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탄생의 신학적 의미

 이신건

 

예수의 탄생은 오늘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가? 이 물음은 사실상 성탄절이 다가오면 늘 되풀이해서 제기하는 물음이기에 다소 식상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오늘 여기서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물음은 늘 우리를 자극하고 우리에게 대답을 강요하는 물음이다. 물론 형식적인 껍데기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이 물음은 성탄절이 가져다 주는 자본주의 사회의 오락적 흥미를 깨는 귀찮고 번거로운 질문이겠지만.

그러나 "예수의 탄생이 무슨 의미를 갖는가?"라는 물음은 우선 '예수 탄생의 신학적 의미'를 통하여 결정되어야 한다. 우리의 실천적 행동은 신앙적 혹은 신학적 확신 위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엔 우리의 실천이라는 것이 무분별한 행동주의에 빠질 수가 있을 것이다.

성탄신앙의 본질적 핵심은 하나님의 비우심 혹은 낮추심에 있다. 바울은 하나님 안에서 일어난 이 놀라운 신비를 다음과 같이 찬양하고 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픔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 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빌립보서 2장 5-8절)

이것이 갖는 신학적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평소에는 하늘의 영광을 누리시며 세상의 고난과 무관하게 사시다가, 딱 한 번 2천 여년 전에 인간을 위해 몸을 입으시고 고난을 감수하셨다가 다시금 하늘의 영광으로 복귀하셨다는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은 분명히 희생과 사랑의 하나님이시기는 하겠지만, 이 낮추심은 일회적이고 우연적인 일이기에 하나님의 본성과는 무관한 일이 되며, 이 낮추심은 하나님의 본질에서 이탈한 시혜적인 행동이 되고 만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은 본질적으로는 고난을 받을 수 없는 하나님으로서 인간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고난에 참여하셨다는 결론이 성립된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은 영원부터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 단 한 번만 사랑을 베푸신 자선의 하나님이 되신다.

물론 우리는 예수의 역사의 일회성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예수는 만인을 위해 단 한 번 자신을 낮추시고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영원부터 사랑하시는 동일한 하나님의 본성의 표현이고, 그래서 하나님은 영원부터 자신을 낮추시는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지 않는가? 그러므로 20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칼 바르트(K. Barth)가 말한 대로, 하나님의 신성(神性)은 바로 그 분의 인간되심(人間性) 가운데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며, 그 분의 영광은 바로 그 분의 수치 가운데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의 낮추심, 고난과 수치는 하나님의 본질과는 무관한, 단 한번 인간을 향해 행동하신 일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 영원한 사건이요, 그 분의 영원한 신적인 본성과 영광의 표현이요 그 계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영원히 자신을 낮추시는 사랑의 하나님, 영원히 사랑하시므로 고난당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말해야 한다. 물론 우리가 이해하는 '영원성'(永遠性)은 하나님의 '영원성'과는 다른 것이겠지만.

하나님의 본성은 영원히 남(타자)과 함께 하고 참여하는 사랑, 영원히 남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연대성(連帶性), 영원히 남을 유익케 하는 희생에 있다. 이 신비를 우리는 '삼위일체'(三位一體)라고 부른다. 이 신비는 하나님의 영원한 본성 안에 있는 신비이다. 이 신비가 역사 속에서 몸, 형체, 모양을 취한 것을 우리는 '말씀의 성육신'이라고 부른다. 요한은 사랑의 하나님이 바로 '육신'(肉身)속으로 오셨다고 선언한다(요 1,14). 이 육신 안에 오신 하나님이야말로 바로 자신의 영광과 은혜와 진리를 충만케 드러내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영광과 은혜와 진리를 바로 그분의 낮추심 가운데서만 충만히, 즉 온전히 깨닫게 된다.

이것이 지니는 신학적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바로 이 땅 가운데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길 원하시며(나라이 임하옵시며!), 이 땅이 그 분의 뜻이 실현되는 장소가 되길 원하시며(뜻이 이루어지이다!), 이 땅이 그 분의 거룩함이 거하는 성소가 되길 원하신다!(이름이 거룩하옵시며!) 예수의 가르침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은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고 이 세상 안에서 편만히 확장되고 세워지고 완성된다(누룩, 저절로 자라는 씨, 땅 속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를 참조하라!)

