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바르트에게 듣는다!

- 바르트 설교학의 공헌과 의의 -

 

 

이신건(李信建)

 

무겁고 괴로운 짐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에게 가장 무겁고 괴로운 짐이란 무엇일까? 어떤 사람들은 가난이 무거운 짐이라고 한다. 아주 오래 전에 이화여대생들에게 물어본 설문에서 장래 희망하는 남편의 직업으로서 목사가 13위에 오른 적이 있다고 한다. 이보다 한 단계 나은 직업이 이발사였다고 하니, 그 당시로서는 목사가 하는 일이 돈벌이에는 인기가 없는 직업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최근의 설문 조사에서는 2,3위를 다툴 정도라고 한다. 비록 요즘의 젊은이들은 수입이 좋은 직업보다는 안정적인 직업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지만, 목사직을 이처럼 선호하는 이유는 부자처럼 사는 소수의 스타형 목사들과 웅장하게 건축되는 최근의 교회당들 때문일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몰라도, 그들은 대다수의 목회자들이 여전히 가난하게 산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아직도 목회자 지망생이 줄을 잇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목사직이 세상 사람들이 선호하는 직업으로 떠오르는 것은 결코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다. 주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부자라도 가진 재산을 다 버리고 그분을 따라야 하거늘, 주님의 이름으로 어찌 재산을 모을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사이비 교주나 지능적인 사기꾼이 아닌 다음에야 무슨 방법으로 재산을 불릴 수가 있겠는가? 주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마음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이 아닌가! 부자가 되는 것을 인생의 최고의 목표와 행복으로 알고 있는 현대인들 가운데서 특히 가난하게 살아야 할 목사들은 그래서 복이 있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참으로 은총을 입은 사람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난이 지긋지긋해서 정말 목사를 못 해 먹겠다는 사람들이 있다면, 한시라도 빨리 목사직을 걷어차기를 바란다. 분명히 그는 부름을 받지 않고 제 발로 주님을 따라나선 사람이므로 후회할 일만 쌓고 있는 셈이다.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에게 가난 못지 않고 무겁고 괴로운 짐은 아마도 불량 성도일 것이다. 대개 사회에서 잘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는 큰 소리를 치는 법이다. 사회 생활도 반듯이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교회를 온통 휘저으면, 목사는 짧은 혀라도 내둘러야 한다. 하지만 의원이 병자를 위해 존재하듯이, 교회는 바로 이런 사람들을 위해 존재한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이런 사람들을 끌어안아야 한다. 아니 목회자는 그들을 더욱 진지하게 섬겨야 한다. 바로 이런 사람들을 위해 목회자는 세움을 받지 않았는가! 만약 목회자마저 이들을 진심으로 영접하지 않는다면, 누가 이들을 영접할 것인가? 비록 매우 힘들더라도, 목회자는 바로 이들이 자존심을 되찾고 치유를 받아 신실한 일꾼이 되도록 힘써야 한다.   

