 말하는 희망이 얼마나 성서적-신학적인가를 다시 한번 냉철히 검증할 뿐만 아니라, 그가 약속하는 희망의 언어가 얼마나 구체적-현실적인가를 검증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우연하게도 40년이라는 햇수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방황하던 기간과 일치한다. 그런 의미에서 40년은 옛 계약의 백성만이 아니라 새 계약의 백성인 교회, 특히 한국교회에게도 새로운 출발을 촉구하는 호소처럼 다가왔다.

실로 지금 한국 교회는 광야의 이스라엘처럼 모진 시련과 시험을 단단히 치르고 있다. 아니 한국교회는 중요한 결단을 해야 할 기로에 서 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앞으로 힘차게 전진할 것인가, 아니면 환경을 탓하고 우상을 섬긴 결과로 결국 엎드러지고 말 것인가? 이런 상황에서 많은 교회들은 앞으로도 못 나아가고 이른바 '좋았던 옛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는 듯하다. "비록 독재시절이었지만, 그래도 배불리 먹었다! 비록 배가 고팠지만, 그래도 희망은 있었다! '축복', '성장' 하면, 마술처럼 그렇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뭐야!?"

그러므로 오늘의 문제는 비단 경제의 침체에만 있지 않다. 북한의 위험과 친북-좌경 세력에만 있지 않다. 보수-우익 세력과 부시의 오만에만 있지 않다. 날로 벌어지는 부익부-빈익빈의 차이에만 있지 않다. 교회의 위기도 단지 성장의 침체와 이념적 갈등에만 있지 않다. 더욱이 교회의 부패와 교권의 타락에만 있지 않다. 오늘의 위기는 무엇보다 바로 "희망이 없다"는 사실, 아니 솔직하게 말해서, "희망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에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방향 상실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미래의 전망을 잃었다. 그래서 어디로 가야할 지를 모를 뿐만 아니라, 어떻게 가야할 지도 모르고 갈팡질팡하고 있다.

더욱 어처구니가 없는 사실은 우리가 모든 탓을 남에게만 찾고, 남에게만 원망을 돌리려고 혈안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부 탓이고, 정치 탓이고, 북한 탓이고, 미국 탓이고, 재벌 탓이고, 노동자 탓이고, 젊은이 탓이다." 이럴수록 마음의 평화와 가정의 화목과 사회의 안정은 무너지고, 서로 간에 불신과 갈등은 더욱 커져만 간다. 이럴수록 어부지리(漁父之利)로 배를 불리는 것은 바로 어둠의 세력들이다.

이처럼 암담한 한국 땅을 다시금 밟은 몰트만 박사는 더 이상 순진하지 않은 우리에게 또 무슨 말을 속삭이려고 하였는가? 절망 밖에 보이지 않는 이 땅에 무슨 허무맹랑한 희망을 말하려고 하였는가? 우리는 아직도 희망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희망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가?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그리고 어디까지 희망할 수 있는가? 희망에 대해 회의하고 공격하던 청중들에게 몰트만 박사는 지난 시절의 뜻밖의 사건들, 즉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 독일의 통일, 남아프리카의 인종차별 체제의 평화적인 붕괴 등을 예로 들면서, "역사는 우리의 작은 믿음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왜 우리는 더 위대한 희망을 품지 않았는가?"고 반문하였다.

분명히 역사는 우리의 교과서다. 분명히 망할 것만 같은 우리가 여전히 건재하다니! 변방의 조그만 나라로서 아직도 강국에 흡수되지 않고 있다니! 피죽도 못 먹던 우리가 북한 동포를 먹일 수 있을 정도로 음식 쓰레기를 마구 버릴 수 있다니! 오랜 억압과 차별의 땅이 이렇게 빨리 민주화, 산업화, 정보화로 진입하다니! 우리가 스스로 놀라 자빠져도 웃을 일이 아닌가?

하지만 몰트만 박사는 우리의 역사를 칭찬하거나 우리의 가능성에 아양을 떨지도 않았다. 더욱이 그는 "밤이 캄캄할수록 아침이 더 가깝다"거나, "구름 위에는 언제나 태양이 빛난다"거나 하는 사탕발림으로 우리를 잠깐 위로하지 않았다. 더욱이 그는 자신의 '희망의 신학'이 우리에게 희망을 가져온다고 책 선전을 하지도 않았다. 어찌 보면, 희망은 오직 절망하는 자들의 전유물이거늘, 그리고 절망의 늪으로 빠져드는 자는 안간힘으로 지푸라기라도 붙잡거늘, 어찌 그는 이런 세상의 지혜와 격언으로 우리를 달래려고 하지 않았을까? 인간이 품거나 만들어내는 희망이라는 것은 언제나 단편적이고, 세월이 지나고 나면 우리를 늘 속이고 배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섣부른 희망을 갖느니, 차라리 철저히 절망하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

희망은 대개 젊은이의 특권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더 체념하기 쉽고, 죽음이 가까울수록 점점 더 수동적인 자세를 갖기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순이 가까운 노구를 끌고 지구의 반대편까지 날아온 그가 여전히 희망차게 희망을 설파하였다. 그러고 보면, 그가 말하는 희망은 그 자신의 체험이나 유럽의 미래일 수는 없었다. 하물며 어찌 미국이 약속하는 희망일 수가 있으랴! 그것은 오직 희망의 하나님으로부터 다가오는 것이다.