그러므로 칼 맑스(K. Marxs)가 말하기도 훨씬 전에 이미 예수는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 도피시키는 종교를 '아편'이라고 선언하신 셈이다. 아니 그런 종교는 장님의 종교요, 그런 종교의 마지막은 바로 영원한 벌이다(마태복음 25장의 마지막 심판의 비유를 보라!). 예수는 눈물의 골짜기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탄식하는 종교인들과는 반대로 육신을 입고 이 세상 한가운데로 오셨고, 지금도 오고 계신다. 그러므로 착각하지 말자. 예수가 땅에 오신 것은 우리를 하늘로 데려가시기 위함이 아니라 그의 나라를 우리에게, 이 땅에 더 가까이 가져오시기 위함이요, 그래서 우리를 이 세상의 일로 더 가까이 데려가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니체(Nitzsche)가 말하기도 훨씬 전에 이미 예수는 우리에게 "이 땅에 충실하라!"고 선언하신 셈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도피적이거나 영혼만의 반쪽 사랑이 아니라, 이 세상적이고 책임적이고 온전한 사랑이다. 이 사랑은 자신이 창조한 것을 방기(放棄)하고, 마치 도박이나 하듯이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사랑이 아니라, 자신이 창조한 것에 신실하고 책임지고 구원하고 완성하는 사랑이다. 이 사랑은 자기지향적이고 자기완성적이고 자기위안적인 것이 아니라, 타자지향적이고 타자완성적이고 타자구원적이다. 이것이야말로 영원한 사랑이신 하나님의 역사적 계시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예수의 탄생사건으로부터 받는 영광과 은혜와 진리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탄생이 어떤 실천적 의미를 갖는가? 이러한 성탄의 신비가 현실 속에서 사는 우리에게 어떤 실천적 행동을 촉구하고 유발하는가? 성탄의 신학적 의미를 통하여 우리는 이미 암시적으로 우리의 실천적 행동의 근거와 의미 및 목표를 알았으리라. 더 이상 무엇을 말하랴? 남은 것은 비겁을 떨치고 일어서는 용기일 뿐일지니, 더 많은 말이 왜 필요하랴? 그러나 두 가지만 이야기하기로 하자.

1.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며 사는 모든 것, 모든 영역이 바로 우리의 소명(召命)의 자리요 사명(使命)의 목표다. 그러므로 교회와 세상을, 거룩한 영역과 속된 영역을, 평일과 주일(안식일)을 나누지 말자! 하나님이 어디 거룩한 영역, 교회, 안식일에만 오셨는가? 모든 것이 신앙적인 일이고 신학적인 일이며 그래서 정치적인 일이다. 매일이 안식일이고, 정치적인 활동이 거룩한 예배이고, 속된 것 속에 거룩한 것이 있다. 기도가 행동이고, 행동이 기도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과 인간의 영광을 위하느냐 하나님의 일, 그 분의 영광, 그 분의 나라와 정의를 위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하지 못할 일이 없고 가지 못할 곳이 없다. 물론 역할과 기능 혹은 은사의 구분은 있어야 하겠지만, 그 구별과 차별 혹은 분리는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이 하나가 되게 하신 일을 사람이 인위적으로 나누지 말자! 하늘이 땅과 하나가 되었고, 교회는 세상을 위하도록 부름받았거늘, 세상을 도피하는 교회는 그 무슨 자폐증 환자이며, 교회를 핍박하는 세상은 그 무슨 묵시적 괴물인가?

2.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통하여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에서 증거하며 세워야 한다. 그러므로 일의 우선순위를 논하지 말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는 일에 "전도가 우선이냐, 사회참여가 우선이냐?" 혹은 "복음화가 우선이냐, 인간화가 우선이냐?"를 부질없이 논하지 말자. 만약 우선순위가 있다면, 그런 무익한 논의보다는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일을 먼저 하자! 개인구원이 바로 사회구원의 열매를 맺고, 사회구원이 바로 개인구원의 열매를 맺거늘, 복음화는 인간화를 지향하고, 인간화는 복음화를 지향하거늘, 아직도 "이것이 우선이다, 저것이 우선이다!"하며 싸우는 것은 그 무슨 정신분열증 환자의 넋두리인가? 하늘의 영광은 땅에서 가장 찬란하며, 하나님의 일은 땅끝까지 미친다. 가장 신앙적인 것은 가장 실천적이며, 가장 실천적인 것은 가장 신앙적인 것이다. 이것을 깨우쳐 주시기 위하여 예수는 한 번 오셨고, 또 지금도 오고 계실지 모른다. 또 장차 오실 그 분 앞에서 우리가 고백해야 할 한 마디도 이것일지 모른다.

(복음과 상황 49호, 1995)