이들보다 목회자를 더욱 힘들게 하는 사람들, 아니 목회자를 타락시키는 사람들은 사회에서 한 몫을 당당히 하거나 잘 나가는 사람들이다. 대개 이런 사람들은 교회도 사회와 같은 줄로 착각하고, 교회 안에서도 큰 행세를 하려고 드는 법이다. 대개 이들은 교회 안에서 발언권도 세고 헌금도 많이 하는 편이므로 소심한 목회자는 이들 앞에서 기가 죽기 쉽다. 이들 앞에서 소심한 목회자는 "옳은 것은 옳다, 그런 것은 그르다"라고 용감히 말하기 어렵다. 아니 간이 큰 목회자도 이들에게는 아부하기가 매우 쉽다. 대개 큰 교회는 당회에 의해 좌우되고, 당회는 이런 사람들에 의해 좌우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어느 덧 목회의 주안점은 다수의 어린 양들을 돌보는 일보다는 소수의 큰 양들을 관리하는 쪽으로 치우치고 있다. 이러다가는 결국 목회는 힘있는 자들 속에서 살아남거나 그들과 지혜롭게 타협해 나가는 처세술로 변질되고 만다. 그러므로 소신이 있는, 아니 부름을 받은 진정한 목회자는 바로 이와 같은 사람들을 가장 무거운 짐으로 느낀다. 물론 목회자는 그들도 진심으로 섬겨야 한다. 하지만 그들이 던지는 은근한 협박과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는 즉시 그는 악마와 거래를 하는 셈이 되고 만다. 이런 사람들을 올바로 인도하거나 걷어찰 (사탄아 물러가라!) 용기가 없는 목회자도 가급적 빨리 목회를 그만 두거나, 목회를 다시 시작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목회자에게 가난과 불량 교인보다 더 무겁고 괴로운 짐은 아마도 설교일 것이다. 가난은 구차하더라도 견디거나 타개해 나갈 수 있다. 불량 교인은 아니꼽더라도 너그러이 품거나 성화(聖化)의 도구로 선용할 수 있다. 하지만 목회를 하는 한, 설교는 걷어찰 수 없다. 그러므로 비록 돈과 힘 앞에서는 좀 비굴해지더라도, 강단 위에서는 당당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도록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를 강단 위에 세우신 것은 그 자신의 인생 철학 혹은 목회 철학을 전파하거나, 멋진 문학 작품을 발표하거나, 감동적인 드라마를 연출하기 위함이 아니다. 만병통치약이나 값싼 약을 팔기 위함도 아니다. 더욱이 예수 때문에 성공한 이야기를 선전하기 위함도 아니다. 만약 설교의 목적이 이런 것들이라면, 설교는 정말 가볍고 신나는 일이 될 수도 있으리라. 특히 이런 일에 타고난 재주가 뛰어나거나 자기 계발에 능한 목회자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리라. 요즘 잘 나가는 설교자들의 면모를 보더라도, 솔직히 이런 면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잘 나간다고 하더라도, 만약 진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는다면, 사기꾼과 조금도 다르지 않으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이유 때문에 목회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당당함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바로 이와 동일한 이유 때문에 목회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당당할 수 없다. 사람 앞에서는 그럴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럴 수 없다. 그래서 설교는 해가 갈수록 가벼워지는 짐이 아니라 점점 더 무거워지는 짐이 된다. 특히 한국교회는 '설교 포화증'에 걸려 있다. 좋은 음식도 많이 먹을수록 건강을 해치듯이, 설교도 자주 할수록 부실해지기 쉽다. 한국교회가 급성장하고 세계에서 손꼽을 대형교회를 많이 만든 이유가 모이기를 자주 하고 그래서 설교도 자주 한 탓인지는 몰라도, 너무 잦은 설교 때문에 설교의 권위와 능력은 도리어 형편없이 떨어졌다. 그와 함께 교인의 영적 수준도 날로 추락하지 않았을까?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자주 먹으면 물리듯이, 아무리 좋은 설교도 자주 들으면 싫증난다. 성도들은 대개 설교 제목만을 보고도 설교의 내용을 미리 짐작해 버린다. 대개 설교는 그들의 예상과 맞아떨어지는 법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설교를 채 듣기도 전에 빨리 설교가 끝나기를 기다리면서, 지그시 눈을 감거나 졸아 버린다. 마음은 벌써 집이나 산과 들에 나가 있다. 그래서 설교는 허공을 치고 만다. 좋은 설교도 그리 하거늘, 하물며 매 번마다 어떻게 좋은 설교를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최근의 설교학자들은 내용이 좋은 - 딱딱하고 지겨운 - 설교보다는 흥미 있는 - 관심과 재미를 끄는 - 설교를 하라고 추천한다. 그들의 말에도 일리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대중 스타와 개그맨 혹은 극작가가 아닌 다음에야 목회자가 어떻게 늘 그런 설교를 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흥미 있는 설교가 항상 좋은 설교는 아니지 않은가! 그러므로 설교의 무거운 짐을 조금이라도 덜려면, 설교 회수를 과감히 줄이는 방향으로 목회 구조를 만드는 것이 가장 좋으리라. 솔직히 한 주일에 한 번 설교하기도 벅차지 않은가! 필자가 오랜 학자의 생활을 뒤로하고 목회의 길을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고심한 것은 설교의 회수를 과감히 줄이는 일이었다. 어떤 사람은 필자가 박사학위를 취득한 신학자이기 때문에 설교 부담이 덜할 것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또 어떤 사람은 오래 목회를 하다 보면, 그 동안 쌓인 설교가 많아서 부담이 줄어들거나, 설교 준비를 하지 않고 적당히 설교하는 요령이 늘어난다고도 말한다. 요즘 들어서는 인터넷에 넘쳐나는 설교문이 큰 도움을 준다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바로 이런 요소들이야말로 설교를 가장 위태롭게 하는 것들이다. 물론 설교 내용은 적당히 베끼거나 탁월하게 짜깁기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베끼거나 짜깁기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설교자가 혼신을 다 기울여도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할까 말까할 텐데, 적당히 때우는 설교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겠으며, 여기서 어떻게 성령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을 것인가? 더욱이 익숙한 지식과 숙달된 요령과 베끼기 기술로 사람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엄청난 간극을 어찌 메울 수 있을 것인가?   