하지만 "태양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자에게만 비추어준다"는 말이 있다. 이처럼 인류와 교회의 희망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약속의 땅으로 전진해나가는 순종의 자녀들에게만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이 희망은 결코 인간의 한계와 가능성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계산과 가능성 밖에 있다. 그것은 '없는 것을 있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희망의 하나님'의  지치지 않는 약속의 우렁찬 진동이요, 썩고 병들고 죽어 가는 우리의 살을 예리하게 파고드는 희망의 바늘이요, 그래서 우리를 잠시도 가만히 있게 하지 못하게 하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열어 보이시는 미래를 향해 늘 깨어 있게 하고 기도하게 하고 행동하게 하는 미래의 충격이다.

그가 말하는 희망은 절망한 인간이 신을 향해 불러대는 주문도 아니다. 그가 말하는 희망은 성서의 갈피마다 증언되어 있고 역사적으로 실현되어 가는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 전적으로 새로운 하나님의 미래, 죽음을 떨치고 일어나시고 역사 안으로 더 가까이 다가오시는 그리스도의 오심, 창조와 새 창조의 영이신 성령의 충만한 임재에 대한 희망에 기초해 있다. 그런 점에서 몰트만 박사는 철저히 성서적이고, 그래서 철저히 복음적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철저히 현실적이고, 그래서 철저히 혁명적이다. 그리하여 그의 '희망의 신학'은 혁명 신학, 해방 신학, 민중 신학, 흑인 신학, 여성 신학, 어린이 신학으로 이어졌으며,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잘못된 유토피아 사상과는 철저한 논쟁을 전개한다.

한국교회는 섣불리 가나안 땅에 발을 내딛었다. 준비가 없이 성급히 가나안 땅으로 들어왔다. 안정과 배부름과 세상 향락 때문에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을 잃었다. 예수님이 강조하신 가난함과 깨끗함과 애통함과 의에 주리고 목마름과 핍박의 복을 걷어차 버렸다. 어느 덧 우리는 광야에서 만난 희망의 하나님을 버리고, 가나안 사람들의 우상들을 섬기고 있다. 일류대학, 출세, 재물, 성공, 성장, 대형, 미국, 서울, 강남은 이제 생활의 수단을 넘어서 생활의 목적이 되고 있다. 신앙의 열매를 넘어서 신앙의 목표가 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제 성도가 세상 안에서 빛과 소금이 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교회를 보더라도 세상과의 경계선이 어디인지를 도저히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교회는 철저히 세상이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한국교회의 절망과 위기는 희망의 징조와 새로운 출발의 기회이기도 하다. 실로 한국교회의 위기는 일반 성도의 위기라기보다는 대부분 목회자의 위기다. 과거처럼 여전히 값싼 은총, 싸구려 축복만을 남발할 것인가, 아니면 좁은 길과 좁은 문, 십자가의 길을 가르칠 것인가? 여전히 쭉정이 신자를 양산할 것인가, 아니면 충실한 제자를 기를 것인가? 여전히 성직자 독재, 남성 독재, 당회 독재, 어른 독재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모든 믿는 자들의 평등한 공동체로 갈 것인가? 세상의 아편이 될 것인가, 아니면 세상의 빛이 될 것인가? 세상의 설탕이 될 것인가, 세상의 소금이 될 것인가? 세상을 떠다니며 홀로 구원받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방주가 될 것인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 나라의 누룩이 될 것인가?

이제 한국교회는 지난 시절의 시행 착오와 잘못된 방향 설정을 뉘우치고 진정한 방향을 향해 돌아서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시금 몰트만 박사가 '희망의 신학'의 마지막 장에서 주창한 '탈출 공동체'에 주목해야 한다. 교회는 더 이상 세상 욕구에 부응하려는 소비 집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현대인이 갈망하는 주체성의 숭배(자아 실현), 공동체 숭배(패거리 문화), 제도 숭배(편안함을 보장하는 장치들)로부터 단호히 결별하고,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사회를 향한 소명을 실현해야 한다. 교회는 오고 있는 하나님의 공의의 빛 안에서 인간화와 공의 실현을 위해 사랑과 섬김으로 헌신해야 한다. 교회는 미래의 약속된 진리와 정의, 평화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 교회는 모이려고만 안달할 것이 아니라 온 세계로 흩어져서 절망의 밭에 희망의 씨를 뿌려야 한다. 이 세계에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미래의 지평을 열어주어야 한다.

(2004년 11월 5일, 주간기독교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