설교가 무거운 짐이 되는 것은 비단 설교의 회수 때문만은 아니다. 설교가 참으로 무거운 것은 설교에 설교자의 온 인격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설교의 가치가 날이 갈수록 떨어지고 심지어 조롱까지 받는 것은 설교와 인격이 따로 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도와 일반 대중들은 종종 목사를 항해 "설교하지 말라!"고 한다. 설교에 대한 신뢰도가 이처럼 한심하게 떨어졌다면, 차라리 아예 설교하지 않는 편이 훨씬 더 낫다. 이용도 목사는 가끔 강단에서 아무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회중석이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물론 사전에 어떤 공감대가 미리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하지만 이것은 때로는 침묵이 웅변보다 더 강하는 것을 웅변하는 한 사례다.  

사실 나도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왜냐하면 비록 필자가 부름을 받았다는 강한 확신 속에서 설교를 한다고 하더라도, 설교가 나의 삶과 너무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이런 설교를 듣는 회중은 나의 설교를 얼마나 남의 말 같이 듣겠는가! 그러고도 목회자랍시고 교회 갱신이니 사회 개혁이니 하는 말을 쓴다는 것은 목불인견(目不忍見)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모순을 계속 쌓으면서 설교를 하느니,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회개의 눈물을 계속 흘리는 편이 나으리라. 그래서 나도 침묵하는 편이 더 낫지 않을지 심각하게 고민해 본 적이 있다. 하지만 한번도 그렇게 해 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설교는 나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핑계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는 설교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사례비를 받을 자격조차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랬다는 말이 더 솔직한 대답이리라. 간혹 설교를 하지 않거나 다른 형태(영상, 찬양, 기도 등)로 설교를 대신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매 번마다 그럴 순 없으므로 욕을 먹더라도 강단에 올라서야 하고, 괴롭더라도 설교해야 한다. 이 짐을 피하는 즉시 목회자는 죽고 말 것이다. 설령 목회자가 죽더라도, 이로 인해 교회마저 죽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설교는 목회자에게 가장 무거운 짐이다.

하지만 설교의 회수와 설교자의 인격보다 더 설교를 무겁게 하는 이유는 앞에서 말한 대로 설교가 그야말로 대중을 교화하거나 선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대중이 교화되든 말든, 대중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하나님의 말씀은 선포되어야 한다. 그 무엇보다 바로 이와 같은 사명 때문에 목회자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더욱이 대중과 성도가 목회자에게 가장 큰 기대를 거는 것도 설교라고 할 수 있다. 필자가 섬기는 교회는 비록 작은 시골 마을의 작은 교회이지만, 교인들은 수십 년 이상 신앙 생활을 해 오던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설문 조사를 해 본 결과,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여전히 설교였다. 그러므로 필자는 한 주간 동안 한 편의 설교를 작성하는 일에 가장 큰 비중을 두고 있다. 교회의 바쁜 목회자들은 설교가 교육과 상담(영혼 돌보기)의 기능까지 하도록 섬세히 배려할 것이다. 그렇다면 도시 목회자들의 설교의 부담은 얼마나 클 것인가! 더욱이 티끌(욥 30:19)과 진흙(시 18:42)인 주제에, 아니 하나님 앞에서는 '없는 것'(시 39:5)과 마찬가지인 처지에 감히 그분 앞에서 그분의 말씀을 마구(!) 떠들어대다니, 인간으로서 가당한 일인가? 아니 차라리 저주에 가까운 일이 아닌가? 더 많은 심판을 자초하는 첩경이 아닌가? 오호라, 목사는 참으로 곤고한 사람이로다. 목사라도 여전히 죄인이라서 곤고하고, 죄가 되는 줄을 알면서도 뻔뻔하게 죄를 지어야 하므로 참으로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목사를 구원할 것인가?

 

왜 다시 바르트인가?

일반 대중과 성도만이 아니라 목회자의 곤궁을 해결하시는 분도 당연히 오직 예수님이지만, 불행하게도 예수님은 설교학을 친히 가르치시지 않았다. 물론 '예수의 설교학'을 말할 수는 있겠다. '예수의 설교술'을 흉내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예수님은 구체적인 상황을 위한 구체적인 설교 지침을 내려주시지 않았다. 더욱이 목회자는 예수님이 아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고민은 더욱 깊어진다. 그래도 우리는 최소한 그분에게 목회자의 곤궁을 아뢸 수는 있을 것이고, 우리의 짐을 가볍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의 좋은 친구가 되시고, 그래서 우리의 무거운 짐을 가볍게 해 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마 11:28). 이 사실보다 목회자에게 더 큰 위로가 되는 것은 없으리라. 그래서 설교의 자신과 설교 준비 여부를 떠나서, 나는 바로 이 약속을 믿고 강단에 오른다.

하지만 예수님은 "구하라"고만 하시지 않고, "찾고, 문을 두드려라"고도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훌륭한 설교자와 설교학자를 찾아야 하고, 그들의 조언을 청해야 한다. 다행히도 우리처럼 설교의 곤궁을 심각하게 느끼고 그 나름대로 훌륭한 대안을 제시한 지혜로운 스승 한 사람이 우리 앞에 우뚝 서 있다. 그는 바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 칼 바르트(K. Barth)다. "왜 하필 늙어빠진 바르트냐?"고 질문하는 사람이 있으리라. 21세기를 넘어서는 이 마당에 바르트는 낡은 패러다임의 한 전형으로 비친다. 여성만이 아니라 남성에게도 그렇다. 비록 그는 종교개혁적 모형(Paradigm)을 회복한 사람이지만, 현대적 모형 안에서 그렇게 한 사람이다. 비록 그는 현대이후적 모형을 예비한 사람이지만, 현대적 모형 안에 더 깊숙이 발을 들여놓고 있다. 그래서 현대이후적 모형을 열렬히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바르트가 그 누구보다도 먼저 시급히 극복되어야 할 상징적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신학적 사유와 구체적 실천으로 설교에 지대한 관심을 둔 신학자로서 바르트를 필적하는 사람은 아직 없으리라. 다만 그가 설교자로서 하나님의 일을 시작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리고 그의 논문들, 특히 불후의 명작인 '교회교의학'이 웅장한 폭포수와 같은 설교로 다가오기 때문만도 아니다. 더욱이 그의 생애가 한 편의 설교같이 보이기 때문도 아니다. 바르트는 신학을 교회의 본질적인 기능으로 보았고, 설교를 교회의 본질적인 기능으로 보았다. 그의 신학은 올바른 선포를 위해 봉사하려는 관심으로 온통 일관하고 있다.

바르트가 신학자로서 첫 발을 들여놓기 시작한 것도 바로 설교의 과제 때문이었다. 그가 배운 스승의 신학으로 설교해 왔지만, 제2차 세계대전을 열렬히 지지한 스승들의 가르침으로는 더 이상 설교할 수 없다고 느낀 이후부터 주일마다 설교하는 것을 가장 무거운 짐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설교의 원천과 목표는 무엇인가?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 말할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이러한 고민에 빠진 바르트는 성서 주석으로부터 다시 신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성서가 '현대신학'에서 들었던 것과는 아주 다르게 말하기 시작했고, 완전히 놀랍고 낯선 느낌으로 성서를 재발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바로 그를 일약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로마서 주석'(제2판, 1921년)이다.

여기서 바르트는 말한다. 교회는 온갖 인간적인 실수로 인해 신음하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라는 사실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 교회의 곤궁은 인간이 비록 불붙는 혀로써 말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에 관해서는 오직 인간적인 사고, 행동, 소유, 독선의 비유로써 밖에는 말할 수 없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인간은 모두가 하나님에 관하여 진지하게 말하지만, 결국에는 자신을 강하게 드러내고, 자신을 관철한다. 그분은 진실하시지만, 우리는 모두 거짓말쟁이다. 설령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더라도, 만나는 즉시 그분을 배척해 버린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결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인식 혹은 하나님 진술의 불가능성은 다음과 같은 바르트의 문장 속에서 잘 드러난다.

우리는 신학자로서 하나님에 관하여 말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며 그래서 하나님에 관하여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이 둘, 우리의 당위성과 불가능성을 알고, 바로 이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K. Barth, Das Wort Gottes als Aufgabe der Theologie, 1922, in: J. Moltmann, Anfaenge der dialektischen Theologie, Teil 1, a. a. o., 199).

사람들은 이와 같은 바르트의 주장 속에서 '불가지론' 혹은 새로운 '영지주의'를 보려고 하였다. 하지만 바르트의 관심은 여전히 "하나님을 하나님이 되시게" 하는 데 있었다. 만약 하나님이 창조와 역사와 종말, 계시와 구원의 주님이시라면, 오직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을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그분의 주체적인 행동, 기적과 은총으로서만 인식될 수 있다. 그러므로 위와 같은 바르트의 주장은 불가지론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계시론 혹은 하나님의  말씀론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다(Dues dixit)!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바르트의 계시론 혹은 하나님의 말씀론에 따르면, 하나님은 말씀(계시)하시는 분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계시) 자체이고, 성령은 말씀의 능력(계시의 현실)이다. 하나님은 삼중적으로 말씀하신다. 계시된 말씀(예수)을 통해, 기록된 말씀(성서)을 통해, 그리고 선포된 말씀(설교)을 통해 말씀하신다.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고, 설교는 성서를 증언한다. 그러므로 바르트에 따르면, 설교란 무엇보다 하나님의 계시 혹은 하나님의 말씀에 올바로 부응하려는 인간의 활동이다. 그러므로 바르트의 설교학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계시 혹은 하나님의 말씀과의 상응성(적합성)을 확보하려는 인간의 진지하고 겸손한 노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에게 신학과 설교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겸손한 봉사였다.

 

바르트의 설교학적 공헌

예수님은 많은 설교를 하셨지만, 설교학을 가르치신 적은 없다. 하지만 설교를 신학의 본질적 기능을 보았던 바르트는 교회에서 자주 설교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학에서 설교학을 가르쳤고, 그리하여 설교학 교본을 남겨놓았다. 많은 사람들은 바르트가 설교학 분야에서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가는 어렴풋이 알고 있는 편이지만, 바르트가 몸소 설교학을 강의하고 그래서 설교학 교본을 남긴 사실은 잘 모르고 있다. 조직신학자로서는 드물게 바르트는 1932-1933년에 본(Bonn) 대학에서 설교학을 강의하였고, 이것은 '칼 바르트의 설교학, 설교의 본질과 준비'(정인교 역, 한들출판사 1999년)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비록 100쪽을 조금 넘는 작은 책이지만, 이 강연은 바르트가 히틀러에게 충성 서약을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고국으로 추방되기 직전에 발표된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바르트의 설교학은 앞으로 설교해야 할 학생들을 위하여 한가한 시간 중에 책상 앞에서 쓰여진 사변적인 설교학 이론이 아니라 치열한 신학적, 영적인 투쟁의 현장 속에서 - 교수직을 걸고! - 쓰여진 것이다. 여기서도 문화와 인간, 종교성 혹은 경건성 등에 강조점을 두었던 이른바 자유주의(문화개신교주의)에 대한 그의 신학적 투쟁의 노선을 이어가면서, 설교의 원천으로서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 외에, 그리고 그와 나란히 다른 사건들, 권세들, 형상들과 진리를 하나님의 계시로 인정하려던(바르멘 신학선언 제1항), 즉 히틀러와 독일(아리아) 민족 속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를 읽으려던 '독일 그리스도인들'(Deutsche Christen) 운동에 대한 바르트의 노골적인 저항이 드러나 있다.

이른바 '자유주의' 신학과 '독일 그리스도인' 운동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혹은 성서보다는 인간에게 더 주목하려던 거대한 흐름이었는데, 바로 이러한 도도한 운동에 바르트는 결연한 투쟁의 경계선을 긋고 새로운 신학적 분계선을 그었다. 자유주의 신학에 바탕을 둔 '현대적 설교' 운동은 하나님보다는 인간에게, 교회보다는 사회에 초점을 맞출 것을 주장하며 설교의 인간화를 추구하였는데, 바로 이것을 바르트는 다시 '말씀의 설교'로 되돌려놓았다(역자 서문, 6쪽). 하지만 바르트의 힘찬 목소리는 어언 덧 희미해졌고, 다시금 인간 혹은 회중에게 더 많은 관심을 두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려오기 시작한다.

교회가 점점 구원의 기관이 아니라 서비스 기관으로 변해가고, 대중이 목사를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자가 아니라 마음대로 골라잡을 수 있는 하나의 상품처럼 대하는 경향이 짙어지는 오늘날의 상황에 부응하여, 설교의 비중 혹은 말씀의 권위도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 혹은 성서로부터 회중으로 서서히 옮아가고 있다. 설교가 권위를 갖는 것은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회중이 감동을 받기 - 좋아하기 -  때문이다. 역자의 말대로 오늘날의 설교는 실용적인 측면과 회중의 요구에 부응하려는 경향에 지배되고 있다. 그리하여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한 설교자 개인의 이야기 혹은 정신 교양강좌로 전락할 위험에 처해 있다. 한 편으로 이런 추세는 이른바 '이야기 설교학' 운동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다고 생각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열린 예배 혹은 영상 예배 혹은 코미디형 설교 등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전하려는 노력보다는 인간의 욕구에 부응하여 단기간에 뭔가를 달성하려는 노력 속에서도 엿볼 수 있다. 바르트의 설교학은 무엇보다도 이런 설교의 일탈 행위를 견제하거나 방어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로 작용한다. 이런 상황에서 바르트의 설교학은 다시금 새롭게 설교의 본질과 기능에 대한 진지하고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진다.     

물론 바르트의 신학과 설교학은 여전히 한물 간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회중이 듣든 말든, 회중이 좋아하든 말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고 말하는 바르트의 설교학은 우리 시대에 너무 권위적, 위압적으로 들린다. 그리고 역자의 주장대로 바르트가 회중이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에 너무 낙관적으로 접근하였기 때문에 노년에 이르러 이 사실을 인정하고 자신의 설교관을 일부 수정하였다고 한다. 지금으로서는 필자가 이를 일일이 확인할 방법이 없다. 다만 그의 신학의 비중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하나님의 초월성)으로부터 출발하여 점차로 '하나님의 인간 되심'(하나님의 내재성)으로 변해간 사실을 통해 이와 같은 경향을 미루어 짐작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트 신학의 일관된 입장은 "유한은 무한을 담을 수 없다"는 칼빈주의적 공리였다. 하나님의 계시는 '아래부터'가 아니라(자연계시에 대한 반대) '위에서' 아래로 온다. 하나님의 운동이 아무리 낮은 곳으로 내려오더라도, 아니 설령 하나님의 운동이 낮은 곳(밑바닥)에서 시작된다고 하더라도, 이 운동은 한 가지 운동의 두 측면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낮아지심 밖에서는 하나님의 높으심은 인식될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낮아지심 안에서 참으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높으심이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취하셨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자기 낮춤(卑下)을 뜻한다. 하나님이 이처럼 자신을 낮추실 수 있고 또 그러길 원하시며 기꺼이 그러하신다는 바로 이 사실 때문에 하나님은 위대하시며, 바로 그러한 사실 안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진정한 하나님으로 입증하신다. 바로 이 점에서 하나님은 모든 다른 신들과 구분되며 그들보다 뛰어나시다. 바로 이러한 높은 겸손 안에서 하나님은 세상과 화해하시는 하나님으로서 말하시고 행동하신다(K. Barth, KD Ⅳ/1, 172f).   

설령 하나님의 운동이 밑바닥에서 시작된다고 하더라도, '계시된 하나님'은 여전히 '숨어계신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영원토록 경배를 받기에 합당한 분이며, 그 어떤 이념과 인간에 의해서도 완전히 장악되거나 소유될 수 없다. 인간에 의해 소유될 수 있다고 생각되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이다. 이런 하나님은 성서가 말하는 진정한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고안해낸 거짓 하나님이며, 이런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는 신학과 설교는 한갓 어린이 놀이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바로 여기에 신학과 교회, 인간과 역사의 모든 본질과 운명이 걸려 있다. 여기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그 어떤 이름과 모양으로 나타나든, 모두 하나님에 대한 배반 혹은 우상숭배, 아니 인간의 자기숭배로 변한다. 바르트에 따르면 우상숭배는 단지 교회 밖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우상숭배는 오히려 교회 안에서 가장 집요하게, 가장 유치하게 일어난다. 예를 들면,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황숭배와 자유주의 신학의 '인간숭배'와 개신교회의 '종이교황'(육신이 되신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문자가 된 말씀을 절대화하는 입장, 즉 성서문자주의) 등이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바르트 설교학의 가장 두드러진 공헌은 이상적인 설교학이나 모범적인 설교안을 제시한 사실에 있다기보다는 빗나가기 쉬운 설교를 효과적으로 막는 강력한 신학적 무기가 된 사실에 있다고 여겨진다    

 

설교의 본질과 기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트의 웅대한 신학은 설교학적인 열매로도 나타났기 때문에 그의 설교학에도 한번쯤 귀를 기울여 볼 만하지 않겠는가! 무엇보다도 필자가 오늘날의 상황에서 관심을 갖는 것은 설교의 준비나 기술보다는 설교의 본질과 기준이다. 설교란 무엇인가? 바르트는 설교를 다음과 같이 두 가지 방식으로 정의한다. 1. 설교란 하나님 자신에 의해 말씀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서 본문을 현대인과 연관하여 해석하라는 요청 하에 그 자신에게 맡겨진 위임에 복종하는 교회에 의해, 이 일로 부름을 받는 자에 의해 자유로운 언어로 행해진다. 2. 설교란 하나님의 말씀에 봉사하는, 교회에 명령된 한 시도로서 이 일을 위해 부름을 받은 자에 의해 자유로운 언어 가운데서 성서 본문을 현대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친히 들어야 하는 것에 대한 통고로, 정말 그들에게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설명하는 방식으로 수행된다.

두 가지 정의는 외견상으로는 동일한 요소들을 담고 있지만, 접근 방법이 서로 다르다. 처음은 위에서 아래로, 그 다음은 아래에서 위로 설교를 정의한다. 처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고, 그 다음은 인간으로부터 시작한다. 바르트가 설교를 이렇게 두 가지 방법으로 정의하는 것은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임과 동시에 인간의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의 근거는 바로 그리스도론에 있다. 설교의 어려움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며 무엇인가를 말하는 어려움과 다르지 않다. 바르트의 기독론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낮추신' 하나님임과 동시에 '들리심을 받은' 인간이다. 그러므로 신학자는 '상향식'과 '하향식'이라는 두 가지 사유 방식을 사용해야 한다. 설교는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인간의 말이다. 설교자의 말은 그 자신의 말이라는 의미에서 자유로운 말이며, 그 자신의 독창적인 언어로 전달된다. 그는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이정표와 손가락의 역할을 할 따름이다. 이런 점에서 설교자는 예언자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인 이유는 설교를 통해 말씀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설교가 인간의 언어로 수행됨에도 불구하고 바르트가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의 삼중 방식의 하나로 정의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인간은 다만 성서가 말하는 것을 가리키려고 시도할 따름이다. 인간은 다만 하나님의 말씀에 봉사할 따름이다. 인간은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알리려고 시도할 따름이다. 하지만 여기서 일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분은 우리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결단을 촉구하는 자도 인간이 아니다. 인간의 결단은 오로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로서 설교의 본질적인 과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바르트에게서 설교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계시적합성'과 '성서적 성격'이다. 그래서 바르트가 설교의 기준으로 제시하는 아홉 가지 요소들, 즉 계시적합성, 교회성, 신앙고백적 적합성, 직무 적합성, 잠정적 성격, 성서적 성격, 독창성, 회중부합성, 영성 중에서 가장 많은 관심과 지면을 할애하는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다. 설교는 하나님의 계시의 반복이나 전달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전이나 지금이나 언제나 계시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지적인 논증과 명제로 하나님을 증명하려고 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의 진리를 심미적 형식, 그림과 인상 등으로 증명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이 친히 자신의 진리를 말씀하시려고 한다면, 설교자가 자신의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자신을 끼워 넣으려는 것은 우상숭배와 마찬가지다. 그리고 설교자는 하나님의 실재를 창조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그는 다만 하나님의 실재를 드러내고 전달해야 한다. 이 일은 오직 하나님 자신의 일이다. 인간은 자신에게 위탁된 것에 다만 복종할 따름이다.

그렇다면 설교자는 자신의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설교해서도 안 된다. 인간은 다만 하나님이 설교에서 행동하시기를 기대하는 것 이상을 할 수 없다. 하나님은 설교 속에서 친히 자신의 목적과 계획을 관철하신다. 물론 설교자는 자신의 주제와 명제 혹은 착상을 표현하겠지만, 이것들은 엄격히 하나님에게 속한 것으로 유보해 놓아야 한다. 설교자가 자신의 주제와 명제 혹은 착상을 선사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훼손하는 일이다. 설교자가 어떤 개념을 제공하는 것은 '성서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설교자의 임무는 '성서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로부터'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설교에서 말씀하시는 분은 홀로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설교에 자신의 주제와 목적 혹은 개념을 끼워 넣어서는 안 된다. 그는 다만 성서가 말하는 것을 뒤따라 말해야 하고, 성서에 흐르는 고유한 사고의 흐름을 따라가려고 해야 하며, 그것을 벗어난 임의의 목적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이런 의미에서 설교는 성서적 성격을 지닌다. 설교는 바로 성서 해석이다. 여기서 바르트가 설교자가 지녀야 할 구체적인 태도 방식과 자질을 다섯 가지로 제시한다. 1. 성서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2. 인간에 대한 관심, 3. 엄격한 주석적-학문적 작업, 4. 겸손의 의무, 4. 설교자의 가동성. 그리고 이에 덧붙여 바르트는 설교자가 경계해야 할 세 가지 태도를 제시한다. 1. 통속적인 목사 냄새를 피우지 말라, 2. 광신자가 되지 말라, 3. 따분한 존재가 되지 말라.

 이처럼 바르트는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철저한 복종과 봉사의 자세, 겸손과 자제를 요구한다. 왜냐하면 설교는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시는 사건으로 철저히 하나님의 독자적인 행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이와 같은 바르트의 설교학은 매우 권위적인 냄새를 풍긴다. 회중이 이해하든 못 하든, 회중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마치 개에게 먹이를 던지듯이, 회중을 아랑곳하지 않고 "말씀을 던져라"는 뜻처럼 비친다. 모든 결과는 오직 하나님에게 맡기고, 회중에 대해서는 전혀 연연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처럼 비친다. 바르트의 설교학이 이처럼 일방적으로 비치는 것은, 그 자신이 나중에 회고하며 토로하였듯이, 만약 인간의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인정하면, 결국 그것이 하나님과 나란히 서려고 하고, 그리고 종국에 가서는 그것이 하나님을 대체하거나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한다는 사실을 역사적 현장 속에서 생생히 체험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르트의 설교학은, 그 스스로 비판하였듯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너무 강조하려다가 '하나님의 인간 되심' 혹은 '인간의 인간 됨'을 너무 간과한 듯이 보인다.

하지만 바르트가 아무리 하나님 편에 서려고 해도, 그도 여전히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다. 구체적인 인간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하나님의 계시는 하늘의 공허한 독백에 불과하듯이, 연약한 회중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설교도 허공을 치는 주먹에 불과하다. 바르트도 하늘 위에서 신학하고 설교한 것이 아니라, 온갖 문제로 괴로워하는 인간들 앞에서, 인간들을 위해 신학하고 설교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설교학도 '회중부합성'을 전혀 무시하지 않는다. 설교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봉사이지만, 동시에 회중에 대한 봉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만약 회중부합성을 무시한다면, 설교하는 목사는 독주자 혹은 폭군이 되고 만다. 그래서 바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1. 설교자는 회중을 사랑해야 한다, 2. 회중의 실제적인 상황에 대해 열린 자세를 지녀야 한다, 3. 회중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4. 회중의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나가는 말

짧은 지면을 통해 바르트의 설교학을 온전히 소개할 순 없었다. 여기서 필자는 다만 바르트가 직접 강연한 설교학을 그의 신학의 전체적 맥락 속에서 풀이하거나 되풀이하였을 따름이다. 서두에서 필자는 설교라는 것이 목회자의 가장 무겁고 괴로운 짐이라는 전제로부터 출발했다. 결말에 이르러서도 이와 같은 생각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다. 우리의 무거운 짐을 덜어주시고 우리를 곤궁에서 구원하실 분은 오직 예수님이지만, 우리는 잠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 바르트에게 도움을 청해 보았다. 위대한 신학자인 그에게 무언가 뾰족한 해결책이 있지 않을까 하고 잠시 기웃거려 보았다. 하지만 그도 완전한 해답일 수는 없다. 다만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어둠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우연히 붙잡은 줄로 인해 우렁차게 울려퍼진 종소리에 우리도 조금 놀랐을 따름이고, 이 종소리가 우리의 어둠도 깨울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였을 따름이다.

결론적으로 '다시 바르트에게 듣는다!'라는 제목대로 바르트의 설교학적 입장을 그의 논문을 중심으로 다시 정리해 보기로 하자. 1922년에 바르트는 작센(Sachsen) 주(州)의 '목사의 날'에 하나의 의미심장한 강연을 하였는데, 그 제목은 바로 '그리스도교적 선포(설교)의 곤궁과 약속'(Not und Verheissung der christlichen Verkuendigung, 바르트학회 공역, 말씀과 신학. 칼 바르트 논문집 Ⅰ, 대한기독교서회, 1995년)이다. 여기서도 인간 바르트는 목회자의 고민을 가슴 깊은 곳에서 진솔하게 토로하고 있다.

누가 목사여만 하고 목사일 수가 있으며, 누가 설교해야만 하고 설교할 수 있겠는가? 내가 확신하건대, 여러분은 모두 이러한 처지와 고민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  침묵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 나는 말을 선택하지 않은 가능성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나도 이미 침묵해 오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것은 한 때뿐이었다. ... 신학이란 이러한 목사의 방책이 없는 처지와 물음의 표현과 곤궁에 대한 참된 진술 외에 무엇일 수 있을까? ...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입술에서 가능하지 않고, 또한 그렇게 나타나지도 않는다. 아무도 그것을 눈으로 볼 수 없고, 행위로 옮길 수 없다. ... 너 인간아, 너는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너의 입술로 무엇을 하느냐? 어떻게 해서 너는 하늘과 땅 사이의 중보자 역할을 떠맡고 있느냐? 누가 너에게 거기서 종교적 목소리를 만들어내도록 자격을 부여했는가? 더욱이 성공과 성취로 가고 있다고? 사람이 그렇게 분에 넘쳐 오만하고, 강한 것을 제일로 삼으며, ... 그렇게 저속할 수 있을까? 우리는 벌을 받지 않고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는 형벌을 받지 않고는 하나님의 특권 속으로 뚫고 들어가지 못한다!

바르트에 따르면 설교의 곤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에 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신뢰하고 그에 복종하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있을 수 없다. 비록 약속은 성취가 아니지만, 우리에게 성취가 약속되어 있다. 우리는 보화를 흙으로 만든 그릇 속에 가지고 있다.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인간에게 가능하지 못한 것이 하나님에게는 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목사로서, 그리고 교회의 상황 안에서 구원을 받는다. ... 하나님께서 기적이란 바로 그에게 가능한 것이라고 함으로써 우리를  선택하셨고, 목사로서 교회의 상황 안에서 의롭게 하시고자 않다면, 오직 그것은 오직 우리 자신과 교회와 우리 목사직 위에 내리는 심판 속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여기서 비로소 우리는 약속을 붙을 수 있고, 여기서 비로소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 파견(보내심)만이 우리의 선포를 합법화할 수 있다. "창조주이신 성령이여, 오소서!"라고 탄식할 때, 더욱 희망이 있다.

 만약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보냄을 받지 않았다면, 무겁고 괴로운 설교의 짐을 누가 감히 지려고 하겠는가? 허약하고 오만한 우리의 입술이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말씀하시기로 약속하셨기 때문이 아닌가! 아니 하나님이 오늘 우리를 통해 말씀하시기 때문이 아닌가! 그래서 바르트의 권고처럼 우리는 성급히 절망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교회는 매일 수많은 기적들 아래서 보존되고 있기 때문이다. 부활이 없이는 교회의 삶은 존재하지 않는데, 부활은 매일 수없이 일어난다. 설교자의 위로와 희망은 바로 여기에 있다.  

(2006 예배와 강단 권두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